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6:43:10

날란다 대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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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날란다대승원.jpg
날란다 대승원 유적에 남아 있는 사리불(사리풋다)의 사리탑(스투파). 날란다는 사리불의 고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비하르 날란다의 날란다 대승원
영어 Archaeological Site of Nalanda Mahavihara
(Nalanda University) at Nalanda, Bihar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인도|]][[틀:국기|]][[틀:국기|]] 비하르주 날란다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502
등재연도 2016년
등재기준 (iv)[1], (vi)[2]

1. 개요2. 역사3. 여담

1. 개요

우리가 가진 모든 (불교) 지식의 원천은 날란다에서 왔다.
달라이 라마 14세
Nalanda Mahavihara[3]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에 소재했던 불교 사찰이자 교육 기관으로, 인도 아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평가된다.

5세기경에 처음 세워져서 교육 장소를 갖춘 사원으로 출발하였고, 이후 승려들의 수행도량이자 교학을 전수하고 익히는 '불교 대학'으로써 아시아에서 그 위상을 세우게 된다. 한역 불경에서는 나란타사(那爛陁寺)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중아함경에는 나란대(那難大)라고도 나온다. 나란대학교 (唐)의 승려 의정(義淨, 635~713)은 용천(龍泉)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다. 인도 즉 천축국을 오천축(五天竺)으로 분류했던 중국인들의 지리 관념에서 날란다 대승원은 중천축(中天竺)에 해당한다.

인도뿐 아니라 불교를 수용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로부터 승려들이 모두 이곳으로 유학을 와서 불교 교리를 배우고 수행하였다. 날란다 대승원에서 수학한 승려 가운데는 대지도론의 저자로 유명한 나가르주나(नागार्जुनः)[Nagarjuna], 당의 승려로 불경 번역으로 이름을 남긴 고승 현장(玄奘, 602~664)이나 의정도 있었다. 현장이 631년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날란다 대승원에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193년 이슬람힌두교 세력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후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날란다 대승원의 유적이 발견된 것은 승원이 사라지고 8백여 년이 지난 1812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측량사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Francis Buchanan-Hamilton, 1762.2.15~1829.6.15)이 처음 날란다 대승원의 터를 발견했고, 1861년 영국인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인도 고고학 조사 위원회 위원장이 된(1861~1862) 알렉산더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 1814.1.23~1893.11.28)의 주도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 역사

파일:Map_of_Nalanda_by_Alexander_Cunningham,_1861-62.jpg
알렉산더 커닝엄이 제작한 날란다 대승원의 실측 조사도. #[5]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인도 고고학조사위원회 발굴 조사단이 1915년부터 1937년까지 날란다 대승원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고, 남북 500m, 동서 250m의 사역(寺域)을 확인했다. 사역 안에서는 사각형의 수도원과 사찰 5동, 승방 10동 등 건물터와 현무암, 사암 등으로 조성한 불상 및 보살상 등이 출토됐다. 남아 있는 날란다 대승원의 터에서는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는 부도탑(스투파)의 흔적[6]도 발견되고 있다. # 이후에 1974년에서 1982년까지 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불경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날란다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7] '파바리카'(波婆離㮈, Pavarika)라는 망고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의 10대 제자 가운데 대목건련(大目犍連, 목갈라나)과 더불어서 석가모니 부처의 계승자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던 사리불(舍利佛, 사리풋다)의 고향이 이곳 날란다였다.[8]  용수(དཔའ་མགོན་ཀླུ་སྒུབ་) 보살이 날란다에서 강의하였다는 티베트 불교의 전승도 있다. 다만 현대에 말하는 것과 같은 '대학'으로 불릴 만한 시설 및 구조물이 날란다에 정립된 것은 굽타 왕조(427년 성립) 쿠마라굽타 1세(कुमारगुप्त प्रथम, 재위 414~455?)[9] 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승려 법현(法賢, 399~412)이 왔을 때에도 현재와 같은 규모나 형태의 시설을 갖춘 '날란다 대승원'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佛國記)에는 날란다 대승원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불경에서 날란다를 사리불이나 목건련의 탄생 및 열반지라고 전하고 있지만 그 위치에 대해서도 경전에 따라 들쑥날쑥이고, 지명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자이나교의 경전에도 날란다가 왕사성(라자그리하) 교외에 있고 마하비라가 14바르샤를 보냈으며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것도 마하비라가 죽은 뒤 천 년이 지나서야 정리된 것이라서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견해도 있다. 아소카 대왕이 날란다 대승원을 세웠다는 불교쪽 전승도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아소카 대왕의 치세(기원전 268년 ~ 기원전 232년) 혹은 그의 사후 600년 동안 이렇다 할 유물이 나오지 않아서 이것도 신빙하기는 어렵다.

다만 불교 경전이나 자이나교 경전이 가리키는 '날란다'가 현재의 날란다 대승원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비슷한, 그 근처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은 대규모의 '대사원'이자 '대학'으로 성립된 것이 후대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 이전부터 불교 승려들이 오다가다 모여서 신도를 상대로 설법을 행하거나 개인 혹은 단체로 수행을 하던 자리였을 개연성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곳에 '대학'이라고 불릴 만한 교육 시설 및 구조물이[10] 갖추어지게 된 것이 굽타 왕조 때의 일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는 것이다.

쿠마라굽타 1세가 처음으로 '날란다 대승원'이라 불리게 될 승원(僧院) 시설물을 세운 뒤, 불타국다(佛陀鞠多, Buddhagupta), 달타게다(怛他揭多, Tathāgata), 바라아질다(婆羅阿迭多, Bālāditya) 등의 국왕들이 대를 이어가며 주위에 승원을 증축하면서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이후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와 머무르며 불교를 수학하면서, 날란다 대승원은 승려들의 수행 도량이자 불교 대학으로서 성장한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수도원과 비슷하게 성직자들의 기도처가 교육기관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 것이다. 영국 BBC의 표현대로 가히 중세의 아이비리그 교육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11]
如是六帝相承,各加營造,又以甎壘其外,合爲一寺,都建一門。庭序別開,中分八院。寶臺星列,瓊樓嶽峙,觀竦煙中,殿飛霞上,生風雲於戶牖,交日月於軒簷,加以淥水逶迤,靑蓮菡萏,羯尼花樹暉煥其間,菴沒羅林森疏其外。諸院僧室皆四重重閣,虯棟虹梁,繡櫨朱柱,彫楹鏤㩜,玉礎文㮰,甍接瑤暉,榱連繩彩。印度伽藍數乃千萬,壯麗崇高,此爲其極。
이와 같이 여섯 왕이 서로 이어오면서 각기 절을 세우고 또 벽돌로 둘레를 쌓아 하나의 절로 만들었다. 입구에 하나의 문을 세우고, 정원을 별도로 만들어 내부를 8원(院)으로 나누었다.[12] 보대(寶臺)가 별처럼 줄지어 섰고 옥루(玉樓)가 산처럼 솟아 있으며 높고 큰 건물들이 연기와 노을 위에 솟아 있어서, 창에서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처마 아래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거기에다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위에는 푸른 연꽃이 떠 있다. 곳곳에 갈니화수(羯尼花樹)가 꽃을 피웠고, 밖에는 암몰라[13] 숲이 무성했다.
사원의 모든 승방(僧房)은 4층으로 되어 있으며, 중각(重閣)의 용마루나 대들보는 용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두공(枓栱)과 기둥은 붉게 단청을 하였다. 큰 기둥과 난간은 갖가지 조각을 새겼으며 옥으로 된 초석에도 문양을 새겼고, 지붕의 기와는 빛을 받아 번쩍이고 서까래는 색실로 연결해 놓았다. 인도의 가람 수가 천만 개나 되지만, 장엄하고 수려함과 숭고함에 있어서 이 나란타사야말로 극에 달했다.
이 절에는 주객(主客)을 합쳐 승려 수가 항상 1만 명이나 되는데 모두 대승과 소승(小乘) 18부(部)를 모두 배우고 있다. 그리고 속전(俗典)이나 베다(吠陀) 등의 책과 인명(因明), 성명(聲明), 의방(醫方), 술수(術數)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연구하고 있었다. 경론(經論) 20부(部)를 해득하는 자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되고, 30부를 해득하는 자는 5백여 명, 50부를 해득하는 자는 법사를 포함해서 10명이나 되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권제3

'날란다'라는 이름은 '연꽃(날란)이 피어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지혜(연꽃)를 주고, 지혜를 받는 곳[14]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편 현장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날란다'라는 말을 '시무염(施無厭)', 즉 아낌없이 베풀고 끊임없이 주는 곳[15]으로 해석했다. 이곳 남쪽의 암몰라 동산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살던 의 이름이 바로 시무염이었다고 하는 전승도 적고 있다. 그 용이 살던 연못 옆에다가 날란다 대승원을 지은 것인데, 막 공사를 시작할 때 용의 몸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때 점을 잘 치는 니건외도(尼乾外道)[16]가 이 광경을 보고 “이곳은 빼어난 땅이니 이 땅에 가람을 건립하면 반드시 창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5인도의 모범을 이룰 것이며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더욱 융성해질 것이요, 후대의 학자들이 이로써 학업을 손쉽게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용을 다치게 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피를 토하게 되리라.[17]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대당서역기에 보면 각지에서 찾아온 승려 열에 여더일곱은 입학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고 할 정도로 날란다 대학의 입학은 피를 토하게 쉽지 않았다. 이곳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날란다 대승원의 교수진과 대면하여 엄격한 구두 면접을 치러야 했다. 운 좋게 입학한 학생들은 인도 각처에서 온 교수들로부터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다르마팔라(धर्मपाल:)[Dharmapāla], 시라바드라(शीलभद्रः)[Silabhadra] 같은 당대 가장 존경받는 불교 지도자들 밑에서 집단적으로 육성되었다. 날란다 대승원에서도 불교의 가르침과 철학을 전파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불교를 수용하여 신봉하는 지역에 정기적으로 날란다 대승원의 최고의 학자와 교수를 파견하기도 했다. 일종의 '문화 교류 프로그램'인 셈이다.

이러한 날란다 대승원의 승려들의 활동은 아소카 대왕의 법대관 파견과 더불어 불교가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 세계로, 특히 중국과 티베트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45년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시라바드라가 당에서 온 승려 현장에게 유식학을 전수했고, 시라바드라에게서 유식학을 배운 현장은 657부에 이르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가지고 당으로 돌아와 이를 한역했다. 761년에 중관파의 샨타락시타(ཁན་ཆེན་ཞི་བ་འཚོ་)[Shantarakshita]가 처음으로 티베트에서 불교를 일으키고, 774년에는 닝마파의 개조(開祖) 빠드마삼마와(པདྨ་འབྱུང་གནས.)[Padmasambhava]가 밀교(密教)를 티베트 불교에 가져왔다. 쌈예 사 종론(792년 - 794년)은 날란다 대승원의 논사 까말라쉴라(པད་མའི་ངང་ཚུལ་)[Kamalashila]와 중국 선불교의 선승 마하연(摩訶衍)이 벌인 종교 논쟁으로, 이후 티베트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즉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이곳 날란다 대승원에서 시작되었으며, 중국과 티베트 양국의 불교 승려들, 나아가 동아시아 불교 승려들이 직간접적으로 모두 날란다 대승원의 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23]

날란다 대승원은 단지 불교 교육 기관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날란다 대승원에서는 하루에 100개의 강좌가 열렸으며, 그 과목도 불교와 철학은 물론 논리학, 음악, 의학, 공학, 수학, 서화 등 다양한 것이었다고 언급하였다. # 자연 기반 치유에 뿌리를 둔 아유르베다 의학도 날란다 대승원에서 다루는 교육 과목이었으며, '인도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리아바타는 6세기경 날란다 대승원의 학장이었다고 전한다.

날란다 대승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상 최대의 기숙형 학교였다. 현존하는 날란다 대승원의 발굴 조사 결과나 전해지는 기록들을[24] 보면 날란다 대승원은 높은 담으로 둘러쳐서 문은 하나가 있었고, 9층 건물의 도서관이 딸려 있었으며 다양한 분야의 교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날란다 대승원의 장서는 900만 권에 달했다고 한다. 의정은 나란타사(날란다 대승원)에는 "8개의 원(院)이 있고 승방이 3백 개가 있다"#고 적었으며, "절 안에 열 개의 연못이 있어서 새벽마다 정해진 시간에 승려들이 그곳에서 목욕을 하거나, 아니면 절 바깥의 연못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넓은 마당을 강의실과 기도실로 둘러치는 캠퍼스 건축 디자인은 동아시아의 다른 불교 시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온 스투코[25] 장식은 태국의 사원 예술에 영향을 미쳤고, 금속 예술은 티베트와 말레이 반도로 전파됐다.
아리야발마는 신라 사람이다. 정관(貞觀) 연간(627~ 649)에 장안(長安)의 광협(廣脇)【왕성(王城)의 이름이다.】을 떠나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추구하며, 성스러운 유적을 몸소 순례하였다.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율(律)과 논(論)을 많이 익히고, 중경(衆經)을 간추려 베꼈다. 하지만 돌아올 마음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달프기 짝이 없다.
아리야발마 스님은 동쪽 경계인 계귀(雞貴)에서 나와 서쪽 끝인 용천(龍泉)[26]에서 돌아가셨다. 즉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70여 세였다.【계귀(鷄貴)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 Kukuṭeśvara)이다. ‘구구라’는 닭(鷄)이고, ‘예설라’는 귀하다(貴)라는 뜻이니, 즉 고려국(高麗國)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깃털을 뽑아 장식한다고 한다. 나란타사에 못[池]이 있는데, 이를 용천(龍泉)이라고 부른다. 인도에서는 고려를 ‘구구타예설라(矩矩吒翳說羅)’라고 부른다.】
혜업 법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관 연간에 서역으로 가서 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성스러운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타사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듣고 불서를 읽었다.
의정이 이곳의 당나라 불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양론(梁論)』[27] 하기(下記)에 “불치목(佛齒木)[28] 아래에서 신라의 승려 혜업이 필사한다”라는 글을 보았다. 그래서 이 절의 스님을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곳에서 죽었으며 나이는 예순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필사했던 범어 책은 모두 나란타사에 보존되어 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1권[29]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보면 인도로 불교를 배우러 떠났던 승려 56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행적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이 많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뿐 아니라 신라, 고구려 같은 한반도 국가에서도 승려들이 왔고 날란다 대승원에서 수학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이 신라의 승려 혜업(慧業)과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Āryavarma)이다. 일제 시대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인용된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서만 이름이 확인되는 백제의 승려 겸익(謙益)에 대한 기록을 신뢰한다면, 사실상 삼국 모두에서 한 명씩은 날란다로 승려가 방문한 셈이다. 일본은 불교 수용 시기나 시간, 지리상의 문제도 있어서인지 날란다 대승원으로 유학승이 왔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자주 견당사를 보내고 엔닌 등의 구법승이 당에 들어가 순례하기도 했으니 인도에 날란다 대승원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만.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로 이름이 알려진 혜초(慧超, 704~787)도 스승 금강지(金剛智, 671~741)[30]의 권유로 날란다 대승원에서 유학하려고 인도로 떠났던 건데, 그가 거친 루트를 보면 날란다 대승원과 겹치기는 하지만 혜초가 날란다 대승원에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는 현재 남아있는 왕오천축국전의 내용만 가지고는[31] 알 수가 없다.[32] 그리고 날란다 대승원에 수학하러 간 한국이나 중국의 승려들 대부분은 그곳에 남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거나, 돌아오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하는 것을 1203년[33]으로 보고 있는데, 그 단초가 된 사건이 바로 날란다 대승원의 파괴였다. 1193년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악티바르 알 딘 무함마드 박티바르 칼지(Ikhtiyār al-Dīn Muḥammad Bakhtiyār Khaljī)가 이끄는 튀르크 -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학이 파괴되었다. 불은 석 달을 이어졌다고 전한다. 물론 이슬람에 의한 파괴가 날란다 대승원이 겪은 최초의 박해는 아니었고, 날란다 대승원이 1193년에 완벽하게 소멸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5세기에 미히르쿨라(Mihirkula)[34]가 이끄는 백흉노(에프탈)가 날란다 대승원을 약탈했고, 8세기 벵골 가우다 왕국의 침략으로 날란다 대승원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날란다 대승원의 학승 보타흘다(補陀吃多)가 북송 초기에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와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가지고 중국에 왔고# 천축의 승려로 고려 말기의 고승 나옹(懶翁, 1320~1376)의 스승이었던 지공(指空, 1300∼1363)[35]이 여덟 살 때에 나란타사(羅爛陀寺)에서 출가해 열아홉 살 때까지 불교를 수학했다는 전승이 있으니, 이슬람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14세기까지는 어찌저찌 유지는 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굽타 시대부터 시작된 인도 불교의 쇠퇴가 날란다 대승원의 파괴를 계기로 해서 '멸망'으로 확실하게 그 방향이 기정사실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36]
파일:17-Nalanda-Pandits_HHDL-Office-1-e1338579760327.jpg 파일:지공화상부도.jpg
티베트 불교에서 숭경하는 석가모니 부처와 날란다 17논사(論師)[37] 경기도 양주 회암사터 뒤편에 남아 있는 지공의 부도

날란다 대승원이 파괴된 뒤 승려들은 남은 경전을 가지고 네팔티베트, 남인도 등 각지로 흩어졌고, 티베트로 유입된 이들이 티베트 불교의 성립에 기여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지공-나옹-무학의 이른바 '삼화상'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불교 역사를 감안하면 한국 조계종으로도 날란다 대승원의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3. 여담

고려 말 인도의 승려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온 지공은 제자 나옹에게 지금의 회암사 자리를 두고 "지형 지세가 날란다 대승원과 닮았다"며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쳐 주어,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하는 동인이 되었다고 한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가 인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제안하여 날란다 대승원 터에 현장의 사리가 분골(分骨)되었다.

1982년에 국제불교문제연구소에서 파견한 한국의 승려 6인[38]이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날란다 대승원을 방문하여 한국 불교 연구 자료로 해인사팔만대장경 영인본을 기증하기도 했다. # 이보다 앞서 1962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의 동국대학교 황수영 박사가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서 그린 루트를 따라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날란다 대승원 유적도 방문했는데, "날란다 대승원 부근에 불교중화연구소가 마련되어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학승이 모이고 있는데 한국 학생만 없더라"라며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

인도 비하르주 주정부는 2007년싱가포르동아시아 정상회의(EAS) 국가의 학자와 정부 관계자들의 지지를 얻어, 예산을 확보하고 2년에 걸친 작업으로 국회 입법을 거쳐# 2014년 9월 1일에 개교했다. 새로 재건된 날란다 대학은 대학원 과정으로 32개 국에서 온 700여 명이 수학하고 있다고 알려졌으며, 한국의 동국대학교와도 2023년 MOU를 체결하였다. #

이밖에 '날란다'라는 이름이 붙은 불교 학교나 수도원은 인도 비하르주 외에도 스리랑카나 미국 토론토, 프랑스에도 존재한다. 한국의 경주에도 나란다불교학술원이 존재하며, 티베트 불교 교학 강좌를 개설하고 티베트 불교 경론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고 있다. #


[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3] 비하라(विहार, vihara)는 한문으로 번역될 경우 정사(精舎)로 번역되는데 일반적으로 비구를 위한 승원을 말한다. '마하비하라'의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비하라 앞에 붙여서 '대승원' 또는 '대사원'으로 번역된다.[Nagarjuna] 150~250. 한역한 이름인 용수(龍樹)로 잘 알려져 있다. 티베트 불교의 전승에 따르면 용수가 이 날란다 대승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와 함께 용수 이후 날란타에서 수학하고 불법을 전수했던 17인의 고승을 '날란타 17논사(論師)'로 기리고 있다.[5] 당의 승려 의정도 자신이 수학한 날란다 대승원의 모습을 그린 '나란타사도'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는다.[6] 석가모니 부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리불의 것이라는 전승이 있다.[7] 중아함경 권32 우바리경에 석가모니 부처가 이곳에 머무르며 파바리나(波婆離㮈)에서 니건친자(尼揵親子) 즉 자이나교의 제자와 교리 담론을 했다고(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도 날란다 대승원에 온 적이 있다고 전한다) 언급되며# 대당서역기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국왕으로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많이 했기에 그곳을 '시무염(施無厭)'이라고 불렀다는 전승도 있다.[8] 만약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사리불이나 목건련 가운데 한 사람이 승가를 이어받았으리라고까지 평가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석가모니 부처보다 일찍 입적했고, 석가모니 부처는 "사리불과 목건련이 없는 자리를 보니 '공허함'의 이치가 무엇인지를 내가 알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내비칠 정도였다. 현재 날란다 대학원 경내에 사리불의 사리탑이 남아 있다.[9] 대당서역기에는 삭가라아일다(鑠迦羅阿逸多)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샤크라디티야(Shakraditya)'라는 현지 발음을 음차한 것이다. 쿠마라굽타의 칭호가 마헨드라디티야(Mahendraditya)인데, 마헨드라(Mahendra)와 샤크라(Shakra)는 모두 인도의 신 인드라(Indra, 제석천)의 다른 이름으로 마헨드라디티야는 샤크라디티야(Shakraditya)로 바꿔 쓸 수 있으며 쿠마라굽타 1세로 비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쿠마라굽타 1세나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신봉했다.[10]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나 교수 및 학생들이 머무르는 기숙사 및 강의를 듣는 강당, 수행을 위한 승방 등.[11] 불교에서는 이렇게 승려들의 종교적 수행도량, 기도 및 집회소, 아울러 교육 기관의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수행하는 곳을 총림(叢林, vindya-vaṇa)이라고 부르며, 승원(비하라)과는 비슷한 듯한데 다르다.[12] 의정의 전하는 기록과도 일치한다.[13] 망고를 암몰라로 쓴다.[14] 날란=연꽃, 다=주다. 연꽃은 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이다.[15] 나='없다'는 부정의 의미, 아란=충분함, 다=주다.[16] 보통 불경에서 '니건(자)'은 불교가 지목한 육사외도의 하나로 자이나교 및 그 신도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드물게 아지위까 교도를 가리킨 경우도 없지는 않다.[17] 『대당서역기』 9권[Dharmapāla] 530~561. 한역하면 호법(護法)이다.[Silabhadra] 529~645. 한역하면 계현(戒賢)이다.[Shantarakshita] 725~790 또는 728~788. 티베트 불교에서 추앙하는 고승으로 날란타 17논사의 한 명이다. 한문으로는 적호(寂護)라고 불린다.[Padmasambhava] 티베트 불교에서 제2의 부처로 칭송받는 성인으로, 전설에 의하면 부처는 자기가 죽은 뒤 '빠드마삼마와(蓮華生)'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티쏭데짼은 빠드마삼마와가 오자 위대한 스승이 온 것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라싸 근교까지 마중을 나가고 많은 황금을 바치며 가르침을 구했으나, 빠드마삼마와는 금을 모래로 만들고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후 모래를 다시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Kamalashila] 740~795. 한역하면 연화계(蓮華戒)이다.[23] 샨타락시타와 빠드마삼마와, 까말라쉴라는 모두 티베트 불교에서 '날란다 17논사'로 추앙되고 있다.[24] 현장의 대당서역기나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 등이다.[25] 건축의 천정, 벽면, 기둥 등을 덮어 칠한 화장 도료를 가리킨다.[26] 날란다 대승원의 다른 이름이다.[27] 인도의 고승 무착보살이 저술한 논장 섭대승론과 그것을 세친이 주석한 섭대승론석의 세 가지 번역본 가운데 양의 승려 진제가 번역한 것을 말한다. 나머지 두 번역본은 불타선다와 현장을 말한다. 무착과 세친 모두 날란다 대승원에서 수학했다.[28] 날란다 대승원의 근본향전 서쪽에 있었으며 석가모니 부처와 인연이 있는 나무로 사람들의 숭앙을 받고 있다.[29] 해당 조목은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귀축제사'에도 인용되어 있다.[30] 인도 이름은 바즈라보디(Vajrabodhi)이고,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이다.[31]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은 결코 완질이 아니다.[32] 한국의 황수영 박사나 자현 비구는 혜초도 날란다에 오기는 왔는데 날란다 대승원의 높은 입학 난이도를 못 넘고 물러나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33] 날란다 대승원과 함께 인도 불교의 중심지로 손꼽히던 대승원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超戒寺)가 델리 술탄국의 창시자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무하마드 바프티야르 할지(Muhammad Bakhtiyar Khalji)가 이끄는 튀르크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된 해이기도 하다.[34] 대당서역기에는 마혜라구라(摩醯邏矩羅)로 음역되어 있다.[35] 인도식 이름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이고, 한자로는 음역해서 제납박타(提納薄陀), 풀이하면 선현(禪賢)이다.[36] 지공 본인도 승려로써 받는 정식 구족계가 아니라 재가자에게 주는 수계인 오계를 받는 데에 그쳤고, 열아홉 살 때에 스승의 권유로 사자국(스리랑카)으로 가서 배움을 이어나가야 했다.[37] 1. 용수(150~250 / 龍樹 / དཔའ་མགོན་ཀླུ་སྒུབ་ / Nagarjuna)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 Dharmakirti)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세기경?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 Kamalashila)
17. 아티샤(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
[38] 소장 김광태(金光泰) 이하 이성법(李性法), 윤재분(尹再粉), 정대영(鄭大泳), 손추식(孫秋植), 김선용(金善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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