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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e4fe><colcolor=#ffffff> 초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한덕수 韓德銖 | Han Duk Su | |
초명 | 한원오(韓元五) |
자 | 대여(大汝) |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907년 2월 18일[2] |
경상북도 경산군 북면 동호동 (現 대구광역시 동구 동호동) | |
사망 | 2001년 2월 21일 (향년 94세)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 / 중퇴) |
직업 | 정치인 |
소속 | |
훈장 | 김일성훈장 김일성상 국기훈장 1급 조국통일상 로력영웅 2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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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초대 의장. 자는 대여(大汝).2. 생애
2.1. 초기 이력
1907년 2월 18일, 경상북도 경산군의 농민 집안에서 아버지 한기만(韓琦萬, 1878. 8. 26 ~ 1972. 3. 3)[3]과 어머니 인동 장씨(? ~ 1918. 3. 8)[4]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을 계기로 반일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1927년 학업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뒤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해 고학으로 1년간 공부하였으나 끝내 학비 부족으로 중퇴하고 터널 공사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이때 각종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는 무려 300개에 가까운 조선인 단체들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을 규합하여 전국적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1945년 9월 10일, 조득성, 권혁주, 김정홍 등이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45년 10월 1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전국대회를 개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전신인 재일본조선인련맹, 약칭 조련이 결성되었는데 이때 한덕수도 참가하여 우익 교포 진영에 대한 테러를 통하여 대회를 완전히 장악, 대회 결과 총무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총련 2차 대회에서 총무부장에 임명되었다. 한덕수는 조련에서 2번째로 많은 17개의 지부를 관리하는 카나가와현 본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를 볼때 초기부터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1947년 10월 15일의 4차 대회와 1948년 10월 14일의 5차 대회에서는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2.2. 조총련 결성
한편 조련에는 일본공산당 출신 김천해, 김두용 등이 참여하면서 좌경 정치단체화되기 시작, 천황제 타도와 일본 민주화, 조선의 완전독립, 친일파 처단 등의 정치적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49년 9월 8일, 법무성은 단체등규제령에 의거하여 조련을 강제해산하였으며 한덕수는 공직추방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공산당 산하 민족대책부 부원으로 참가하였으나 김천해와 박은철에 반대하여 곧 탈퇴한다.이후 1951년 1월 9일, 에도가와구에서 민전결성대회가 개최, 한덕수는 일본공산당의 지도에서 탈피하여 조선로동당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었고, 1951년 12월, 고베에서 열린 민전 2차 대회에서 일본공산당 세력과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1952년에는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신의 활동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1952년 5월, 민전 6차 확대중앙위원회에서 강령과 규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수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었고, 1952년 12월 민전 3차 대회에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북한 외무상 남일이 1954년 8월 20일에 발표한 남일성명[5]이 중국과 소련의 지지를 받으면서 일본 공산당은 조선로동당 지지파벌을 제재하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한덕수는 1951년 구월서방을 설립하면서부터 북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보인다.
1955년 3월, 민전 19차 중앙위원회에서 한덕수는 리계백의 소개로 등장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의 성격과 임무>를 발표, 민전 지도부를 격렬히 비판하였고 일본공산당과 민대부 파벌은 자아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6차 대회에서 한덕수는 민전의 해산과 조총련 조직을 이끌어내어 1955년 5월 25일, 조총련을 결성하였다. 재밌는 것은 결성대회 때는 한덕수가 의장을 맡지 않았다.
2.3. 조총련의 왕
1955년 7월, 일본공산당 6차 전체협의회는 민족대책부 해산을 결정하였고 민대부파는 1955년 10월, 민전 중앙조직국장 겸 서기장인 김충권을 북한으로 보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 한덕수를 견제하려 했지만 북한은 이미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한덕수가 있는데 민대부파를 지원해줄 이유가 없었다. 김충권은 귀국하지 않았고 박은철도 북한으로 밀항해버리면서 민대부파는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 1956년 5월 28일, 조총련 2차 대회는 압도적인 찬성 속에서 김충권을 제명해버렸다. 이후 북한은 교육원조금과 장학금 명목으로 1억 2100만엔을 보내주면서 한덕수파가 완전히 조총련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조총련은 확실히 친북단체화된다.1956년 7월 16일, 조총련 6차 중앙위원회에서 한덕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당면과제>를 보고하였고,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민단에 대한 적극적 포섭을 결의하게 된다. 1957년, 한덕수는 조국전선 2차 대회에서 중앙의장에 선출되었으며 한덕수파의 리심철, 황봉구도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5월 27일, 조총련 4차 대회에서 한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가 완성되게 된다. 이때 한덕수의 조카사위인 김병식도 등장하여 한덕수의 뒤를 이어 조선문제연구소장에 임명된다. 1960년 8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김병식은 매우 적극적으로 한덕수 우상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이 있는데 한덕수라는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것을 북한이 좋아할리가 없었고 북한은 이를 즉각 제지, 리계백 부의장, 안흥갑, 박재로 선전부장에게 학습자료 작성을 전속시켰으며 1961년 8월 간부학습회에서 인사부장이었던 김병식은 일시적으로 해임되고 안흥갑이 새 인사부장에 임명된다.
한덕수는 북한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이를 쿠데타로 규정,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김병식을 다시 인사부장으로 복귀시킨다. 안흥갑은 1962년 2월 북한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한덕수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숙청하였고 한덕수 반대파들은 북한으로 압송되곤 했다. 50~60년대 한덕수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다가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자 조총련의 법적지위가 약해졌고, 북한은 조총련을 달래기 위해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7명의 조총련 성원들을 대의원에 진출시켰는데, 이때 한덕수도 대의원에 당선되어 1998년 10기까지 7선을 하였다. 1966년 12월 29일, 환갑을 기념하여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그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1961년 3월, 조총련 산하의 일조협회 오카야마현 본부 부지부장, 조총련 중앙본부 재정위원을 지냈던 오귀성이 조총련 규탄 성명을 발표하다가 제명되기도 했고, 일부 북송 재일교포들이 가까스로 일본에 귀국하여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한덕수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한덕수는 1967년 5월 24일, 조총련 8차 대회를 열고 부정적 경향과 사상요소 청산 문제를 제기하였고, 조총련의 주체사상화를 더욱 다그쳤다. 1967년에 부의장 리심철이 북송당했고, 한덕수는 조총련 안에서 계속 수령으로 군림하였다. 개인적 사치도 늘어서 1968년에 자택 대지를 구입하고 1972년에 호화주택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1972년에는 심복이었던 김병식이 한덕수를 찍어내고 자신이 조총련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한덕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김병식이 북한으로 압송되는 걸로 끝나는 일도 있었다. 이것으로 한덕수-김병식 체제는 붕괴되었고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전체 재일교포의 75%를 차지하던 조선적은 44%까지 감소하였다.
어쨌거나 한덕수는 계속 북한에 충성하여 소위 애국사업을 전개, 1972년 김일성 환갑을 기념하여 5억엔을 송금한 것을 시작으로 매해 북한에 많은 조공을 바쳤으며 1982년, 김일성 칠순에는 무려 50억엔을 갖다바쳤다. 그리고 합영법 제정을 계기로 조총련 기업들이 북한에 직접 투자를 하여 막대한 투자를 하였고 한때 일본은 중국을 제치고 북한의 제1 교역국이 되기도 하였다. 조총련이 북한에 세워준 소위 애국공장만 무려 60여개가 넘었다.
김일성은 한덕수에게 각종 포상을 대가로 하사, 1972년, 김일성훈장이 제정되었을때 조총련 대표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으로 또 수훈, 1997년에는 그의 구순을 기념하여 또 주어 무려 삼중수훈자 기록을 세웠다. 그외에도 김일성상, 2중 로력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도 받았으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평양경공업대학도 그의 이름을 따서 한덕수평양경공업대학으로 개칭되었다.
2.4. 말년
하지만 북한의 엉망진창인 경제에 끝없는 조공도 한계가 있었고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 때는 조총련이 갹출해서 바친 돈으로 모자라서 따로 공작원들이 와서 돈을 갈취해갔다. 여기에 헤이세이 불황이 시작되면서 조총련의 자금사정 자체가 나빠져서 조총련 중앙학원, 조일수출입상사, 도쿄 제8초급학교, 오사카총련 본부 등 441억엔에 달하는 자산이 은행에 동결되었다. 결국 1997년 11월, 조은 오사카 신용조합 파산을 시작으로 도쿄를 포함한 6개 신용조합이 파산했다. 조총련은 조은 오사카 신용조합의 후계조직으로 간사이 지방 조은 5개를 병합하여 세운 조은 긴키 신용조합도 2000년 12월 29일에 파산해버렸다.또한, 더 이상 조총련 계열이 북송에 호의적이지 않음에도 북한에서 편집해준 교과서로 가르치는 조총련 학교를 무리하게 늘려나갔고, 조총련 학교은 줄도산하였다. 조총련 학교 소속 교사들이 월급도 못받고 밥을 굶은 일까지 발생하였다. 21세기 이념에 맞는 민주주의 교육 실시, 민단이나 중립 성향의 교포도 수용, 실력 양성 지향, 일본대학 진학 허용 등을 골자로 한 개혁 요구는 가차없이 무시되었다. 1994년에는 책임부의장 허종만에게 숙청당해서 북한으로 도주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1999년 4월 20일에는 평양을 방문한 조총련 제1부의장 서만술에게 김정일이 개량주의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사업해야 한다면서 자본주의화 되었다는 비판을 들어도 상관없이 사업방법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뒤숭숭해진 조총련 업무에서 90대가 된 한덕수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조총련 규모는 전성기인 50여만명의 20%도 안되는 10만명 이하로 감소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1년 2월 21일 오후 8시 20분에 폐렴으로 인하여 향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어버이수령님께와 경애하는 장군님께 무한히 충직하였으며 총련의 결성과 건설, 애국애족운동을 일관하여 진두에서 지도해 온 총련의 의장을 잃은 것은 총련조직과 재일조선인운동의 커다란 손실이다."라고 애도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의 명의로 조전을 보내 "한덕수동지는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주체사상을 확고한 신념으로 삼고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륭성번영을 위하여, 재일동포들의 민족적존엄과 민주주의적권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습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그리고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문단을 파견하였고[6], 이때까지만 해도 조총련을 무시할 수 없어서 한덕수의 장례가 가족장이었음에도 민주당, 사민당, 공명당의 당수들과 내각의 전직 각료들도 조문을 왔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이후 조총련 의장은 19차 대회에서 제1부의장이며 한덕수 장례위원장을 지낸 서만술이 승계하였다.
3. 매체에서
한국 매체에서는 조총련의 악명이 워낙 높았으므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했다.4. 참고문헌
- 조정남, 유호열, 한만길, 북한의 재외동포정책(서울: 집문당, 2002).
- 진희관, 조총련 연구 -역사와 성격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8.12)
- 허동찬, 한덕수 사망과 조총련의 운명, 북한 2001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