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멸망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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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멸망전 伽倻滅亡戰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562년 7월 ~ 9월 | |
장소 | 반파국 일대(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 | |
원인 | 백제의 약화로 인한 가야의 외교적 고립과 신라의 팽창. | |
교전 세력 | <rowcolor=#C00D45,white> 가야·백제·왜 (방어) 패 | 신라 (공격) 승 |
주요 인물 | 지휘관
| 지휘관
(병부령) |
참가자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1]
카와베노 오미니에[2]
코모츠메베노 오비토토미[3]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4]
츠키노키시 이키나[5] †
츠키노키시 오지코[6] † | 참가자
(귀당비장) 등 | |
전력 | 규모 불명 | 25,000명 이상[7] |
피해 | 백제: 1,000여 명 전사 가야, 왜: 규모 불명 | 규모 불명 |
결과 | 가야의 소멸. 남부지방의 백제·왜 세력 축출 | |
영향 | 신라 전성기 구도의 완성, 삼국시대 후반기 구도 정립 |
1. 개요
562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이사부, 사다함에게 명령해 가야를 공격, 반파국(대가야)을 정복하여 최종적으로 가야를 멸망시킨 전쟁. 이때 백제와 왜도 지원군을 파병했으나 신라군이 모두 무찔렀다.이 전투의 결과로 전신인 변한으로부터 수백년간 한국 고대사의 일원이었던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오직 고구려•백제•신라만이 남아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 판도로 재편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관산성 전투와 함께 전성기를 맞은 6세기 신라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한때 가야 연맹의 최강국이었고, 거의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 반파국(대가야)의 멸망 과정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교적 자세하지만 그 외 나머지 가야의 멸망 과정은 여러 사료를 찾아봐도 명확하지 않다. 그나마 멸망 과정이라도 있는 나라는 대가야를 제외하면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안라국) 정도에 불과하며, 그 외 후기가야의 20여개 소국은 대부분 구체적 멸망 연도조차 미상일 정도로 문헌이 빈약하다.
562년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모든 가야의 연맹국이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신라에게 멸망한 나라가 10개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신라는 555년 과거 비화가야가 있었던 지금의 창녕군을 장악하고, 행정구역(완산주)을 설치했으며, 556년에는 거창 등 가야 서부로 가는 길목이자 백제 지원군까지 대비해 추풍령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감문(김천)에 하주의 주치를 옮기는 등 신라군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들을 설치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 척경비에서 진흥왕을 보좌한 장수 명단을 보면 멀게는 한성까지 당시 신라 전국의 사방군주(四方軍主)가 본인의 관할지역을 뒤로 하고 창녕에 집결한 것이 나오는데 이를 인접한 고령에 있는 대가야로의 총공격 준비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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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의 가야 세력 범위 |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
2.1. 서부 7국[10]과 동부 3국[11]의 멸망
6세기 초반부터는 나제동맹이라는 미묘한 견제구도 사이에 끼어있는 덕분에 독립하고 있었을 뿐, 가야의 작은 나라들은 더 이상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512~513년 백제가 모루, 대사, 사타,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등의 서부 가야 일곱 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정확한 위치는 기문 항목에서도 나오듯 낙동강 유역이라는 설과 섬진강 유역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문헌적 자료로든 지리적 위치로든 고고학적 실증으로든 섬진강이라고 비정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본래 4세기 근초고왕 시기부터 명목상 백제, 가야, 왜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백제 무령왕의 노골적인 영토 확장 시도와 왜의 방관에 가야의 구성국들은 동맹에 의심을 품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대가야의 제9대 이뇌왕은 백제를 위협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친신라&반백제로 외교 노선을 바꾸게 된다. 522년, 이뇌왕은 신라에 혼인동맹을 제안하였고, 신라가 이를 받아들이며 친신라 혼인동맹이 체결되었다.
혼인동맹을 위시한 대가야는 계속해서 백제의 세력 확산에 대항을 시도했으나, 탁순국을 위시한 동부 지역의 가야 구성국들은 이러한 대가야의 친신라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12] 결국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자 신라는 526년 대가야를 침공하는 것으로 반감을 내비쳤으며, 연이은 529년에는 혼인동맹의 파기를 선언하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가야인 탁기탄[13]을 멸망시켰다.
이후 대가야는 후기가야 맹주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맹주의 자리는 안라국(아라가야)에게 넘어갔다. 아라가야는 안라회의(529. 3)를 개최하여 신라와 백제에게 중립을 선언하고 가야의 재발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회의 이후 백제는 아라가야를 공격해 걸탁성을 빼앗았으며(531), 신라는 이에 질세라 532년 금관가야와 538년 탁순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변한과 진한 시절부터 700년 가까이 나뉘어 있던 낙동강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이는 가야연맹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하다리·사타·모루의 4현을 요구했다. ...(중략)...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制旨)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겨울 11월 신해 초하루 을묘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장군과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의 신이해(辛已奚),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대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반파국이 즙지(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일본서기》<계체기 6년~ 7년> (512년~ 513년)
겨울 11월 신해 초하루 을묘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장군과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의 신이해(辛已奚),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대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반파국이 즙지(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일본서기》<계체기 6년~ 7년> (512년~ 513년)
9년 봄 3월에 가야(加耶)의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22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22년)
가라왕은 신라 왕녀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인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종자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고 신라 의관을 착용하게 했다. 아리시토(阿利斯等)[14]가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자세하지 않다>가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 고 답하였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 (529년)
《일본서기》<계체기 23년> (529년)
이 달 아후미노게나노오미[近江毛野臣]를 안라(安羅)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15]와 탁기탄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백제는 장군군(將軍君) 윤귀(尹貴)와 마나갑배(麻那甲背)・마노(麻鹵)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받게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없앤 것이 두려워서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나마례(夫智奈麻禮)와 해나마례(奚奈麻禮) 등을 보내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게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높은 (堂)을 세워서 칙사를 오르게 하고 국주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국내의 대인으로서 당(堂)에 올랐던 사람은 한둘 정도였다. 백제의 사신 장군 군 등은 당 아래에 있었는데 몇 달간 여러 번 당 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장군 군 등은 뜰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 (529년)
《일본서기》<계체기 23년> (529년)
<19년>에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 아들인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32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32년)
2.2. 운명의 관산성 전투, 소가야의 멸망
[주의]
513년 백제가 대사국(하동)을 멸망시키자, 소가야(고성)와 바로 옆의 사물국(사천)이 위협을 느꼈다. 위치비정이 맞다면, 이 때에 이미 백제는 섬진강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 서부 가야들의 해상교역로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기존 가야의 중요한 영역이었던 남해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또한 섬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백제의 가야 침탈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갔다.
이에 소가야는 2차 사비회의(544)에 참석해 입지를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독성산성 전투(548)에서 안라국이 참패를 당하고, 이어서 삼국시대 후반의 판도를 결정지었던 관산성 전투(554)에서 백제가 대패하고 대가야의 후견인이 소멸하며 소가야는 거의 고립되었다.
이후 소가야가 얼마나 버텼는가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관산성 전투 이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단 소가야의 당시 정치적 입지를 고려할 경우, 신라는 소가야를 본격적인 가야멸망전이 시작되기 전에 정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가야는 엄연히 후기 가야 연맹에서 독자적인 파벌을 거느린 집단이었으나 일본서기에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한 다른 집단인 안라국과 반파국과는 다르게 일체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야마토노미코토모치 신[臣]과 임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고세[許勢]의 나솔 가히[奇麻]·모노노베[物部]·나솔 가히[奇非] 등이 야마토로 부터 돌아왔다. 이제 야마토노 미코토모치 신과 임나국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을 듣고 함께 임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야마토의 기비노오미,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과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 군의 아이,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 한기, 구차 한기가 이에 백제로 나아갔다.
《일본서기》<흠명기 5년> (544년)
《일본서기》<흠명기 5년> (544년)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9천6백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54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54년)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말키우는 노예 고도(苦都)<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쓰쿠시노쿠니노미야쓰코[筑紫国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쿠니노미야스코[国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 <안교는 우리 말로 구라니(矩羅膩)라고 한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야마토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일본서기》<흠명기 15년> (554년)
《일본서기》<흠명기 15년> (554년)
2.3. 외교와 저항의 상징, 아라가야의 멸망
안라회의 실패 이후, 연이은 신라의 확장 정책에 아라가야는 백제& 왜와 재차 동맹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백제와 안라의 주도 하에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가 열렸지만, 백제 성명왕의 급진적인 정책 제안과 가야 각 구성국들의 의견 불합치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만다.
이에 아라가야는 또다른 동맹 국가를 모색하며 고구려에 밀통을 시도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한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 전투에서 나제동맹에게 패배하면서 안라의 밀통 시도가 발각되었고, 이후 아라가야는 백제의 식민지격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상 가야연맹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잃게 되는 시점이었다.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 패배의 영향으로 백제의 우호를 상실한 가야는 신라의 부용국으로 전락했으며, 신라는 이듬해 비사벌(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는 것을 계기로 가야 진출의 야욕을 본격화한다. 결국 대부분의 가야 소국들(임례국, 자타국, 걸손국, 졸마국, 거열국, 사이기국, 산반하국)이 수 년에 걸쳐 차례로 멸망하였으며, 이러한 소국들의 연이은 멸망으로 인해 내륙에 위치한 아라가야는 사실상 고립된다.
연이어 신라는 561년에 아라가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라가야는 금사에서 버티며 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신라는 아라의 파사산에 성산산성을 쌓아 왜의 침입에 대비하며 아라가야의 정복을 시도했다. 저항하던 아라가야는 끝내 버티지 못한 채 신라에 멸망하였고, 신라 진흥왕은 즉시 그곳을 순행하여 창녕에 척경비를 두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남은 세 가야 중 아라가야가 사라지고, 다라국(합천)과 대가야국(고령)만이 남게 되었다.[17]
여름 4월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대불손・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만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의 야마토노미코토모치[日本府]의 기비노오미[吉備臣]<이름자를 잃었다>와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중략)... 성명왕은,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의 때에, 안라・가라・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 자제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에게 속임을 당하여 천황을 노엽게 하고 임나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 중좌평마로, 성방갑배 매노 등을 보내어 가라에 나아가 임나의 야마토노미코토모치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임나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황이 명령을 내려, ‘속히 임나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후략)...
《일본서기》<흠명기 2년> (541년)
《일본서기》<흠명기 2년> (541년)
...(전략)... 성명왕이 이들에게 일러, “임나라는 나라는 우리 백제와 예로부터 자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이제 야마토노미코토모치이키미<임나에 있던 야마토 신하의 이름이다>가 이미 신라를 토벌하고 다시 장차 우리를 치려고 하며, 또 신라의 허망한 거짓말을 즐겨 듣는다. 무릇 이키미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탈하여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자세하지 않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는 무도하며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거스려 탁순을 멸망시켰다. 팔다리같은 나라를 속히 회복코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오게 하여 함께 은혜로운 조칙를 받들어, 임나의 나라를 일으켜 맥을 잇고 옛날처럼 길이 형제가 되기를 바랬다. ...(중략)... 마땅히 야마토 신(臣)・임나 한기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아뢰고 은혜로운 조칙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기비노오미와 한기 등이, “대왕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야마토 대신(大臣)<임나에 있는 야마토노미코토모치의 대신을 일컫는다>, 안라왕・가라왕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흠명기 5년> (544년)
《일본서기》<흠명기 5년> (544년)
여름 4월 임술 초하루 갑자에 백제가 중부 간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덕솔 선문 등이 칙을 받고 신의 나라에 이르러 ‘청하는 구원병을 때에 맞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조를 받고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고려가 마진성을 공격한 것은) 안라국과 야마토노미코토모치(日本府)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밝히고자 하여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으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가외천황(可畏天皇)께서<서번들은 야마토[日本] 천황을 모두 가외천황이라 일컫는다>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청했던 구원병을 잠시 멈추시고 신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일본서기》<흠명기 9년> (548년)
《일본서기》<흠명기 9년> (548년)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북사』 권94 열전 제82 신라 (554년)
『북사』 권94 열전 제82 신라 (554년)
16년 봄 정월에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5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법흥왕 (555년)
22년 신라가 구례질급벌간을 보내어 조부를 바쳤다. ...(중략)... 대사가 나라에 돌아가 그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야마토에 대비하였다.
《일본서기》<흠명기 22년> (561년)
《일본서기》<흠명기 22년> (561년)
2.4. 대가야의 멸망, 사국시대의 종언
562년 가을 7월, 진흥왕은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기병 5,000명을 주어 대가야를 공격하게 했다. 사다함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전단문에 들어서 흰 깃발을 꽃으니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쩔줄을 몰랐다고 한다. 대가야가 조금 저항하며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백제는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9월, 대가야가 계속해서 버티자 진흥왕은 대장군 이사부에게 20,000명의 병력을 주어 토벌하게 했다. 이에 맞서 일본은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와 카와베노 오미니에를 위시한 다수의 장수를 앞세워 원병을 파병하였다. 이 때까지의 일본서기에서 이 정도로 상세한 장수의 편성과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이때가 거의 유일하며[18],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파견이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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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군 수뇌부는 가야인을 아내로 맞은 장수 코모츠메베노 오비토 토미(薦集部首 登弭)에게 명령해 백제군 진영에 군사계책을 가지고 가게 했다. 문제는 이 자가 처가집에 들리다 군사기밀을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길바닥에 실수로 떨어뜨리는 사고를 쳤고, 그걸 신라군이 손에 넣어 전략을 파악하자 신라가 군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19]
대가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일단 왜군은 신라군을 상대로 한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특히 부장군 니에의 무용이 뛰어나 많은 신라군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차례 승리한 후 대장군인 오마로노 스쿠네가 동맹인 백제군 군영에 들어가서 일장연설을 했는데, 써있는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승리한 장군이 하는 대사라기에는 약간 부자연스럽다. 《일본서기》 특유의 허술한 윤색일 뿐 실제로는 패배했거나, 간신히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제군과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를 보면 초반에 소규모 전투는 몇 차례 승리했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그러자 신라군은 왜군에게 거짓 항복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국 측 기록에서도 등장했던 백기가 여기서도 등장한다. 가야군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 사용했던 백기를 다시 들고 나와 무기를 버리면서 왜군에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군사병법에 밝지 못했던 부장군 니에는 진짜 항복하려고 한다고 속아넘어가 방심했고, 무방비 상태에서 자신도 응답의 의미로 백기를 들고 신라군에 접근했다. 이에 신라군이 역습을 가해 백제군과 왜군들을 1,000여 명 가까이 죽였다. 이때 지휘관급 인물 중에는 야마토노 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彥)만이 빠른 말을 타고 있어서 간신히 달아났고[20] 나머지 왜군 장수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부장군 니에와 그 부하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사로잡은 한 신라 장군[21]이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보고 니에에게 "네 목숨이 중요한가? 아내가 중요한가?"라고 묻자,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소중하다며 아내와 여자들을 바쳤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니에는 풀어주고 옥외에서 우마시히메를 강간했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니에가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며 일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라 장군은 포로가 된 장군인 츠키노 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에게 칼을 대고 하카마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왜국의 장군은 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외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키나는 끝까지 "신라의 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반대로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화가 난 신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22] 그의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도 같이 죽었는데 아버지의 유해를 안은 채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데, 유독 이 대목에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자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 많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기재된 이유는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각설하고, 일본과 백제가 어떻게든 완충지대이자 핵심 교역로였던 가야를 온전시키기 위해 무리하면서 대병을 파병하여 몸부림을 치고 악전고투를 했지만, 욱일승천하는 신라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도설지왕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로서 신라는 지난 수백 년간 신라의 숙적으로 지내던 가야를 멸망시켰고, 한때 남방 무역을 주름잡으며 일본, 백제, 중국을 잇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무역지역이던 가야는 500년 역사의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신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최대 규모의 전역이었던 가야멸망전은 진흥왕 최대의 업적 중 하나로서, 이후 백제는 철 부족과 전선의 불리 속에 빠져 한동안 침체하게 된다. 반면 한반도에 존재하던 마지막 군소세력을 집어 삼킨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대등 그 이상으로 겨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모든 원시국가~고대 연맹국가들이 멸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세 개의 세력이 서로 비등하게 천하를 놓고 겨루게 되었다. 이는 진정한 삼국시대의 시작이었다.
3. 정세와 《일본서기》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전에서 백제와 왜도 대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즉시 지원군을 파병했다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562년 가야 멸망을 막으려 지원군을 보낸 부분은 '신라군이 왜군에게 크게 이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때문에 한국 측 사서 내용과 비교하여 큰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며, 큰 틀에서 같은 사건을 더 세세하게 전하고 있어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자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내용이 많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기재된 이유는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천황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왜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3.1. 가야의 회복?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대가야)가 일본 천황에 의해 회복하였다고 되어 있다.571년, 천황이 임나의 재건을 회복으로 남겼다. 584년, 백제와 일본이 임나의 재건을 계획했다. 591년, 임나를 재건하고 사신을 뽑았으나 이후 수십년에 걸쳐 신라가 임나를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하였다. 607년 임나와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608년 가라사국(아라가야)[23]이 수나라와 교류했다.
623년, 신라가 다시 임나를 멸망시켰다. 이에 천황이 분노하여 군사를 보냈고, 신라가 항복하자 다시 임나를 재건했다. 643년, 이 해에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조공했다.[24]
646년, 신라에 의해 임나가 또다시 멸망했다. 그러나 백제와 천황의 힘이 부족해 더 이상 재건되지 못하고, 그 해 9월 조서를 없애니 임나가 완전히 멸망했다.
여름 4월 무인 초하루 임진에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를 보내 불러들였다. [천황이]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일본서기》<흠명기 32년> (571년)
《일본서기》<흠명기 32년> (571년)
가을 8월 경술 초하루 천황이 군신에게 조를 내려, “짐이 임나를 세우고자 생각하는데, 경들은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군신들이, “임나관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모두 폐하께서 조를 내리신 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일본서기》<숭준기 4년> (591년)
《일본서기》<숭준기 4년> (591년)
이 해 사카히베노오미[境部臣]를 대장군으로 삼고 호즈미노오미[穗積臣]를 부장군으로 삼아<모두 이름은 빠졌다>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하여 신라를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곧바로 신라를 향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신라에 이르러 5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신라왕이 두려워하여 백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서서 다다라·소나라·불지귀·위타·남가라·아라라 6성을 떼어 주며 항복을 청하였다.
《일본서기》<추고기 8년> (600년)
《일본서기》<추고기 8년> (600년)
수 양제 대업 3년(607년) 4월 임술에, 가라<『제서(齊書)』에는 가라(加羅)라고 썼다>국(迦羅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북사』>
『해동역사』 권16 세기16 제소국
『해동역사』 권16 세기16 제소국
『수서(隋書)』 양제본기(煬帝本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업 4년(608년) 백제, 왜, 가라사국(迦羅舍國)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강역고』 권2 변진별고
『강역고』 권2 변진별고
이 해 신라가 임나를 공격하여 임나가 신라에 복속되었다. ...(중략)... 그리고 “임나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황의 부용국이다. 어찌 신라가 함부로 그것을 영유하겠는가. 평상시대로 내관가로 정할 것이니 원컨대 걱정하지 말라.”라고 약속하고, 나말 지세지를 기니노이하카네에게 딸려 보내고, 또한 임나인 달솔 나말지를 기시노쿠라지[吉士倉下]에 딸려 보내어 두 나라의 조를 바쳤다. ...(중략)... 그러나 신라 국왕은 많은 군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미리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장군들이 함께 의논하여 표를 올리니, 천황이 허락하였다.
《일본서기》<추고기 31년> (623년)
《일본서기》<추고기 31년> (623년)
『일본사』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추고 천황 31년(623년, 신라 진평왕 45년)에 신라가 다시 임나를 침범하니 장수를 보내어 쳤다. 신라, 임나가 조공하였다.” 이 때가 곧 당나라 고조 무덕 6년(623년)이다. 임나가 망한 것은 당나라 태종 정관의 시대에 있었으니 수서에서 이른바 가라사국(迦羅舍國)은 곧 임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한강역고』 권2 증보임나고
『대한강역고』 권2 증보임나고
9월 세우토쿠[小德] 다카무쿠노하카세쿠로마로[高向博士黑麻呂]를 신라에 보내 인질을 바치게 했다. 드디어 임나의 조를 (바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일본서기》<효덕기 2년> (646년)
《일본서기》<효덕기 2년> (646년)
또 [『일본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숭준 천황 4년(591년)<진평왕 건복 8년> 기노오마로[紀男麻呂], 고세노히라부[臣勢比良夫], 가시하데노카타부[膳賀拖夫], 오호토모노쿠히[大伴齧], 가즈라키노오나라[葛城烏柰良]를 대장군으로 삼아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츠쿠시[筑紫]에 주둔하게 하고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신라가 화해를 행하였으므로 마침내 임나를 회복하였다. …(중략)… 숭준 4년(591년)에 비록 신라와 화해를 행하여 잠시 임나를 회복하였지만, 회복하였다가 침범당하여 다시 일본에 복속되지 못했다. 그래서 백제로 하여금 그 사사(使事)를 맡게 하였고, 효덕 2년(646년)에 결국 그 조를 없애고 영원히 신라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대한강역고』 권2 증보임나고
『대한강역고』 권2 증보임나고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기록은 실질적인 가야의 회복을 통해 당시 국제관계와 결부되어 실재하였다고 보는 실체론, 단순한 부흥운동의 성격을 띠거나 왜의 관념 및 인식이 외교와 기록에 투영되었다고 이해하는 상징론, 일본서기 찬자에 의한 조작이라고 파악되는 부정론이 존재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일본이 가야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7세기 중엽까지 임나를 통해 지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임나일본부설 연계), 임나계 도래인의 정착을 돕는 기구 혹은 신라와 왜의 협의 기구로 해석하는 견해(상징론), 반독립국 상태의 구금관국 왕가로 해석하는 견해(실체론)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일본측 사료를 기반으로 증보한 장지연의 대한강역고를 제외하면 한국 쪽 기록에서 일체 전하지 않으며, 일부 중국 사서(수서, 북사)를 제외하면 교차검증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 사학계 전반에서는 실체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의 친신라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견해(상징론), 일본서기 편찬자의 조작 혹은 실수로 해석하는 견해(부정론), 가야계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견해(상징론~무효론) 등이 주를 이룬다.
4. 후일담
진흥왕은 가야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에게 포상으로 가야인 300명과 토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그가 받지 않자, 왕이 강권해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불모지를 받았다고 한다. 사다함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인재였던 듯 하지만, 17세가 되던 해 친구 무관랑이 죽자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가야가 멸망한 고령 땅에는 대가야군(大加耶郡)을 행정구역으로 설치했으며, 마지막 왕 도설지왕은 학계의 연구상 월광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월광태자설이 맞다면 거덕사(擧德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광사(月光寺)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져오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대가야인의 일부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지역으로 사민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5] 반파국이 멸망하던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했던 가야 7개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왜국에서는 571년 4월 15일 긴메이 덴노가 몸져누웠을 때 유언격으로 신라를 치고, 이미 멸망한 임나(가야)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패배의 미련이 많이 남았던 듯 하다. 패배한 장군 오마로노 스쿠네, 니에 등은 모두 파직당하고, 품계가 깎이는 처벌을 받았으며, 천황에게 충절을 지킨 이키나의 남은 가족들은 포상을 받았다.
진흥왕은 합병한 가야 지역을 대상으로 신라 본토와 같은 율령제에 기반한 통치를 개시했고, 이는 가야 각국으로 나뉘어있던 시절보다 훨씬 체계적인 통치였다. 함안 성산산성에서 합병 직후 6세기 중반 시점에 공문서로 사용되었던 목간이 대량 출토되어 밝혀졌다. 대야성 전투의 죽죽과 같이 현지인들은 신라에 빠르게 동화되어, 삼국 통일 후 9주 5소경을 구분할 때에도 옛 고구려 지역 3주 및 옛 백제 지역 3주와 함께 신라+옛 가야 지역을 합쳐 원신라 지역 3주로 간주할 정도로 가야인은 신라에 빠르게 융화되었다. 이 가야 지역과 유민들은 훗날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부터 시작해 신라에 맹공을 펼칠 때, 이를 막아내 신라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만 완전히 동화되진 않았는지 후삼국시대가 되자 가야 지역 호족인 차윤웅이나 왕봉규 등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가야가 멸망한 이후 백제는 중요한 철 산지를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고, 한성백제 상실 이래 고질병이었던 철 부족이 심화되어 금속 갑옷보다 가죽 갑옷을 더 많이 쓰게 된다. 금휴개라고 하는 백제 특유의 옻칠한 가죽갑옷이 대량 출토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5. 기록
5.1. 《삼국사기》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26]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15, 6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27]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사다함 열전>
《삼국사기》<사다함 열전>
8년(서기 561) 가을 7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죽은 자가 1,0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위덕왕 본기>
《삼국사기》<위덕왕 본기>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28]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 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지리지> 강주
《삼국사기》<지리지> 강주
5.2. 《일본서기》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미마나(任那) 미야케(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미마나(任那)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미마나(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카라국(加羅國), 아라국(安羅國), 니시키국(斯二岐國), 타라국(多羅國), 소츠마국(卒麻國), 코사국(古嵯國), 코타국(子他國), 산한게국(散半下國), 코츠산국(乞湌國), 니무레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562년 1월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562년 1월
이달 대장군(大將軍)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타리(哆唎)에서 출동하고, 부장군(副將軍)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코소무레(居曾山)로부터 출발하도록 하여 신라가 미마나(任那)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미마나(任那)에 도착하여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登弭)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토미(登弭)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렸다.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귀부(歸附)하기를 빌었다.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군중(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 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원래 군사(軍事)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 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패한 바가 매우 많았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彦)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까지 뒤쫓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테히코(手彦)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카와베노오미(河邊臣)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 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러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카와베노오미(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사카모토노오미(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우마시히메(甘美媛)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는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하카마(褌)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야마토(日本)로 향하게 하고 “야마토(日本) 이쿠사노키미(將)는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 코니키시(王)는 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오지코(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이키나(伊企儺)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앗기 어려운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오바코(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키(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야마토(日本)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화답(和答)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키(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나니와(難波)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562년 7월
[1] 紀臣 男麻呂宿禰.[2] 河邊臣 瓊缶.[3] 薦集部首 登弭[4] 倭國造 手彦.[5] 調吉士 伊企儺[6] 調吉士 舅子.[7] 이사부에게 준 20,000의 병력, 그리고 사다함에게 준 5,000기의 기병.[8]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요동 철맥을 점유하여 당대 동아시아 최강 수준의 철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서는 가야의 뛰어난 철기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는 가야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고는 있었지만, 무자비하게 밟아버려 철기 공급원 자체가 막혀버리는 무식한 정책을 벌이진 않는다. 게임에서야 철맥이 있는 곳을 점령하면 철이 쏙쏙 나오지만, 이때까지는 아직 면 단위가 아닌 점과 선 단위의 지배가 이루어지던 시대이므로 무리해서 해당 지역 행정을 붕괴시키면 광부와 대장장이들에게 생계수단이 끊겨 굶어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9] 하지만 이 영역 강화 역시 백제가 장수왕의 한강 침공으로 인해 국왕인 개로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사형당하고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웅진 천도 후 내부 정쟁으로 암살당하는 등 내홍이 심하여 남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걸 이용해 벌인 것이었다. 실제로 백제가 다시 힘을 회복한 무령왕 대에는 이 지역은 물론 원래 강역이었던 섬진강 하류의 하동군 지역까지 빼앗기며 교역로까지 차단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10] 모루(순천), 대사(하동), 사타(광양), 상기문(임실), 하기문(남원), 상다리(여수), 하다리(돌산)으로 비정한다. 기문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위치 비정은 불확실하다. 이하의 서술에서는 "기문"을 섬진강 유역으로 보는 의견을 차용하며, 위치 비정을 달리하거나 사서의 해석에 차이를 둠에 따라 전황의 해석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11] 탁기탄(양산), 금관가야(김해), 탁순(창원)[12]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동부(탁기탄, 금관가야, 탁순) 구성국들은 신라의 위협에 가장 먼저 노출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태였고, 실제로도 모두 53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일찍히 멸망하였다.[13] 사비회의에서 백제 성왕이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14] 탁순국의 왕 아리사등이다.[15] 금관가야를 뜻하는 국명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금관가야의 멸망 연대는 532년이므로, 본 기사에게 남가라국을 다시 세우라는 언급은 그만큼 금관가야가 약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주의] 해당 이미지는 소가야가 554년 관산성 직후에 멸망했다는 출처 불명의 설을 따르고 있으나 소가야의 멸망 시점은 불확실하다.[17] 학자에 따라서는 이사부가 빼앗았다는 가라국을 다라국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아마 다라국은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18] 이보다 더 규모가 거대할 것이 확실한 백강 전투에 파병한 병력의 지휘부도 이렇게 상세하게 적혀 있지는 않다.[19] 비슷한 일화로 미국 남북 전쟁 때 앤티텀 전투에서도 남군의 장교가 군사기밀을 길에다 떨어뜨린 것을 북군이 주운 덕분에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에서도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하고 있었던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가 타고가던 비행기가 벨기에 상공에서 추락해 계획서가 탈취되는 바람에 급히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타고가던 비행기가 다바오 상공에서 추락, 동석했던 참모장이 휴대하고 있던 Z작전 계획서를 압수당한 전적이 있다.[20] 신라 장수들에게 맹렬하게 쫒기다가 성의 해자를 말 탄 채로 뛰어넘자 신라 장수가 쫓아오지 못하고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 구수니자리)!"라고 외치며 탄식했다고 한다. '쿠스니지리'가 무슨 뜻인지는 일본 측 기록에도 알 수 없다고 적었다. 당시 한국어 표현으로 추정되지만 이것도 일본인이 들리는 대로 쓴 것이라 몬더그린일 수도 있어서, 실제 발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도 의문이다.[21] 한국 측 기록까지 감안하면 이 신라 장군은 당시 신라군을 지휘했던 이사부나 사다함일 수도 있겠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22] '왜국 장군'의 대응어가 '신라 왕'인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황을 조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저자가 감히 천황을 조롱하는 표현을 그대로 써넣을 수가 없어 장군으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 엉덩이라는 표현도 원문에서 한자 '먹을 담(㗖)' 자를 쓴 것을 감안하면 원래 똥이었지만 엉덩이로 순화시켰을 수도 있다.[23] 이 때문에 아라가야도 재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4] 그러나 일본서기는 위작수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사서라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다만 한국에는 고대사 기록이 적어 교차검증이 어렵고, 사건을 기록하는 정도의 기여를 하는 책이니 완전히 허황되었다 말하기는 어렵다.[25] 이형기(2002), 《멸망 이후 대가야 유민의 향방: 동해시 추암동고분군 출토품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보' 38, 97-117.[26] 가야(加耶)라고도 한다.[27] 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28]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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