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3:33:58

아리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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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3. 멸망 후4. 가족 관계5. 관련 연구6. 관련 문서

1. 소개

阿利斯等 (생몰년 미상, 재위 : ? ~ 538)

탁순국의 마지막 왕. 아리사등은 왕명이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는 대개 아리사등이다."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와 동일인으로 본다. 단 기능말다는 금관국구형왕설이나 반파국이뇌왕설도 있다. 한국 사서의 가야 관련 기록이 부실한 관계로 이 인물도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한편 아리사등의 이름 중 아리사-는 "거대한"을 뜻하는 신라어 알(閼), -등은 "신하"를 뜻하는 신라어 타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이름이 아닌 대신(大臣)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있다. 일단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같은 인명도 있고, 《일본서기》에서도 아리사등이 기능말다간기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등장하므로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본다.

탁순국이 존재하기 매우 오래전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다른 사서에서 의부가락국 왕자 도노아 아리사등(츠누가 아라시토) 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의부가락국 왕자 도노아 아리사등과 탁순국 왕 아리사등이 시기가 다른 별개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나 탁순국 아리사등의 후손들이 일본 화국(火國) 지역의 국조가 되면서 조상인 탁순국 아리사등을 예전 천황계와 혈연관계인 아메노히보코와 동일시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도노아 아리사등이 나타났거나 별개의 인물일 수 있다.

2. 생애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1]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 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했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을 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후략)
일본서기게이타이 덴노 23년 3월조.
당시 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반파국(대가야)이 신라와 손을 잡았지만 반파국의 친 신라 행보에 거부감을 느끼고 강경한 대응을 했던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타난다. 이를 결례로 본 신라는 결국 파혼을 결정했고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신라는 파혼의 보복으로 몇몇 가야 지역을 공격하고 돌아갔으며, 탁순국도 이때 피해를 입었을 수 있다.

신라와의 전쟁에 529년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사실 왜국에서는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앞서 527년 오우미노 케나노오미(近江 毛野臣)에게 60,000명의 군사를 맡겨 보냈었는데, 이를 중재인으로 삼아 신라 왕과 백제 왕에게 탁순과 남가라(구야국)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인정해주길 바랬으나 신라백제 양쪽 모두 고위 관료를 보내지 않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무시했다. 왜국 측 중재인으로 왔던 케나노오미는 신라군을 이끄는 이사부의 무력 시위에 꼬리를 내렸다. 아리사등은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신라에, 노수구리(奴須久利)를 파견해 백제에 보내 케나노오미를 공격하라고 부추겼는데 이것은 일본에서의 지원군의 증원이 필요했던 케나노오미가 아리사등과 의논하여 먼저 백제와 신라가 케나노오미를 공격하게 하기 위해서인것으로 보인다.

531년 안라회의가 열렸지만 아무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어 백제가 군대를 전진시켜 지금의 함안군 칠원읍 땅에 구례모라성을 쌓는 등의 압박을 가해오자 탁순국 내부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3. 멸망 후

백제 성왕은 탁순국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지만 않았어도 탁기탄과 탁순국이 멸망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즉 신라가 낙동강 서쪽 그 지역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일본서기》 544년의 기록에서 성왕이 520년대의 정세를 회고하며 아쉬워하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한편 탁순국이 멸망한 후 아리사등은 일본 측 기록에서 히노아시키타노 아리사등(火葦北 阿利斯登) 혹은 오사카베노유게이 아리사등(刑部靫部 阿利斯登)으로 일본식 우지(氏)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왜국에 귀순한 것이다. 당시 스쿠네이자 야마토 정권의 실세였던 오오토모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호족이 된 것이다.

탁순국 땅은 신라에 편입되어 굴자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는데 이때 범위가 칠제현[2], 합포현[3], 웅신현[4]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근거로 탁순국이 단순한 소국이 아닌 넓은 영토를 가져었다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탁순국이 협조적으로 신라에 투항했기에 탁순국 당시 영토보다 넓은 지역을 배정받았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기에 아직 확실한 영토 범위는 알 수가 없다.

4. 가족 관계

일본서기》는 아들 "일라(日羅)"의 존재도 기록하고 있다.

아리사등을 마지막으로 탁순국이 멸망했기에 일라는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탁순국 멸망 후 백제에서 벼슬을 받아서 달솔(達率)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정작 아버지 아리사등은 《일본서기》 기록상 결국 나라를 신라에 바쳐서 백제와 왜국의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인데, 훗날 마의태자처럼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았던 듯 하다.

5. 관련 연구

백승옥, <日本書紀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2014[5]
장인성, <가야 阿利斯等의 외교와 행적>, 《백제학보》, 2015
정재윤, <阿利斯等 日羅를 통해본 6세기 한일 관계>, 《백제학보》, 2015
백승충, <阿利斯等 사료의 기초적 검토>, 《지역과 역사》, 2018
위가야,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안라국제회의’>, 《역사와 현실》, 2020

6. 관련 문서



[1] 한국 기록에서는 왕(법흥왕)이 아니라 고위 귀족이찬 비조부(혹은 비지배)의 딸(혹은 여동생)로 나온다. 물론 이찬이라는 직책은 왕족인 성골진골만이 오를수 있는 고위 직책이었기 때문에 골품 상으로 비조부는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3]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5] 해당 연구에선 아리사등을 안라국의 국왕으로 비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