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54:34

6.25 전쟁/전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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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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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호국보훈의 달 특집 - 북한이 말하는 6·25 전쟁
(2023년 6월 24일 방송분)

1. 개요2. 남침의 주도자들3. 북한의 선제공격
3.1. 남침? 북침?
4. 전쟁의 원인: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
4.1. 김일성 주도설
4.1.1. 김일성 주도설의 문제점
4.2. 스탈린 주도설, 미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
4.2.1. 스탈린 주도설의 문제점
4.3. 스탈린미국개입유도설4.4. 남침유도설?
5.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각6. 전쟁 전야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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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굳이 끼워 맞추자면 국공내전에서의 공산군 승리와 애치슨 라인 설정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 일으키자는 요청을 71번이나 기각시켰다. 몇몇은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한국을 공산화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춘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된 후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6.25 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애치슨 라인 가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1]

세부적인 부분에는 논란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또는 남북한 양쪽 정부의 기원 내지는 본질 문제와 결합되어 대부분이 매우 불명확하다. 얼마 전까지 이러한 미묘한 부분은 연구자들이 일부러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 정부 시절에는 민간 학자가 북한의 선제공격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자료 수집을 시도해도 자칫 잘못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고초를 겪을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전쟁 이전에 국지전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방부 소속 연구소 편찬 '한국전쟁사'에서도 국군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국지전으로 오판한 이유도 1945년 해방 이후 지속된 국지전으로 인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국군의 초기 대응이 늦어진 점 대표적으로 당시 제8보병사단이 북한군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막지 못한 이유로 당시 8사단의 작전 지역인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빨치산과의 분쟁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연히 그 중에는 북한 특작대도 있었다.

또한 최근 정병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38도선을 중심으로 하는 국지전은 지속되고 있었다.[2] 그러나 국지전은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일 뿐이지 국지전이 6.25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6.25 전쟁의 시작이 북한의 대대적인 기습 남침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이건 미국의 주장이 아닌 소련의 주장이다.(KGB문서 공개)

엄밀하게 군사적인 개념으로만 보자면 북한 정권과 그 후원자인 중국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에게 우선적인 핵심 국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과 중국이 간과한 게 있었다. 만약 미국이 우방인 남한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의 신망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주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냉전의 정점에서 혹시라도 미국의 동맹들이 양다리를 걸치거나 공산 진영으로 갈아타기라도 하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동일 선상에서 다룬다. 예컨대 폴란드, 발트 해 국가들, 일본 그리고 필리핀 등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 미국이 자신들 뒤에 버티고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2. 남침의 주도자들

  • 북한
    •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해서 전쟁을 일으켜 북한 영토와 주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해놓고, 그 실책마저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에게 뒤집어씌워 자신의 권력 공고화에 써먹었다. 자신의 선제 남침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 철저히 숨겼다. 휴전협정 북한 측 대표였던 이상조 같은 고위층조차 대규모 군사 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 했지 진짜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라고는 예상도 못했다고 한다.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내각 수상.
    • 박헌영: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6.25 전쟁을 적극 추진하던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라는 등의 충격적 발언들을 했다.[3][4]. 남로당의 역할을 강조해야 권력 지분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한, 권력욕으로 인한 시야 좁은 발언이었다. 또한 김일성이 스탈린 등과 전쟁 논의를 할 때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행동했다. 다만 김일성은 이미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난 상태여서 박헌영의 충격적 발언들은 그다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다. 빨치산이 패배만 거듭했기 때문에 이미 김일성은 박헌영의 허세를 매우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박헌영 때문이란 주장은 김일성의 책임 떠넘기기이다. 전쟁 시나리오를 짠 쪽은 박헌영이 아니라 소련 인사들이다. 북한 지도부가 전쟁은 결정했으나 국지전 경험만 있었고 전면전 경험이 없었기에 시나리오 같은 걸 짤 능력이 없어서 소련이나 중국 인사들이 짜줘야 했다.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내각 부수상 & 외무상.
    • 김책: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 김광협: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군 지휘관.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김일성으로부터 문책을 당했다.
    • 방호산: 6.25가 발발하자 6사단은 국군 1사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 쪽에서 쳐들어왔다. 개전하자마자 옹진반도해주의 국군병력을 순식간에 패퇴시켰다. 개전 사흘만인 27일에 김포반도를 점령했다. 남한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데, 바로 6사단이 남진하면서 점령한 충남, 전라도 전역, 경남 서부에서 수많은 인민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강건: 6.25가 발발하자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이끌다가 9월 8일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 리승엽: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었다. 당시 인천상륙후 유일하게 UN군과 국군과 대치했다.
  •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이 김일성의 침략 요구를 71번이나 거절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공산통일과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해 승인[5]해준 것이며 스탈린 또한 애초에 한반도에 최소 북부 지역이라도 친소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6][7]. 물론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경계했고 그것 때문에 침략을 미루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일성의 지속적인 요청에 승인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스탈린은 남한을 일절 침공할 생각이 없었는데 김일성이 떼써서 전쟁을 허가해준 것은 아니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스탈린의 명령앞에서는 설설 기었는데, 김일성 따위가 생떼를 쓴다고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할 목적으로 탱크, 박격포, 야포, 대전차포, 장갑차나 기총 등의 무기들을 남한을 압도할 만큼 제공하고 훈련시켰다. 그에 비해 당시 남한에는 탱크가 단 1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 테렌티 시티코프: 소련군정 사령관을 역임했고,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 중국
    • 마오쩌둥: 모택동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영향을 준다.
    • 펑더화이: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총사령관을 했다.
    • 쑹스룬: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팽덕회의 부장(副將).

3. 북한의 선제공격

북한이 먼저 남침해왔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 부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다만, 전쟁의 주도세력이 김일성인지, 박헌영인지 등의 논란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한국사회의 인식과 학계의 인식이 다르다. 일단 그 러시아가 북한이 막 나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옐친 때 기밀 문서를 공개해서 폭로했다. 일부 종북세력들도 "미 제국주의자"가 아닌 그 스탈린 동지가 남침을 비밀 기록으로 남겼다라고 하면 반박못한다. 이 시점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음모"는 확실히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주장[8]을 제외하면 정말로 한국이 북한을 선공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 of Korean War (1981)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6.25 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참고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미국의 외교 기밀 문서들은 25년을 시한으로 공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 다만, 커밍스의 그 책은 80년대초에 출판된 만큼 근거한 자료가 2010년대 기준으로 35~40년 이상 전의 것이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좌파 대학생들과 사회인들이 열독한 그 번역본 역시 당시의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이후로도 이 전쟁과 관련해 각국에서 비밀해제된 정부 문서는 많으며, 특히 저 책이 저술되고 십여 년 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문서가 풀렸고, 중국이 천안문사태 이후 다시 열리는 등 공산권 문서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적어도 당시의 판본은 현재로서는 맞지 않는 서술이 많다.[9]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지전이 6.25전쟁의 연장선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북한군의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을 내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에서 북한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공격을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에 반해 미국 학계에서는 복합설이 주류이므로, 국지전이 6.25전쟁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6.25전쟁을 일으킨 여러 중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10]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북한의 탱크 수와 남한의 탱크 수 비교 및 남침 직후 수십~수백 km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북한은 당시 약 242대의 탱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한국에는 탱크가 한대도 없었다.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함부로 떠날 수 없다. 게다가 개전 직후 전황을 보면 더 참담하다.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도 북한 학교에서 한국이 북침했다는 역사 교과서 내용을 배우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떻게 한국이 먼저 공격했는데 바로 쳐발리고 수도까지 순식간에 밀려버릴 수가 있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커밍스의 연구는 해당 분야에 대한 극초기의 연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 직전의 국군은 물자와 장비가 부족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서 전면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결론이 학계의 정설이다. 단지 물자와 장비, 병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UN 한국위원회와 미국의 극심한 통제 속에서 전쟁 준비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조차 되지 못했다. 이 당시 UN 한국위원회의 국군 통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하다 못해 소총 1정도 한국위원회의 승인 없이 불출할 수 없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소련 측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신전통주의적 해석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기밀 자료 중에 6.25 전쟁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이자 북한군 배속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Разуваев, 1900년 1월 16일 ~ 1980년 8월 5일) 소장이 당시 상황을 보고한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라주바예프 소장이 6.25 전쟁 중인 북한에 착임하게 된 과정과 그 이후 전쟁 전개 과정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다.

매우 생생한 묘사와 서술로 사료가치가 높고 더군다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라주바예프 소장이 착임하게 되는 1950년 10월 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는 소련의 6.25 전쟁 개입을 확실하게 설명한다. 개전 당시인 6월 25일의 북한 주재 소련 대사는 테렌티 시티코프(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1907년 2월 28일 ~ 1964년 10월 25일) 중장, 군사고문단장은 니콜라이 바실리예프(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Васильев (1900년 6월 27일 ~ 1971년 10월 27일) 소장이었다.

스탈린은 제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해 소련인 군사고문은 38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군사고문의 작전지도에 애로사항으로 작용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스탈린은 현지에 파견된 소련 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의 무능에 격노하여 이 둘을 교체하고 라주바예프 중장을 파견해 위의 두 직위를 겸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소련은 한때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파견해 조선인민군을 지휘하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고 한다.[11]

심지어 6.25 전쟁 초기에 국군에 투항한 북한군 장교 출신자는 2010년 경 방영된 KBS의 다큐 <한국전쟁>에서 "6월 25일 개전을 앞두고 소련군 고문이 훈련담당 고문에서 작전담당 고문으로 싹 교체되는 걸 보고 전쟁을 직감했다" 라고 증언한 바도 있다. 이 사람은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당시 6사단은 개전을 앞두고 중국 팔로군조선인 부대에서 조선인민군으로 일괄 이관된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정예부대였다.

소련파 출신인 정상진은 1946년부터 북한 당국이 소련군의 지원을 이용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본다. # 전쟁 당시 신의주시에서 교사를 지냈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6.25 전쟁이 북한 지도부에 의해 1947년부터 그 준비가 끝난 남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현재 미국 학계의 다수의견은 복합설을 취하고 있다. 한국 학계는 6.25전쟁을 금기시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의견은 사실상 국방부의 의견과 동일하다. 복합설이란 6.25 전쟁은 수정주의가 주장하는 요인과 전통주의가 주장하는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져 6.25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남침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국군의 북침설을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1960년대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으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남침 자체는 빼도박도 못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대신 전쟁 주체 및 과정을 중국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남침유도설 역시 이미 1960년대에 깨졌다. 대표적으로 굽타라는 학자는 해주진공설을 주창하였고, 콜코 부부는 미국과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전통주의자들의 막대한 증거 자료에 반박을 못했다.

북한 지도부는 현재도 북침설을 주장하며 미국의 조종을 받는 국군과 미군이 북침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실제로는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남한의 미국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중이었지만 소련은 북한에 영관급 장교를 군사 고문단으로 파견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아예 정확한 날짜와 과정을 열거하며 남침 준비를 위한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6.25 전쟁/20080610000838_0.jpg
세르보크로아트어 한국어 번역
Туђу хумор
очигледна настава
КОРЕЈА
Сеул
МАНЏУРИЈА
Вот, како је извршена инвазија Северне Кореје.
("Вашингтон Пост")
외국 만평
명백한 설명
한국
서울
만주
보시오, 북한이 이렇게 침공당했단 말이오.
'워싱턴 포스트'

그 당시 같은 공산주의 국가[12]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신문 '폴리티카'에서 실은 만평. 지도를 뒤집어 놓고 남침을 북침이라고 우기는 소련을 까고 있다.[13]

3.1. 남침? 북침?

남침
「명사」
북쪽에서 남쪽을 침략함.
¶ 북한의 남침 야욕/북쪽의 남침에 대비하다/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넘어서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침
「명사」
남쪽에서 북쪽을 침략함.
¶ 한국 전쟁이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잘못 기술한 책도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남침은 북쪽에서 남쪽 침범함.으로 북침은 남쪽에서 북쪽 침략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6.25 전쟁은 남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다만 한자어의 어감 문제로 북한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북침'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서 침략했으니 '북침'아냐?"와 같은 식이다.

사실 이 단어가 매우 헷갈리는 이유는 일상 생활에서 방위가 들어간 한자어를 그리 많이 쓰지도 않거니와 상황에 따라 방위의 품사가 비뀌어 주어가 되기도 하고 부사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방위 부사어의 경우 '월북', '월남'의 예처럼 동사 뒤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문법이 잘못했네
  • 방위가 주어로 쓰인 경우
    • 예: 외침(外侵), 북풍(北風) 등. 주어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주어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위가 방향의 시작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외침'(← 외세의 침략, 바깥으로부터의 침략), '북풍'(← 북쪽으로부터 부는 바람)이 대표적인 예.
  • 방위가 부사어로 쓰인 경우
    • 예: 북벌(北伐), 남하(南下), 동진(東進) 등. 맥락상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효종 시기의 북벌론'이나 '제갈량의 북벌'에서의 '북벌' 등에서는 기준이 되는 주체가 '자국(혹은 자기 자신)'으로 명확하다. 이 때의 '북'은 부사어로 풀이하며 '북쪽으로 정벌함'이라는 뜻이 된다. 방위가 들어간 다른 한자어인 '남하, 북상, 동진, 서정' 역시 '남쪽으로 내려감', '북쪽으로 올라감', '동쪽으로 나아감', '서쪽으로 정벌함'으로 해석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해석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남침'은 '(북쪽이) 남쪽으로 침략했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6.25 전쟁에서는 행위의 주체가 '북한'과 '남한' 둘이기 때문에 행위의 주어가 불분명하다. 이런 맥락 때문에 과거 중국 문헌에서는 방위를 주어로 해석하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처럼 여러 나라가 대립하는 구도가 아닌 남한과 북한만이 대립하는 6.25의 특성상, 남쪽으로 내려갈 주체는 '북한'밖에 없으며 북쪽으로 올라갈 주체 역시 '남한'밖에 없으므로 주어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으나, 앞선 '북벌'의 예처럼 애초에 이렇게 주어가 생략된 용어는 주체가 '자국'임을 전제로 깔고 있다. 즉 '남침'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인상은 남한이 남쪽으로 침략했다 혹은 남한이 북쪽으로 침략했다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북침'이 옳다고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한문에서 '북쪽이 남쪽을 침범했다'는 문장은 '南(남)'의 품사에 따라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南(남)'이 명사인 경우에는 목적어가 되어 '북침남(北侵南)'이 된다. 반면에 '南(남)'이 부사인 경우에는 부사어가 되어 '북남침(北南侵)'이 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고립어한문에서는 형태가 변하지 않은 채로 단어의 품사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굴절어인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단어의 형태를 통해 품사를 알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고대 중국어는 맥락에 따라 고대 중국에서의 관습에 기대 뜻을 전하는 때가 많은, 바꿔 말하면 고대 중국인이 아닌 제3자가 보면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든 느슨한 문법[14]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북침', '남침', '외침' 등의 논리와 같이 체계적이지 않은 해석 방법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문법이 매우 유연해서 작문의 장벽이 낮았다는 말이 되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문법이랄 게 없어서 객관성 없이 개판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아직도 한중일 역사서의 상당 부분이 중의적이어서 해독자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해석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암기하기 위해 반쯤 농담으로 '똥침'을 예로 설명[15]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것은 네티즌과 부사관 면접을 준비하는 군인들이 단순암기를 위해 심화적인 언어적 요소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만들어진 우스갯소리다.[16] 오로지 단순암기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언어적 요소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나 이해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므로 똥침이라는 단어는 북침/남침이 혼동되거나 암기할 때 연상을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그 이상의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말자. 언어적 해석을 찾고자 한다면 이것을 참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국방부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했는지, 2013년 6월 21일자로 '남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용어를 변경했다. 이 용어를 정신교육 시간에도 쓰도록 지시했고, 교육부에도 용어 변경을 요청했다. 이는 현역 장병들뿐만이 헷갈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실시된 한 조사결과 고등학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

4. 전쟁의 원인: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

KBS특별기획 한국전쟁 제1편 : 분단(2010년 6월 6일 방송)

6.25 전쟁의 원인은 예상외로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이다.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북한이라는 가해자가 확실하니 의문을 가지지 않지만 국제사적으로 6.25 전쟁의 원인은 첨예한 문제인데, 이것이 냉전의 기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달리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한 통론은 없다. 학계에서는 과거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최근들어 두 설을 종합한 복합요인설이 힘을 받아가고 있다.[17] 하지만 아직 복합요인설이 주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며, 복합요인설도 외부기원을 강조하냐 내부기원을 강조하느냐를 두고 대립하고 있다.

6.25 전쟁의 원인은 크게 외부기원설, 내부기원설, 복합기원설, 제3시각으로 나누어진다.[18] 각 설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외부기원설은 소련이나 외부환경에 의해 발발했다는 설(김영호, 달튼), 내부기원설은 한국의 모순(신분제와 식민지통치 등)이 촉발시켰다는 설(커밍스), 복합기원설은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의 융합(박명림 등), 제3의 시각인 김일성 주도설(웨더스비)가 있다. 참고로 당시 미국 행정부의 입장은 공산주의자들이 독립국가를 침범한 전쟁이다이다. 미국을 비롯한 다수설의 입장은 스탈린의 생각과 김일성의 생각과 마오쩌둥의 생각이 일치해서 일어났다는 설이다.

외부기원설(전통주의)은 6.25 전쟁의 원인이 한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인 소련 및 공산권 주도의 전초전이었다는 관점이다. 전통주의적 외부기원설은 6.25 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여 공산권 확대전쟁을 위한 전초전이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미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이었고, 이에 따라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한 것이다. 즉, 6.25 전쟁은 소련이 미국을 테스트 하는 것(to test American)이라 보았다. 최근에서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냥 뭉뚱그려서 공산지도부 주도의 확대전쟁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여기서도 김일성은 스탈린을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말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며, 수많은 위성 공산국가를 설립한 자이다. 그에 반해 김일성은 이제 막 리더가 된 인물이다. 그것도 혼자 힘이 아니라 소련의 힘으로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스탈린을 설득해서 전쟁을 주도적으로 진행한다면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 동구권의 국가들의 행보를 보면 대부분 소련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김일성 주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김일성 주도설은 6.25전쟁이 내전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이는 미국의 발빠른 대응이 내전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이 설을 따르게 되는 경우 UN과 미군의 개입이 불법이 된다. 참고로 6.25 전쟁 당시 UN군과 미군이 개입하자 북한이 내전에 개입한다고 비난했다.

내부기원설(수정주의)는 6.25 전쟁의 원인을 국제관계나 소련에게 묻지 않고 내부적인 모순이나 또는 기타요인에 의해서 발발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수정주의적 내부기원설은 커밍스가 최초로 주장하고 이후 학자들에 의해서 구체화된 이론이다. 수정주의는 전통주의의 시각을 부정한다. 즉 개인이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요인은 매우 사소하다고 본다. 전쟁은 어떤 세력이 주도적으로 일으켜서 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25 전쟁도 스탈린의 야욕에서 찾기 보다는, 한국사회 내부의 모순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커밍스는 한국사회가 겪어온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를 분석하여 형성된 사회계급의 모순을 잘 지적했다. 커밍스는 사회적 모순이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화되었지만 이것이 억압되어 있었고, 해방과 동시에 이러한 억압이 분출되는 상황에 냉전이라는 국제환경과 접합되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보았다.

복합기원설은 외부기원설과 내부기원설을 통합하는 형태로,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이 전쟁의 한 축이며 동시에 한국사회의 모순이 복합적으로 기인해서 발생했다고 본다.

한국의 통론인 제3의 시각은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한국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일성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입장이다. 참고로 이 주장은 전통주의 시각도 아니고 수정주의 시각도 아닌 제3의 시각이다. 주장한 학자로는 웨더스비가 있다. 박명림을 비롯한 한국의 6.25 연구자들도 복합요인설에 기반해 김일성+박헌영 주도, 그리고 중국 적화 이후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늦은 참여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19] 참고로 국내 학계는 연구인원이 워낙 적으며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실제로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한 대한민국 최초의 논고가 김학준의 미국연구결과를 소개하는 수준이었다.

4.1. 김일성 주도설

김일성 주도설은 6.25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김일성이 한국으로 쳐들어갈 것을 무려 48번씩이나 요청했고 계속 씹혔음에도 애치슨 라인까지 들먹이며 요구한 끝에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20] 평양, 김일성에 의해서 한국 침공정책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21] [22]

웨더스비는 북한에 대한 소련의 막대한 물자지원과 고문관 파견, 중공군의 지원 등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한 결과라 보고 있다. 웨더스비는 스탈린의 관심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안정이었으며, 안정을 최우선으로 했기에 그는 한반도 반쪽만을 차지하고 힘의 균형을 맞추는데 관심을 가졌다고 보고 있다. 웨더스비에 따르면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하지 않고 한반도의 안정을 추구한 이유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리스 내전처럼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이 개입하게 되면, 국제적인 공산권의 위상이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23][24]

다른 의견으로는 전면전을 할 경우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25][26] 그리고 스탈린 개인은 소련의 현 전투력이 미국에게 많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27] 전면전을 반대한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개인의 욕심을 위해 이러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스탈린에게 생떼를 부린 것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친필 러시아어 서문 전력 면에서 스탈린이 망설인 큰 문제 중 하나는 1949년에야 소련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전에 미국과 소련 간에 전쟁이 터져 핵이 전장에 나오면 그당시 오직 미국만이 가진 핵폭탄이 나가사키, 히로시마가 아니라 모스크바 위에 떨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확전해서 미국이 들어오면 자칫 수도가 털릴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6.25 전쟁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를 통해 미국의 핵 보유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경멸했으며 중국의 6.25 전쟁 참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그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에 패배하면, 압도적인 핵전력을 보유한 미국(1950년에 원폭 300개 소유)이 중국과 소련(당시 원폭 5개 소유)에 핵공격을 퍼부어 세계 대전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스탈린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김일성 주도설은 개인의 야욕을 전쟁의 핵심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전통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지만, 동시에 김일성이라는 내부 인원을 핵심 인물로 선정했다는 점에서 수정주의적 시각, 커밍스와 유사한 관점을 지닌다.[28]

4.1.1. 김일성 주도설의 문제점

  • 공개된 소련문서에 대한 지나친 신봉 : 공개된 소련 문서는 증명력이 의심된다. 그 자료 자체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선별적으로 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를 근거로 삼기에는 조작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9] 그리고 조작의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가 소련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즉,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소련문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대리전 성격을 무시 : 6.25 전쟁은 대리전이다. 즉, 소련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위성국끼리 대전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대리전이다. 그렇기에 소련이 개입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이를 소련이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고, 소련에게 면죄부를 주는 태도이다.
  • 김일성에 대한 과대평가와 스탈린의 과소평가 : 이는 김일성 주도설이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와 그 궤를 달리하는 특징 중 하나에서 기인한다. 김일성 주도설은 기존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인 김일성을 전쟁의 핵심인물로 부각시켰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탈린의 역할을 김일성이 가져가게 되는데, 그 역효과로 스탈린이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버렸다. 문제는 스탈린이 수동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가 해온 행보와 일치되지 않는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시점은 전 세계에서 공산내전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단순히 6.25 전쟁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스 내전, 국공내전 등이 즐비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이 전쟁에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된다면, 결국 스탈린은 전세계 공산내전에 대해서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버리고, 이는 소련이 주장한대로 냉전은 이러한 공산주의자를 소련이 지원했다는 미국의 오해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당연히 소련은 수많은 국가들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원을 했다. 1960년대에는 아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까지 건설해가면서 그들을 도우려고 했다. 그렇기에 스탈린이 절대로 수동적이 인물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아무리 인간의 평가가 다면적이라지만, 6.25 전쟁 전후로 세계적으로 공산내전을 촉발시키고 유도했던 스탈린이 유독 6.25 전쟁에서 수동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 상당한 무리가 생긴다.

4.2. 스탈린 주도설, 미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

The attack upon Korea makes it plain beyond all doubt that communism has passed beyond the use of subversion to conquer independent nations and will now use armed invasion and war. It has defied the orders of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issued to preserve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
I know that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ill consider carefully the consequences of this latest aggression in Korea in defiance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A return to the rule of force in international affairs would have far-reaching effects. The United States will continue to uphold the rule of law.
대한민국에 대한 이러한 공격(북한의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수단을 넘어 이제는 무장침략과 전쟁을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국제평화와 안보를 지키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또한 무시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UN에 소속된 모든 국가들이 유엔한장을 무시한 체 한국에 대한 침략의 결과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라 봅니다. 국제관계에서 힘에의한 통치로의 복귀는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킬 것입니다.
- 해리 S. 트루먼. 1950년 6월 27일 연설문#
미 트루먼 행정부의 인식

현재 한국정부의 입장이 김일성 주도설이라면, 냉전 시절엔 대한민국 정부와[30] 1950년 미국 정부의 입장은 6.25 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본다. 6.25 전쟁이 발발하는 즉시 미 트루먼 행정부가 가장 발빠르게 움직였던 이유이고, 수십만의 미 장병들을 한국에 파견했던 이유이다. 소련이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뒤로는 신생국가들을 무력으로 병합하여 그 세를 확장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탈린 주도설의 시작은 미국 정부의 입장이었고,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왜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론이 유럽에서의 미국의 압박을 분산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6.25 전쟁은 스탈린의 소련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의 봉쇄정책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국내학자로는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가 있다. 이 이론의 전제는 먼저 스탈린과 김일성의 관계에 주목한다.

스탈린은 공산혁명의 1세대이고, 소련 근대화의 상징이자 전세계 공산당의 지도자이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그에 비해 김일성은 이제 막 북한이라는 작은 동네의 지도자가 된 자였고, 그것도 소련의 힘으로 된 것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달린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스탈린은 상위단위이고 김일성은 하위단위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스탈린은 대통령이고 김일성은 낙하산으로 온 5급 공무원이다. 그런 5급 공무원이 기획안을 작성하여 보고했다고 한들 그 기획안을 승인한 것에 대한 주도자는 당연히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스탈린 배후 조종설은 이러한 관점에서 6.25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즉, 전쟁을 기획입안한 것에 김일성이 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 전쟁을 승인한 것은 공산사회의 최고정점인 소련이었고, 당연히 소련이 승인하였으니 최고결정권자로서 전쟁 주도권이 있다는 말이고 책임도 소련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무려 48번이나 소련을 찾아가 전쟁승인허가를 받으려 했다는 것도 북한은 소련의 승인없이 자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며, 공산사회라는 거대한 세계질서의 하부구조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이 발발의 주도권은 스탈린에게 있고 그 책임도 스탈린에게 있다. 6.25 전쟁은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종한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왜 소련이 전쟁을 일으켰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 중 유력한 것이 미국의 시선 분산. 국제정세를 살피다가 미국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동유럽에서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해 만만한 한국에서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시선을 잘 끌기 위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하여 유엔군이 결성되는데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적정한 수준의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통해 유엔군이 쉽게 전쟁을 끝맺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공군 지원도 적정선에서 운용하였고, 특히 38선 이남에 대한 공습을 최소화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T-44, T-54, IS-3, IS-4 같은 소련제 최신예 전차들을 북한과 중공에 전혀 제공하지 않고 2차 세계대전에 쓰던 구식무기를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소련의 대외정책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유럽 중심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의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고, 베를린 봉쇄의 실패와 런던에 핵무기가 배치하겠다는 미국의 선전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 유럽에 집중된 미국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한 고도의 기획전쟁이라는 것이 스탈린 배후 조종설이다.

이 이론에 대한 대중적인 반론은 다음과 같다.

Q: 기획된 전쟁이라면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기획하지 않았고, 왜 48번이나 거부의사를 밝혔다는 것인가?이다.

A: 48번의 거부는 오히려 스탈린의 판단이 중요했다는 점을 반증한다.
스탈린 주도설은 소련이 전쟁을 기획했다기 보다는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이 중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48번의 거부의사로 인해서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김일성이나 북한이 사실상 소련의 번국이나 지방정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또한 대통령도 모든 정책을 스스로 기획하지 않는고 단지 지시만 할 뿐이다. 즉, 스탈린이 직접 기획하지는 않았지만 김일성에게 전쟁을 지시하고 그에 대한 전쟁기획안이 부족하니 48번이나 반려시킨 것일수도 있다.

Q: 전쟁보다는 국지전을 확대하는 것이 미국의 시선을 잡아두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쟁은 당연히 막대한 물자가 소비된다. 그에 비해 국지전은 적은 비용으로 사회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고, 당연히 전쟁발발위험으로인해 미국도 시선을 잡아둘 수 있다. 전쟁위기도 충분히 미국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베를린봉쇄는 전쟁위기까지 이야기되었고, 이에 미국은 런던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신문선전과 항공기를 통한 대규모 공중보급을 통해 소련을 압박하기도 했다.

A: 국지전으로 미국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한국은 1945년 이후로 꾸준히 국지전이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다보니 그 이전에는 국지전이 없다고 인식하는데, 그 전부터 한반도는 준전시 상태였다. 6.25전쟁 초기 채병덕이나 당시 국방부가 북한군의 습격을 전면공습이 아니라 국지전으로 판단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38선에서는 심심하면 북한군과 충돌이 있었고, 여수와 순천에서도 북한에 동조하는 국군 내 일부 불순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31]
또한 국지전과 내전은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 어렵고 개입도 불가능하다.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도 중국, 베트남, 그리스, 키프로스 등 각지에서 국지전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의 국지전이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지금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내전이 지속되고 있는데, 국제사회에서 이에 대한 큰 관심은 없다.

Q: 소련의 소극적인 행보이다. 6.25 전쟁 이전부터 이후까지 소련의 행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무기보급도 사실 신형전차를 공급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소련이 북한의 국방강화를 위해 무기를 지원한다는 식으로 무기를 지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T-34 전차도 이러한 방식으로 공급하였다.

A: 소련의 소극적 행보는 스탈린 주도설의 근거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련의 소극적 행보는 스탈린 주도설의 근거 중 하나이다. 스탈린의 목적은 미국을 테스트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소련이 소극적으로 행보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전쟁 전에 자신의 힘을 추스리는 동안 미국의 행동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북한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스타로 비유하자면 북한은 SCV인 것이다. 정찰하는데 탱크나 배틀크루저 등 주력군을 뭉텅이로 보내지는 않는다.

4.2.1. 스탈린 주도설의 문제점

스탈린 주도설의 문제점은 전통주의 학설에 대한 비판과 동일하다.
  • 모든 원인을 소련의 야욕에서 찾는다 : 기본적으로 1950년대 이후 모든 전쟁은 소련의 야욕,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개인적인 욕망과 동기를 중시하기에 다른 국제적인 상황이나 대한민국의 국내사정을 평가하지도 분석하지도 않았다.[32] 스툭은 대놓고 6.25 전쟁에서 한국인들은 1876년 이후 일본, 러시아 등에게 의해서 지배된 나라로 독립적으로 자신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기에 전쟁도 그들 스스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평가절하했다.
  • 소련문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 비록 소련문서가 조작가능성이 존재하며, 전면공개가 아니라 선별된 자료만 공개되었다는 점은 소련문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소련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당시 자료를 공개하던 시점은 러시아 건립이후 옐친정부의 개방정책에 기인했으며, 문서를 조작할 요인도 적다.[33] 거기에 소련자료는 해명되지 않았던 많은 부분의 의혹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비록 교차검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자료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도 보기 어렵다.
  • 내전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 : 당시 국내상황은 혼란이었다. 38선에서는 국지전이 지속적이었고, 후방에서는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국내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심지어 6.25 전쟁 초기 8사단의 경우 강원도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부대를 분산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부대들도 비슷했다. 이런 국지전의 상황이 분명 전쟁의 발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스탈린 주도설에서는 이러한 국내상황을 무시한다.
  • 김일성 과소평가와 스탈린 과대평가 : 아무리 김일성이 말단직원이고, 그 위치가 미약했으나 분명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했던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수천키로미터를 48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은 강력한 전쟁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8시간이 걸리지만 당시에는 기차로 수십일을 가야했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 48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은 정말로 강한 야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김일성이 풋내기 정치인이라고 무시하는 점은 무리가 있다. 또한 스탈린이 비록 공산사회의 지도자라고 하지만 전세계의 모든 전쟁을 일일이 기획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아시아는 소련에게 변경인데 이러한 곳까지 세밀하게 계획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실제로 국공내전 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지원한 물자는 동구권 국가들에게 지원한 물자보다 적었다.

4.3. 스탈린미국개입유도설

2000년 이후 스탈린과 고트발트의 편지내용이 담겨있는데 이 편지 내용에 따라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됐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4.4. 남침유도설?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콜코 부부이다. 이들은 6.25 전쟁이 이승만과 미국이 북한의 침공을 유도했다는 일명 남침유도설을 주장하였다.

단, 북한이 쳐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미국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음모론은 존재한다. 일명 남침유도설로, 2차대전 중 돈을 신나게 빨았던 미국의 군수산업이 종전이 되자 만든 물건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걱정이었는데 김일성이가 뻘짓하는 게 빤히 보이니 낚싯줄을 드리웠다는 것이 그 골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군비 군수 확장 요청에도 미군은 거절로 일관했고[34] 이에 대해서는 북진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승만의 탓이 없지 않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통일을 시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에 응해줄 수 없었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 서기관 도널드 맥도널드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북진통일'이라는 이승만 정부의 구호를 한국어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 # 그는 미국이 지원을 꺼린 이유가 이승만 정부의 호전적인 성향과 맞물릴 경우 북한을 진짜로 공격할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라 술회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고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사이가 안 좋았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반도를 제외하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걸 밀고 들어가서 "북한은 미국의 음모에 휘말린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도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음모에 히틀러가 휘말렸을 뿐이라는 주장과 같다. 그러나 불공평한 베르사유 조약이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1차대전까지의 유럽 정치사를 모르고 그 부분만 잘라서 읽은 것.

더군다나 만약에 남침유도설이 맞다면 국군이 박살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남침을 유도해놓고 요격에 나선 미군 역시 투입하는 족족 박살이 난데다 이후에도 삽질을 거듭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만약 진짜로 남침을 유도했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주력군이 투입되어서 곧장 밀고 올라갔어야 하는데, 현실은 북한군 요격에 나섰다는 게 겨우 1개 대대, 그것도 2개 중대만 있고 대대원 540명에 장교숫자는 겨우 15명 정도밖에 안 되는 찰스 스미스 대대 요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게 쳐발리고 나서야 윌리엄 딘 장군의 미 24사단이 나섰다. 남침을 유도해 놓고서 남침한 북한군을 때려잡는다는 게 1개 대대밖에 안 된다면 남침유도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남침을 유도해놓고 병력을 외출,외박,휴가를 자유롭게 보낸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전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 초기에는 미군 병사들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한국에 보내지는 족족 총알받이로 내몰려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며, 개전 초 미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연이어 패한 데는 이러한 병력의 자질 문제도 있다. 게다가 군수산업을 돌릴 큰 시장을 미국이 원했다면 차라리 중국의 국공내전을 장기화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실례로 미국은 장제스의 군사적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더불어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최근에도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는 서적이 나오곤 하지만 순전히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일례로 남침유도설을 정론으로 내세운 <한국전쟁의 수수께끼>의 경우 6.25 전쟁 50주년을 노리고 출판했다가 반응이 시들하자 10년 후에 6.25 전쟁 60주년 기념으로 <6.25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살짝만 바꾼 채 신간으로 속여 출판했다. 저자가 이글루스에 스스로 만점을 먹이면서 완벽한 책이라고 홍보하다가 왕창 까이고도 계속 남침유도설이 만고의 진리임을 전파하는 걸 보면 정말 책 팔고 싶은가 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6.25 전쟁은 휴전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5.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각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에 38선을 넘었다. 전술적으로 본다면 새벽에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에서 복무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군 체계는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군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기에 그 많은 인력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국군도 토요일 오전이 되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외박을 나가 일요일 오후에 들어왔다.

즉,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경에 국군 병사들의 대부분은 각자의 집에서 취침 중이었다.

한편 이 날 브라질에서는 월드컵 개막전이 열렸다. 타이밍도 절묘해서 개막전이 벌어지는 딱 그 시각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북한군 탱크가 38선 철책을 넘어오고 있었다.

다만 이는 정규전 개시를 기준으로 한 시간이다. 동해안으로 상륙한 유격대는 이미 오전 3시경에 육지에 오르고 있었다. 강릉 인근 초소에서 근무하던 전대욱 경사(당시 순경, 전사 후 경사 추서)가 이들을 목격하고 교전하다가 전사했는데, 경찰청은 이 경찰관을 6.25전쟁 최초 전사자로 인정하고 있다.6·25전쟁 최초 전사자는 경찰…역사 속 강원경찰의 활약 재조명

6. 전쟁 전야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상황 비교 (단위: 명)
육군 소계 육군 전투 병력 지원 • 특수 병력 해군 공군
국군 103,827 94,974 67,416(8개 사단•22개 연대) 27,558 6,956 1,897
인민군 201,050 182,680 120,860(10개 사단•30개 연대) 61,820 15,570 2,800

6.25 전쟁 관련 문서 공개 이전까지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 영, 소 3국 수뇌가 38선을 경계로 신탁통치안을 합의했다고 여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387), 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당시 정책과장보 딘 러스크 (Dean Rusk)의 냉전비망록에 따르면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 하자 전쟁부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본스틸과 함께 급히 그은 군사적 저지선이었다. 소련도 미국의 의견을 인정하고 38선에서 진군을 멈췄다. 이를 군사적 편의론이라 한다.[35]

하지만,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공산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공산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36] 묘하게 북벌론스럽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대로 묵살당했고, 당시 남한의 경제력은 사야 할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데다가 미국이 제공한 무기도 전적으로 미국이 유지시켜주는 등[37] 형편없었다.

전차만 해도 한국군은 이미 소련에서 북한에 전차를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전차의 도입을 추진하였다고 하는데 1949년 10월쯤에 미국에게 북한이 전차를 가지고 있으니 M26 퍼싱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미국 측의 답은 한국의 교량 대부분은 M26 퍼싱의 하중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국 측은 전차 보유를 희망하였으나 급하게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북한의 전차를 얼마나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미국 측은 이승만의 반복적인 북진 주장 등으로 한국군이 전차를 보유할 경우 이를 이용해 북진을 추진할 가능성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게 보았기에 공격용 무기는 배제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 수준이라고 폄하한 한국군의 전력이 한때 인민군보다 강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인민군의 무력이 우리가 아는 야크기와 전차 242대로 증가한 것은 1949년 말에 들어서였다. 김일성이 금괴와 현물로 무기 값을 치르기 전까지는 스탈린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38] 아무튼 이때부터 북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도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국군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물론 한반도의 지형적 요건상 전차의 활용도가 높지 않고 한국군에게 지원한 바주카나 대전차지뢰 정도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실제로 UN군이 전차를 끌고 왔을 때 지형문제로 상당히 고생했고 영국군 전차들도 종종 사고를 냈을만큼 전차를 대규모로 굴리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논두렁에 처박은 센추리온이라든가, 전복된 영국군 셔먼이라든가 지형도 제한적이라 대전차지뢰만 잘 활용해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57mm 대전차포도 T-34를 상대로 좀 힘들기는 해도 320m 이내로 끌어들이면 정면이라도 격파가 가능한 수준이었다.[39]

당시 한국군의 역량은 그런 상황에서도 전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당시 지휘부가 국지전에 대한 대응력은 탁월했지만, 전차를 동원한 전면전에 대한 대응력이 부족했다. 흔히 당시 장병들의 훈련상태가 안 좋았을 거라고 착각하는데, 당시 국군은 3년 간 국지전을 경험한 부대였다. 당시 연대급 이상 부대 병력들의 전면전 훈련이 부족한 이유는 제대로 훈련할 시간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8사단의 경우 6.25가 발발한 순간까지 강원도에서 빨치산 토벌 중이었으며, 다른 사단들도 다 국지전으로 북한군과 교전을 했던 부대였다. 8사단이 강릉을 빼앗긴 이유도 빨치산 토벌로 인해 병력이 분산되어서 조직적인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다. 또 6사단의 뛰어난 포격 능력도 국지전의 결과물이다. 심지어는 한국군은 후방부대도 국지전 경험이 있는데,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문에 후방부대도 동원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군이 전쟁 극초반 대규모 북한 병력의 전면 공격에 분쇄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 강북지역을 내준 이후 낙동강 방어전 이전까지 국군은 국지전 경험을 바탕으로 T34 쇼크와 북한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나면서도 한강 도하 방어전 등 굉장히 치열한 지연전을 벌였고 화력 차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미군 본대 도착 시까지 한반도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국군의 전반적 평균전투력은 지속된 후퇴와 지연전간 국지전 경험을 쌓은 배테랑들의 낙오와 전사로 사단 정원이 반토막나서 8시간 기초 군사 훈련받은 학도병으로 버티던 낙동강전선 때가 숙련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역시 북한군 역시 국공내전으로 정예병이 되어 있던 병력들이 다부동-영천-포항-기계-마산 전투에서 박살나면서 9월 중순엔 전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어쨌든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 대를 보유한 상태였다.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중국 대륙 내에 있던 일본 전차라도 소유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과는 달리 미국은 한반도와 제주도에 있는 모든 일본 전차를 폐기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보유한 탱크도 없었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참전용사들의 수기를 잘 읽어보면 "우리 국군에 탱크만 있었다면, 인민군이 남침했어도 이렇게 3일이라는 빠른 시간에 서울까지 금방 밀리지 않았을텐데..." 같은 증언도 많이 언급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로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 출처는 KBS 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이다.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한반도의 수령이 된다.
  •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패배를 핑계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政敵)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워서 싹 숙청하고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북한의 수령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김일성은 이걸 핑계로 1955년에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 등을 포함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했다. 다만 최용건은 바지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숙청하지 않았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 : 멸(승)공통일, 백화통일이라고도 한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되거나 중국 간도로 패주해서 북한 임시정부를 꾸린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하게 된다.

하지만 남북의 군사력 상황 상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므로 마지막 경우의 수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 이기면 소련과 싸바싸바해서 득할 간도회복+한반도 적화통일하여 공산 대조선국가를 세워 수령이 되는 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혼자만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중에서 비교해 본다면 스탈린이 옳은 것이다. 만약 남한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미국과 전쟁에 말려들고 이게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면 김일성 본인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씨가 마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1.4 후퇴 당시 소련이 북한에 공군을 지원한 것을[40] 미군이 눈치챘으나, 수뇌부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적기가 소련 공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야욕 하나 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때 중국 내 한국인들로 편성해 총괄하였던 조선의용군 2~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얻어 전쟁을 승인하는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때는 애치슨 라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으나 현재는 소련 문서의 공개로 부정되고 있다.

파일:acheson_line_seokj.jpg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국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삼팔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중에 없었던 것에 가깝다. 히로히토를 호출하는 권위를 가지고 도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시기였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그래봐야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꺼림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무기거래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오히려 북한이 남침을 계획하고 소련에 요구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가뜩이나 대대적인 군축중인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육군의 육탄 10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주로 개성시, 옹진군, 연천군, 양주군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대한민국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공방전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 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국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1949년 10월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소령에게 작성을 지시, 박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김종필과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가 공동으로 작성했다.[41]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국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고 3~4월에 걸쳐 전선에서 '위기설'이 퍼지고 있었던 시기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비상대비태세가 발령후 해제되지 않아 전군의 피로도가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여기에 6월 중순 한국에 방문한 유엔 한국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이 불필요하게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으면서 한국군은 별 수 없이 6월 24일을 기해 비상대비태세를 전면 해제하고 전 군에 대대적인 휴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비상대비태세를 해제하자마자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했는지가 의문일 수 있는데, 3개월이 넘게 휴가 외출 외박 없는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군량미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휴가 장병들에 지급할 건빵은 창고에 가득 남아있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상대비태세가 해제된 후 처음 맞는 주말인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전면적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7. 여담

6.25 전쟁에 대한 논의는 한국 학계에서 거의 실종되어 있다. 1980년 발간한 계간 현대사는 보수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6.25 전쟁에 대해서 논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다. 6.25 전쟁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는데, 처음 시작은 김학준에 의한 외국의 6.25 전쟁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박명림, 정병준, 김남균, 남정옥 등 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었으나, 6.25 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경직된 사고와 예상외의 무관심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논의나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는 않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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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1945)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 (1947) ·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9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948) · 북·남조선로동당 합당 (1949) · 6.25 전쟁 (1950~1953) ·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1953~1955) · 8월 종파사건 (1956) ·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958) · 재일교포 북송 (1959~1984) · 조소동맹조약 (1961) · 조중동맹조약 (1961) · 갑산파 숙청 사건 (1967) · 1.21 사태 (1968)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 사회주의헌법 제정 (1972)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 제13차 평양세계학생축전 (1989) · 남북기본합의서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 · 북일수교협상 (1991~1992) · 제1차 북핵 위기 (1993~1994) · 서울불바다 발언 사건 (1994) · 김일성 사망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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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우상화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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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초에 애치슨 라인이 생기기도 전부터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2]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3] 그러나 남로당 세력은 이미 토벌로 사라졌거나 전향하였다. 지하에 숨어 저항하는 박갑동이나 이현상 같은 이들이 남아있다 쳐도 사실상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박갑동은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숙청 당시 사형까지 갔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된 후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도쿄에 거주 중이다.[4] 다만 당시에는 박헌영 입장에서는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전쟁 외에는 수가 없기는 했다. 지지기반이 남쪽에 있었던 박헌영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남침을 하지 않아도 기반이 튼튼하고 심복을 결집하는 정치적 조직력이 뛰어난 김일성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6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5] 이승인도 당시에는 보급품과무기만 준다는 조건하에 해준것이다.[6] 공산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핀란드화를 바랐던 게 스탈린의 입장이었고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며 북부 지역이라도 확보해 완충지대로 삼고자 하였다.[7] 박태성, <한반도 분단에 있어 소련의 역할과 의도에 대한 재고>, 2015[8] 탈북민과 실향민, 국군의 북진 과정 등에서 얻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 개시 순간에 김일성의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한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대응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다"는 주장이 있던 것이다. 6.25 발발 순간부터 현재까지 거짓말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사실 이 이전부터 김일성의 최측근이 아니면 김일성이 준비하는 것이 무력통일을 위한 전쟁임은 몰랐다.[9] 일단 커밍스가 처음으로 제기한 남침유도설은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1990년대 초반에 박명림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으로 논파했고, 커밍스 본인도 2005년 발매된 『The 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이 부분을 정정했다. 따라서 수정주의 세력에서 말하는 남침유도설은 사실상 사장되었다.[10] 참고로 국내학계에서 6.25전쟁은 관련 연구학자의 이견이 별로 없다.[11] 소련군 6개 사단도 파견할 계획이었다고 한다.[12]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제명당하여 비동맹 국가에 속하였다. 즉 체제는 공산주의지만 친소는 아니었다.[13] 정확히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만평을 #인용한 것이다. 만평 맨 위를 보면 'Туђу хумор(해외 만평)'이라고 적혀있고, 아래에 인용처인 워싱턴 포스트지를 'Вашингтон Пост'라고 인용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이 유고슬라비아가 북한의 남침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서 북침설을 비판하는 내용을 게재한 것은 사실이다.[14] 이는 맥락에 기대는 비중이 높은 '고맥락 문화'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특징이다. 애당초 고맥락 문화권인 동아시아의 중심을 세운 게 중국이기 때문에 고맥락 문화의 종주국 역시 중국으로 볼 수 있다.[15] 항문을 공격하니 '똥침' → 남한이 공격당했으니 '남침'과 같은 방식.[16] 굳이 엄밀히 따지자면 두 단어는 한자부터가 다르다. 북침/남침의 '침'은 侵이고, '똥침'의 '침'은 針인 데다 전자는 동사(정확히 말하자면 '-하다' 따위를 붙여서 용언으로 쓸 수 있는 경우. 물론 侵을 쓰는 단어가 모두 용언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다. 앞선 '외침(外侵)'의 경우 '외침을 당하다'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명사로 쓰이는 경우 역시 엄연히 있다.)로 쓰였고 후자는 명사 ('침을 놓다'와 같은 표현에서 유래한 단어로, '바늘'의 뜻이다. 참고로 이 표현의 침은 '鍼'으로, 針과 鍼은 이형동자다.)로 쓰였다.[17]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1950-2015." 『한국사학사학회』, 32권, 2015[18] 외부기원설은 전쟁 관련하여 한 개인이나 야욕이 전쟁의 핵심요인이라고 보기에, 전쟁에서 개인적 요인을 과대평가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반면 내부기원설은 전쟁에서 개인의 야욕을 배제하고 있기에 개인적 요인을 과소평가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러한 지적 속에서 나온 복합기원설의 경우에는 내부적으로 통설을 마련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내부기원설과 외부기원설은 기본적인 큰 토대가 있지만, 복합기원설은 그런 토대도 없고, 내부적으로 외부기원설 강조형과 내부기원설 강조형이 대립하는 상황이다. 제3의 시각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인물인 김일성과 박헌영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센세이션했지만, 기껏해야 괴뢰국의 수장이 전쟁 결정권을 쥐고 흔들었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큰 상황이다.[19] 제3의 시각인 이유는 전통주의적 방식대로 개인의 야욕을 전쟁의 핵심원인으로 삼았지만, 전쟁의 핵심인물로 김일성, 박헌영이라는 내부인원을 지목하여 수정주의적 입장대로 전쟁의 내부원인을 강조하기 때문이다.[20] Instead, the Soviet Union sought to protect its strategic and economic interests through the traditional Tsarist approach of maintaining a balance of power in Korea.[21] The North Korean attempt to reunify the country through a military campaign clearly represented a sharp departure from the basic Soviet policy toward Korea. The initiative for this departure came from Pyongyang, not Moscow.[22]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p. 36.[23] the factors stated above were not strong enough to overcome Stalin’s fear of directly confronting the United States. We know from the example of the Greek civil war, among others, that at this time Stalin was quite willing to allow a foreign communist party to lose its bid for power if he concluded that Soviet interests would be harmed by direct involvement in the conflict.[24]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p. 34.[25]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소련은 그 악명 높은 독소전쟁의 당사자였다. 소련에서만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스탈린이 아무리 잔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그 짓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26] 심지어 스탈린의 장남인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마저도 독소전쟁이 한창인 1943년에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 할 정도였다. 이 의견을 비판적으로 읽고 싶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1차 대전 참전자이고, 스탈린과는 달리 최전선에서 뛰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27] 직접적으로 전투력 측면에서 비교하지 않더라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미국이 입은 피해와 소련이 입은 피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국은 전체 인명 피해가 50만여 명이었던 데 비해 소련은 공식 집계만 2900만 명이었고 거기에 공업 시설까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경제까지 파탄 직전이었다는 것이어서 소련이 한참 불리한 것이 당연하다.[28] 재미있는 것은 웨더스비 주장을 비판한 사람이 커밍스다.[29] 이는 김일정 주도설을 주장하는 웨더스비도 인정하고 있다.[30] 당시 국사교과서인데, "6⋅25 남침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대한 민국 전역을 차지하려는 영토적 야욕을 가진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전쟁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21세기 이후 군대의 정훈교육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31] 정병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6.25전쟁 이전 한반도는 국지전의 연속이라고 한다.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32] 괜히 브루스 커밍스의 서적이 큰 이슈를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논의되지도 않았던 한국의 사회모순을 잘 분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2부는 망작이 되었지만[33] 옐친은 소련을 해체한 당사자이며 러시아 공산당과는 8월 쿠데타, 러시아 헌정위기를 거치며 원수지간이었다.[34] 이 시기엔 38선 부근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던 상태로, 함부로 무기를 쥐어줬다간 확전될 수도 있었고 소련 등 공산권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즉 평화를 해칠 수 있다는 이야기.[35] 그러나 이완범은 논문(1995)에서 준비부족론과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였다. 8월 11일 급작스럽게 지어졌다는 준비 부족론은 증언 당시 사용된 지도는 30도선과 40도선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30분만에 두 대령이 책임지고 업무를 추진한 것은 불가능 하며, 1944년 초부터 한반도의 군사점령은 논의되었고 1944년 12월 전략정책단장 런컨 준장이 일반명령 1호 초안을 작성하면서 정보부로부터 받은 자료와 지도들을 토대로 구상되어 온 것이며, 1945년 7월 4일 한반도 4분할안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45년 2월 OSS가 일찍히 작성한 38선을 인지할 수 있는 더 낮은 축척의 지도를 사용하였고 이쯤을 전후로 38도선이 안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며 정치적 분할선의 의미를 주장한다. 양 국가 모두 모험을 강행한다면 미,소 모두 독점이 가능한 한반도였지만 준주변부적인 전략적 위치로 세력분할적 사고에 따르면 반분하는 위치가 극단론자를 제외하면 가장 알맞았으며, 7월 25일 포츠담에서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의 질문에 전쟁부 작전국장 헐 중장은 38선을 가장 중요한 위치로 판단한다고 하였다. 또한 38선은 양국 점령 후에 바로 봉쇄되면서 단순히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할선이 아닌 실질적 세력선이 되었다.[36]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 되지도 않는 헛소리까지 지어내서 말했으니 미국은 당연히 의심할 것이다. 가령 해주에서 서울을 포격할 수 있는 화포 4문을 방열했다거나(...). 참고로 해주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구글지도를 기준으로 약 120km(...)이다. 뻥을 치려면 그럴듯하게 쳐야지. 그런데, 더 웃긴 게 송악산 전투 때 불발탄까지 회수하여 증거품으로 제출했음에도 육본에서 122mm 야포 보유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http://blog.daum.net/mybrokenwing/567[43]https://panzerbear.blogspot.com/2008/08/blog-post_19.html[37] 그리고 미국도 대대적인 군축으로 상태가 엉망이었던 건 덤. 한 예시로 전쟁 당시 10여개에 달하던 기갑사단을 1개 외에는 전부 해체시켰을 정도다.[38]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 정부를 지원했는데, 히틀러와 무솔리니로부터 대가 없이 막대한 지원을 받은 반대편의 프랑코와 달리 무상 지원이 아니라 공화 정부가 보유한 금을 대가로 무기를 판매했고 그마저 환율을 유리하게 책정해 공화 정부를 등쳐먹었다. 그리고 전세가 공화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때마침 공화 정부의 금도 떨어지자 바로 손절했다. 현물만 받으시는 강철의 대원수[39] 실제로도 수원, 낙동강 일대에서 전과를 냈으며, 청주에서는 18연대 소속 6파운더 1문이 무려 T-34를 3대나 잡았다.[40] 물론 소련에서는 조종사들에게 중국어 교육을 시키며 중국어로 통신하라고 명령하며 했지만, 문제는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생소한 중국어로 통신하는 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조종사들의 항의에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철회했다.[41] http://www.kimjongpil.com/post/939[42]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1950-2015." 『한국사학사학회』, 32권, 2015, pp.327-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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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구글지도의 거리와는 달리 당시 잘못된 정부라든가 행정구역 등의 차이인지 약 70km라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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