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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문(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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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2C2E><colcolor=#fff> 송성문
宋成文
파일:송성문(1931).jpg
구명(舊名) 송석문(宋錫文)
본관 여산 송씨[1]
혜전(惠田)
출생 1931년 12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서주동
(現 평안북도 정주시 서주동)
사망 2011년 9월 22일 (향년 79세)
서울특별시
학력 정주고급중학
신의주교원대학
동아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약력 마산고등학교 교사
서울고등학교 교사
성문출판사 대표

1. 개요2. 생애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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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출판인. '성문영어' 시리즈의 주저자.

2. 생애

1931년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서주동 출신이다.# 이북에서 그의 성명은 송석문(宋錫文)이었으나 자음동화 중 비음화 때문에 '송성문'이라고 불리자[2] 남한에 내려온 후 가호적(假號籍)을 만들며 아예 개명했다고 한다.

고교생 시절 북한의 영향으로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하였으며 정주중학을 3년 반 만에 마치고 정주고급중학에 1기로 입학해 우등 졸업했다. 그의 원래 목표는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였다. 그의 합격을 의심한 이가 없었다고 하나 결과는 탈락. 아버지가 천도교청우당원이라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혁명열사'의 후손들만 판치는 세계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3] 그 후 2년제 신의주교원대학에 들어가 교사로 일하던 중 6.25 전쟁을 맞는다.

그 해 11월 미군신의주에 진주하자, 그는 집으로 찾아온 미군 앞에서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읽어댔다고 한다.[4] 미군 병사는 그를 통역으로 데리고 평양으로 갔다. 그러나 평양에서 중공군의 역습에 당황한 미군은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갔다. 그는 평양에서 차를 얻어타고 구걸해가며 부산까지 내려가 부두에서 '체커' 일을 하며 먹고 산다.[5] 그 후 1952년에 입대해 국군 통역장교로 근무한다.

군 복무 중 영어 검정고시[6]를 합격하고, 이어 동아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야간과정[7]을 이수하고 중등 영어교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대위로 제대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1년간 임시교사로 근무한 후 마산고등학교 정교사로 근무하며 영어교사로 활동하며 고교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안상수 전 창원시장이다.

성문각 사장 이성우가 그의 명성을 듣고 마산까지 찾아와 당시 거금인 200만 원[8]을 계약금으로 주며 고등학교 영어 참고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문교부에서 전국 영어교사 중에서 2명을 뽑아 뉴질랜드로 연수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발탁되어 1965년에 뉴질랜드로 영어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뉴질랜드와 영국, 일본에서 자료들을 모아다가 귀국하여 종합영어를 집필, 1967년에 '정통 종합영어'를 출판했다. 이 책은 당시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69년 서울고등학교에 스카웃되어 학교를 옮기게 되었으나, 학원계의 열렬한 러브콜이 이어졌고 결국 1970년 서울고 교사를 그만두고 경복학원의 강사가 되며 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한 강의실에 1,200명을 두고 강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경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박안종[9] 강사에 따르면 당시 특히 경기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선생님 얼굴을 안 봐도 좋으니까 목소리만 듣겠다"며 당시 새벽에 종로 바닥을 완전히 휩쓸었다고 한다. 당시 새벽에 학생들이 몰린 이유는, 정부가 사교육을 억제하겠다며 1970년부터 야간자율학습을 사실상 강제화하면서 새벽반과 심야반이 성황이었기 때문이다.

1976년에는 학원 강의를 그만두고 자신의 이름을 딴 성문출판사를 설립하여 '정통종합영어'를 '성문종합영어'로 이름을 바꿔 출간했다. 이후 기초, 기본 단계를 위한 '성문기본영어', '성문기초영문법'을 완성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권의 영어 참고서를 발행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문법에 대한 설명은 아무래도 구식이고 오류도 꽤 있지만[10], 독해 지문의 수준은 높다. 특히 "성문 종합영어", "성문 영미 명문선" 이 2권은 좋은 독해 지문이 매우 많다. 본고사, 학력고사 세대 수험생들은 성문종합영어에 나온 지문들을 달달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가면 정확하고 격식있는 영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3년간암 발병으로 장기간 병고생활을 해오다가, 2011년 9월 22일에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기타

1960년대부터 고서적 전문가 전문(田文)에게 도움을 받아 평생을 고서와 고문서 수집에 열을 올려서, 자신이 성문영어로 벌어들인 인세의 대부분을 고서와 고문서 수집에 쏟아부었다. 덕분에 국보 4점, 보물 22점이 포함된 질과 양 모두 어마어마한 수집품을 자랑하였으며, 2003년에 이를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 # 문화재 수집 및 기증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집에 빈집털이가 들었을 때 도둑이 고서의 가치를 몰라서 무사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어 부문에서는 수학의 정석으로 이름을 날린 홍성대와 비슷한 급이지만[11], 홍성대에 비해서 저자의 인지도는 조금 밀리는 편이다.

4. 관련 문서



[1] #[2] 본 문서의 바탕이 된 인터뷰에서는 당사자의 착각인지, 기자의 오식인지 '구개음화'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비음화가 맞다.[3] 북한 정권의 극초기에는 서민들에게도 대학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지도층이 된 그들의 자녀가 대학에 갈 때가 되자 그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게 되었다. 그 결과 출신 성분이 나쁘면 아무리 성실하고 실력이 우수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현재 북한의 교육 시스템이 완성되었다.[4]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결국 팔자였던 것 같다"고 말 한 바 있다.[5] 화물이 선적되는 것을 감시하는 일.[6] 중등과정, 고등과정을 둘 다 합격하였다. 이는 당시 서울대 영문과 학부생도 쉽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난도가 높은 시험이었다고 한다.[7] 지지금은 유명세가 예전같지 않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 중 하나였다.[8] 당시 200만 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9] <알파 테크닉 난제수학>이라는 책으로 유명했다.[10] 그래도 개정판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11] 실제로 출판 시기도 1967년으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