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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 북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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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2년 9월 5일 주 유엔 북한대표부 3등 서기관 오남철이 미국인 여성을 성추행한 사건.2. 전개
1982년 당시 북한은 미국과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유엔에도 가입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WHO 회원국 자격으로 유엔에 옵저버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맨해튼 80가 이스트 40번지의 아파트 25층을 임대하여 북한대표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한시해 대사 등 26명의 외교관을[1] 뉴욕에 파견한 상태였다.1982년 9월 5일 일요일 오후 뉴욕 북쪽 24킬로미터 거리의 웨스트체스터 카운티(Westchester)의 이스트체스터(Eastchester)의 트윈 레이크 저수지에서 43세의 흑인 여성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당시 저수지에서는 6명의 주 유엔 북한대표부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뒤에서 이 여성을 잡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놀란 여성은 거세게 저항했고 가해자는 계속해서 쫓아왔고 도로로 나와 비상전화를 걸어 경관들을 불렀다. 이 광경은 마침 근처에서 승마를 하고 있던 3명의 여성들과 2명의 경찰관에게 목격되었다. 상황을 목격한 경관이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형사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피해자에게 저수지에 있던 6명의 북한 외교관들 중에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이때는 피해자가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이때 오남철은 체포되어 경찰차에 태워졌으나 외교관임을 주장하여 석방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타고 온 자동차 번호판을 바탕으로 이들의 신분이 주 유엔 북한 대표부 직원들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며칠 후 미국 국무부는 웨스트체스터 경찰서에 북한 대표부 직원 26명 전원의 프로필 사진을 제공하였고 이 사진을 바탕으로 경찰 측은 다시 청취에 나섰다. 이번에는 피해자가 3등 서기관 오남철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오남철이 그날 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곧 확인되었다. 이에 경찰은 현장에 있었던 2명의 경관과 목격자들에게도 범인 지목을 요청하였고 이들 모두 오남철이 범인이었다고 지목하였다. 이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경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오남철의 도주를 우려한 미국 경찰 측은 이를 공개하지 않다가 9월 27일에야 공표하고 오남철의 출국 금지령을 내렸다. 9월 28일에는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경찰은 유엔 법률사무소에 상황을 알리고 북한 대표부 측에 오남철의 출두를 명령하였다. 오남철이 미국 변호사를 선임하였기 때문에 이는 오남철이 법정에 출두하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9월 29일, 미국 국무부는 오남철의 외교 면책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북한 측은 유엔 측에 면책특권 적용 가능성을 물어보았으나 부정적인 답변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9월 30일에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출두를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북한 대표부 대사 한시해는 성명을 발표했고 오남철은 무죄라고 주장하며 국제법에 따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당국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에 유엔 대표부 미국 임시대사인 찰스 리첸스타인(Charles M. Lichenstein)은 오남철이 옵저버 직원이니만큼 부분적 특권만을 가질 뿐이며 오로지 외교 관련 업무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대표부 측은 "현장에는 갔지만 추행은 하지 않았다", "면책특권이 있으므로 미국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잡아뗐다. 이에 미국 수사관들은 오남철을 체포하기 위해 북한 대표부로 파견되었으나 대표부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은 국제법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대기했다. 북한의 비협조에 미국 측은 모스크바에서 신임 대표부 직원으로 임명되어 미국 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던 5명의 북한 외교관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복했지만 리첸스타인 임시대사는 이것이 보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식적으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은 월북 미군 조지프 와이트의 서한을 문제의 외교관들이 가지고 있다는 떡밥까지 뿌리면서 비자 발급을 받으려고 똥꼬쇼를 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월 22일, 웨스터체스터 카운티 대배심은 오남철을 1급 성추행 혐의로 기소하고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11월 24일 이 문제를 심사하기 위해 유엔 제6위원회에서 오남철에게 특권이 적용되는지의 여부가 다뤄졌다. 리비아[2], 시리아, 우간다, 베냉, 짐바브웨, 니카라과를 비롯한 친북 제3세계 국가들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열성적이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제6위원회는 오남철의 면책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무부는 북한 대표부 폐쇄를 시사했으며 북한 외교관 비자 발급은 이 문제가 처리되기 전까진 불가능하다고 밝혔지만 대표부 직원이 아닌 외교관들의 UNDP 참가는 허용하였다.
해를 넘겨 1983년 1월 한시해 대사는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열리는 비동맹회의 참석을 위해 재입국 비자 발급을 신청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하여 참석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국무부는 유엔 관련 회의 참석은 허용하여 한시해는 빈으로 출국하였고 빈에 들른 김에 뉴델리에 들러 비동맹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노재원 외무차관의 성명을 통해 한시해의 재입국을 허용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7월 미국은 오남철 은닉 혐의로 북한대표부 1등 서기관 추방을 유엔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오남철이 자수한다면 이를 집행하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결국 유엔 법률사무소가 중재안으로 오남철이 미국 법정에 출두하는 대신에 오남철을 추방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과 미국이 모두 수락하면서 7월 26일 오후 3시 오남철이 웨스트체스터 법정에 출두하였다. 변호사 및 북한대표부 차석대사인 천재홍과 함께 법정에 출두한 오남철은 혐의를 인정하는 대가로 1급 추행에서 3급 추행으로 형량을 경감받았다. 북한 측은 오남철이 무죄이며 미국으로부터 10개월 간 투쟁하여 승리한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 28일 다시 법정에 출두한 오남철은 자정까지 미국을 떠나 영구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고 밤 10시 프라하행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떠났다. 7월 29일, 오남철은 이 사건이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우기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건이 종결되면서 미국은 김완수 신임 북한대표부 수석대사를 비롯한 북한 외교관들의 비자 발급을 재개하였다.
3. 여담
- 당시 오남철을 변호한 미국 변호사는 미국 공화당 지지자 스탠리 펄크너(Stanly Faulkner)였다.
4. 참고문헌
- 1982년 8월 2일자 뉴욕타임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