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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의 도서관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40001,#222222><tablebgcolor=#e40001,#222222> | 인민대학습당 人民大學習堂 Grand People's Study Hall |
▲ 인민대학습당의 낮 풍경 | |
▲ 인민대학습당의 밤 풍경 | |
<colbgcolor=#e40001,#222222><colcolor=white> 설립 | 1945년 11월 5일 평양시립도서관 설립 |
준공 | 1982년 4월 1일 |
연혁 |
|
규모 | 건축면적 40,000㎡ 연건축면적 100,000㎡ 층수 12개층 |
주소 | 인민대학습당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
링크 | [접속불가] |
[clearfix]
1. 개요
북한 평양시 중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서관으로 북한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도서관이다.북한에서는 인민의 학습을 생각하는 김일성의 은혜의 상징이라고 선전하며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로 넣는다. 북한의 기념일에 조선인민군이 열병식을 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기에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북한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2. 역사
인민대학습당 터는 1946년 미군이 발행한 평양 지도를 보면 평양시 남산동에 있는 광성학교 자리로 되어 있다.[2]한편 기관으로서는 1945년 광복 직후에 평양시립도서관으로 개관[3]했고, 1948년에 북한 정권 출범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꿔 달면서 국가대표도서관으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에 건물을 해방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갔고 1973년에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했다가 1982년 현 건물로 이전하면서 인민대학습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인민대학습당 건설을 보도한 로동신문기사. 1979년 12월 착공해 1980년 10월 경에는 거의 공사가 끝난 상태였다. |
현 건물은 김일성의 지시로 1982년 지어졌으며, 총면적 10만 m²에 10층 규모로 원래 정부청사로 계획된 건물이었으나 김일성의 지시로 바꿨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이 도서관 확충과 독서문화 장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 국가지도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도서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데 크게 신경을 썼고, 6.25 전쟁 직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도서관을 체계적으로 복구, 건설하는데 신경 쓰며 상당한 재원을 투입하였다. 그 덕택에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어서 1980년대 초반까지도 북한 도서관이 남한 도서관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월했을 정도였다.
원래 1982년보다 훨씬 일찍 건설될 예정이었지만 학습당 부지에 김성애의 남동생인 김성갑이 자기 멋대로 사저를 짓는 바람에 건설이 늦어졌다. 김성갑이 이 위치에 사저를 지었음을 뒤늦게 알고 김일성이 격노하여 김성갑을 좌천시키자 김성애가 남동생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의 눈밖에 난 김성애의 일족은 후계구도에서 제외당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성애 가문 구성원들의 비리를 낱낱이 까발린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었다.[4]
3. 장서
도서관의 정확한 장서량은 확인하기 힘들다. '3천만 권' 운운하는 루머가 있으나 이는 북한의 선전 문구를 오독한 것이다.북한의 해외향 선전선동 웹사이트인 "우리민족강당"(김일성방송대학의 웹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전한다.
"인민대학습당은 그 규모와 건축술, 장비수준에 있어서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주체시대의 빛나는 기념비적창조물이다. 인민대학습당은 조선식건물로서 10개의 호동으로 구분되는데 크고작은 조선식지붕이 34개이고 방수가 600여칸이다. 3천만권의 장서능력을 가진 서고를 중심으로...(후략)"
출처아카이브
즉, 책을 3천만 권 소장했다는 말이 아니라 건물의 서고가 최대로 소장할 수 있는 책의 권수가 약 3천만 권이라는 뜻이다. 그 외 북한의 책 《조선건축사》 2권(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에서는 인민대학습당에 대해 정확한 장서능력이나 소장권수를 밝히지 않고 "수천만 권의 장서 능력을 가진..."으로 얼버무리렸다.출처아카이브
현재 인민대학습당 홈페이지에서는 그 소개에서 "보유하고 있는 출판물과 각종 자료의 총수는 2천6백만부"라고 밝히고 있다. 이 중 외국으로부터 기증받은 자료의 수 29만 8천여 부, 해외동포 (조총련 및 친북성향 재미한국계 미국인) 기증서적이 61만 7900부, 특허자료 (마이크로필름형태 포함) 303만 5500여 건, 그 외 전자자료 161만 2100건이 존재한다고 소개하였다.
북한의 정보 통제 정책상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는 책은 북한 서적밖에 없다.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인 만큼 남한 국립중앙도서관은 못 하더라도 소장한 책도 많고 고서들과 외국에서 수입해온 서적들도 다수 보유했지만, 열람은 전문가와 연구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다만 건립 초기에 신간열람실에서 외국 서적도 상당히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90년대 들어 사상 통제가 강화되면서 폐쇄. 외국 도서는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 도서가 들어오는 편이다.
4. 내부
러시아어를 공부중인 평양의대 학생 |
문답실. 은퇴한 학자들이 상주하거나 편지와 전화등으로 이용자들의 질문에 답한다고 한다. |
음악강의실 |
자료검색 컴퓨터(2016년 사진) |
5. 운영 시간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하며, 공휴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휴관일은 매달 2, 4주 목요일이라고 한다.강의도 진행되는데, 주말과 휴관일, 공휴일에는 진행되지 않는다.
6. 이용 자격
18세 이상의 내외국인이 이용할 수 있으며, 학습당독자로 등록해야 한다. 고급중학교 학생의 경우 인민대학습당 학생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7. 역대 총장
대수 | 이름 | 기간 |
1 | 남순홍 | 1982년 2월 ~ 1982년 8월 |
2 | 전주남 | 1982년 8월 ~ 1994년 8월 |
3 | 김재성 | 1994년 8월 ~ 1998년 9월 |
4 | 최희정 | 1998년 9월 ~ 2006년 8월 |
5 | 신오순 | 2006년 8월 ~ 2019년 3월 |
6 | 신광선 | 2019년 3월 ~ 현재 |
8. 인근 풍경
인민대학습당 주위 전경 |
참고로 인민대학습당 옆에 있으면서 김일성 광장 좌우에 있는 건물은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 남한으로 치면 세종로나 시청 앞 광장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이 모여 있는 격이다.
9. 여담
- 이 건물은 김정일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일성은 인민대학습당을 지을 부지를 미리 선정해 놓았는데, 어느 날 부지를 시찰하러 가 보니 처남 김성갑이 지어놓은 대저택이 눈에 띄었다. 자신이 아끼고 아끼던 부지에 김성갑이 지은 집이 보이자 화가 난 김일성은 김성갑을 불러내어 훈계했다. 그날 저녁 집에서 밥을 먹는데 아내 김성애가 "당신 처남이랑 가시어머니(장모)가 그런 집에 좀 살면 안 되냐" 하고 남동생을 두둔하며 역정을 부리고 밥상을 뒤엎었다. 국물을 뒤집어 쓴 김일성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는데, 때 마침 기회를 노리던 김정일이 권력투쟁 대상인 이복동생 김평일과 계모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보고했다.
이로 인해서 김정일은 확고히 후계자 자리에 오른 반면, 김성애 일가는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 후보로서 유력했던 김평일도 신임을 잃고 외교관 신분으로 동유럽 국가들을 전전하며 김정일이 죽을 때까지 북한으로 귀국하지 못하였다. 말이 외교관이지 사실상 유배생활이었다. 김정은 집권기인 2019년 말이 되어서야 북한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미 나이가 상당히 들었기 때문에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권력의 주변부를 맴돌 듯하다.
- 고려투어스나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 같이 외국인 대상 북한 관광사들이 항상 패키지 투어에 집어넣는 곳이다. 유튜브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기에 올라 김일성광장과 대동강 그리고 건너편 대동강구역 등을 보며 사진을 찍는 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다.
- 2016년 한 외국인 관광객이 이곳에서 북한 인트라넷을 해킹한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