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0:10:57

김일성 가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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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초와 설명3.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4. 결론5. 동명이인 독립유공자6. 참고 자료

1. 개요

오기섭이 한때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일제강점기 저명한 항일 투사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제기한 설. 1 2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 연설 이후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반공 통치가 강화된 60년대 말부터 반공 성향의 학자나 언론인 등에 의해 퍼지기 시작해 심지어 당시의 아동/청소년용 반공 교육서적이나 반공정신 함양매체(동화, 소설, 만화 등)에서 버젓히 통용될 정도로 한때 남한 사회에서 꽤 널리 통용되었으나 더 이상의 증언이나 자료가 없어서 현재는 폐기된 과거의 학설 이상의 진전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이 '가짜설'은 남한 우익진영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익에 의해 체계적으로 퍼뜨려진 것도 아닌 그가 평양에서 처음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북한 주민들과 남한의 조선공산당 그리고 우익 진영 등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것이 그 기원이다. 만일 이 설이 우익이 김일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박헌영여운형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가짜론을 만들 필요도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설의 악용은 어디까지나 '원래 있던 것'을 원용한 것이다.

2. 시초와 설명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백발노장이라는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김일성의 항일투쟁 소문이 퍼졌는데, 당시 한국 사람들은 '장군'이라고 하면 경험과 지식이 가득하고 노회한 중년 이상의 남자를 떠올렸다.[1]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일성 '장군'도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같은 이미지인 사람이라고[2] 믿은 것이다.[3]

그러나 1930년대 당시 항일 투쟁은 장기화되면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지속하던 노령의 인사들은 여러 이유로 세상을 떠났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협력을 얻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젊은 층들이 항일무장투쟁의 맥을 이어가는 참이었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거나, 아니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대규모로 참여해서 활동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 갑자기 '중국공산당 내에 조선인 간첩이 있다'라는 괴소문이 대거 유포되면서[4] 1932년 11월에 민생단 사건이 벌어졌다. 그 여파로 공산당 내 조선인 간부들이 대숙청되었을뿐더러, 조선인을 '일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중국공산당 만주 지역간부들이 조선인 숙청을 거의 3년 가까이 하자, 만주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조선인 간부들과 인텔리들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중년 이상 고령의 간부들은 싸그리 희생되었고, 중국과 합작해 활동하던 조선인 부대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가 조선인 숙청은 과오라고 규정하여 겨우 상황이 종결되었는데, 공산당은 당 내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살아남은 20~30대 젊은 층들을 매우 신속히 진급시켰다. 이로써 만주 공산당 내 조선인 세력 사이에서 젊은 층이 지도부로 등장하였는데, 당시 30대 초반인 김책, 최용건과 20대 후반인 김일성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로 조선 내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게다가 1930-40년대 만주의 항일투쟁은 상황이 매우 열악해서 노령의 인사들이 나이와 건강상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1930년대 일제가 만주를 침탈하고 만주국을 세운 이례로 거점 없이 떠돌아 다니며 노숙을 허다하게 해야만 했다. 만주의 겨울 혹한은 노령의 독립운동가가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1880-90년대생 군인들이 2차대전 시기에 고급지휘관으로 활동하고 1950~60년대까지는 넉넉히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80~90년대생 무장독립운동가들은 1930~40년대쯤에는 병사, 전사, 암살 등으로 허다하게 죽어나갔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광복 후 1950년대까지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음은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일성은 그해 10월 14일에 평양에서 처음으로 연설하였는데, 당시 평양시민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김일성 장군'과는 전혀 다른 33세 젊은 김일성을 접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김일성하면 백전노장의 나이 많은 사람을 기대했는데, 소련군이 갑자기 내세운 앳되기까지 한 진짜 김일성을 본 평양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당황하여 김일성이 가짜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조만식의 비서 출신 오영진이 1952년에 출판한 '하나의 증언'에서 매우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일성 장군이 등단하자 군중의 입은 그들 눈앞에 전개되는 의외의 사건에 한결같이 벌어지고 눈은 의심스러이 빛났다. 군중이 기대했던 백발이 성성했던 노장군 대신에 확실히 30대로밖에 안보이는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선다. 신장은 1미터 66~7가량, 중육(中肉)의 몸에 짙은 감색 양복이 좀 작아 맞고 얼굴은 볕에 그을러 검었고, 머리는 중국요리점간부급 '뽀이'처럼 버쩍 치켜 깎고 앞 머리털은 한치 정도, 흡사히도 '라이트'급의 권투선수를 방불케 한다. 가짜다! 넓은 장내에 모인 군중 사이에는 순식간에 불신과 실망과 불만과 분노의 감정이 전류처럼 전파되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뒤숭숭한 소음이 장내를 휩쓸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김일성을 보고 시민들이 가짜라고 생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김일성의 연설원고는 고려인들이 번역한 것으로 매우 조악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도 못했다. 한홍구 역시 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오히려 험한 만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발성성한 노인보다는 20대 청년이 유리한 것임은 자명함을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혹이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김일성이 가짜란 주장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흔히들 70년대부터 소문이 퍼졌다고 하지만,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40년대 후반 대북 전단이나 대북 선전에도 버젓히 나오던 이야기. 6.25 전쟁 중 제작된 삐라에도 가짜 김일성설을 차용한 삐라가 있다. 다만 김일성 가짜설이 정교하게 이론화됨은, 후술하듯이 유신정권 이후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1960년대 문교부(현 교육부) 공식 서적에는 '김일성이 반일활동을 약간 하긴 했지만 그 범위는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일성이 과연 이전부터 알려진 그 독립운동가 김일성인지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있었다고 한다. 일단 이름의 한자가 달랐다.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金一聖이라 알려졌는데, 북한의 김일성은 金日成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도 김일성(김성주)은 그 이전의 독립운동가인 '김일성'(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활동하던 김경천이 대표적)이 존재했고 김일성(김성주)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했다고 파악했다고 한다.[5]

다만 김일성이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김일성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일본 경찰의 첩보에 의존하였는데, 그 첩보는 프락치가 없는 이상 대부분 용의자 심문이나 조선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의존했다. 그래서 일본의 초기 자료는 한자가 다른 김일성이나 오타로 '김일선'까지 나왔고 그것이 김성주의 가명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후대의 연구자들로서는 김일성/김일선 등등이 동일인물인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다만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일본 경찰도 김일성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 이때의 자료를 보면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임이 확실히 파악된다.[6]

이러한 김일성 가짜설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사람은 재일교포 학자 허동찬(許東粲)이다. 허동찬은 일제의 심문조서 등에 나오는 한자 다른 김일성과 김일센 등에 따라서 김일성이라 불리는 사람이 적어도 두 명 정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1930년대 후반의 일제 첩보자료를 연구한 뒤에는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인정했다.[7]

가장 유명한 가짜설은 이명영(李命英) 교수[8]가 제시한, 김일성이 3명(혹은 5명 이상) 있다는 이론이다. 유명한 보천보 대전투를 이끈 사람은 1대 노인 김일성인데 전사했고[9] 소련에서 파견된 좀 젊은 2대 김일성이 1대 김일성의 이름을 이었고, 이 사람은 소련에 돌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사망, 1대와 2대의 이름과 업적을 김성주가 날로 먹은 뒤에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명영은 심지어 이런 1대, 2대를 제외하고 다른 김일성도 있었다고 해서 일명 '김일성 열전'을 쓰기도 했다. 이종석의 말대로 김일성 열전에 대한 연구는 곧 김일성의 업적을 빛내는 역설을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김일성(김성주)이 과거부터 있던 다른 사람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렸다고 해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이 김일성(김성주)이라는 것은 현재 거의 확실시된다. 당시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들이 자신과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가명을 사용하기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 가짜설의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는 김경천(金擎天) 장군의 '경천(擎天)'이란 이름 역시 지청천(池靑天), 신동천(申東天) 등과 함께 하늘 천(天) 자 돌림으로 지은 가명이었다.

김구나 이육사 등 웬만한 독립운동가들은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가명일 수밖에 없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 역시 '김산(金山)'은 가명이고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이었다.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록을 뒤져서 가명으로 진명을 알아내기가 일이다. 이름이 가명이란 이유로 인물 역시 가짜라는 것은 조악한 논리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초명이 '김성주'라는 것은 의외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한의 영화 조선의 별에서도 엄연히 엄친아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개명해서 무장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북한의 교과서에도 김일성의 어린 시절 이름이 김성주라는 서술이 나온다.

그리고 저우바오중을 비롯해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투쟁을 한 중국인 동료들이 존재했음이 밝혀졌음이 학계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사라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일성이 가짜라면 중국인 동료들이 존재함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

일단 반공적인 의미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지고 교육된 만큼 아직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하나, 학계에서는 폐기된 학설이다.[10] 성공회대 교수인 한홍구의 경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기도 했다.
“가짜 김일성 설은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쪽의 권력에 진입한 친일파들에 의해 제조되고 유포된 것이다. 가짜 김일성 설은 실상 학설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조잡하고 황당한 것이며, 이미 학문적으로 파탄이 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민간 차원에서는 이 설이 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이북의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 종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김일성이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가로채 자신의 명성을 높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가짜 김일성 설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바로 현재의 이북 정권이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한 영역으로서 뿐 아니라 이북의 전사로서 반드시 연구가 되어야 할 분야이다. 이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가 “생활도 생산도 학습도 모두 항일유격대식으로!”이다. 유격대 국가라 불리는 이북처럼 역사가 과거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 버리고, 어떤 조건 속에서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그의 활동이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할 때이다.”
한홍구, 「가짜 김일성설과 한국현대사」, 『민족발전연구』 6, 중앙대학교 민족통일연구소, 2001, 84쪽.

흔히 보천보 전투를 다들 물고 늘어지지만 김일성의 전과는 보천보 전투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일경에 대한 피해 자체는 보천보보다 훨씬 더 줘서 일제에서 선전 자료까지 배포해야 했던 훙치허 전투도 있다. 결정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살되거나 일본에 전향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다. 그리고 보천보 전투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그 전과가 크지 않더라도, 이미 이전의 주요 항일 투쟁 거점에 만주국이 자리잡고 항일 투쟁의 소식조차 뜸하던 때에 항일 무장 세력의 국내 진입이 이루어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아직도 만주에선 항일독립군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인 것이다. 더불어 김일성이 이 보천보 전투로 한반도 전역에서 큰 유명세를 얻었다는게 이후 현대사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11] 소군정이 김일성을 북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이유도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으면서도[12] 항일운동으로 조선인들에게 내세울만한 명성을 얻었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김일성 진짜설을 주장하면 상당히 위험했던 것도 사실, 종북주의자들의 저서가 아니더라도 김일성 진짜 독립운동가설이 적혀있으면 처벌을 받았는데 70~80년대 악명높은 금서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회고록에도 다음과 같이 엄연히 김일성은 진짜임이 적혀 있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그가 함남의 길주, 명천 등지의 남삼군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김일성은 완전한 '가짜'라는 대목이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의 반공전선 교육의 가운데 토막이 돼오고 있었다. 이것은 공화당 정권에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는 김일성의 그만한 경력도 묵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재직 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가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물론 군사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저자 자신은 반공주의자라는 걸 강조하지만서도.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놀랐던 부분.

북한 망명 정치인 임은[13]이 일본에서 출간한 북조선 왕조성립비사는 김일성 정권의 피의 숙청을 처절하게 고발하고 한국전쟁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걸 강조한 책임에도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하고 김일성 보천보 전투 주도설을 주장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듣고, 조사한 바-주로 관계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책을 썼는데, 책의 요지는 제목에 나오듯이 김일성 왕조를 무너뜨리자는 신념이라고 서술했다. 그는 북한 김일성의 경력이 대단히 부풀려졌다고 하나, 보천보의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맞다는 주장을 폈다. 대한민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황당한 거짓말도 있지만, 당시 일본에서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한국의 신문들은 여러 날에 걸쳐서 경쟁적으로 번역 연재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출간되어 현재 2가지 판본이 돌아다니고 있다.

즉 대부분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연구와 당시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항일유격전을 지휘한 것도 맞고, 보천보 전투를 주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외에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중 일부는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이 분명 존재한다. 심지어 김일성의 자서전과도 충돌하는 내용도 존재한다.

4. 결론

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일성의 독립운동 행적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는 북한의 선전을 빼고 봐도 분명히 과장된 감이 존재한다.

김일성 가짜설의 진위 문제는 사상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김일성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해방 후 그에 대한 행적과는 별개로 보는 것이 옳다. 어차피 독립운동가로써 휼륭한 업적을 세웠다해도 독재자로 타락한 사례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위낙에 흔해빠진 일이라 특이한 일도 아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해방 이후 그가 저지른 수많은 과오와 실책, 악행들까지 인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 둘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비판 받을 점은 비판 받아야 한다.

또한 김일성 가짜설은 예측하지 못한 후폭풍을 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80년대 지하 유인물과 해외 저작물로 김일성 가짜설이 가짜라는걸 알게된 대학생들은 극도의 불신에 빠져 그동안 받아왔던 반공교육 전체를 부정하게 되고, 이는 한 동안 주사파서울대를 제외한 모든 주요 대학 학생회를 장악할 정도로 크게 세를 떨치는데 기여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허위에 기초한 이론은 배제해야 된다는걸 알 수 있다.

다만 아직도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북한이나 김일성을 철저히 부정하려는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에서 비롯된 편파적인 정보 습득의 결과다.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 특수부대나 간첩이 개입했다는 허구적인 음모론을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전라도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심으로 인해 민주당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내세우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자체의 정당성 자체를 아예 철저히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계속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여담으로 만주 독립운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조선족 연구자 유순호(1959년생)가 쓴 <김일성 평전>[14]에 따르면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개명한 이유는 만주에 퍼진 김일성 신화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북한의 김일성이 전설 속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그 '가짜'라는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도 사실인 셈이니, 김일성 가짜설은 사실상 일단락된 셈이다. #

5. 동명이인 독립유공자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당시 비교적 흔한 이름이라 같은 이름의 독립유공자가 3명 존재한다.
  • 金一聲(1898 ~ 1938) : 1928년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동 조직이 해소되자,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에 가입하였다. 1931년 4월 김범이(金凡伊) 등과 함께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土建) 가나가와지부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어, 9월경 한인 노동자의 실업구제를 위해 평작천(平作川) 개수공사 쟁의를 주도하는 한편, 다마천(多摩川) 사리채취(砂利採取) 투쟁, 반전 전단 배포 등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가나가와현에서 상남무산자소비조합(湘南無産者消費組合)을 결성하고, 동년 8월 격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옥 후 1933년 전협 토건노조 지부원으로 활동하면서 5월경 상남무산자소비조합 이사로 선임되었다. 8월 초순 시즈오카[靜岡]현에 파견되어 시즈오카현 토건(土建)지부 결성 및 수야천(狩野川) 개수공사 노동쟁의를 일으키기 위해 활동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출옥 후 1938년경까지 가나가와현에서 활동하며 재차 체포되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옥하였으나, 동년 2월경 도쿄 하라마찌다[原町田]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金一成(1888 ~ 1926) : 함남 단천(端川) 사람이다.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기의하여 의병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군과 수십차례의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6년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활동 시기나 지역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함경도와 간도 지역에 퍼져 있었던 이른바 김일성 장군 신화의 시초일 가능성이 높다.
  • 金逸成(1901 ~ 1952) :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웅동면 소사리(熊東面 所沙里)에 살고 있으면서 마천리(馬川里)의 주기용(朱基溶)·배종인(裵鍾仁) 등과 주동하여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거사준비에 힘썼다. 이들은 1919년 4월 3일을 의거일로 약정하고 웅동면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서 봉기하여 읍에 이르러 웅천리(熊川里)의 시위행렬과 합류하기로 계획하였다. 예정된 4월 3일 의거 장소인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오전 11시에는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주동인물들은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한 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곧이어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웅천리로 향하여 물밀 듯이 행진해 갔고 연도 주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니, 시위군중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웅천의 합류계획은 연락도중 사전에 일헌병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어서 그는 주동인물 32명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노력하셨으나 이름이 하필 어느 불한당과 같아 추모받지 못하는 분들이다.

6. 참고 자료



[1] 과거 구한말 시절 교육받은 위인전의 영향이 컸다.[2] 을지문덕은 수나라와의 전쟁 이외의 기록이 남은 게 없어서 나이를 전혀 추정해볼 수 없지만, 강감찬은 귀주대첩 때 일흔이 넘었다.[3] 이 점은 일본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가 지은 <북한 현대사>에도 언급되어 있다[4] 이 소문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일제가 퍼트렸다고 추정한다.[5] 이 설은 해외까지 알려졌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동아총통특무대》에서는 소련NKVD(내무인민위원회)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명을 받고 진짜 김일성을 처형하고 김성주를 다음 김일성으로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6] 중국과 일본은 한국인 인명을 한자로 적다보니 이런 오기가 지금도 현대에도 터진다. 곧바로 한자 표기를 알 수 있으면 괜찮은데 소리로만 이름을 듣고 기록하려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리설주가 등장한 직후 중국에서 '리설주'란 이름의 정확한 한자를 몰라 임시방편으로 여러 표기를 동원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나마 일본은 불완전하나마 가나 표기라도 있지만 중국은 정말 답이 없다. 사실 가나 표기도 완전하지는 않다. 김정은 등장한 초기에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았기에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많은 부분을 의지했는데, 가나 및 일본어 발음 문제로 '김정은'이 아닌 '김정운'으로 오해된 사례도 있다. 일본어로 운이나 은이나 둘 다 “ウン”이기 때문. 그렇기에 순우리말 이름인 사람들 중에서 일, 중, 대만과 교류가 많은 이들은 일부러 한자 표기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7]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30년대 자료를 고의로 무시한다.[8] 전 성균관대 정치학교수. 그의 아들 역시 모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데, 가끔 수업 중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카더라.[9] 일본군의 특성인 전과 부풀리기의 일환으로 윌리엄 홀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모두 몇 번씩 전사한 경험이 있다. 김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10] 다만 앞서 말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에도 월간조선을 통해서 끝없이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했다.[11]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 리상조는 보천보 전투 이후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찾았으나 김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상조는 오히려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한 인물이다. 리상조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하며, 그를 만나지 못한 이유를 '진지를 사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기사(1989년 경향신문)[12] 김일성은 해방 당시 소련군 대위였다.[13]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이 사람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허웅배가 리상조와 함께 쓴 필명이다. 임은이란 이름은 필명으로, 허웅배가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리에서 필명을 따왔다고 언급하였다. 허웅배는 비록 임은리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선대 본거지인 이곳을 그리워하며 필명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장군의 손자로. 모스크바 유학중 망명을 결심해 친구 셋이서 각자 이름을 이진, 한진, 허진으로 개명하고 함께 망명했다.[14] 8~90대였던 중국의 항일 군인들과 그 가족들 등 관려자 100여 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등 꼼꼼히 자료를 수집했기에 자료 수집부터 집필까지 2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북한의 출판 방해와 한국의 출판사 100여 곳의 출판 거부로 2016년 자비 출판하는 지경까지 갔고, 약 4년 뒤인 2020년에야 총 3부작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