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0:18:03

대한제국군 해산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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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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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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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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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최익현 · 신돌석 · 임병찬 · 이인영 · 허위 · 이강년 · 홍범도) · 13도 창의군 · 헤이그 특사 (이상설 · 이준· 이위종)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 · 오적 암살단 (나철) · 황제 대리 의식 집행 거부 & 관료 암살 시도 (남정철 · 박영효 · 이도재)*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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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1. 개요2. 배경3. 해체 준비4. 해산식과 저항
4.1. 남대문 전투4.2. 전국의 진위대 봉기사건
5. 결과6. 외부 링크7. 둘러보기

1. 개요

대한제국군 해산(大韓帝國軍解散)은 1907년 [1] 8월 1일부터 9월 3일까지, 일본 제국의 강요를 받은 순종의 황명으로 대한제국군 병력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사건이다.

2. 배경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2월 9일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대한제국군은 러시아 제국 교관단의 교육을 기반으로 편성된 부대였고, 러일전쟁 때 들어온 일본군에 굉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군 사병들은 일본군 장교에게 경례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사병들도 한국군 장교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양군 장교들끼리도 서로 무시했다. 일본 측은 이 문제를 괜히 건드렸다가 더 큰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을 감안하여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 후 군축을 요구하여 1905년 4월 16일에 3,000여명의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5,000여명의 시위대를 2,500여명의 혼성시위여단으로 감축시켰다. 지방의 진위대의 병력도 크게 감축시켜 1901년 이후 6개 연대이자 18개 대대 18,000명의 병력이었던 진위대는 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황주·평양·북청의 8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편제는 과거 1개 대대가 5개 중대였던 것을 4개 중대로 개편시켰으며, 1개 중대 병력을 장교 이하 256명으로 줄여서 8개 대대를 모두 합쳐도 2,365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1907년 4월에 대한제국군의 2번째 군축을 시행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하는 6개의 칙령이 반포되었고 시위 보병 연대는 다시 3개 대대와 그 휘하 4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7월 19일에 일본이 강제로 퇴위시키자 이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였다. 7월 20일에는 시위혼성여단 소속1연대 3대대 소속 병사 100여 명이 동조하여 종로의 병영을 뛰쳐나와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관들을 살상한다. 대한제국의 중앙군인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을 포함한 상당수 장교단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퇴위를 막으려 시도하다 기밀이 새어 봉기를 포기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대한제국군의 항일봉기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일본은 준비해 온 대한제국군 해산을 결행한다.

순종 즉위 후 7월 24일 체결한 정미 7조약의 시행에 관한 비밀조치서 통해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兵務) 분야를 통감부일본군에 넘기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3. 해체 준비

앞서 일본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일임받기 전에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위한 비밀리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대한제국군화포, 기관총 등의 중화기를 보관하던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고 600만발의 탄약과 무기류의 관리를 일본군 일임하에 두도록 했으며, 대한제국군 사병들이 반발하여 봉기할 것을 대비하여 대한제국군 일원에게 금족령(禁足令)를 발령하였다. 또한 이미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병들에게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 보급하였다. 마침내 1907년 7월 31일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발령과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다음날인 8월 1일 시위대의 해산을 시작으로 8월 3일부터 9월 3일에는 진위대 해산까지 일부 병력을 제외한 전 대한제국군을 해체하기로 하고 시위대의 각 대대장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알렸다. 예하의 각 중대장들에게만 비밀리에 통보하고, "사병들에게는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포함하였다.

시위대가 먼저 해체 대상이 된 것은 9천 명 남짓한 대한제국군 중 절반 이상이 시위대일 정도로 주력이었고, 서울이라는 한 곳에 몰려 있었으므로 조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반발이 거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4. 해산식과 저항

사병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도수체조 연습을 할 것이니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시위대 전 병력에게 내려갔다. 그러나 다수 장병이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므로, 오후 4시가 되도록 절반 가량의 인원밖에 모이지 않았다. 이날 해산 군인 대상은 3,441명이었는데, 훈련원에 모인 수는 1,812명으로 52.7%의 군인만이 모인 것이었다. 더구나 남대문 전투로 인한 총성까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일본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수 인원만으로 해산식을 거행한다.
“짐은 생각건대, 나랏일이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크게 절약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일에 쓰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라고 본다. 가만히 생각건대, 현재 우리의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이루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따라서 짐은 이제부터 군제(軍制)의 혁신을 꾀하여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후일에 징병법(徵兵法)을 반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갖추고자 하는 바이다. 짐은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 시위(侍衛)에 필요한 자들을 뽑고 그 외의 군대는 일시 해산하고자 한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들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특별히 금일봉을 하사하니, 너희들 장교, 하사, 군졸 들은 짐의 뜻을 잘 헤아려 각기 자기의 생업에 나아감으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들을 뽑고 그 외의 군대는 일시 해산한다는 조령[2]
순종의 군대 해산 칙서(勅書) 및 "대한제국의 국방 및 병무 분야를 통감부일본군에 일임한다"는 공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고, 일본군이 감시하는 가운데 대한제국 사병 및 간부들의 계급장이 제거되고 소지 중인 도검류를 반납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은사금으로 나온 지폐를 찢어버리고 통곡하는 장병들도 많았다.

4.1. 남대문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남대문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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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국의 진위대 봉기사건

1907년 8월 일본의 압박으로 시위대가 해산되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진위대도 차례대로 해산되기 시작되었다. 이에 반발한 전국 각 지방에 주둔한 진위대의 군인들은 의병이 되어 각지에서 적극 대항하여 의병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진위대에서의 봉기사건은, 바로 1907년 8월 5일에 민긍호와 김덕제가 이끈 원주 진위대의 봉기와 같은 해 8월 9일에 일어난 수원 진위대와 강화 분견소의 봉기 등이 알려져 있다.

5. 결과

8월 1일 남대문 전투 이후 살아남았거나 해산식에서 뛰쳐나온 대한제국군의 의병 합류로, 장비와 전투능력은 한층 강화되어 정미의병이 발발한다.

당시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8,000여 명 정도였는데, 이들 중 3,000여 명이 13도 창의군에 가담하여 1907년 11월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하자, 이를 막기 위해 통감부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지 않도록 헌병보조원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8월 3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해산된 대한제국군 257명이 순검과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된다.#

또한, 당시 해산을 면하고 황실 경호부대로 존치가 허용된 시위 2연대 2대대는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채 1907년 8월 이후 황궁 의장(儀裝)과 수비를 임무로 하는 근위 보병대 1개 대대로 644명이 편성되었다. 1907년 12월에는 92명의 근위 기병대가 편성되었다. 1909년 7월에는 군부가 폐지되면서 근위 보병대와 근위 기병대는 축소되었다가 경술국치 이후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가 되었고 이후 조선기병대는 1913년에, 조선보병대는 1931년에 해체되었다. 1931년 해체 당시 약 202명의 인원이 남았고 이들은 일본군 헌병보조원과 순사보조원이 되었다.

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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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사건(1919)I P 일본군 위안부(1940년대)I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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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무 11년~융희 원년[2] '군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국방 개혁을 하면서 잠깐 부대를 해산할 뿐'이라는 식으로 대외적 명분을 꾸며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대 해산의 배후인 일본 제국의 기만적 침략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