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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문환 | 2대 조천성 | 3대 정병주 | 4대 정호용 | 5대 박희도 | |
6대 최웅 | 7대 육완식 | 8대 민병돈 | 9대 이문석 | 10대 서완수 | |
11대 김형선 | 12대 장창규 | 13대 정영무 | 14대 오남영 | 15대 김희중 | |
16대 류해근 | 17대 김윤석 | 18대 백군기 | 19대 김진훈 | 20대 김상기 | |
21대 최용림 | 22대 신현돈 | 23대 최익봉 | 24대 장준규 | 25대 전인범 | |
26대 장경석 | 27대 조종설 | 28대 남영신 | 29대 김정수 | 30대 소영민 | |
31대 손식 | 32대 곽종근 | ||||
※ 초대~4대 : 소장 / 5대~현재 : 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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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000><colcolor=#ffffff> 출생 | 1958년 9월 6일 ([age(1958-09-06)]세) |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서울위생병원 | |||
본관 | 정선 전씨 | ||
재임기간 | 제25대 육군특수전사령관 | ||
2013년 10월 31일 ~ 2015년 4월 14일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1000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전주화, 어머니 홍숙자 | |
배우자 | 심화진 | ||
자녀 | 장남 전민규, 차남 전민우 | ||
학력 | 리라국민학교 (5회 / 졸업) 대경중학교 (16회 / 졸업) 경기고등학교 (73회 / 졸업) 육군사관학교 (37기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1]) 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박사[2]) | ||
종교 | 개신교 |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81년 ~ 2016년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37기)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 ||
주요 보직 | 육군특수전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제27보병사단장 합동참모본부 전작권전환추진단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차장 합동참모본부 공동작계추진단장 국방부 대미정책과장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 ||
병과 | 보병 | }}}}}}}}} |
1. 개요2. 주요 직위3. 생애
3.1. 가족관계3.2. 학창 시절3.3.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3.4. 위관급 장교 시절3.5. 영관급 장교 시절3.6. 장군 시절: (1) 초기3.7. 장군 시절: (2) 육군특수전사령관3.8. 장군 시절: (3) 육군특수전사령관 이후3.9. 전역3.10.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안보자문 합류/인사검증
4. 평가5. 기타6. 둘러보기3.10.1. 더불어민주당의 안보자문위원으로 발탁3.10.2. 전인범 돌발발언 “전두환, 5·18 발포 지시했다 생각 안 해”3.10.3. 전인범 승진파티 성신여대 조교 서빙사건/심화진 교비 횡령사건
3.11. 근황[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서울위생병원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서 성장했다. 의과학 전공의인 아버지는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기 몇 달 전이었고, 역시 미국 유학 중이었던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와서 장충동 시댁에 살고 있었다. 리라초등학교, 대경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1981년 육사 37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신원식, 양종수, 박찬주, 김영식, 이재수, 엄기학, 조보근, 박지만, 고명현, 이상욱 등이 있다.
어린 시절 미국에 체류하며 습득한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렸다.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총 복무 기간은 1981년 4월 3일~2016년 7월 31일(전역식 7월 28일)로 35년 4개월이다. 그가 현역 시절 받은 훈장은 도합 11개로, 창군 초기 참전 군인을 제외하고 현역 중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주요 직위
- 소위 1981년 임관
- 중위 1982년 진급
- 대위 1984년 진급
- 제30보병사단 제90보병연대 2대대 7중대장 (1984)
- 제30보병사단 제90보병연대 2대대 10중대장 (1986)
- 제30보병사단 작전처 작전장교 (1987)
- 한미연합군사령부 기획참모부 우발계획장교 (1988)
- 소령 1988년 진급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전속부관 (1988)
- 육군특수전사령부 작전처 연합작전계획장교 (1990)
- 육군특수전사령부 작전처 작전장교 (1991)
- 육군본부 비서실 정책과 정책장교 (1992)
- 육군본부 비서실 정책과 군사외교협력장교 (1993)
- 중령 1995년 진급
- 제22보병사단 제55보병연대 3대대장 (1995)
- 제22보병사단 인사참모 (1997)
- 제22보병사단 작전참모 (1998)
-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UFL)연습장교 (1999)
- 대령 2001년 진급
-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연습처 한미연합전시증원(RSOI)연습장교 (2001)
-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2003)
-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민군작전처 선거지원과장 (2004)
- 국방부 국방정책실 국제협력관실 대미정책과장 (2005)
- 준장 2006년 11월 1차 진급
- 제1보병사단 작전부사단장 겸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2006)
-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 작전기획부 공동작계추진단장 (2007)
-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 전략기획부 차장 (2008)
-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 전작권전환추진단장 (2008.11~2009.11)
- 소장 2009년 11월 1차 진급
- 제27보병사단장 (2009.11~2011.11)
-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차장 (2011.11~2013.04)
-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겸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2013.04~2013.10)
- 중장 2013년 10월 3차 진급
- 전역 2016년 7월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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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국군방송 국방TV 대담 출연 영상 |
3.1. 가족관계
할아버지 전항섭은 유한양행 사장이고 아버지 전주화는 한의사이다.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역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제13대 대통령 선거)였던 홍숙자 박사이다. 국방일보 기사 고모는 전혜성 예일 대학교 교수, 그 장남인 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를 지낸 하워드 고는 내종형(內從兄)이 된다. 이처럼 본인의 집안 배경은 상류층인데도 불구하고 사단장 및 상급 지휘관 시절 병영생활 복지에 힘을 썼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그의 부인 심화진은 남편보다 1년 9개월 먼저 태어났다. 성신여학교 설립자 이숙종이 이모할머니고 부친은 성신학원 이사장 심용현이다. 2007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되어 제8-10대 총장을 역임했다. 부인과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전민규와 차남 전민우 두 아들 모두 육군 현역병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전민규는 UN평화유지군인 레바논 파병부대(동명부대)에서 근무했다.
3.2. 학창 시절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어머니 홍숙자 박사와 함께 살았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서 5년 정도 살았는데 외톨이 신세였다고 한다.[3] 이때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TV 시리즈 컴뱃(Combat!)을 보며 샌더스 중사가 기관총을 들고 전투하는 멋진 모습에 푹 빠져서 처음으로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12살 때 한국에 돌아와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 외삼촌과 국군의 날 행진을 보았는데,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 본인은 장교가 있는지 부사관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때부터 막연히 육사를 가야 되겠다 생각을 해서 육사 행을 결정하였다.
학창 시절에는 워낙 운동도 못하고 겁도 많아서 체육에서는 미, 양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홍 박사는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한국에서 AFKN을 시청하게 하고 저녁식사 때는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전인범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 등을 하나하나 읽었다. 미래 미국통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을 영어 실력은 이때부터 완성된 셈이다.
3.3.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육군사관학교 37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의 기수로 유명하다. 자신의 아들을 박지만과 학연을 맺게 하여 아들 덕에 뭔가 얻어 먹어보려는 장성급 장교들이 넘쳐서, 통상 기수당 1, 2명에 그쳤던 고위 장성의 아들이 37기에만 10명이 넘었다.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지만과 친한 육사 37기가 약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육사 37기로 이재수 국군기무사령관,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 등과 함께 전인범이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하지만 박지만은 선배들이 입교 첫 날에 "니들 중에서 육사가기 싫은데 온 사람은 당장 손들어!"할 때 유일하게 손들었을 정도로 억지로 들어왔었고, 결국 사관생도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육군 방공 대위로 임관 5년만에 전역한다. 이후 이재수를 뺀 다른 육사 동기들과 거의 연락도 안 하고 지냈기 때문에 육사 37기가 박지만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잘 나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육사는 동기생 20명씩으로 중대를 구성하는데 박지만은 자신이 소속되었던 6중대 사람들의 모임에는 매년 참석한다고 한다. 전인범은 6중대원이 아니었다.
통상 한 기수에 중장은 6~7명 정도 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32기 7명 / 33기 6명 / 34기 7명 / 35기 8명 / 36기 6명) 8명이 중장으로 진급한 37기가 승진이 조금 잘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훈장을 받았는데도 그대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전인범은 다른 장성들에 비해(심지어는 대장까지 포함해도) 훈장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군 복무 내내 한 개 받기도 힘든 훈장을 자그마치 11개씩이나 받았고, 그 중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 공로훈장인 Legion of Merit 3개가 들어있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손에 꼽는 수훈이다. 다시 말하지만 군 복무기간 내내 한 번 받기조차 힘든 훈장을 저렇게 많이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한 개만 받아도 승진이 빨라야 정상인 훈장을 전인범은 11개나 받았다.
전인범의 어머니인 홍숙자 박사는 외교관이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다. 홍 박사는 전인범에게 '지만이 잘 챙겨줘라'라고 했지만 박지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아들로 육군사관학교장인 정승화 육군 중장이 직접 챙겨주는 특별한 생도이며, 박지만과 친해져 보려고 입학한 장성 아들이 10명에 달하는 상태라 다가갈 수 없는 상태였다. 전인범 스스로도 박지만 생도 주변에는 워낙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지만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데, 육사 4학년이던 1980년 7월 8일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국내에서 치렀다. 이때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박지만 덕분에 육사의 키 크고 잘생긴 생도들을 차출해서 미스 유니버스 각국 대표들의 파트너로 만찬회를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위의 일화처럼 박지만에 대한 수없이 쏟아지는 군부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선배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연대책임으로 육사 37기를 마구 굴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정신이 없어 37기들은 후배들을 거의 통제하지 못했는데, 이때 대표적으로 나서서 후배들을 교육한 사람이 전인범이다. 그 당시 별명이 '잔인범'(殘仁犯)이라고 38기 이하 후배들은 기억한다.
'잔인범'이 탄생한데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1학년 시절 하도 심하게 기합을 주던 선배가 있었다고 한다. 전인범은 어느날 우연히 그와 함께 기합을 받았는데 그 선배는 원산폭격을 5분도 못 견뎠다. 알고보니 그 선배는 귀여움만 받았지 기합을 안 받아 봤다고 한다. 이때 전인범 생도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불합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여담으로, 당시 육사 37기 중 입학 성적이 뒤에서 두번째였다고 한다(368명 중 367등). 그래서 4년제 육사 첫기수인 11기 전두환 이래로 꼴찌가 장성이 된다는 육사의 법칙은 전인범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전두환도 육사 11기 입학 당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교했으나 가장 먼저 준장을 담. 반면 당시 졸업 성적 10등까지는 육사 교수 요원이 됨). 정확히는 한국 육사의 원형인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 부터 있던 유서 깊은 농담이다. 공부 못하는 생도에게 훈육관이 "이 새끼 이거 이러다 별 달겠어"하는 식.
3.4. 위관급 장교 시절
중위 시절 당시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 계급 최초로 당시 제1군단의 군단장이던 이기백 중장의 전속부관(참모장교)에 보임되었는데, 뒤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혀지길, 당시 행정착오로 인해서 중위로 진급한 지 1달밖에 안 된 자신을 이기백 장군이 '고참인 줄 알고' 뽑았다고 밝혔다. 그래도 성실히 일을 잘 했는지 이기백 중장은 그를 신뢰했고, 이후 육군참모차장, 대장 진급 후 제2야전군사령관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3년 동안 늘 전속부관으로 데리고 다녔다. 금은 합참의장의 부관을 소령 계급이 맡고 있기 때문에 당시 중위였던 전인범이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속부관' 문서에도 나오지만, 계급별로 부관으로 뽑히는 위치가 다르다.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포함해 6개국 순방에 나설 때 당시 합참의장이던 이기백 대장이 수행했고, 따라서 전속부관인 전인범 중위도 동행했다. 그리고 다음 날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당시 현장에 있다가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긴급 후송해 생명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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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나러 갑니다 499화(2021년 7월 11일 방영) 요약 영상 |
위 영상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전속부관이던 전인범 중위는 상관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필름과 배터리를 많이 준비했는데, 당시 양곤의 날씨로 인해 배터리가 방전되어 교체하러 잠시 주차장에 들렸다가 돌아본 순간 폭발이 난 것이다. 회고에 따르면 굉음 후에 화약 냄새가 나서 폭발인 줄 알았고 추가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발이 안 떨어졌지만,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들어가서 직속상관을 구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입고 있던 정복을 벗어서 현장에 있던 넉가래를 이용해 임시 들것을 만들고 주변에 있던 한국인 차를 냅다 잡아타고 피를 철철 흘리는 이기백 장군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시설이 낙후된 데다가 테러 당일이 일요일이어서 당직근무자밖에 없어 응급실은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장군을 침대에 눕힐 수 있었고 전인범 중위가 영어로 의료진에게 테러 사실과 합참의장의 상태를 의사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기백 장군은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첫 마디가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였다고 한다. 전인범은 이를 통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상관과 부하를 챙기고 위하는 이가 진짜 군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수라장인 상황 속에서 직속상관이던 이기백 장군을 구한 공로를 중위로서는 받기 어려운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2013. 10. 9. 전인범 소장 전화 인터뷰
그리고 그는 당시 두부(頭部)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는데, 당시 사건을 경험삼아 후에 제27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2009.11.~2011.11.) "전시 혹은 훈련 중에 두부에 상처가 생기면 두발이 짧아야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라면서 사단 全 장병에게 마치 모히칸 스타일 같은 짧은 헤어 스타일을 지시해 전 간부가 주 1회 이발을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이 당시 장병들의 머리를 부대 이름을 따서 '이기자 컷'이라고 불렸는데, 옆·뒷머리를 싹 밀고 앞머리가 6㎜인 것이 표준이었다. 여담으로 여기에 감명받아 똑같이 따라한 휘하 부하가 있었는데 바로 최초의 비육군사관학교(학군사관) 출신 육군참모총장인 남영신 대장으로 제3보병사단장 시절 일명 '백골컷'이라는 헤어 스타일을 그대로 시행했다.
이후 중대장 시절에는 우수 전투중대장에게만 주는 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중대장을 모두 마친 이후 참모 보직으로 제30보병사단 작전처 작전장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어머니 홍숙자 박사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3.5. 영관급 장교 시절
소령 시절엔 육군대학을 마친 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의 전속부관, 육군특수전사령부 작전처 연합작전계획장교 및 작전장교, 육군참모총장 비서실 정책과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를 지냈다. |
제22보병사단 제55보병연대 제3대대장을 마치고 동사단에서 인사참모와 작전참모를 역임했으며, 이후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연습처에서 근무한 바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7월 11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전인범 대령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2003년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의 연대장에 이어 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했을 당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하여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때 국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승인받은 투표용지를 중국 등으로부터 수송기로 받아 이라크 전역의 5,800개 투표소에 분배하고 직원들 봉급을 비롯해 비용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서울신문 기사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
2005년에는 국방부 국제협력관실 대미(對美)정책과장을 역임했는데, 이 직위는 국방부의 대미정책과 현안을 담당하는 주요 요직으로 한미동맹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군내 최고의 미국통 대령이 맡는 자리이며 육군사관학교 44기 김현종 중장, 45기 허태근 준장, 48기 김성민 중장, 50기 최병옥 소장, 51기 곽태신 준장 등이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전략통으로 꼽히는 군인들 대부분이 졸업 석차가 높은 엘리트여서 이 직위 역임자 중 육사 수석이 유의미하게 많다. 김현종, 김성민, 곽태신이 육사 수석졸업자이다.
3.6. 장군 시절: (1) 초기
2007년 7월 1일 대한민국 육군의 준장으로 진급 후 당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김관진 육군 대장과 함께 |
2006년 준장 진급자 선발 후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공동작계추진단장, 전략기획부 차장, 전작권전환추진단장 등 전략분야 직위를 거쳤다.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적극적인 인질 구출작전으로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합뉴스 기사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구출된 인질들은 기자회견장에서 "전인범 단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전인범 군사협조단장은 아프가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파견되어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 육군대학원 유학시절 가깝게 지냈던 독일군, 미군의 지휘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ISAF는 전인범 장군이 요청하는 모든 정보를 넘겨주고 지휘통제실도 자유롭게 출입하게 해주었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육군특수전사령부와 국가정보원 전술요원들을 침투시킬 헬기까지 차출해서 대기시켜줬다고 한다. 이때 ISAF 지휘관들이 너무 많은 자료를 스스럼없이 공유해 전인범 장군이 '이걸 나에게 줘도 되냐'고 오히려 물어볼 정도였으며 정보 공유 문제로 나중에 징계를 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전인범이 괜히 미국통이 아닌 것이다.
2009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의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사단 예하 모든 부대와 일선 장병들이 전투적 사고와 호전적 공세 기질을 갖춘 최정예 전투형 부대가 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 당장 싸울 수 있는 거점 전비태세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제27보병사단 장병들은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를 참군인으로 평가했다. #
위에서 언급된 이기자 컷도 이 시절 존재하였다. 이기자 컷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은 아니었지만 '이기자 컷'이라는 단어가 이기자부대 전역자들에 의해 인터넷상으로 워낙 유명해져서 이 명칭이 마치 공식 명칭처럼 되었다. 리그베다위키 시절에 작성된 이 문서의 초창기 버전은 이기자 부대 사단장 시절의 전인범을 다루면서 시작되었고, 이때의 이기자 컷으로 전인범 자체가 유명해졌으며 당시 수많은 미담과 소탈한 면모를 과시하였다. 인터넷에 이기자부대 전인범이라고 치면 많은 미담들이 쏟아진다. 그가 사단장을 이임한 뒤 후임은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다소 완화되었으나 육군특수전사령관 시절 직속 부하였던 남영신 당시 제7공수특전여단장이 이후 소장으로 진급해 김운용 후임으로 제3보병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전설의 백골 컷을 그대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제27보병사단장 시절 제설작전에 직접 넉가래를 들고 진두지휘하는 무시무시한 짤방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겪어본 블로거들의 말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평가다. |
게다가 제27보병사단장 재직 중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발굴해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차성도 중위는 1970년 제27보병사단의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부하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를 당시에는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덮어 버려서 이후로는 소수를 제외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재구상의 기원인 강재구 대위 역시 부하가 놓친 수류탄을 덮쳐 폭사하였지만, 당시 대대장이 박경석이고, 사단장 역시 참군인 채명신 소장이었다. 그리고 강재구 사건은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는 박경석 대대장의 주장이 채명신 사단장에게 받아들여져 채명신 사단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재구상 재정에, 아예 부대 이름을 재구대대로 개명시켰다. 요약하면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숨겨야할 사고가 되는지, 국민적 영웅이 되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게다가 전인범은 중대장 시절 재구상을 받은 사람이였고, 차성도 중위 사건을 재조사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이후 제27보병사단 주관으로 관련 사료들을 발굴, 보전하면서 '차성도 중위 추모제'를 열고 차성도상을 제정했으며, 제27보병사단의 창고를 1년에 걸쳐 개조하여 사단 역사관도 만들었다.
2011년 5월 13일에는 한미 유대를 공고히 하고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이 상을 받은 다른 외국인은 장제스 대만 총통,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 국방장관,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육군 대장 김용배 육참총장, 해병대 중장 김성은 국방부장관, 육군 대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겸 국가안보실장, 육군 대장 정승조 합참의장 등이 있다. 다만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은 최고사령관(Chief Commander)-사령관(Commander)-장교(Officer)-레지온네어(Legionnaire)으로 구분되며, 앞서 나온 인물들 중 장제스나 조지6세, 드 골 같은 국가원수는 최고사령관 등급으로, 타국 장성에게는 사령관급, 고위 장교에게는 장교급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2011년 11월에는 2년간의 사단장직을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영전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은 한·미군의 핵심 보직으로 미군의 소장이 작전참모부장을 맡고 대한민국 국군 소장인 차장이 한미연합 작전 실무를 담당한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위협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임무를 탁월히 수행했다는 평이다. 아시아투데이 기사
한미연합군사령부 근무 시절인 당시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가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윤장호 하사를 기리는 나무가 미국 육군의 제8군 부대에 있었는데, 그 나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인범은 그 나무를 교체하도록 건의하고 그가 사단장을 역임했던 이기자부대 역사관 안에 윤장호 하사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전인범은 상술한 '차성도 중위', '윤장호 하사'처럼 그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도 호국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기리는데 두팔을 걷고 나섰다. 이후 전인범의 전역식 당시 유일하게 축사를 해준 사람이 군번도 계급도 공로 인정도 없이 싸웠던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이진복 부회장이라는 점은 이러한 전인범 장군의 행적과 연관이 있다.
2013년 4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제16대 한국군 수석대표에 임명됨과 동시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지상구성군사령부 참모장 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는 유엔군사령관 지침에 따라 평시 정전협정 유지 및 관리를 기본 업무로 수행한다. 특히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발생하면 유엔군사령부 회원국 연락단을 포함한 다국적 특별조사팀을 구성해 조사한다.
3.7. 장군 시절: (2) 육군특수전사령관
2013년 10월 중장 진급과 함께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육군특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변화들이 생겼다. |
전인범 중장이 특전사령관에 부임한 뒤 특전사 베레모는 이렇게 바뀌었다. 특전사 베레모의 모표도 그동안 장교는 계급장만 달고 특전휘장을 달지 않던 것에서 특전휘장 아래에 계급장을 달도록 바꾸었다, 특수작전 훈련을 이수하지 않은 인원은 베레모에 특전휘장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 또 기존의 특전병들이 특전부사관과 휘장을 공유하던 것을 특전병 전용 휘장을 달도록 바꿨다. 전인범 장군 자신도 육군특수전사령관이긴 하나 해당 특수전 훈련 미이수자였으므로 특전휘장을 재직기간 동안 달지 않았다. 장경석 장군이 후임으로 온 뒤 전인범 장군의 정책 상당수가 환원되었으나, 이 복제 규정은 유지됐고 장경석 장군 본인도 재직기간 내내 베레모에 계급장만 달았다. |
육군특전사령관 취임 1년차에 접어들면서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부대원들의 여건 개선 노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서울신문 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특전사에 근무하다가 전역해 현재는 보안 관련 업계에 종사하며 후배들에게 자문활동을 해주고 있는 한 예비역 중사는 “지금과 같은 사령관이 있었다면 전역 안 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장기복무자들에게 불필요하게 반복적이고 지나친 육체적 소모와 부상을 가져오던 기존의 정기적인 천리행군을 자대배치 전에 특수전교육단에서 한 번만 하고 이후에 자대에 가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었다. 천리행군의 방식도 바뀌었는데, 마치 지옥주처럼 7일간 잠을 안 자는 무박으로 강행군하고 중도 포기자는 모두 퇴교시키는 일종의 살아남기식 자격 훈련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전인범 사령관이 물러나고 후임 사령관인 장경석 장군이 부임한 이후론 전처럼 자대에서도 천리행군을 계속 하고 있다. 이것 외에도 전인범 사령관 시절 바뀌었던 사항들이 새 사령관 교체 후 대부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특전사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세종특별자치시에 달려가서 관료들 만나 빌고, 울고, 협박도 했어요"라고 할 정도. 그 결과 강하 수당이 15년 만에 50,000원에서 70,000원으로 40% 인상되었다. 전투력을 올리면서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많이 보장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달에 250㎞를 뛰면 휴가 하루를 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또한 예전엔 사제 택티컬 장비 (비인가 장비)의 사용 가능 여부가 각 대대의 대대장의 마인드 성향에 따라 저마다 달랐었는데, 전인범 사령관은 모든 예하 부대에 사제 장비의 사용을 정식으로 허용하였다.(이것 역시 다음 특전 사령관때 없어짐)
2013년 11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 이로서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급 장교들 중 최다 훈장 수상 기록을 세웠다. 연합뉴스 기사 |
그가 지시한 특전사 포로 체험 훈련 중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한 사건에 대한 처벌이 서면경고를 받는 데 그쳐 비난 여론이 있었다.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인권활동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인범 특전사령관이 영화 브라보 투 제로를 특전사 사령부 참모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훈련과정이 왜 한국에는 없느냐” 라며 훈련 수행을 지시해서 졸속으로 시행된 훈련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언론보도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문제의 훈련은 5인 1조를 기반으로 실시됐으며, 사고 발생 30분 전에 훈련을 받던 하사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교관은 훈련의 일부로 여겨 중단하지 않았다. 질식증세가 나타난 인원을 충청북도 청주시의 성모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하사 2명이 숨졌고 1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려한 수훈과 커리어, 인맥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중장에서 예편했다는 주장과, 이리저리 튀는 편인 전인범 장군을 탐탁찮게 보던 장성들이 이걸 기회로 대장 진급을 막아버린 것이란 주장이 있다.
당시 육군의 입장은, 전인범 당시 특전사령관은 도의적 지휘책임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2016년 10월 장성 인사에서 당시 2차 지휘책임이 있던 13공수특전여단장 정재학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해 50사단장으로 영전한 것은 육군의 이러한 판단에서다.
<신동아> 2016년 5월호 225페이지에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관련하여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드라마에서처럼 부하를 아끼는 사령관도 실재한다. 전인범 사령관이 그런 사례이다. 보급품 확충, 수당인상, 사제품 허용, 간결한 훈시 등 여러 면에서 부하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 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 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 후로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으면 나도 유(시진)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부사관 출신 A씨)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를 볼 때 일선 특전사 대원들에게 상당한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3.8. 장군 시절: (3) 육군특수전사령관 이후
제1야전군 부사령관 시절 전인범 중장(해당 사진은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교육 도중) 국방일보 기사 |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2차보직으로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기사 전인범 25대 특전사령관 이임사 영상
그렇게 한직에 있다가 다음 장성인사(15년 10월)에서 육사 동기인 김영식, 박찬주, 엄기학이 대장 진급에 성공하고 각각 1, 2, 3군사령관으로 영전하면서 그는 사실상 대장 진급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2016년 상반기 장성 인사에서 2군단장직을 수행하던 고현수 중장이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보직이동함에 따라 전인범 중장은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이동하였다. 정책연구관은 장성이 계급정년 혹은 연령정년이 남아있으나 보직은 이미 끝마쳤을 때 가는 자리. 즉, 전역대기직이다.
3.9. 전역
2016년 7월 28일 경기도 이천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 동안의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했다. 이날 보국훈장 국선장과 함께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특수작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도 수여받았다. 수훈은 5월이었지만 훈장수여식은 이 날 했다. 해당 훈장은 한국군 출신에게는 처음 수여된 것이다. 전역식에는 정호용, 이기백, 김동진,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4]
전역 직전 한국군사학회 부회장으로 영입되었다. 다만 해당 단체에는 이미 10명 이상의 부회장직이 존재하므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10월부터는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해를 넘긴 2017년 1월 23일에는 미국의 북한전문 매체 'NK 뉴스'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공개 편지를 발표하여 눈길을 끌었다. 관련 국내보도 NK뉴스 원문 NK뉴스 번역문
3.10.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안보자문 합류/인사검증
3.10.1. 더불어민주당의 안보자문위원으로 발탁
2017년 2월 4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북콘서트 '대한민국이 묻는다' 행사에서 안보자문위원 합류 소식을 전하는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모습 ⓒ 문재인 전 대표 공식 블로그 |
2017년 2월 4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날 콘서트 진행을 맡은 고민정 아나운서와 함께 인재 영입 대상으로 확정됐다. 본인 스스로도 페이스북에 더불어민주당 안보자문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더민주의 안보자문위원으로 합류한 직후인 2월 6일의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에 관해, "기존 한미 합의를 존중하고, 중국의 경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선언이 전제된 상태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혀 사실상 배치 찬성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국방 현안에 대해 문재인 후보와 견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개진할 것이라고도 했다.
전인범 장군이 문재인 후보를 돕기로 한 배경에 대해선 "지난번 특전사에 갔는데 그간 추진했던 많은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특히 '람보 칼'로 불리는 개당 7만 원의 특수작전용 서바이벌 칼의 도입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에 "조용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측은 "특수작전 칼을 당초 개당 7만 원에 구매하려 했지만, 더 나은 15만 원짜리로 구매하기로 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18억 5,000만 원의 관련 예산이 이미 통과되어 2017년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보급될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다만 이에 대해선 평가가 나뉘는데, 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다목적을 광적으로 선호하는 현상'이 이번에도 발휘 되었다. 특수전용 칼이면 그냥 쑤실 때 쓰게 튼튼하기만 하면 되는건데, 신형 특전사 칼을 손잡이 속에 성냥개비, 낚시줄 따위를 넣어 요술방망이처럼 쓰라는 용도로 채택하였다.
또한 기존의 특전사 칼에 철조망 절단 기능이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내구성이 약해 "그냥 내구도 좋은 칼이나 줘라"고 했던 특전사 내부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안되어 또 다목적 칼에 내구성 약함 + 철조망 절단 기능까지 넣어놨다. 외국 특수부대가 바보라서 철조망 절단기를 따로 들고 다니는게 아니다. 특전사 역시 기존의 철조망 절단 기능 대검이 있음에도 절단기를 따로 들고 다녔다. 대검으로 자르는 것과 절단기는 효용성 면에서 비교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목적이다 보니 칼 자체의 내구도는 떨어지면서 가격만 몇배로 비싸다. 반면 전인범 장군이 추천한 거버사의 LMF 모델 칼은 싸기라도 하다. 아무 기능도 없어 튼튼하고 작다는 것도 장점.
3.10.2. 전인범 돌발발언 “전두환, 5·18 발포 지시했다 생각 안 해”
2017년 2월 9일에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지금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무도 모르잖나. 특전사가 살인마처럼 비춰지는 건 바뀌었으면 한다”
"그러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감옥에도 가고 그런 것 아닌가"
“하여튼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인범 “전두환, 5·18 발포 지시했다 생각 안 해”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국민의당은
"이러한 일방적 발언은 국가적 민주화운동과 희생을 모욕하는 망언... 전 장군은 민주화운동에 희생되신 분들과 유족들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호남에서 지지를 호소하면서 정작 반5.18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사를 안보자문역으로 영입한 문재인 전 대표에게 제 정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 공격했다.전인범 '전두환 발포' 발언에 국민의당·손학규 '발끈'이러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호남 지지율 11% 빠져, 민주당 의원들도 뒤늦게 비판을 하게 된다. 당내에서도 "영입 철회해야" 목소리 높아졌다.'전인범 논란' 가볍게 봤다가 한 방 먹은 문재인 캠프
3.10.3. 전인범 승진파티 성신여대 조교 서빙사건/심화진 교비 횡령사건
"전인범 승진파티에 성신여대 조교들이 서빙"사건
"전인범씨의 제 27사단장 승진 축하파티에 성신여대의 업무용 차량이 동원되었고, 교직원과 조교 등이 새벽부터 부대에 와서 축하연 준비를 했으며, 특히 조교들은 간부식당에서 열린 축하파티에서 서빙을 했다고 한다. 전인범씨가 현직에 있을 때 성신여대와 소속 교직원을 마치 휘하 부대와 소속 장병인 것처럼 여겨 부렸다
이 시기에 아내 심화진 前 성신여대 총장의 교비 횡령 등 비리 논란이 일었고, 전인범 본인의 승진파티에 성신여대 직원과 조교를 동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논란이 발생했을 때 페이스북에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겁니다."[5]
라고 격하게 반응하며 부인의 무죄를 확신하였다. 이후 심화진은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고, 본인의 승진 파티에 성신여대 교직원이 동원된 것은 허위로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대법 "文 영입1호 전인범 前장군, 승진파티에 교직원 동원 인정" 이에 관하여 전인범은 1심 판결이 나왔을 당시
"과거 SNS글은 경솔하였으며 사과를 드린다. 사법부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판결을 존중한다"
고 밝혔다.#결국 '5.18 발포 발언'과 '아내의 교비 횡령 옹호 발언'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2월 10일 미국으로 떠나 연수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언론에선 그가 문재인 캠프를 하차했다고 말했으나 캠프 관계자들은 그가 자숙 차원에서 도미한 것이며, 안보 자문은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뉴시스 기사
도미 후에도 안보 자문을 계속하다 2020년, 문재인을 지지한지 3년 만에 지지를 철회했음을 밝혔다. 이유는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에서 강원도 삼척의 앞바다로 탈북해 온 북한 선원 2명을 강제로 북한으로 돌려보낸 조치를 용납할 수 없어서라고 밝혔다. 그 2명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 간에 탈북을 한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처벌을 받아도 한국 법정에서 물어야지, 그들을 북으로 돌려보내버린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 그 요지.
3.11. 근황
전역 이후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팬들과 밀리터리 코스프레 여장 남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소통하고 있으며, 국내외 등지에서 한미외교 연구, 안보 강연 등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동물자유연대 이사에 등재되어 동물권 보호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2018년 6월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를 주최하여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파이낸셜뉴스 기사. 당시 세미나 참석자 다수는 휴가 등을 얻어 참석한 국군 장병 및 안보 관련 종사자였고, 다수의 밀덕들도 자리를 차지했다.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명 이상이 참석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21년 신동아 2월호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에서 19대 대선 당시 "전작권 전환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캠프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현재 제동이 걸린 전작권 전환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서는 늦춰지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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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한미연합사단 창설 6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고, 축하 연설을 했다. |
2024년 7월 회고록 '보통장군 전인범'을 출간했다.# |
2024년 8월 10일, 전인범 장군의 출판기념회가 전쟁기념관 이병영홀에서 열렸다.#
정치인이 출판기념회를 가지는가 하면 정치자금법상 출판위원회 활동은 금액 한도와 모금 액수에 제한이 없고 내역 공개나 과세 의무도 없는데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할 의무도 없다. 정치인 입장에선 이런 이유로 출판위원회가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인 셈이다.
하지만, 문재인 캠프에서 이탈한 이후,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정치인으로서 전인범은 국민의힘 진출 역량이 아직은 미약해보인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과 함께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5개월 전에 촬영된 전인범과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 |
12.3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을 암시한 커뮤니티 작성자# |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군인 시절, 과거 한미연합군사령관을 지낸 미국 육군 대장 커티스 스캐퍼로티 장군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군 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으로 인해 복무 당시 우리 군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분류되었다. 아시아투데이 기사제27보병사단장 시절, 내구성이 약했던 군용 슬리퍼를 꽤 고품질의 슬리퍼로 교체해 '국방부의 역작' 소리가 나오도록 하는 등 사병들 입장에선 빡세지만 좋은 사단장이라는 평을 얻었다. 이때 슬리퍼는 내구성이 뛰어나서 병사들 사이에서는 통칭 "아다만티움 슬리퍼" 또는 "국방부 마지막 양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2015년 하반기 군 수뇌부 인사가 야전 경력 위주의 인사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 가운데 신원식, 이재수 장군은 박지만 EG그룹 회장과의 친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인범 중장을 배제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이유로 그가 야전보다 ‘미국통’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 외에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이 지목되기도 했다. 뉴스1 기사 국민일보 기사 주간동아 기사
4.2. 부정적 평가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건 이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논란이 될 발언을 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늘었다. 특히 자신의 유투브 채널 보통장군 전인범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전파하는 부분이 많아 가짜뉴스로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전인범 장군이 하는 화법은 미괄식 화법이다. 미괄식 화법은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처했을 때, 그리고 특별히 하고싶은 말은 없지만 자신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을 때 등에 사용한다. 문제는 영상이 길어지다보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갈 지(之)자 행보의 발언으로 주장하고자하는 논리가 안맞는 아무 말 대잔치하는 느낌이 강하다. 예컨데 병사월급 200만원 이슈에 대해서 찬성한다고 서두에 말을 해놓고서는, 실제로는 월 50만원 지급하고 나머지 월 150만원은 전역시 일괄 지급하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화법이다. 이는 양측에 욕은 먹기 싫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화법인데, 자신은 욕먹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듣는 사람 짜증나게 만들고 논점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물어봐서 확인해야 한다.
이건 자기 자신의 정치색을 감추고 싶을 때도 쓰인다. 2017년 2월 4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안보영입인사로 발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제1공수특전여단 만기 전역 병장 출신이라서 붙은 것이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의 대북정책에 동의하는 인사는 아닌 것이다.
2014년 때만해도 12.12 군사반란에 항거한 의로운 군인 김오랑 중령 훈장수여식에서 특전사령관 재임당시 축사를 통해 "김오랑이라는 군인은 역사 속에 산화했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었다.특전사, 고 김오랑 중령에 훈장 전수 그 동안 전두환의 하나회가 군부쿠데타 이후에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오랑[6], 정선엽[7]의 12.12 군사반란 피해자 명예회복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8] 이때만해도 사람들이 전인범 장군을 더불어민주당과 함께할 수 있는 진보인사나 참군인인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17년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를 "지휘체계가 문란해서 일어난 일"로 생각한다며, 전두환이 직접 지시하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해 논란이 되었고전인범 “전두환, 5·18 발포 지시했다 생각 안 해” 그리고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의 핵심 멤버인 정호용장군을 언급하면서 <신동아> 인터뷰에서 "그분을 보면서 사람을 진실하게 대해야 사람이 따른다는 걸 배웠다"라고 말했다.5.18·성신여대·포로훈련,전인범 둘러싼 논란 세 가지 [9]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정치관 입장을 바꾸는 화법을 취한다. 보통 이런 류의 사람은 자신의 '양쪽 정치 진영에서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의도와 달리 '양 진영에서 매도급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크다.
2017년 2월 4일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북콘서트 '대한민국이 묻는다' 행사에서 안보자문위원 합류 소식을 전하는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모습 ⓒ 문재인 전 대표 공식 블로그 |
많은 사람들이 전인범을 처음엔 더불어민주당 성향의 인사로 생각하고 접근했다가 손절하고 나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보수성향의 장군 출신이라도 더불어민주당 성향이면 철저히 그 정당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감을 하려 노력을 하고 애쓰는 모습이라도 있어야 하는데,[10] 전인범의 정치성향은 국민의힘당 지지자이자 극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11] 전인범은 독실한 개신교신자이고 최근엔 SNS에 反민주당 발언, 건국전쟁 관람 등 극우 포지션을 잡은듯하다. 육군 내 하나회 선배를 존경을 표시하고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유투브에 매번 '북한과 전쟁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하는 등 언행들을 보고 판단했을때 원래부터 극우성향이 맞다.
반대급부인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과 전두환과 하나회를 싫어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12]하며 북한과 대화와 타협[13]하려하는 더불어민주당 성향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런 인사를 영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이낙연처럼 될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한 적이 있어서 호남 표심을 못얻고 현재 표류하는 정치인이 되었다.곳곳에서 드러나는 이낙연의 '전두환·박정희 찬양'…뿌리마저 흔드나
하지만, 이런 갈지(之)자 행보때문에 우파진영에서는 전인범 장군을 문재인 편이라고 이미 찍힌 상태이고 유투브 댓글에 극우 진영의 사람들에게 욕설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면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와 부인 심화진 총장 횡령사건[14]을 둘째치더라도 결론적으로 보수진영에도 밉상 박혀서 전인범은 정치쪽도 가기 힘들다.'특전사' 출신 전직 장성이 빨갱이라고?
오히려 자신의 동기인 신원식이 2019년 보수, 우익정치 판세를 읽어서 윤석열 정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발탁이 되었다. [15] 신원식 전 국방부장관/국가안보실장의 종교가 카톨릭인데 비해서 전인범 장군의 종교는 개신교[16]라는 보수 정치인으로 가기에 아주 유리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극우포지션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연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걸 활용하지 않았다.
밀덕으로서 전인범에게 큰 기대를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특전사령관 시절때 전인범의 튀는 행동 중 하나가 밀덕이었을 뿐이고 우연히 얻어 걸렸을 뿐이다. 이 튀는 성격이 특전사에 기여를 한 부분도 있지만, 사고로 대원이 사망하는 일도 발생한 적이 있다.[17] 2019년부터 플래툰 컨벤션을 통하여 자신의 자서전을 판매하는데 홍보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쪽에 가서 뭔가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18]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전쟁이 나더라도 이런 사람 밑에 있으면 성신여대 조교들처럼 자기 소속도 아닌데, 개처럼 부려먹힌다거나 전쟁영화 따라한다고 시킨다고 했다가 죽거나 그 책임을 다른 부하에 전가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해서 참전용사가 되서 돌아오면 "그 동안 한 것이 뭐가 있느냐?"며 면박받을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5개월 전에 촬영된 전인범과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19] |
곽종근 장군과 같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와 자신이 지휘관으로 몸담았던 육군특수전사령부를 비호하는 발언을 많이 하는 이유도 알 법하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후,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서 현재 그의 유투브 채널의 주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루고 있다.
4.2.1. 월남 참전용사 앞에서 망언 발언
이 블로그에 따르면 전인범 장군이 제27보병사단에 재임하던 시절 기억을 기록했다. 작성자는 월남전 참전자 중앙회 안보교육위원장이다.몇년전 경험 이야기이다. 그가 27사단장 시절에 있었던 기억이다. 2011년 이었던가? 9월 27일로 기억된다.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삼천동 200-9 수변공원(중도 오가는 배 선착장 옆)에서 6.25 전쟁시 최초 승전을 기념하는 「춘천대첩」기념식 행사를 거행하였다. 당시 제2군단장은 전임 군단장 오정석[20] 장군의 후임 박선우[21] 중장이었다.
오후 행사여서 11시부터, 초청된 보훈단체인사들과 군단 산하의 요직 인사들과 중식시간을 먼저 가졌을 때이다. 우리 일행의 자리는 보훈단체 중 월남전 참전자회 강원지부 임원들을 위해 표시한 곳이었다. 예술관 입구 옆편 정원에 마련된 여러 개의 둥그런 식사용 테이블 중 우리 일행이 한자리로 모인 곳이다. 그리고 여러 보훈단체 자리마다 제2군단 산하의 현역 간성[22]들이 한 명씩 배정된 자리에 합석하는 대화 중심의 자리였다.
그런데 우리 자리에는 27사단장 전인범 장군이 함께했다. 식사 시작 전 담소시간에 빙 둘러 앉은 초청된 인사 우리들에게 27사단장 전인범 장군이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대화 중 그가 현역 지휘관이면서 우리 일행 월남전 참전 용사들 면전에서 약간 비아냥대듯 한 말이다.
"월남전 참전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게 뭡니까? 그저 경제적으로 국가에 약간의 도움이 있었을까?"
전인범 장군의 이 말에 우리 참전자들 좌석은 얼굴 표정이 바뀌어 냉냉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두가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응대하는 말을 못했다. 그는 직접 대놓고, 감히 현역 군인신분으로 월남전 참전 노병들에게 무안을 주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 중앙회의에서 「안보교육위원장」소임을 수행 중 일때였다. 나는 격한 어조로 전인범 장군에게 말하였다.
"전인범 장군! 월남 참전의 정신은 대한민국 국군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환경에서 자유 민주주의 수호하기 위하여 목숨 바쳐가며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한 대한민국의 건국 정체성 사수 반공정신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약속 이행이 그 핵심골자인데 전인범 장군은 아시고 명령에 의하여 사명감을 지니고 싸움터에 나간 우리 참전자에게 하는 말이오? 모르시고 하는 말이오?"
좀 언성이 높아졌고 흥분된 분위기에서 건네는 나의 격해진 말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국군 간성이 우리 월남참전 노병들에게 말 실수를 한 것이다.
조금 있더니 그는 배당된 자리에서 먼 발치 다른 식탁 테이블 자리로 슬그머니 옮겨 사라졌다. 그는 자유세계평화를 수호하는 대열에 참전한 우리 국군의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정신에 대놓고 모욕을 준 것이었다. 그의 가슴엔 대한민국은 없다는 거드름 피움이었다.
그 이후 그는 승진하여 특전사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박지만씨와 육사 동기동창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도 그의 춘천대첩행사 수변공원 식탁에서과거 사선을 넘고 넘어가며 참전한 애국 노병에게 무안한 말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는 우리 국군 간성이면서 반공국가인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 우리나라에 모욕된 언사를 거리낌없이 내 뱉었다.
그가 승진하건 말건 그 이후 나는 그를 세칭 유행하는 「똥별」이라고 부른다. 요즘 그가 문재인 대선캠프에 자문위원으로 합류했다는 소문에 새삼스래 지난 5년전 기분 나빳던 기억이 다시금 생각이 난다. 그가 어떻게 우리 국군을 지휘하는 간성이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스럽다.
오후 행사여서 11시부터, 초청된 보훈단체인사들과 군단 산하의 요직 인사들과 중식시간을 먼저 가졌을 때이다. 우리 일행의 자리는 보훈단체 중 월남전 참전자회 강원지부 임원들을 위해 표시한 곳이었다. 예술관 입구 옆편 정원에 마련된 여러 개의 둥그런 식사용 테이블 중 우리 일행이 한자리로 모인 곳이다. 그리고 여러 보훈단체 자리마다 제2군단 산하의 현역 간성[22]들이 한 명씩 배정된 자리에 합석하는 대화 중심의 자리였다.
그런데 우리 자리에는 27사단장 전인범 장군이 함께했다. 식사 시작 전 담소시간에 빙 둘러 앉은 초청된 인사 우리들에게 27사단장 전인범 장군이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대화 중 그가 현역 지휘관이면서 우리 일행 월남전 참전 용사들 면전에서 약간 비아냥대듯 한 말이다.
"월남전 참전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게 뭡니까? 그저 경제적으로 국가에 약간의 도움이 있었을까?"
전인범 장군의 이 말에 우리 참전자들 좌석은 얼굴 표정이 바뀌어 냉냉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두가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응대하는 말을 못했다. 그는 직접 대놓고, 감히 현역 군인신분으로 월남전 참전 노병들에게 무안을 주었다.
당시 나는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 중앙회의에서 「안보교육위원장」소임을 수행 중 일때였다. 나는 격한 어조로 전인범 장군에게 말하였다.
"전인범 장군! 월남 참전의 정신은 대한민국 국군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환경에서 자유 민주주의 수호하기 위하여 목숨 바쳐가며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한 대한민국의 건국 정체성 사수 반공정신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약속 이행이 그 핵심골자인데 전인범 장군은 아시고 명령에 의하여 사명감을 지니고 싸움터에 나간 우리 참전자에게 하는 말이오? 모르시고 하는 말이오?"
좀 언성이 높아졌고 흥분된 분위기에서 건네는 나의 격해진 말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국군 간성이 우리 월남참전 노병들에게 말 실수를 한 것이다.
조금 있더니 그는 배당된 자리에서 먼 발치 다른 식탁 테이블 자리로 슬그머니 옮겨 사라졌다. 그는 자유세계평화를 수호하는 대열에 참전한 우리 국군의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정신에 대놓고 모욕을 준 것이었다. 그의 가슴엔 대한민국은 없다는 거드름 피움이었다.
그 이후 그는 승진하여 특전사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박지만씨와 육사 동기동창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도 그의 춘천대첩행사 수변공원 식탁에서과거 사선을 넘고 넘어가며 참전한 애국 노병에게 무안한 말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는 우리 국군 간성이면서 반공국가인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 우리나라에 모욕된 언사를 거리낌없이 내 뱉었다.
그가 승진하건 말건 그 이후 나는 그를 세칭 유행하는 「똥별」이라고 부른다. 요즘 그가 문재인 대선캠프에 자문위원으로 합류했다는 소문에 새삼스래 지난 5년전 기분 나빳던 기억이 다시금 생각이 난다. 그가 어떻게 우리 국군을 지휘하는 간성이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스럽다.
4.2.2.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
4.2.3. "우리 육사 출신들을 싸잡아서 지금 욕하는 사람들, 과연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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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도 여러분들처럼 놀라고 걱정이 되었고 안도의 숨을 쉬었고 실망하고 또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많이 앞서도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필이면 저의 모교인 저의 중심에 있는 육군사관학교가 여러가지 비난을 받고 있어서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육사출신들이 잘못한게 많지만, 잘못을 저지른 육사출신 말고 올바르게 군을 이끌어나간 육사출신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일부라고 말을 하기에는 정말 부끄럽습니다만, 전체가 아닌 육사출신들의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전부다 싸잡아서 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특히 현재 젊은 장교들..사관학교 나온 장교들 이사람들에게까지 그런 비난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장교의 길을 걸을려고 준비하고 있는 육사생도들도 마찬가지 그런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반면교사를 삼아서 앞으로는 우리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희생을 앞장서서 하고 나를 버리고 나라를 구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지낸다면 지금의 이 비난이 오히려 찬사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 육사출신들이 해야될 것은 일단 반성부터 해야 됩니다. 뭐 좌절을 한다든지 포기를 한다든지 이러면 안되죠. 상황이 어렵고 선배들이 엉망을 만들어놨더라도 내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올바르게 세우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해야하느냐 사관생도 신조에 다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 우리가 이렇게 했다면 지금 이런 비난을 받겠습니까?이번에 정말 마음 먹고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육사출신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사람들 과연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라고 말을 하기에는 정말 부끄럽습니다만, 전체가 아닌 육사출신들의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전부다 싸잡아서 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특히 현재 젊은 장교들..사관학교 나온 장교들 이사람들에게까지 그런 비난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장교의 길을 걸을려고 준비하고 있는 육사생도들도 마찬가지 그런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반면교사를 삼아서 앞으로는 우리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희생을 앞장서서 하고 나를 버리고 나라를 구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지낸다면 지금의 이 비난이 오히려 찬사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 육사출신들이 해야될 것은 일단 반성부터 해야 됩니다. 뭐 좌절을 한다든지 포기를 한다든지 이러면 안되죠. 상황이 어렵고 선배들이 엉망을 만들어놨더라도 내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올바르게 세우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해야하느냐 사관생도 신조에 다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 우리가 이렇게 했다면 지금 이런 비난을 받겠습니까?이번에 정말 마음 먹고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육사출신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사람들 과연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도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에 대해서 하나하나 지적하기가 많아서 잘못을 한 육사출신이 많은지 아닌지는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참조하기 바란다. 육사출신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계엄 이후 2일 후 12월 5일에 올린 전인범의 영상이다. 뻔뻔하기 그지없다.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변명, 거짓말을 해대니 전인범 장군이 윤석열 내란의 편이 아닌가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2.3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건 후, 사람들이 육사에 대한 비판이 쏟아내자 이에 대한 영상을 올리며 "우리 육사 출신들을 싸잡아서 지금 욕하는 사람들, 과연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며 울분[23]을 토했는데, 이에 대해 육사 출신 아니었으면 반란은 안 일으켰을 테니 더 잘했을 거라는 비아냥만 듣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들었다.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화난 건 알겠는데, 지금 할 소린 아닌 거 같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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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범은 "총을 당긴다거나 툭툭 치거나 소화기를 뿌리면 특수부대원들이 감정을 못 이겨서 유혈사태가 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 몰려온 시민들 그리고 국회직원 등 그렇게 극렬 저항했는데, 본회의장 코 앞까지 밀고 들어갔던 특수부대원들에게 어떤 순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국민들의 세금을 받아 운영하는 군대가 국회를 향하여 침입한 사실이 유투브와 언론을 통해서 생방송으로 보여주었는데 여기에 대한 비판보다 특전사를 두둔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에 전인범은 "그래도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를 강조하는 편이다.
이 영상의 여파로 중도-보수 성향[24]의 사람들과 밀덕들이 이탈하고 있다. |
4.2.4. 논란의 국방부 장관,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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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나라는 왜 국방부장관을 군 출신이 하고 있을까요? 군 출신이 국방부장관을 하고 있다보니까 이번에 엉뚱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요? 이런 의구심들을 가질만 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국방부장관을 꼭 군출신이 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이 국방부장관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우리나라 국방부장관은 군령권과 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군령권은 그야말로 군인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대 보고 "저리 가라", 저 부대 보고 "이리 가라" 이런 것을 할 수 있어요. 임무를 부여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국방부장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군정권은 "누구를 진급시켜라 누구를 어디에 보직시켜라."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군을 잘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군인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엉뚱한 사람들이 진급하게 되는 겁니다. 과거에는 군인들이 그 안에서 대부분 진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군인들 사이에서 만약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면 진급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보기에는 20년 됐어요. 점점 민간인들이 군인들을 진급시키는 겁니다. 군 내부에 많은 부조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참모총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올바른 눈을 가져야 되는데 인간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미스가 있었겠죠. 그러니까 오히려 군인들이 자기의 지휘 계통을 유지 안하고 엉뚱한 접촉을 해서 진급하는데 힘을 썼던 것입니다. 국방부장관이 이런 군정과 군령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군에 대해서 잘 알고 군인들을 잘 아는 그런 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같은 경우는 이런 군령권과 군정권을 국방부장관이 갖고 있지 않아요. 국방부장관은 오로지 대통령을 보좌해서 군사 정책, 국방 정책에 대한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군사에 관해서는 합참의장이 도맡아서 하고 있고 합참의장이 커다란 작전계획을 세우고 나면 이러한 전략을 가지고 각 작전사령부, 통합사령부라고도 하는데 통합사령부에서 이것을 군사작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체제로 바꿨을 때 민간인이 국방부장관을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군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특히 군인에 대해서 잘 모르면 군인을 어떤 사람들을 주로 뽑을까요? 자기 눈에 들었던, 자기 고향 사람이거나 저가랑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이런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군대의 근간이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어요. 군대를 무너뜨리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이 민간 출신이 국방부장관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심각하게 장단점을 잘 따져봐야 됩니다. 군 출신 중에서 올바른 사람들이 국방부장관을 하고 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그러면 현재 국방부장관이 하고 있는 역할을 조정해서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하고 군인들 스스로가 나름의 자정 노력을 갖춰서 올바른 장군들을 뽑는 그런 제도로 발전시킨 다음에 민간인이 국방부장관이 되어야지 현재와 같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다 같이 갖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군대를 잘 모르고, 군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했다가는 잘못하면 더 큰일 납니다.
군령권, 군정권그러나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이 국방부장관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우리나라 국방부장관은 군령권과 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군령권은 그야말로 군인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대 보고 "저리 가라", 저 부대 보고 "이리 가라" 이런 것을 할 수 있어요. 임무를 부여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국방부장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군정권은 "누구를 진급시켜라 누구를 어디에 보직시켜라."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군을 잘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군인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엉뚱한 사람들이 진급하게 되는 겁니다. 과거에는 군인들이 그 안에서 대부분 진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군인들 사이에서 만약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면 진급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보기에는 20년 됐어요. 점점 민간인들이 군인들을 진급시키는 겁니다. 군 내부에 많은 부조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참모총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올바른 눈을 가져야 되는데 인간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미스가 있었겠죠. 그러니까 오히려 군인들이 자기의 지휘 계통을 유지 안하고 엉뚱한 접촉을 해서 진급하는데 힘을 썼던 것입니다. 국방부장관이 이런 군정과 군령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군에 대해서 잘 알고 군인들을 잘 아는 그런 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같은 경우는 이런 군령권과 군정권을 국방부장관이 갖고 있지 않아요. 국방부장관은 오로지 대통령을 보좌해서 군사 정책, 국방 정책에 대한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군사에 관해서는 합참의장이 도맡아서 하고 있고 합참의장이 커다란 작전계획을 세우고 나면 이러한 전략을 가지고 각 작전사령부, 통합사령부라고도 하는데 통합사령부에서 이것을 군사작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체제로 바꿨을 때 민간인이 국방부장관을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군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특히 군인에 대해서 잘 모르면 군인을 어떤 사람들을 주로 뽑을까요? 자기 눈에 들었던, 자기 고향 사람이거나 저가랑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이런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군대의 근간이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어요. 군대를 무너뜨리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이 민간 출신이 국방부장관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심각하게 장단점을 잘 따져봐야 됩니다. 군 출신 중에서 올바른 사람들이 국방부장관을 하고 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그러면 현재 국방부장관이 하고 있는 역할을 조정해서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하고 군인들 스스로가 나름의 자정 노력을 갖춰서 올바른 장군들을 뽑는 그런 제도로 발전시킨 다음에 민간인이 국방부장관이 되어야지 현재와 같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다 같이 갖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군대를 잘 모르고, 군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했다가는 잘못하면 더 큰일 납니다.
전인범 : "그러나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이 국방부장관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우리나라 국방부장관은 군령권과 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국군통수권은 국군 전체에 대한 군정권과 군령권을 아우른다. 국방부장관은 대통령의 군정권과 군령권을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며,합참의장은 군령권을, 각 육군, 해군, 공군 참모총장은 군정권을 위임받아 행사한다. 국방부장관은 군령과 군정의 책임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에는 참모총장이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행사했지만 1952년 부산정치파동 친위쿠데타가 일어났었다.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부산피란정부 발췌 개헌 당시 일본 육사 16기 출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대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병력 배치를 거부했었다.[25] 그 이후로 이승만은 자기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이종찬을 경질시키고 만주군관 출신 백선엽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힌다. 훗날 1960년 4.19 혁명이 터지고 나서야 이종찬은 허정 내각에서 국방부장관을 하게 된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경우 각군 참모총장들이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1992년에 되어서야 군령권이 합참의장에게 넘어갔다. 이는 일반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민주국가는 모두 견제와 균형의 논리에 따라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해 놓는다.
합참의장은 현역 군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최고위 보직이다. 합동참모회의 또는 총참모부는 보통 그 나라 군대의 가장 높은 의결기구이다. 합참의장은 바로 이 의결기구의 의장이자 총책임자인 만큼 보통 경험이 제일 많은 대장이 보임된다.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 7명 중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기 때문에 합참의장은 현역 군인의 좌장(座長)이라고도 불린다.
반면 국방부장관 엄연히 계통상으로 군대 조직 내부의 자리가 아닌 '국가 행정부 관료로서의 보직'이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문민통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제복군인은 할 수가 없고 오로지 비 제복군인 신분의 민간인만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순수한 문관 출신도 가능하다. 실제로 현재 문민통제를 보다 더 확실하게 시행하는 대부분의 유럽, 북미 등지에서는 입대 자체를 해본 적 없는 민간인 출신들도 국방장관을 많이 맡는다.
북한군의 경우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에서 군령권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참모총장에 대응하는 각 군의 사령관들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나 한 사람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다 같이 아우를 수 있는 것마냥 전인범은 설명하고 있다.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
전인범 : "현재와 같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다 같이 갖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군대를 잘 모르고, 군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 했다가는 잘못하면 더 큰일 납니다."
팩트체크를 하자면 근래 20년(2005~2025)년 동안 39대~50대까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은 전부 군인출신이 했었다. 대한민국 해군이 윤광웅 송영무 2명 대한민국 공군출신 정경두 1명이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대한민국 육군출신이 많다.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중에서 민간인이 맡았던 적은 이승만 정부때 이기붕, 김용우가 있으며 장면 내각에서는 현석호와 권중돈만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정부때 15대 국방부장관인 김성은 장군을 제외하고는 전부 대한민국 육군 출신들로 도배된 역사가 있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 중엔 자신의 동기 육사 37기인 신원식도 있다.
군인 진급의 역사
전인범 : "과거에는 군인들이 그 안에서 대부분 진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군인들 사이에서 만약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면 진급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과거에서도 육군 내부에 지역과 일본육사출신과 만주군관 출신간의 파벌 싸움이 있었다.
1969년 10월 개헌을 통해 3선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 권력을 더욱 강화하면서부터 군 인사에 있어서의 지역적 파벌성은 1960년대보다 더욱 심화되어 갔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는 유신체제를 무리하게 끌고 가나가기 위해서는 주된 권력기관이 필요했고 그 기반을 자신의 출신지인 영남의 군 인맥 강화에 두었다.
1974년 말, 준장 진급 예정자들을 출신지 별로 보면 경상도 14명, 충청도 3명, 경기 2명, 전라, 강원, 이북이 각각 1명이었던 것 같다. 70년대 들어서 해가갈 수록 군 인사의 편파성이 짙어진 대해 많은 장군과 장교들이 개탄을 금치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이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인사도 없지도 않았다.
이 무렵에 군 인사를 비판하다 예편된 대표적인 인사로는 당시 1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던 최세인 육군 대장[26]을 꼽을 수 있다. 육군의 장군 진급자 명단이 발표된 얼마 후인 1974년 말 경, 황해도 해주출신인 최세인 장군은 예하 군단장인 김모 중장(경남 출신, 수산청장 역임) 및 정모 중장(경북 출신, 육참총장 역임)과의 술자리에서 인사문제가 화제가 되자 "이번 진급은 경상도 위주로 선발되었다. 당신네들끼리 잘들 하시오."라고 쏘아붙이듯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술 기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말이었지만 평소의 군 인사에 대해 자신의 불만을 은연 중 표출된 뼈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짐으로써 제 1군 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군사령관 역임 후에는 잘되면 참모총장이나 그렇지 않으면 합참의장의 보직을 받았다. 그의 능력이나 군에 기여한 공로로 보아도 제 1군사령관만 무사히 마치면 합참의장이나 참모총장까지도 한 번 기대할 수 있는 장군이었는데, 주석에서의 한마디 불평이 박정희 대통령 귀에 들어가 예편되고 만 것이었다. 후일 들리는 이야기로는 문제의 술좌석에 동석했던 한 군단장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S장군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1972년 4월, 제 5군단장 이병형 중장은 예하 5사단장 Y소장과 군단장실에서 호남출신 군 인사의 푸대접에 관해 불평하는 가운데 "나는 군에서 박정희 장군을 존경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의 군 인사정책에는 불만이었다. 박대통령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공평무사해야만 되는데도 경상도 편중의 인사를 하고 있다. 이는 좋은 일이 못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병형 장군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육사 4기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 당시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그 후엔 야전군작전참모, 육본작전참모부장, 제 1사단장 등의 요직을 거친 장군이었다. 그는 식견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생활태도를 견지해 온 관계로 동료와 부하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최세인 장군과 함께 육군참모총장 또는 합참의장으로 촉망되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었다.
전인범 : "자기 눈에 들었던, 자기 고향 사람이거나 자기랑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이런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군대의 근간이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어요. 군대를 무너뜨리려면 그렇게 하십시오."[27]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절의 군의 편파적 인사정책에 관한 데이터를 이승만 정권 시대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출신 장교(육군)의 공화국별 우대현황
경상도 인구/ 전국 인구 | 경상도 출신/총 육군 대령 수 | 경상도 출신/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된 평균 수 | |
제 1공화국(이승만 정부) | 28% | 26% | 25% |
제 3, 4공화국(박정희 정부) | 29% | 27.5% | 38% |
제 5공화국(전두환 정부) | 29% | 29.5% | 44% |
국방부장관을 비 장성 출신으로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장성 출신과 달리 민간 출신은 군을 잘 모를 테니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마치 비 장성 출신은 군알못일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말하는 것이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로버트 맥나마라 등의 사례에서 보듯, 군에서 단기간만 복무하고 전역하는 정도로도 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거니와, 수십년을 군에서만 복무한 사람들과 달리 민간에서의 삶도 겪어봐서 군 출신들이 체감 못하는 군의 부조리와 비효율성 등을 느낄 수 있기에 장성 출신보다 더 유능할 수도 있다. 병법의 고전인 손자병법만 참고해도, 결국 전쟁이라는 것이 장기적인 보급과 수송이 뒷받침되고 인원의 채용과 교육훈련, 인사 배치 등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경영 능력이 부각되는 사람이 국방부장관을 해야하는데, 평생을 야전에서 함께 뛰어오던 사람이 그런 지식을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를 보면 파벌싸움으로 인해 얼룩진 역사를 생각해보면 군인출신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국군은 비전투병과는 물론이고 전투병과 장교들 중 작전 직능자만 일방적으로 우대하고 있는데, 국방부장관이나 각군 참모총장은 국방부 및 각군을 경영하는 자리로 작전보다는 인사, 군수 직능자가 더 적합[28]하나 작전 출신들이 분야 안 가리고 참모총장, 장관까지 다 해먹는 경우가 많아 더 그 위험성이 심하다.
작전 등의 분야는 합참의장 등 제복 군인의 보좌를 받으면 되는 일이며, 실제로 타 장관들도 자기 부처의 업무 전반 혹은 일부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도 이를 실무 보좌진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데 국방부만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게다가, 그 군을 잘 아는 장군 출신 장관이 이번 불법 계엄의 주동자였음을 알면, 이런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이 없다.
4.2.5. 부당한 명령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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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명령에 대해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명령은 절대로 복종해야 된다. 명령은 적법한 명령만 들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이 논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명령은 반드시 복종해야 됩니다. 다만, 윗사람은 적법한 명령만을 내려야 되고 또 아랫사람은 적법한 명령만 들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중대급 이하에서, 또는 병사가 그 명령에 적법성을 따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되죠.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만약에 자기 상관이 두 살짜리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적법한 명령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비무장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지.[29] 이것은 그 민간인이 간첩이거나 혹은 폭탄을 소지하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혼란한 시기에는 예를 들어서 한 시간 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하던 적을 잡았는데, 우리가 갑자기 후퇴해서 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영화에서도 보셨지만, 더 이상 포로로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 아니면 놔줘야 하느냐?" 그런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포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금 전까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도 처형을 해야 됩니까? 이것은 적법한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상당히 애매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때 그때 봐야 될 일이고 대원칙은 명령은 반드시 복종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 계급이 대령이상 장군 정도가 되면 그 위치에서는 이 명령의 적법성 여부를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는 겁니다. 또 그 적법성 여부를 도와줄 수 있는 법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모로 편성되어 있기도 하죠. 예하부대에서는 그런 참모 편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법률 조언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예하부대에서는 상급자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다만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상식적으로 도저히 아니다 싶은 명령.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이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각자 자기의 양심과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행동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거에 대한 의심을 가져서는 안돼요.
자, 대령이상 장군들은 어떠냐.. 여러분들은 자기 부하들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어요. 부당한 명령을 내릴 권한도 없습니다. 적법한 명령만 내렸어야 돼요. 만약에 자기 상관이 불법적인 명령을 내리면 자기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못하겠습니다.", "안됩니다."라고 해야죠. 그러면 이게 항명이 됩니까, 안됩니까? 당연히 항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명죄로 판단을 받아야 돼요. 그러면 어떠한 경우라도, 예를 들어서 이번에 계엄을 하려고 했는데, 거기 있는 장군들이 "저는 못합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항명죄에 적용이 될까요? 안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항명죄에 적용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재판에 넘겨졌다 하더라도 부당한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가 나왔겠죠.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특히 대령이나 장군 이상들은 적법하지 않은 명령은 절대로 내려서는 안됩니다. 이번에 우리가 뼈아픈 교훈을 배워야 될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예하부대, 중대급, 대대급 밑으로 있는 부대들은 상급자의 명령은 복종하는 것이다. 상급자의 명령은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겁니다. 아울러서 상급자들은 올바른 명령을 내려야 됩니다. 특히 대령이상 장군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적법한 명령만을 수명하고 내려야 됩니다. 명령에 대한 가치는 우리 군대의 중심에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명령은 반드시 복종해야 됩니다. 다만, 윗사람은 적법한 명령만을 내려야 되고 또 아랫사람은 적법한 명령만 들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중대급 이하에서, 또는 병사가 그 명령에 적법성을 따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되죠.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만약에 자기 상관이 두 살짜리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적법한 명령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비무장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지.[29] 이것은 그 민간인이 간첩이거나 혹은 폭탄을 소지하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혼란한 시기에는 예를 들어서 한 시간 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하던 적을 잡았는데, 우리가 갑자기 후퇴해서 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영화에서도 보셨지만, 더 이상 포로로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 아니면 놔줘야 하느냐?" 그런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포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금 전까지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도 처형을 해야 됩니까? 이것은 적법한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상당히 애매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때 그때 봐야 될 일이고 대원칙은 명령은 반드시 복종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 계급이 대령이상 장군 정도가 되면 그 위치에서는 이 명령의 적법성 여부를 좀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는 겁니다. 또 그 적법성 여부를 도와줄 수 있는 법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모로 편성되어 있기도 하죠. 예하부대에서는 그런 참모 편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법률 조언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예하부대에서는 상급자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다만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상식적으로 도저히 아니다 싶은 명령.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이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각자 자기의 양심과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행동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거에 대한 의심을 가져서는 안돼요.
자, 대령이상 장군들은 어떠냐.. 여러분들은 자기 부하들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어요. 부당한 명령을 내릴 권한도 없습니다. 적법한 명령만 내렸어야 돼요. 만약에 자기 상관이 불법적인 명령을 내리면 자기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못하겠습니다.", "안됩니다."라고 해야죠. 그러면 이게 항명이 됩니까, 안됩니까? 당연히 항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명죄로 판단을 받아야 돼요. 그러면 어떠한 경우라도, 예를 들어서 이번에 계엄을 하려고 했는데, 거기 있는 장군들이 "저는 못합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항명죄에 적용이 될까요? 안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항명죄에 적용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재판에 넘겨졌다 하더라도 부당한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가 나왔겠죠.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특히 대령이나 장군 이상들은 적법하지 않은 명령은 절대로 내려서는 안됩니다. 이번에 우리가 뼈아픈 교훈을 배워야 될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예하부대, 중대급, 대대급 밑으로 있는 부대들은 상급자의 명령은 복종하는 것이다. 상급자의 명령은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겁니다. 아울러서 상급자들은 올바른 명령을 내려야 됩니다. 특히 대령이상 장군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적법한 명령만을 수명하고 내려야 됩니다. 명령에 대한 가치는 우리 군대의 중심에 있습니다.
군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기본법으로 2015년에 제정된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30]' (약칭 '군인복무기본법’ )제 25조는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정당한’이 아니라 ‘직무상’이다. 따라서 ‘사적인 업무지시’(상관 가족 관련 심부름 등)에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직무상 명령에만 따라라’ 정도의 규정으로는, ‘비상계엄이니 국회에 진입해라’와 같은 위헌·위법한 명령에 대한 복종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베트남인 피해자를 대리해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 중 한분이 용기를 내 2022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셨다.
판사 : “증인은 국제인도법이나 전쟁법을 교육받으신 적이 있었나요?”
증인 : “없었습니다.”
판사 : “증인은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교육받은 적이 었었나요?”
증인 : “없었습니다.”
이런 교육의 부재는 당시 비극의 원인 중 하나였다.증인 : “없었습니다.”
판사 : “증인은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교육받은 적이 었었나요?”
증인 :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의 통치구조와 국민의 권리의무를 규율한 최상위 법이다.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이나 군인사법이 헌법보다 아래에 있지 그 위에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최상위 법이므로 대한민국의 어떤 법도 이 대한민국 헌법을 거스를 수 없고, 헌법에 위반된 법률은 효력을 상실한다. 여기서의 법률은 국제법규와 헌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을 포함한다. 군인의 위법한 명령(구두명령, 서류명령)도 헌법의 효력을 상실한다.
제87조 (내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2.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살상, 파괴 또는 약탈 행위를 실행한 자도 같다.
3. 부화수행(附和隨行)[31]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2.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살상, 파괴 또는 약탈 행위를 실행한 자도 같다.
3. 부화수행(附和隨行)[31]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형법 제 87조에 말하는 내란은 나라 안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벌이는 난(亂)으로, 국가대권과 헌법의 통치력을 저해하거나 파괴하려는 행위, 또는 국가의 영토 주권을 말소시키려는 일체의 무력 행사를 말한다. 반란은 내란과 일대일대응되는 개념이 아니고 하위 개념으로, 반란은 기존 권력에 반하여 일으키는 난을 말하지만 내란에는 기존 권력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으키는 친위 쿠데타 등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민주주의[32]와 법치주의[33]를 파괴하려는 행동이다.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은 친위 쿠데타 미수이자 실패로 들어난 사건이다.
형법 제91조(국헌문란의 정의) 본장에서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함을 말한다.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2024년 12.3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당시에는 평시 상황에 비상계엄을 불법적으로 때린 것이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을 공격받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를 묘사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관련 법과 절차가 정당했는지 보고 싶다면 문서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헌법 및 법령 위반 여부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군 지휘관의 명령만을 강조하며 군형법 제44조(항명)의 사례를 끌고 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전인범 : "각자 자기의 양심과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행동해야 되는 겁니다."
이또한 위험한 말이다. 이슬람교로 예로 들자면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에서 무슬림인 체첸 반군은 12살 미만의 어린이 20명과 임산부 등 30여명의 인질을 자발적 풀어주었지만, 12살 이상의 어린이는 지하드가 가능하다는 이슬람 샤리아[34] 율법에 따라 인질로 잡고 있었다.
개신교로 예로 들자면 이런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르고 죄를 짓는 자와 알고도 죄를 지은 자들을 구분하시지만(민수기 15:27-31) 언제나 회개를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마가복음 1:15, 사도행전 2:38; 26:18). 회개는 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며, 회개에는 구원의 믿음이 따릅니다(사도행전 3:19; 20:21; 26:20). 회개 없이는 용서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3; 다음도 참고. 누가복음 17:3-4; 베드로후서 3:9).
자신이 개신교 신자이고 하나님께서 회개하면 용서했다고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이같이 종교마다 가치관이 다 다르고 전쟁이나 범죄를 보는 시각도 전부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 3조에도 헌법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제3조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 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무력 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Article 3 Each Party recognizes that 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 in territories now under their respective administrative control, or hereafter recognized by one of the Parties as lawfully brought under the administrative control of the other, would be dangerous to its own peace and safety and declares that it would act to meet the 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cesses.
Article 3 Each Party recognizes that an armed attack in the Pacific area on either of the Parties in territories now under their respective administrative control, or hereafter recognized by one of the Parties as lawfully brought under the administrative control of the other, would be dangerous to its own peace and safety and declares that it would act to meet the 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cesses.
본 조약에 헌법이 명시된 만큼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 대한민국 헌법을 숙지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
대한민국 헌법은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경찰간부후보생 전 직렬, 경찰승진 시험, 5급 군무원 시험 행정직렬 필수 과목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장교들은 자신들이 지켜야할 최상위법인 대한민국 헌법을 모르고 국방부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5. 기타
- 육군 통신장교 석면 사망사고 피해자 장교가 살아생전에 웃긴대학에 쓴 글들 중에 전인범에 관한 미담 글도 있다.
- 사관학교 시절 별명이 '살인범', 혹은 '잔인범'이었다. 굉장히 엄격하여 후배들이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
-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자가 진정한 사나이다"(Nemo vir est qui mundum non reddat meliorem)라는 라틴어 격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
- 위관급 장교 후반 시절, 어머니인 홍숙자 여사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바 있다. 당시 홍 여사는 '정치 기적은 여성 대통령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마했다가 당적이 문제가 되어 중앙선관위에 의해 등록무효가 되었다. 대신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지지 선언을 하였다.
- 대령 시절인 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연구(1994-2004)"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4년 후 제27사단장 재직 시절인 2010년 경남대학교에서 "美 닉슨·부시(’01.1~’09.1) 행정부 시기 주한미군 감축결정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둘 다 한미동맹에 관한 주제인데, 해외파병 경험에 따른 한미 연합작전 부문의 근무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 전역 직후 <신동아>지와 가진 인터뷰 기사가 2016년 9월호에 게재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남은 생을 한미관계 증진에 바칠 것이며 또한 동물자유연대 회원으로서 개와 고양이 등 동물 보호활동에도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특히 군 시절부터 동물들의 권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1야전군 부사령관 시절 퇴역 군견들을 민간에 분양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고, # 전역 후 예비역이 되면서는 동물자유연대 이사가 되어 3년 동안 8평의 좁은 내실에 갇혀 사는 사자 가족을 미국의 야생동물보호소에 보내주는 등 동물의 자유를 위한 다양한 활동도 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사 이외에도 특전사령관 시절에 10년 넘게 후원해왔던 아동양육시설 SOS어린이마을에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특전사로서의 보람된 삶을 추천하기도 했다. #
- 특전사령관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페이스북 활동이 활발하다. 전역 후인 상기의 2016년 신동아 인터뷰나 2020년 인터뷰 자료를 보면, 현역일 당시 그가 페이스북을 시작하니 상급부대에서는 이것이 보안에 위규되므로 그만 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하며, 심지어 예비역 장성 중에서도 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본인이 보안에 위규되는 행동을 하면 처벌하면 되는 것이고, 이에 대해 더이상 궁시렁거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한다. 더불어 그가 페북을 시작한 근본적 이유는 군 복무중인 병사나 그 부모, 여자친구 등 그 어느 누구든지 지휘관인 본인에게 직통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통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그리하여 중간 간부들도 이를 알도록 하게 해 그들이 일선 병사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게 주목적이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병사들의 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지 "군대공감" 혹은 "병사공감" 관련 글들에 공유를 하거나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경우가 많다. 또 장삐쭈의 만화 신병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 2019년 3월부터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채널 이름은 '보통장군 전인범'이다. 2019년 3월 19일 첫 영상이 업로드됐으며 2022년 11월 기준 구독자 수는 7만여 명.
- 2019년 하반기 플래툰 컨벤션 2일차에 깜짝 등장했었다. 인터뷰나 기타 특별한 활동 없이 구경만 하다 갔는데 마스크를 쓰고 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구경 온 평범한 아저씨인줄 알았다고. 이후에 개최된 플래툰 컨벤션에도 자주 방문하고 있어 참가자들이 함께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서 공개하는 일이 있다.
- 그 국방부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불리는 아다만티움 슬리퍼가 만들어지게 한 주인공이다. 당연히 호평일색이다. "전투화보다 더 오래갑니다.", "6년째 내리쓰는데 부서지지를 않습니다.", "천리행군은 이걸 신고 해야 한다.", "군생활 7년 하면서 가장 슬펐던 일은 훈련소 때 보급받은 초록색 무적슬리퍼를 3년차 도난당했을 때다" 하는 반응이다.
- 에어소프트건 및 에어소프트 게임에 대해서 대단히 호의적이다. 사무실 벽에 타공판 걸어놓고 거기다 여러 에어소프트건을 종류별로 걸어둘 정도다. 군대 훈련에도 충분히 쓰일 수 있다면서 도입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한 대한민국의 현 에어소프트건 규제는 말도 안되는 수준이라며 고쳐야 한다고 비판했다. 관련 인터뷰 당연히 규제와 단속에 수십 년간 시달려온 에어소프트건 동호인들에게는 호평 일색.
- 2021년 5월 대한민국 국군 자가격리 장병 부실 식사 제공 논란에 대해서 유튜브 영상이 올라왔는데 병영내 휴대전화 사용은 군 전투력 향상 차원에서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군인들이 음란물,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선의가 포함된 일들이 왜곡되는 상황이 있다고 말했다. 또는 여론에 따라 병사들의 복지에 관련된 군납업체를 외부 업체로 바꾸게 되었을 경우 국방비 지출이 늘고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이긴 하나, 휴대전화 사용시의 부작용은 모든 이들이 다 해당되고 또 개인이 알아서 이를 관리해야 함에도 여전히 군인 특히 병들한테만 유난 떠는 건 여타 장성들과 다를 바 없단 지적도 있다.
- 2021년 1월 경 본인의 유튜브 영상으로 모병제 및 군인 월급에 대한 의견을 밝혔으며 크게 4가지 이유(1. 인구감소 문제라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복무확대(남여징병제(여성징병제) 포함)하면 됨, 2. 군 정예화를 위해선 모병제로 인력획득 어려움, 3. 청년일자리 창출 문제는 군은 목숨을 담보로 안보를 책임지는 조직이라 다른 조직들과 성격이 다름, 4. 병영부조리 척결 문제는 징병제 하 병영부조리는 해결될지 몰라도 모병제 하 병영부조리가 새로 생길 것)를 들며 모병제에 대해 반대하며 결국은 징모혼합제가 가장 낫다고 밝혔으며 군인 월급(정확히 이야기하면 병의 월급)의 경우는 하루종일 부대에서 복무하므로 최저임금 수준까지 월급을 올리는 게 아깝다 생각하진 않으나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는데 스웨덴, 이스라엘, 싱가폴 같이 기본 월급은 적어도 야외훈련시 상당한 수당지급이랄지 전투병과 비전투병 간 월급차를 크게 두는 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리브레위키
- 혈액형은 A형이다.
- 제27보병사단장 시절 춘천 MBC의 신나軍에 출연한 적이 있다.
-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육군사관학교의 이전을 반대한다고 밝히며, 그 이유로 "생도들은 수도와 같이 크고 외국인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에게 "그 말대로면 진해와 청주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는 지방에 있지만 해군, 공군 장교들이 딱히 육군 장교들보다 시야가 좁지 않다"는 반박을 들었다. 이는 해군, 공군 비하발언을 서슴치 않고 육군우월주의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해당 영상에서 일본의 방위대학교가 도쿄에 있는 것을 사례로 들었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방위대는 요코스카시에 있으며 도쿄에 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교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현 이치가야의 방위성 부지에 있었다. 이를 누군가 댓글로 지적했고, 전인범 장군은 지적한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댓글을 남기며 자신의 오류를 수용했다.
- 12.3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사건 이후 논란에도 불구하고 2024년 12월 29일 플래툰 컨벤션 행사장에 나타났었다. 워대디 양유진 바펜_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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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윤인하 | 22대 편장원 | 23대 양상태 | 24대 오형근 | 25대 김현수 | |
26대 이풍길 | 27대 김승광 | 28대 김기성 | 29대 김군식 | 30대 이명구 | |
31대 하정열 | 32대 이승우 | 33대 김인동 | 34대 전인범 | 35대 이진원 | |
36대 김종태 | 37대 김정수 | 38대 허강수 | 39대 정해일 | 40대 정진팔 | |
41대 민인기 | 해체 |
[1] 석사 학위 논문: 한미군사동맹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연구(1994-2004) (2006)[2] 박사 학위 논문: 美 닉슨·부시('01.1~'09.1) 행정부 시기 주한미군 감축결정 비교연구 (2009)[3] 과거 신문에 기록이 있는데 1965년 10월에 출국하여#, 1970년 2월에 귀국하였다#.[4] 육사 11기 하나회핵심멤버인 정호용씨가 참석할 정도면 하나회가 아닌가하는 추정해볼 수 있다.[5] 이 발언 이후에 공약 이행여부 DM[6]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반란군으로부터 지키다 교전 중 전사했다.[7]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초병으로 근무하던 중 국방부에 진입하려던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8] 그래서 현재는 진보진영에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이 생겼다.[9] 사실 이 두 기사만 보면 전인범도 하나회 멤버가 아니냐는 의심도 해볼 수 있다.[10] 원래 군인들 태생이 보수/우익 진영이긴 하지만, 성우회를 등지고 나와 불이익을 감수하고 정치적 신념이 있으면 더불어민주당의원으로서 잘 활동한다.[11] 국민의힘에 당적을 둘 경우 영남, 충청(일부), 강원도를 아우르고 자신이 존경하는 하나회 정호용장군을 존경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해도 흠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12] 더불어민주당이 주로 호남민심을 기반으로 표를 얻어야 대선에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13] 한미상호방위조약 제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전쟁이라도 국제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업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14] 정치권에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는데, 이런 요소가 중요치 않다. 훨씬 더 논란이 많은 사람들도 정치인이 되며 자신을 좋아할 법한 사람들의 정치적 포지션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가 조금 비판받았다 싶으면 도망가는 성격이라 못한 장군들 중의 하나이다.[15] 자신이 국민의힘당 성향이 강하다면 국민의힘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니즈를 파악해서 행동해야한다. 신원식처럼 전광훈 태극기 집회 나가서 붕짜춤을 춘다거나 그래야 하는 이유이다. 정치라는게 우스꽝스러워도 양극단으로 나뉘는 세상에선 그래야하는게 맞다. 국민의힘당과 싸울 인재가 더불어민주당에 필요한 것이지 회색분자나 피장파장한 사람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게 싫은 장군들은 대부분 장군연금 월 500만원씩 받고 집에서 편하게 조용하게 산다. 유투브를 할 이유도 없다.[16] 전광훈 목사에게 간증 받거나 태극기 집회 나가서 군복입고 문재인, 이재명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면 해결될 문제이다.[17] 밀덕이 사람 잡은 유일한 케이스이다.[18] 가령 에어소프트건 경찰 단속으로부터 개선이라든지 군복단속법 개정이라든지 이런 것엔 특히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관심이 있었다면 에어소프트건 게이머로써 영상을 올렸을테니 말이다. 자신이 유튜브에서 하는 발언들은 지극히 육군 장교, 장군 중심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19] 곽종근 특전사령관은 계엄 이후로 더불어민주당 (육사 40기) 김병주의원, 박선원의원 앞에서 양심고백을 한 상황인데 재미있게도 전인범 장군과 교차되는 반대정치진영에 서게 되었다.[20] 3사 10기[21] 육사 35기[22] 군단 지휘관, 사단장, 부사단장등 군단간부요원[23] 실제로 크게 분노하고 있는 티가 나는데, "싸잡아서"라는 대목에서 유달리 강한 톤으로 말을 하고, 양눈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24] 군부, 신군부에 반대하며 중도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25] 그 당시엔 북한군, 중공군과 싸우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쿠데타에 동원할 병력이 없었다.[26] 제 12대 사령관[27] 실제로 박정희, 전두환대통령이 그랬다.[28] 반대로 군령권만 행사하는 합참의장은 작전 직능자에 알맞는 자리다.[29] 살인이자 전쟁범죄에 속한다. 제3차 UN 총회는 1948년 12월 9일「집단학살죄의방지와처벌에관한협약」(Genocide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의하면 체약국(締約國)들은 평시·전시를 가리지 않고 집단학살을 방지하고,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도도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1950년 10월 14일 동 조약에 가입하였고(그럼에도 민간인 학살을 많이 자행했었다.) 이 조약은 1951년 12월 12일부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발생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도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1950년10월14일 동 조약에 가입하였고 이 조약은 1951년 12월 12일부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발생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30] 참고로 이법이 만들어지기 전의 2014년 이전의 군대는 "상관(고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라는 이유로 구타 및 가혹행위, 성폭행, 성추행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군 간부와 장군들이 개인 사적으로 징집병을 부려먹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31] '줏대 없이 다른 사람의 주장에만 따라서 그가 하는 짓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32] 삼권분립의 개념을 알면 이 계엄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 알 수 있다.[33] 법률은 국회에서 정한다.[34] 지하드에 관한 율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