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5:47:54

민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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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육군특수전사령관
민병돈
閔丙敦 | Min Byung-don
파일:민병돈.jpg
출생 1935년
경기도 경성부
거주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본관 여흥 민씨[1]
재임기간 제8대 육군특수전사령관
1987년 1월 15일 ~ 1988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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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72aa><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민윤식, 어머니 은진 송씨
가족 배우자 구문자{1945년생}
슬하 2남{민운기(雲基), 민대기(大基)}
학력 휘문고등학교 (졸업)
경력 경민대학교 석좌교수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9년 ~ 1989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33대 육군사관학교장 }}}}}}}}}
1. 개요2. 생애
2.1. 군인 시절2.2. 육사 졸업식 항명 사건2.3. 예편 이후2.4. 기타
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전두환의 1공수여단장 시절 대대장으로 계파상으로는 전두환계에 속하나, 자기 소신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민따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회 중 거의 유일한 정상인이자 참군인으로 평가받는다.[2]

2. 생애

1935년 경기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윤식(閔允植, 1897 ~ ?. 12. 14.)[3]과 어머니 은진 송씨(1896 ~ ?. 11. 7.)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휘문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조선인민군에 맞서 싸웠다.

휘문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15기로 졸업 후 임관했으며 중위 시절이었던 1963년에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2.1. 군인 시절

군사 정권 시절 상납이 문화였던 군대에서 상납을 하지 않았으며 본인도 상납을 안 받았다고 한다. 휘하 장병들을 엄하게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원칙에 어긋나면 강하게 혼내면서도 가난한 병사가 휴가를 갈 때면 차비를 쥐어주는 지휘관이었던 것으로 회고된다. 아울러 군부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란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다라며 군장병의 자유로운 비밀 투표를 독려했던 인물이었다.[4]

하나회 15기의 대표주자이자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가는 코스였던 요직 20사단장을 역임했으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병사들에게 현 정권에 대한 투표 독려를 거부하여 준장 보직으로 좌천당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당하였으나 훗날 정보참모부장을 거쳐 특전사령관이 되었다.

육군특수전사령관 시절에는 서울 올림픽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테러에 대비한 훈련이 한창이었는데, 특전사 대테러 대원들이 캄캄한 실내사격장에서 야시경을 쓰고 방탄복을 입은 상태에서 서로에게 실탄 사격을 하는 위험한 훈련까지 실시되었음을 훗날 회고글에서 밝히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하나회 인물로 전두환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지만 자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선배들에게도 소신있게 거부하였다. 6월 항쟁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전두환이 군을 출동시켜 유혈 진압하려는 명령을 내리자 군 출동 시 핵심 부대인 특전사의 사령관이었던 그는 대통령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명령 취소 요청을 하기까지 했다.[5] 2023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처음에는 위수령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6월 19일에 내려온 명령서를 읽어보니 사실상 계엄령이었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그는 비슷한 일을 서울에서 벌인다면 나라가 망할 게 틀림없다고 직감했다고 한다. 일선에 파견된 정보장교들도 광주랑은 비교도 안되는 상황이라고[6] 다들 난색을 표하니 동기인 고명승을 만나서 대통령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이고, 대통령 명령을 따르면 시민들 손에 맞아죽을 게 뻔한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냥 총살당하는 게 낫다고 둘이 힘을 합쳐서 반기를 들기로 했다고 하며 전두환이 재고하지 않았다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연습까지 마쳤다고 한다. #

정치권 뿐만 아니라 군부 내에서까지 제2의 5.18이 될 수 있는 군을 통한 강경진압에 대해 반대 의사가 터져나오자, 전두환은 결국 군 출동명령을 취소했으며 이후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는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군대 사회에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켜온 드문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나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육사 각 기수의 유능한 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해 거의 협박에 강권을 서슴치 않은 선배들에 눌려서 억지로 가입을 한 후배들이 많았다. 민병돈도 아마 이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민병돈 본인의 말로는 하나회를 그저 곱창 회식모임으로만 알았다고 한다(...). # 다만 전두환과의 개인적 관계는 끊지 않아서 전두환 퇴임 후 그를 예방하기도 했고 백담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이때 노태우가 전두환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전두환이 자신은 노태우를 잘 안다고 일축했는데, 백담사에 가게 된 후에 "네 말이 옳았어."라고 딱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병돈은 전두환계를 숙청하려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찍혀 특전사령관 자리에서 육사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둘 다 중장 보직이지만 육사 교장은 곧 군문을 나갈 사람이 받는 자리나 한직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 좌천에 가깝다. 당장 박희도 육참총장, 김진영 수경사령관 등의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민병돈 특전사령관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후임 특전사령관으로 온 이문석은 9.9 인맥의 선두주자로 이후 1990년에 1군 사령관까지 달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육참총장까지 노리는 위치에 올라섰다). 전두환 시절의 강직함과는 별개로 육사 교장으로서 보인 이후의 행적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2.2. 육사 졸업식 항명 사건

그러다가 1989년 3월 21일, 육군사관학교 제45기 졸업식에서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이었던 민병돈은 대형 사고를 친다. 바로 대통령 노태우를 공식 행사에서 무시하고 그의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한 것이었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407202482520102011.jpg
졸업식이 시작되고 교장 식사 순서가 되자 민병돈은 연단으로 나가면서 임석 상관이었던 노태우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단순히 실수인 줄 알았는데 연설이 시작되면서, 민병돈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단순 졸업 축하 식사를 한 것이 아닌, 대통령을 뒤에 두고 노태우 정부북방정책을 10분 동안이나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군 장성이 정부 정책을 비판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대통령을 뒤에 두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상관인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간단하고 짧게 해야 하는 교장 식사를 10분 가까이 끌며 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연설을 끝나고 돌아오면서도 노태우 대통령에게 끝까지 경례를 하지 않으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방금 전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이 실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나의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표한 격으로, 제대로 작심하고 반항을 저지른 것이었다. 당황한 노태우 대통령은 그를 지나치면서 "민 교장, 왜 이러는 거야?"라며 불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나면 대통령이 육사 식당에서 밥을 먹는 관례가 있었는데, 민병돈 교장은 그것도 막았고,[7] 다른 데서 식사를 하자는 노태우 대통령의 제안도 거부했다.

당연히 다음날 그의 육사 1기수 선배인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구는 그를 강도높게 질책했고, 민병돈은 즉시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KBS뉴스 영상 20일 후 육사 교장에서 경질되었고 50일 후에는 예편당했다. 이 일은 보수파였던 민병돈이 적국이었던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달한 강한 이의 제기라고 보는 시각이 있으며, 집권 후 전두환계 군맥들을 숙청한 것에 대한 전두환계의 불만이 섞여있다는 시각도 있다.

민병돈 본인 말로는, 노태우 대통령이 인기가 떨어지니까 "북한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다."라는 말로 정국을 전환시키려고 하자, 전방에 있는 군인들이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북한이 적이 아니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는 군인들은 뭐냐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보신주의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자, 자신이라도 나서야 겠다는 결심을 품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군사정권에 비판적이거나, 혹은 일부 보수층들 사이에서는 민병돈에게 "대통령에 대드는 패기, 오오~"라는 식의 허세 섞인, 혹은 6월 항쟁 당시의 진압군 동원 거부에 대한 호평이 확대된 나머지, 이 육사 교장 시절의 항명까지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까지 해석될 일이 못된다. '동유럽 등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서 제기되었던 보수층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그 전에 북방정책을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군인이 엄연히 민주적-합법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군 통수권자[8] 앞에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대통령에게 항명을 저지른 이 행위는 6.25 전쟁 당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명백한 문민통제 위배이자 군의 정치 개입이라고 봐야 한다. 본인은 북방정책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봤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은 단순히 야전 군인의 이념적인 경직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된다.[9]

물론 그냥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표 내고 할 말하고 떠나기의 군인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그 뒤로 군에 남아서 대통령을 압박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그만 둘 각오을 애초에 했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으니 문민통제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10]

2.3. 예편 이후

이후 경민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아시아엔이라는 군소 인터넷 언론에서 글을 기고하고 있는 등[11]의 주로 군사전문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치고 40년 전 마련한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나회였음에도 6월 항쟁 무력 진압에 반대한 인물로 최소한의 애국심과 정의감은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18년 8월 14일 PD수첩에 등장하여 근황을 알리는데 1987년 계엄문건을 공개한다.

2019년 4월 13일에 상처(喪妻:아내를 여읨)했다.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중풍에 걸린 아내를 20년동안 간호했다고 하며, 본인도 국립묘지 안장[12] 대신에 아내와 같이 살던 집 마당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2021년 10월 2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후배인 전 수도방위사령관 안병호 예비역 중장의 권유로 조문하였다. 사실상 32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출처 이후 전두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2.4. 기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월간조선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전문가인 국방장관이 非전문가인 대통령의 눈치만 보는가" 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김종대 전 의원은 자신의 저서인 <시크릿 파일 위기의 장군들>에서 이 기고문을 들어 문민통제를 위반했다는 비난을 했다. 하지만 민병돈의 칼럼은 이는 2년전 연평해전에서 드러난 NLL 교전 수칙을 예로 들며 해군제독 출신 장관이 왜 대통령에게 전문가적 조언을 하지 않냐는 취지였다. 윤광웅 장관은 민간인인 국방부 장관이고, 국방부 장관의 역할은 정부의 국방 정책 집행에 대한 책임자이며,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군사 정책에 관한 실무 조언을 하고, 군 통수권자를 보좌하면서 판단을 돕게 하는 위치이므로 김종대가 들먹인 문민통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기고문 내용도 남북전쟁 시기에 군 전문가의 의견을 자주 구한 링컨 대통령을 예로 들며 "노무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존경해 온 미국 링컨 대통령을 부디 계속해서 존경하고, 앞에서 예를 들었던 그의 모범적 군 통수권 행사를 따라 배우기 바란다" 라고 매듭짓고 있다.

3. 대중매체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성우 황윤걸이 연기했다. 6월 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전두환의 병력 동원명령 거부에 대해 고명승 보안사령관(최은석)과 의논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1] 삼방파 30세 병(丙) 항렬. 고조부의 작은 형이 흥선대원군장인, 즉 고종 임금의 외조부민치구이다.[2] 후술하듯 민병돈이 하나회에 가입한 이유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3] 초명 민원식(閔元植).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했다.[4] 민주화 이후인 1992년에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감안하면 더욱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5] 이 일화는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 '6월항쟁' 편에도 나온다.[6] 실제로도 그랬다. 광주시 한 곳만 시위에 나선 1980년과 달리 1987년 6월은 서울을 포함한 전국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다.[7] 대통령이 육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원래 그 시설을 써야 할 장교들이 식사를 못한다는 이유였다.[8]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전임자와 달리, 노태우신군부 정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긴 했으나 어쨌든 6.29 선언 이후의 직선제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로 당선되었기에 정치적 정당성은 전두환과 비교가 불가능하다.[9] 물론 그 개인의 신념 때문일 수도 있다. 애초에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민따로라 불릴 정도로 자기 길을 갔다. 거기다 본인 스스로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옳지 못한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대로라면 6월 민주항쟁 때나 이 때나 대통령 뜻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본인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하는 과정에 부상까지 입었었다. 두 가지를 결합해 보면 본인 입장에서는 북방정책에 매우 불만이 컸을 수 있다.[10] 다만 그 스케일이 컸던게 문제다. 직장인이라고 하면 그냥 잘리면 그만이지만, 문민통제의 대표격인 대통령에게 (실권은 없지만) 고위 장성이 항명한 것이기에 그 무게가 달랐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강력한 무력을 군에게 이양하고도 발 뻗고 잘 수 있는 이유는 군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민이 뽑은 사람이 군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군이 만약 이 믿음을 저버린다면? 독점한 군사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만들어야 통제가 가능하겠지만 아쉽게도 그 최전선에 서야할 군인들부터가 통제가 안될 것이다. 당장 군 수뇌부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는 미친 명령을 내린다면, 민주 정치에 대해 배운게 있는데다가 징병제와 고기방패 취급에 신물이 난 일선 병사들과 간부들이 따를까? 역으로 지휘부가 성난 군인들에게 체포되지 않기를 바래야 할 상황이다.[11] 탄핵 정국때는 우병우를 비판하기도 했으며, 보수인사로는 드물게 친박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다시 강연을 다니고 있다. 근데 최근에 계엄령 문건 사건이 터지자 또다시 쿠데타는 안 된다며 조현천을 사정없이 깠다. 사실 민병돈은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5.18 민주화운동과도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내로남불이 아니다.[12] 민병돈은 하나회였기에 승진에 있어 득을 보았지만, 12.12 군사반란이나 5.18 민주화운동과 연관이 전혀 없었기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있으며 군인연금도 수령하고 있다. 다만 12.12 반란 때 17사단 연대장으로 부대가 혹한기 훈련중이었고 보안사에 있는 허화평에게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고 묻긴 했지만 허화평은 어차피 북괴가 내려온 게 아니니까 그냥 훈련 진행 고대로 하면 된다면서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고 한다. 하긴 본인부터 하나회 성골인 전두환계인데도 전혀 계획언질을 받지 않았으니 허화평에게 확인한 후에야 알았다. 5.18 때도 해당 부대에 연대장으로 그대로 재직중이어서 휘말릴 일이 전혀 없었다. 대신 국보위에 가서 전경 도입에 앞장서면서 시위 현장 군부대 출동을 원천 차단하면서 1987년 6.29 선언에 공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