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3:09:55

허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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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장 허강수.jpg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86년 ~ 2022년
학력 충주고등학교 (졸업 / 39회)
한남대학교 행정정책대학원 (안보학 / 석사)[1]
임관 육군3사관학교 (23기)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7기동군단
주요 보직 지상군 페스티벌 행사기획단장
제27보병사단
제7포병여단
제3야전군사령부 대화력전과장
제5포병여단 제1포병단장

1. 개요2. 생애3. 주요 직위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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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장군이다. 최종 계급은 중장으로, 최종 보직으로 제7기동군단장을 2년 6개월 역임하였다.

2. 생애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다불리 출신이며 충주고등학교(39회)[2]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23기)에 입교하여 1986년 졸업 후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3]

부인 신미경 씨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딸 두 명은 출가하였다.

3. 주요 직위

4. 여담

  • 독실한 개신교 신자(장로)다. 간증 #1 #2 #3
    • 위 기사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전국에서 알아주던 명문인 충주고등학교에 다녔으나 고교 재학 당시 소위 말하는 일진들과 어울렸다가 결국 입시에 실패하여 전문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이후 군 문제를 해결하려다 3사관학교 공고를 보게되었고, 결국 3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장교가 되었다. 그런데 장기를 박을 생각은 없었는데, 입학 후에야 뒤늦게 3,4학년 과정을 마치고 학사학위를 받으면 10년간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학위 안 받고 5년이냐 학위 받고 10년이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후자를 고르며 자동 장기가 되었다고 한다.
    • 제15보병사단 포병연대에서 포대장[10]을 했는데, 당시 상관이 후일 국방부 차관을 지내게 될 황인무 중령이었다. 당시 황인무 중령이 허강수 대위를 전도했고, 교회 건축 업무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 완공된 교회는 1993년에 완공된 수피령교회로 94년, 95년도 군인달력에 아름다운 교회로 선정되었다.
  • 제7포병여단장 재임 시절에는 부대원들에게 구보를 많이 시켰는데[11], 평소에는 부관이나 참모들과 함께 구보를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단 본부와 울타리 안의 예하부대 간부(약 200명)들을 모두 집합시켜 부대 인근 팔당대교까지 약 20km 정도를 선두에서 함께 뛰었다. 그래서 비가 오거나 하늘이 흐린 날이면 여단 전속부관 전화기는 예하 부대의 뜀걸음 집합여부에 대한 문의전화가 빗발쳤었다. 목격담으로 낙오한 일부 간부들이 택시를 타고 복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제7포병여단장 재임 시절에는 박승원 전 여단장에 비해 군 기강을 강조하여 부대원들이 쉰목소리로 '북진'을 외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 제27보병사단장 재임 시절, 그간의 과도한 뜀걸음으로 무릎에 무리가 생겨 뜀걸음을 할수 없게 되자 차선책으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목욕탕에서 체력단련을 시행했다. 일과 내의 체력단련이 종료된 후에 목욕탕에 모인 사단 참모들과의 체력단련 2차전으로 플랭크(3분) → 레그레이즈(200개) → 팔굽혀펴기(100개) → 스쿼트(200개) → 자유형발차기(1000개) → 냉수마찰 순으로 시행하여 참모들이 아주 힘들어 했다는 소문이 있다. 군단장 시절에도 휘하 처장들과 함께 체력단련에 열심이었다.
  • 전임자가 부대원의 특급전사 강요 논란으로 악명이 높았던 윤의철[12]이었던 관계로 기대가 높았으며, 전임자가 군단장을 했을 적 매우 소홀했던 주특기 훈련(특히 정비, 조종, 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기동부대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지만 전임자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사단 내 대대급 교회를 불시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대령 때부터 새벽기도에 거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고 2021년 후반기에 장로 임직을 받았다. 생사의 기로에 서서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은 사생관이 중요하다며 신앙전력화를 강조하였다. 독실한 개신교인이지만 개신교에 편향되지 않는다는 평이 많았다.
  • 27사단에서는 소부대 단위의 실전적인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지시하였다. 전장군기와 야전성 그리고 특히 소부대전투기술, 간부교육, 야간훈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군단장이 되어서도 거듭 강조하였으며 군단 전 부대 유형별 소부대 전투기술 전술예규를 작성하여 활용하였다고 한다.
  • 평소에는 준수하고 깔끔한 외모를 갖추고 있지만 훈련장에서는 야전성을 중시하여 간부들도 용사들과 동일하게 복장을 착용하고 전장군기를 유지하도록 강조하였다. 특히 식사 역시 용사들과 동일하게 반합으로 식사를 하며 전투식량주먹밥도 동일하게 맨바닥에 앉아서 먹었다고 한다. 예하부대 훈련 현장지도를 갔을 때 이를 모르고 식판에다 식사 준비를 한 예하부대 간부가 꾸중을 들었다는 후문이 있다.
  • 7군단장으로 재임할 때 코로나19로 인한 용사들의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자칫 외면받을 수 있었던 간부들을 위해서는 '1table-1flower 캠페인'을 해당 내용 기사(국방일보) 코로나19를 함께 극복하는 군인 가족들을 위해서는 '퇴근길 꽃 한송이 캠페인'도 실시하였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외출, 외박통제로 지친 장병들을 위해 이틀의 특별휴가를 군단 전체에 뿌리셔서 칭송이 자자했다.
  • 군단장으로 2년반 이상 재임하면서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잘 대우해준 것 같다. 일부 참모가 전출을 가면서 인사말로 "지금 군단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고 하며 2021년 후반기 인사에서 군단장이 유임되자 참모장도 함께 더 근무하고 싶다고 육군본부에 건의하여 남았고 일부 참모들도 전출을 희망하지 않고 남아서 계속 함께 근무하였다고 한다. 즉 윤의철이 망친 7군단을 아주 훌륭하게 재건했다는 뜻이다.[13] 뭔말이냐면 엘리트들이 있어야 할 부대에 전출희망이 매우 큰 건 전투력에 매우 큰 손실을 끼치는데 계속 남길 바란다는건 전투력 향상에 매우 큰 기여를 한다는걸 의미하면 7군단의 전력 회복은 성공한 셈이다.
  • 허강수 군단장은 이런 행보 덕분에 부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주택 청약은 넣고 있었지만,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부하의 권유로 목동 신축 아파트를 신청했다가 당첨되었다고 한다.
  • 허강수 군단장이 군단장을 꽤 오래 보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윤의철이 군단장을 하다가 중간에 짤린 걸 땜빵하느라 이렇게 된 것이다.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윤의철이 밟아 놓은 걸 복구하느라 군단장을 오래 했다.
  • 허강수 장군의 배우자(신미경)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간부 가족들을 큰 언니와 친정엄마 같이 잘 챙겨주기로 소문이 났다. 밭에서 가꾼 채소를 챙겨서 부대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고 아픈 가족들이 있으면 호박죽을 직접 쒀서 가져다가 주며 힘들어하는 가족들이 있으면 밥도 사주면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자주 해줘서 간부 가족들이 좋아하고 격의없이 따랐다고 한다. 배우자와는 포병학교에 있을 때 소개를 통해 만났다.
  • 비육사 출신의 대장 티오를 두고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던 학군 26기 박양동 육군군수사령관과는 함께 전역하게 되었고, 일단은 유임된 3사 동기 정철재 육군교육사령관과 학사장교 출신 소영민 육군특수전사령관도 해당 보직을 마지막으로 전역할 것으로 보인다. 비육사 출신 대장 티오는 중장 진급 후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아 후보군에도 없던 신희현 장군이 가져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정권 교체 후 군 인사에서 육사 44기 참모총장에 45기 지작사령관/연합사부사령관 체제가 완성되어 나머지 2작사령관 자리에도 45기와 동기급인 신희현 장군이 들어가고 그보다 선임인 비육사 중장 4명은 배제되었다.

5. 관련 문서



[1] 석사 학위 논문: 韓·美 軍事同盟關係의 發展方向 : 韓·美 相互防衛條約과 安保協議機構 및 軍事指揮體制를 中心으로 (2002)[2] 동기로 이인영 국회의원이 있으며, 군 관계 인사로 1년 선배인 유무봉 전 국방부 국방개혁실장, 3년 후배로 윤병호 공군참모차장이 있다.[3] 1998년 이전의 육군3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지금처럼 전문대 졸업생 또는 4년제 대학 2년 이상 수료자가 편입학하는 방식이 아닌 입교 후 오로지 군사훈련만 받고 임관하였기에 소대장을 마친 후 중위때 2년간 3사관 학사학위과정 교육을 받았으며 입교기준으로는 88군번과 같이 인사관리가 이뤄지는 동기그룹(year그룹)이며 진급 시기도 이들과 같다. 이 기준으로는 김현종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육사 44기), 박양동 제6군단장(학군사관 26기) 등과 동기라고들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엄연히 임관년도 기준으로는 선배다. 임관년도 기준 동기가 김승겸 전 합참의장.[4] 후술할 간증 인터뷰에서 언급하지만 원래 대령 진급이 잘 나오는 요직 부서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30사단에서 핵심 참모를 맡고 있다 보니 훈련 끝나고 가라고 붙잡았고, 훈련이 끝나고 보니 원래 가기로 되어 있던 자리엔 이미 다른 사람이 가 있고 본인은 한직인 지통실로 보내져 낙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여가 시간이 많이 나오는 보직에서 목 디스크 치료도 하고, 주에 한 번 하는 총장 배석 브리핑을 맡아 평소 자신 있던 영역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하여 대령 1차 진급을 했다고 한다.[5] 준장 진급률이 높은 요직이다. 똑같이 포병 대령급 요직인 합참 화력과장과는 달리 비육사에게 개방된 보직이기도 하다. 당시에도 브리핑을 했었는데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김현집 사령관이 보고는 참모들에게 ‘야, 저 허강수는 왜 아직 장군이 안됐냐. 장군으로 내보내라’고 했다는 거다.[6] 후임 여단장 이귀우 준장은 육사 41기로 7군단에서 짬밥 넘버원이었다. 당시 군단장인 윤의철보다 2년 선배. 그리고 허 장군 본인이 군단장에 취임하면서 전역신고를 받게 되었다.[7] 허 장군이 여단장을 맡았을 적 군단장은 이종섭 장군이었다. 이종섭 장군은 허 장군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이 때문에 허 장군은 소장 진급에 성공했다.[8] 전임은 김정수, 후임은 정해일[9] 무려 31개월 간 지휘관을 지냈다. 긴 기간 안정적으로 군단을 이끌며 능력을 보여줬기에 정권 교체 후 육사 위주의 인사 기조로의 복귀와 기수 물갈이만 없었다면 대장 진급도 노려볼만 했으나 좌절되었다. 전임은 윤의철, 후임은 고현석[10] 육군에서 포병부대 중대장을 포대장이라고 한다.[11] 본인은 매일 10km구보를 개인적으로 시행했다.[12] 심지어 본인과 똑같은 포병 출신이다. 다만 소위 임관은 허강수가 3개월 빠르다.[13] 윤의철 시절때는 반대로 참모들이 7군단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많았다고 한다.[14] 청와대에 몸담은 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