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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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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사건 이후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강표사건.jpg
1949년 5월 월북 환영대회에서의 강태무(左)와 표무원(右)
1949년 5월 4일부터 5월 5일에 걸쳐 대한민국 국군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제2대대장 강태무 소령의 주도로 제1, 2대대 장병 380여 명이 삼팔선을 넘어 월북한 사건. 8.15 광복 이후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의 월북 사례는 박헌영남로당 간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월북이나, 1948년 홍명희, 이극로남북연석회의를 통한 중도파들의 월북, 그리고 김일성이 직접 초청한 전문가 집단의 월북 등이 있었다. 물론 군인들이 개별적으로 월북하는 사례는 이 사건 말고도 종종 있었으나, 이 사건은 국군 장병들이 수백 명 단위로 월북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월북 사례다.[1]

2.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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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무는 1925년 경상남도 고성군 출생으로 친형 강태열은 남로당 간부를 역임하다가 후에 월북한 공산주의자였다. 릿쿄대학을 졸업하였고, 해방 이후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무렵, 강태열이 김창숙에게 자신의 동생을 소개하면서 강태무는 김구의 추천장을 받아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표무원은 1925년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 출생으로 일본특별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 부사관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국군준비대에 가입하여 대구 지구대에서 활동하다가, 제6연대의 창설에 참여했던 하재팔 참위의 추천으로 입대하였다.[2] 표무원은 6연대에 자원 입대하여 김종석[3] 정위 중대의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최남근 부위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같은 동년배에 같은 기수, 성향까지 비슷했던 강태무와 표무원은 이후 서로 친구로 지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발하자, 군은 즉각 정보국과 정보국 특별조사국, 헌병대를 통하여 좌익 계열로 보이는 군인들을 모조리 체포했는데, 체포된 군인들은 각 연대 주둔소에 마련된 수용소와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 광주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 헌병대와 조사대는 이 군인들에게 각종 고문을 한 뒤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먼저 대전군법회의에서는 11월 12일 형무소에 수감된 3,000여명의 군인들 중 100명을 뽑아 재판을 했다. 당시 재판의 형식은 형무소 창고에서 재판을 열고, 이면지에 작성된 형량을 낭독하여 형을 확정하는, 이른바 즉결처분 형식이었다. 이 때문에 재판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대전군법회의에 회부된 100명의 군인들 중 80명이 사형을, 15명이 무기징역을, 5명이 징역 5년을 언도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형을 언도받은 군인들은 얼마 안 가 형무소 뒷산에서 집단 총살됐다. 이같은 무분별한 재판으로 인해, 최소 300명 가량의 군인들이 즉결처분됐다. 전체적으로 볼 때, 1,000명에 육박하는 군인들이 이 과정에서 총살됐다. 숙군으로 인해 파면된 군인의 숫자가 총 4,000여 명인 걸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수치였다. 이러한 무차별한 학살로 각 부대 장병들은 공포에 빠졌는데, 말 잘못 했다고 좌익으로 몰려 순식간에 사형장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령으로 진급하여 8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한 표무원과 2대대장으로 부임한 강태무도 숙군 과정에서 백선엽 대령의 숙군 조사반의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8연대장을 거쳐갔으며,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좌익 장교 최남근, 오일균[4]과 관련이 있으며, 공산당에 가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좌익 배경을 가지고 있고, 평소 정부와 군에 불평불만이 많은 불평장교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에게 두 사람의 구속을 건의했으나, 이응준은 두 사람이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고, 삼팔선 경비를 맡은 전방부대 책임자인 만큼 교육 중인 8기생들이 임관, 배치된 다음에 조사하라고 보류시켰다.[5]

피비린내 나는 숙군 과정에서 강태무는 자신이 다음 숙청 대상으로 지목될 것을 두려워했다. 여순사건 직후, 육군본부와 헌병대에서 자기 대대를 방문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으며, 월북한 친형 강태열에게 '겁이 나서 군에 못 있겠다'고 말하며 숙군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냈다.[6] 표무원도 숙군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1949년 5월 4일 강태무와 표무원은 자신의 부하들을 제물로 삼아 월북을 감행했다.

3. 전개

파일:월북환영식.jpg
평양역에 도착한 월북 장병들과 환영하는 시민들

5월 4일, 춘천에 주둔 중이던 1대대장 표무원은 '야간전투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로 대대 병력 455명을 소집하고 곧바로 북한으로 이동해 38선을 넘었고, 미리 내통한 북한군이 부대를 포위하자, 자진투항하는 방식으로 월북했다. 다음날인 5월 5일에는 홍천에 주둔 중이던 2대대장 강태무가 '연대의 작전명령으로 북한군을 공격한다'는 구실로 대대 병력을 속인 후[7] 병력 300여 명을 이끌고 인제로 이동하여 표무원과 같은 방식으로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흥미롭게도 표무원이 지휘한 1대대는 탄환을 가지지 않고 38선을 넘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대대장 표무원이 월북할 때 휘하 장병들이 월북을 거부하고 저항한다는 선택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북 낌새를 눈치챈 일부 장병들은 월북을 거부하고 탈출을 감행하였는데, 제1대대에서는 2중대장 최동섭 중위와 화기중대장 한정희 중위의 인솔 아래 239명이, 제2대대에서는 8중대장 김인식 중위가 이끄는 8중대와 5중대, 7중대 소속 몇몇 장병들, 총 143명이 항전 끝에 포위망을 뚫고 귀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나머지 장병들은 그대로 월북해 북한에 정착하였다.

한편, 두 부대의 상급부대인 8연대에서는 5일 새벽에 탈출한 장병들이 부대에 복귀하여 두 대대장의 월북 사실을 보고하고 나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보고를 받은 8연대장 김형일 중령은 삼팔선으로 달려나가 마이크에 대고 복귀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두 대대장의 월북 사건 직후 북한의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국방군 제6려단 8련대 소속 춘천 제1대대 대대장 표무원씨의 지휘 하에 전 대대가 조국과 인민에게 복무할 목적으로 5일 새벽에 의거, 소지하였던 장총 미국식 카뱅총(M-1 카빈 소총),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등 무장을 전부 휴대하고 동 5일 4시에 화천 방면으로 입북했다. 같은 날 새벽에 홍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2대대 대대장 강태무씨의 지휘 하에 전 대대가 의거하여 역시 자기가 소지하였던 미국식 무장 전부를 휴대하고 5일 5시 30분경에 38선 이북 린제군 방면으로 입북했다.

당시 남한 언론들은 남한 병사들이 표무원과 강태무의 모략에 빠져 월북한 병사 대부분은 귀환하고 현재도 계속 귀환 중에 있다는 보도를 했다. 심지어 "월북한 병사들이 표무원과 강태무의 모략에 빠진 것을 알고 단호하게 인민군과 혈투하거나 또는 산중에 피신하며 생명보다 중대하게 여기는 무기를 휴대하고 기회를 타서 육박전을 전개하며 귀환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으며 2일 뒤에 월북인 명단을 발표함과 동시에 월북한 이들 중 최소 절반 이상이 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즉, 전원 월북했다는 북한의 발표를 과장이라고 치부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런 식의 축소보도를 한 것이다. 절반에 가까운 장병들이 탈출해 귀환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 언론들의 보도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4. 사건 이후

표무원과 강태무, 그리고 그 부대원들은 이북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7일 오후 1시 평양에 도착하여 30만여 명의 평양시민들이 모인 군중대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월북한 병사들은 9일 오후 조선중앙방송에 출연하여 한국군과 이승만을 비방하는 방송을 했으며, 이들 장병들은 1949년 7월 12일 성대한 인민군 편입식과 함께 조선인민군에 정식 편입됐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표무원과 강태무는 제766유격연대(연대장: 오진우) 소속 대대장으로 참전했고 1951년 포로수용소에 강사로 파견되어 국군 포로들을 상대로 "해방전사로 인민군에 편입하라"는 전향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2년에는 국군 포로 출신들로 구성된 조선인민군 제22여단(여단장: 송호성) 소속 대대장을 맡기도 했다.

표무원과 강태무 둘 다 이후에도 북한에서 살았고, 2000년대 이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표무원은 1992년까지 재북평통 서기국장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됐고, 1999년 연합뉴스의 이산가족 관련한 보도에서 언급되기도 했으며, 2006년 4월 15일 사망했는데, 이 날이 공교롭게도 김일성의 94번째 생일이었다. 강태무도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살았고, 1953년 8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80년 쯤에 제작된 북한의 기록 영화 ‘조국해방전쟁사 1부’에도 출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저는 남반부에서 치욕스러운 괴뢰군살이를 하다가 우리민족을 영원히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는 미제의 침략정책과 리승만 괴뢰도당의 반인민적 테러통치의 불만을 품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1949년 5월 5일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계시는 공화국 북반부로 뜻을 같이하는 대대전원을 대리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나, 남반부 인민들과 애국적 군인들의 거세찬 반미국 투쟁을 유혈적으로 탄압하는 놈들의 야수적 만행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05년 3월 15일 조선중앙TV에도 모습을 비추었으며, 북한은 그의 80세 생일을 축하해 줬다. 2007년 6월 17일 사망했다.

강태무와 표무원 이외에 6.25 전쟁 이전의 월북 사례로는 국방군 제1사단 11연대 소속 1개분대의 월북(1949년 9월), 7사단 9연대 2대대 1등 상사 리성결(1950년 3월) 등의 입북 사건이 있다.

한편, 남한에서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두 대대의 상위부대 지휘관인 제6여단장 김백일 대령과 제8연대장 김형일 중령이 직위해제당했다. 이응준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채병덕이 임명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항공기를 비롯한 미국으로부터의 각종 무기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주장했는데, 동시에 여순사건 이후 좌익 계열 군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음에도 월북 사건이 발생하자, 신성모는 '국방군이 금후로는 여사한 소란이 없도록 숙군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비상수단을 취하겠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는 숙군을 다시 한 번 실행하겠다는 의지였으며, 결국 대대적인 2차 숙군이 실행되어 2,5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체포되어 수감됐으며, 군법회의에서 대부분 파면 조치되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1] 이 사건 이전의 월북 사건으로는 1948년 5월 7일 남조선 해안경비대 소속 해경선이 월북한 사건이 있다.[2] 하재팔은 일본군 학병 소위 출신으로 좌익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해방 직후 대구에서 국군준비대를 조직해 참모장을 하면서 좌익 청년들을 규합했다. 미군정이 국군준비대를 불법화하자 육사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1기로 입학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했고, 정식으로 6연대 창설에 참여했다. 창설 과정이 과정인 만큼 6연대는 남로당 세포들이 많이 침투된 부대였는데, 여순사건 전후로 6연대 소속 장병들이 세 번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고, 결국 군은 숙군 과정에서 6연대를 해체한 후 22연대로 재창설하는 식으로 재편성했다. 하재팔도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본군 대위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해방 이후, 국군에 참여해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5여단 참모장 등 고위 장교로 활동했다.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 계열 군인임이 발각되어 1949년 8월 처형당했다.[4] 역시 남로당 계열 군인으로 육사 3기 생도대장으로 있으면서 육사 3기가 좌경화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5연대 2대대장으로 제주 4.3 사건 당시, 남로당 유격대 토벌을 위해 제주도로 왔을 때, 김달삼에게 토벌대의 정보와 무기 등을 제공하는 등 프락치로 활동했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1949년 8월 2일 처형되었다.[5] 이후 백선엽이 이응준을 찾아가 강태무와 표무원이 월북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는데, 이때 이응준은 크게 격분하며 백선엽에게 '그것도 몰랐느냐'고 호통을 쳤고, 이에 백선엽이 억울하다며 이응준이 거부한 영장신청서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즉석에서 사표를 썼다고 한다.[6] # 박갑동이 탈북 이전 강태무와 나눴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당시 숙군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다.[7] 여담으로, 당시 2대대 소속 중대장 중 1명이 바로 10.26 사건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였다. 이때 정승화는 월북 계획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작전에 자신의 중대도 참여하겠다고 자청했는데, 강태무는 정승화를 데리고 가면 월북 과정 중에 트러블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전 중대가 다 나가면 대대는 누가 지키나? 자네 중대는 남아있게"라고 권고하여 정승화와 그의 부대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걸 피할 수 있었다.[8] 당시 한정희 중위의 진술조서를 일부 살펴보면, 이동 도중 대대장이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포위됐다. 저항해보았자 피해만 날 터이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고 지시했고, 이에 부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북한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