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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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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 모표
파일:조선경비대.jpg
조선경비제1연대
1st Korean Constabulary REGT[1]
朝鮮警備隊
Korean Constabulary

1. 개요2. 역사3. 계급4. 역대 사령관5. 규모6. 관련 문서

1. 개요

1946년 1월 15일, 미군정하에서 준군사조직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2]가 창설되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현 대한민국 국군, 세부적으로는 대한민국 육군대한민국 공군의 모체가 되는 조직으로, 1946년 6월 15일에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로 개칭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1948년 9월 1일자로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며 9월 5일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하였다.[3] 이름의 '경비대'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 Reserve)를 뜻한다.

건군기 항목의 조선경비대란에서 본 항목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33711864.jpg

조선국군준비대처럼 독립 직후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단체가 60개를 넘을 정도였다. 미 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훗날 대한민국 해군이 될 해방병단을 제외한 모든 사설 무장단체들을 해체시키고 19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열었다. 이 학교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 입학자 상당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4] 오랜 통치로 인하여 조선인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람이 20만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정한 교육을 거친 뒤에 소위로 임관하였고 영관이나 장관급 장교가 없는 당시 한국군의 특성상 빠르게 진급했다. 영관급은 특례로 몇몇만 임관했다. 일본경찰예비대미 육군 고문관을 지휘관으로 두고 모든 최초 입대자가 이등경사 계급을 받은 것과는 차이 나는 점이다.

미 군정 초기에 미국소련과의 갈등을 피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에 정규군 대신 기존의 경찰[5]에게 치안을 맡겨두었고 이는 조선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찰예비대였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아니라 폭동진압훈련 등 경찰과 비슷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장교들이 대부분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었기에 실제로는 군대식으로 훈련이 치러졌다.[6] 사실 미 군정도 일단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만든 것이라서[7] 1947년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소련관계가 틀어지자 조선경비대가 1948년대한민국 육군으로 탈바꿈하는 걸 묵인했다. 차후 1949년 10월 1일에는 육군 항공대가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하게 된다.

2. 역사

미 군정기 1946년 1월 15일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같은 날 태릉에 제1연대가 창설된 걸 시작으로 1월 29일 부산에 5연대, 2월10일 충북에 7연대, 2월 15일 전남에 4연대, 2월 18일 대구에 6연대, 2월 26일 전북 익산에 3연대, 2월 28일 대전에 2연대, 4월 1일 강원 춘천에 8연대, 11월 16일 제주도에 9연대가 연이어 창설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연대급 병력으로 창설된 건 아니었고, 각 별로 중대 규모로 시작해 현지모병과 타 부대에서 병력들을 규합해 대대, 연대로 확장시킬 계획이었다. 예컨데 1연대 A중대(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 중대장은 채병덕 정위로 총 인원은 187명이었고 경비대 사령관은 미 육군 중령인 존 마샬이었다. 창설 인원은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훈련소에 주둔했다.

1946년 6월 15일엔 조선경비대로 개칭된 뒤 9월에 첫 한국인 지휘관인 이형근이 사령관 대리로 임명된 뒤 이듬해인 1947년 2월 1일 한반도 남쪽을 각각 담당할 1,2,3 여단이 동시에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에 국방부 산하로 들어가고 9월 5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되었다. 11월 3일부턴 국방부 산하에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탄생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뒷자리 여단들도 창설되었고, 기존 여단의 연대들이 차출되어 기간(基幹) 부대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마지막 국방경비대 출신 제대자는 현지임관 출신으로 1983년 10월 31일에 전역한 최갑석 2군 부사령관과 이명구 38사단장. 당시는 12.12 쿠데타 세력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어 육군참모총장은 육사 10기 출신 황영시(1951년 임관)였다.

3. 계급

처음엔 대한제국군의 정부참을 따랐으나 계급이 어렵다고 1946년 12월 1일 대중소로 바꾸었다. 처음엔 장성급 호칭이 없었으나 1947년 2월에 손원일송호성이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생겼다. 관련글
구분 개편 전[11] 개편 후[12]
장성급 장교 없음 대장[13]
중장
소장
준장[14]
영관급 장교 정령
부령
참령
대령
중령
소령
위관급 장교 정위
부위
참위
대위
중위
소위
하사관 대특무정교
특무정교
정교
특무부교
부교
참교
특무상사
일등상사
이등상사
일등중사
이등중사
하사
사병 일등병사
이등병사
일등병사
이등병사

4. 역대 사령관

직책 대수 인물 재임기간
경비대 총사령관[15] 1대 미합중국 육군 중령 존 마샬(John T. Marshall) 1946. 1. 15-1946. 2. 5
2대 미합중국 육군 대령러셀 베로스(Russell D. Barros) 1946. 2. 5-1946. 8. 15
사령관 대리 남조선국방경비대 참령 이형근(李亨根)[16] 1946. 9. 28-1946. 12. ?
3/4대 남조선국방경비대 중령 송호성(宋虎聲)[17] 1946. 12. ?-1948. 8. 15
5대 남조선국방경비대 대령 이응준(李應俊)[18] 1948. 8. 15-1948. 12. 15
경비대 육군사령관[19] 1대 원용덕[20] 1946. 1. 15-1946. 12. 13
2/3대(총사령관 겸직) 송호성 1946. 12. ?-1948. 11. 20
4대 이응준 1948. 11. 20-1948. 12. 15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21] 1대 손원일 1946. 6. 15-1948 8. 15
경비대 항공대 사령관[22] 1대 최용덕 1947. 7. ?-?

5. 규모

1946년 1월 15일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땐 187명 규모였고 한국인 가운데 최고계급자가 정위(대위)였다. 다만 곧 이응준이 대령(정령)으로 임관한다.

1948년 12월 7일에 보병 5개 사단(15개 연대) 규모였으며 장교 1,403명, 부사관/병이 49,087명으로 50,490명 규모였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육군의 상한선은 6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장비 규모는 장갑차 27대, 57mm 무반동총 140정, 2.36인치 로켓포 1,900문, M3 105mm 야포 91문이며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엔 규모를 계속 키워 94,974명에 8개 사단(22연대) 수준이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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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giment, 즉 연대의 약칭이다.[2] 약칭 국방경비대. 조선국방경비대(朝鮮國防警備隊)라고도 한다.[3] 대한민국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모체로 하며,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에 조선해안경비대(朝鮮海岸警備隊)로 개칭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해군이 된다.[4] 당시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에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광복군 출신들이 균등하게 참여하기를 바랬으나 상당수의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에 부정적이라 소규모만 참여하였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사회주의권과 인력풀이 있는 지역과 가까웠기에 충원과 지원이 쉬웠다. 그런 그들도 군 경력자가 절실하여 일본군 출신들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특히 북한 공군 조직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다수였다. 이는 일본군 출신들이 소수였던 남한의 공군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다.[5] 해방 직후에 23,000명 규모였다.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경찰이 그대로 인수되었다.[6] 아예 백선엽각개전투 등을 시킨 탓에 경찰처럼 훈련하라는 미국 고문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7] 북한의 경우는 조선인민군의 역사란에 잘 설명되어 있지만 이미 더 본격적으로 정규군을 창설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8] 1948~49년 사이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외는 제3보병사단 22연대로 합병시켰다. 참고로 대구 10.1 사건 수년 후에 일어나서 별개의 사건이다.[9] 정확히는 10연대를 기간연대로 8사단이 창설되었고, 이후에도 8사단 예하에 있었지만 2017년 11월 30일에 해체됐다.[10] 다만 (구)수도사단으로 승격될 때 현 수도사단의 전신인 수경사로 보냈기에 좀처럼 언급되지는 않는다.[11] 1946. 1. 15. ~ 1946. 11. 30.[12] 1946. 12. 1. 이후[13] 최초의 대장 진급자는 1952년에 진급한 백선엽이었다. 1946년에 소위로 임관해서 6년 만에 대장 진급.[14] 최초의 준장 진급자는 손원일과 송호성이며 중국 중앙군 소장 출신인 김홍일특별임관으로 준장으로 임관했다.[15]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현재의 합참의장이나 국방참모총장이라 볼 수 있다.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총참모장과 비교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보다는 통합군사령관에 더 가깝다.[16] 1920-2002.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번을 받은 걸로 채병덕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유는 채병덕도 1번을 노리고 있어서. 5대 총사령관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이다. 최종 계급은 한국군 육군 대장이다.[17] 1889-1959. 김구의 측근으로 육군 창설 후 사단장 등을 지내다가 김구의 암살 이후 납북된 뒤에 조선인민군 여단장 등을 지내다가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유배됐다.[18] 1891-1985.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군 대령(대좌)으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최종계급은 한국군 육군 중장이다.[19] 현재의 육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20] 1908-1968. 만주군 중령(중교)이었다. 만주군에선 군의관이었다. 최종계급 한국군 육군 중장.[21]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22] 현재의 공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