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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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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년 5월 2일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면 수기옥정
(現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
사망 1966년 5월 14일 (향년 85세)
본관 탐진 최씨
오방
부모 아버지 최학신
어머니 국씨(생모)·공씨(계모)
형제자매 3남[2] 5녀 중 차남[3]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대한제국기2.2. 일제강점기2.3. 광복 이후의 행적
3. 기도론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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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장로회 목사,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대한제국기

1881년 5월 2일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면 수기옥정에서 최학신과 국씨 부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5살 때 모친을 잃고 계모인 공씨 슬하에서 자랐고,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청년 시절 장터에서 '주먹'으로 유명했다고 하며,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에 강명환과 결혼했다. 그의 집안 내력은 분명하지 않지만, 차종순의 <호남교회사의 복음적 사회운동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광주의 부유층 자녀로 태어나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09년 나환자 보호시설에 1천여 평을 기증하기도 한 것을 보면 광주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 12월 25일 유진 벨 선교사 사택에서 열린 광주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여 기독교 신앙에 감화되었고, 1907년 세례를 받아 최흥종으로 개명했다. 한편 1905년 광주군 경무청의 순검이 되었다. 이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김윤수가 총순을 지낸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최흥종은 의병장 안규홍의 부하 12명을 화순에서 압송하던 중 몰래 풀어줬고, 순창에서 총살형을 당할 예정이던 의병 6명을 감옥에서 풀어줬으며, 의병장 백낙구, 이백래, 임창모 등이 수감되었을 때 따뜻하게 돌봐줬다. 또, 의병장 채기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자 미리 그에게 알려줘 도망치게 했으며, 보성의 의병장 임창모의 부하 10여 명도 계책을 세워 풀어줬고, 의병장 백낙구와는 감방에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최흥종이 이렇듯 의병들을 풀어줬다는 내용은 김천배의 <물이 '포도주' 되어>와 문순태의 <성자의 지팡이>에서 나와 있지만, 체포된 의병 10여 명을 압송 도중에 달아나도록 도와주고, 투옥된 의병 6명이 감옥에서 빠져나가게 했는데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호남의병 관련 자료나 연구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최흥종이 순검으로서 의병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후원했을 가능성은 있다. 한편, 그는 1907년 3월 조직된 대동의상회의 발기인을 맡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40전을 의연했다.

문순태의 <성자의 지팡이>에 따르면, 최흥종은 국채보상운동 전남지부 간판을 떼어오고 주동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날 아침 순검 사직서를 써서 경무고문 책상에 올려놓고 직위를 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경찰이나 군인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그가 국채보상운동 때문에 순검을 사직해야 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아마도 을사조약, 정미7조약을 거치며 경찰이 일본의 수괴로 전락하여 의병을 탄압하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껴 순검을 사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주농공은행에서 잠시 직장 생활을 하다 사직하였고, 1908년 3월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로버트 M. 윌슨의 어학선생 겸 광주선교진료소 조수로 취직했다. 같은 해 양림리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1909년 4월에는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윌리 W. 포사이드를 만나 감화를 받고 더욱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한다.

2.2. 일제강점기

한일병합 후, 최흥종은 광주선교진료소에서 발전한 광주제중원의 사무인으로 재직하였고 1912년 나환자교회인 봉선리교회의 설립에 참여했다. 같은 해 북문안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며, 1913년에는 북간도 선교사를 지원했으나 노회와 총회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광주교회 수은'을 교계신문에 실었고, 1914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광주제중원에 계속 근무했다.

1919년 당시 '야소교 전도사'였던 그는 김필수, 김철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국기열의 주선으로 김범수를 만나 광주에서의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했다. 이후 경성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하여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조선신문>이란 유인물을 나눠주며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했다. 이어 대한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조선독립'이라 쓰여진 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3월 5일 체포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판사에게 자신이 평소 한일합방에 대해 반감을 갖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선인의 대우가 틀리다는 것, 교육제도가 불완전하다는 것, 참정권이 없는 것, 총독의 정치는 무단정치로서 일선인이 동화되지 않는다는 것” 등에 대한 불만도 품고 있었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전국을 돌며 조선의 독립에 강연하려고 계획했고, 고종이 붕어한 뒤 국장 구겸을 겸해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한 연설을 하기 위해 3월 1일의 시위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3월 2일 상경하여 시위에 참가, 인력거 위에 올라가 연설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당국에 대한 불평과 민족자결주의 취지를 설명하면서도 "조선의 독립은 배일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며, 조선과 일본은 어디까지나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판사가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고 묻자, 최흥종은 "나는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어쨌든 나로부터 독립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전도에만 전념하며 종사하고 정치에는 관계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1920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수형자 인물카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9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6월 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를 맡으며 유치원을 교회 내에 설립했다. 1920년 8월 창립된 조선노동곤제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9월에 열린 전국회의에 참여했다. 일제는 그런 그를 경계하여 1921년 1월 '갑종 요시찰인물'로 지목했다. 1921년 6월 서정희 등과 함께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개선임원 선정위원'으로 위촉되었고, 7월에는 광주지회에서 "노동자의 행운"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9월에는 광주 최초의 청년단체인 광주청년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북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같은 해 광조 YMCA 회원들과 함께 일본산 마약인 모루히네의 해악을 선전하여 유통을 억제하기 위한 '모루히네 방독회'를 조직했다. 그해 3월 시베리아 선교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그는 그해 9월 총회 참석차 일시 귀국했는데, 동아일보 1922년 10월 1일자 기사에서는 그를 "전남청년계의 추앙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일제 당국도 기독교 선교에 전념하는 그를 "점차 사상이 온건해져서 하등 용의점이 없다"라고 평가하며 경계를 풀었다.[4] 1922년 6월 조선에 귀국하여 광주, 전주, 영광, 담양, 군산, 목포, 여수, 마산, 부산 등지를 순회하며 시베리아 선교보고회를 열었다.

귀국 후 광주 북문안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잡지 <청년> 1923년 9월호에 <과도기의 현상>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킬 때 이스라엘의 신인 야훼가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렸다고 예시하며, "필경은 군벌을 홍해에 매장하고 소약민족이 자유를 득하야 민족자결이 발생한 것이니, 그 시기의 징조는 늘 계속하여올 것이다. (중략) 장래 과도기에도 권력주의를 불근 바다에 매장할 것슬 예표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을 이집트, 조선을 이스라엘에 비유하여, 장차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조선 민족이 군국주의 일제로부터 독립할 것을 소원한다는 걸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었다.

1923년 9월 서정희와 함께 광주소작인연합회 대표로서 소작인 이동방지 등 7개 항에 대해 당국과 교섭했다. 1924년 3월에는 전라노농연맹 발기회에 광주지한면소작인회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5년 1월에는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면화공동판매 개선이 시급한 문제"이며 "부정간책을 철저히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1924년 6월에는 광주 YMCA 주최 6단체 후원을 4개 교회에서 열린 예정인 무산아동을 위한 단기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주 YMCA 회장을 겸임했다. 이 밖에 광산회 총무(1923), 서선 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보고 창립 기성위원(1926), 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했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26년 1월 광주청년회 회원들이 노동공제회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최흥종은 양측 책임자들을 불러 화해를 주선했다고 한다.[5]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를 맡아 출국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적로퇴거 명령으로" 4월에 귀국했다. 이후 10월 14일에 열린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준비위원회에 참석하여 취지 설명을 하고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9일 열린 창립총회에서 제1대 지회장에 취임했다. 이 총회에는 수백 명이 참석했으나 내빈들의 축사는 일경의 제지로 금지되었다.

최흥종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 모두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좌우연합'을 추구하는 신간회의 광주지회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근거지인 광주 YMCA의 지도자였으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하고 광주소작인연합회, 전라노동연맹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게열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27년 10월 31일 신간회 광주지회 제1회 임원회를 주관했고, 1928년 12월 제2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에 연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활동이 부진하여, 1928년 8월 남녀유학생 20여 명을 초청하여 환영회를 연 것 외에는 별다른 사회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을 맡았으며,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이사, 사립보통학교유지방침연구회 위원,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 등을 맡았다.

1929년 3월 9일 신간회 광주지회 정기간사회가 열렸으나 그는 불참하고 부회장 정수태가 사회를 맡았다. 이후 광주지회는 부회장 정수태가 주도했고, 최흥종은 신간회에서의 활동을 일체 중단했다. 그가 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간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간의 갈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29년 6월 전남노회는 최흥종을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했고, 그는 이에 따라 7월 광주를 떠나면서 광주지회장을 사임했다.

모슬포교회에 부임한 최흥종은 목회에 전념하였고, 1930년 11월 제주노회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러던 1930년, 또는 1931년경 여수의 조선나환자공제회 회장 이종수가 그를 찾아와 나병 환자를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이후로는 사회 및 정치사업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금일로 나환자들과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1931년 7월 '수토불복증'을 이유로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를 사임하였고, 9월 조선나병환자구제회를 설립하였고, 다시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를 조직했다.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연구회 실행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0월 김병로의 사회로 열린 제1회 실행위원회에서 위원장에 윤치호, 상무위원에 최흥종이 선임되었다. 실행위원에는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여러 종교인사들이 있었으며, 김성수, 박승직, 현준호 등 자산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구제회와 연구회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흥종은 2,800원 모금에 나섰고, 2,700원을 기부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여의치 못했고, 결국 1932년 6월 서울의 나환자 30여 명을 데리고 여수 예양원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는 나환자 구호운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33년 4월 총독부를 방문하여 경무국장과 위생국장을 면담하면서 나환자를 위한 6개항을 진정했다. 또 1934년 10월 광주지역 유지들로 조직된 계유구락부에서 "종교와 일상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러던 중 1935년 9월 25일 서울로 올라가 세브란스병원 의사 오긍선으로부터 거세 수술을 받았다. 그가 자기 생식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단행한 까닭은 모든 세속적인 욕심과 단절하고 오로지 나병 환자 구호에 매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고 한다.[6]

이후 목포에 머물면서 나환자 구호활동에 매진하였고, 1936년 2월 목포에서 안창호와 동행하여 순천에 와서 신풍리의 나환자치료소를 안내하기도 했다. 그해 3월 광주농업실습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했고, 6월 광주 YMCA 유도, 권투부원들과 함께 기념촬영했다. 1937년 1월 이른바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해 모든 외부 활동의 중단을 선언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오만자, 사회에 대하여 방임자,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 국가에 대하여 방기자,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 소위 오방을 제창하면서도 명실이 부합한 가면극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상사에 관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십자가의 구주 예수만 신뢰하고 범사에 예수의 교훈으로 생활할 것을 맹약하고 이제는 생사간에 예수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상사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이외다. 가족적 행렬에서나 윤리적 예의에서나 사회적 규범에서나 제외자요, 출척자요, 폐기자로 인간사회에 무용의 일종 폐물이오니, 금일 이후로는 사망자로 인정하시고 모든 관계와 통신을 단절하여 주심을 통고하나이다.
1937년 1월 모일 오방 최흥종 근고.

그는 사망통지서를 작성한 이유에 대해 츠카모토(塚本虎二)가 1936년 5월 <성서지식>에 기고한 "사망통고문"과 <성서조선> 1936년 10월호에 기재된 <가사망>을 읽고 자극을 받아 자기도 사망통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기성교단에 회의를 느끼며 무교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도암의 성자라 불리던 이세종의 영향을 받고, 이세종이 추구한 "세속과 절연하고 성경을 바탕으로 금욕, 청빈, 생명경외, 탁별수행 등 수도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최흥종은 사망통지서를 발표한 직후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재촉함>이라는 글을 <성서조선>에 기고해 교역자들의 타락을 맹비난하고, 순진한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후 무등산 중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 빈민, 걸인들을 위한 활동에만 전념했다. 다만 1944년 5월 전남도지사에 요청에 따라 동생 최영욱 등 의사들과 함께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100명을 모집해 교육하였다.

2.3. 광복 이후의 행적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국기열의 자택에 모인 광주 인사들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최흥종이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적임자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은거 중인 그를 찾아가 위원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최흥종은 이를 사양했지만, 이튿날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건준 결성식에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다가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고 한다.[7] 그러나 위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불과 17일뿐이었고, 이후 건준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어 9월에는 우익 계열단체인 고려청년당 창립준비회 고문으로도 추대되었다. 1945년 11월 초대 전남도지사에 선임된 동생 최영욱의 부탁을 받아들은 미군정으로부터 제1회 도지사고문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미군정이 그를 고문회 회장에 앉힌 것은 전남에서 명성과 신뢰가 높은 그를 발탁해 도지사고문회에 대한 지방민들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한다.[8] 이어 1946년 2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에 전남대표로 참석했다.

1946년 9월 24일 김구가 삼남 지방 순회하던 중 광주를 방문했다. 이때 김구는 대성초등학교에서 강연했는데, 이 자리에는 한국독립당 전남도당 위원장 신순언과 최흥종, 허백련 등도 참석했다. 김구는 또 중앙교회에서도 강연했는데, 최흥종이 중앙교회의 초대 목사였으므로 이 자리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1948년 9월 30일 다시 광주를 찾은 김구는 10월 3일 무등산 오방정을 찾아 최흥종과 면담했다. 이때 김구는 최흥종에게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휘호를 써줬으며, 상경한 뒤 바로 편지와 함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보내줬다.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넉넉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또한 김구는 편지 말미에 "최흥종 노선생 존념"이라 적어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차종순의 <호남교회사의 복음적 사회운동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하자 최흥종은 100일간 묵언했다고 한다.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회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했고, 1950년 1월에는 우익계열단체인 대한국민당 전남도당부 발대식에서 광주시당부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이렇듯 그는 해방정국기에 여러 직책을 맡았으나 곧 사임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단체 결성의 초석이나 가교의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하고 투신할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그는 병자, 빈민을 위한 구호 사업과 교육 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1945년 9월 한국나예방협회를 조직했고, 1948년 3월에는 증심사 객사에 광주국민고등학교(삼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인 호혜원과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동원, 결핵환자 치유를 위한 백십자여명회 등을 설립하고 환자들과 동고동락했다. 또한 1951년에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이 추대되었다.

임락경은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삼인, 2005)에서 1961년경 최흥종 목사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나 이현필 선생님보다도 더 앞서신 최흥종 목사님꼐서 1961년에 하신 첫 설교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석가도, 공자도 모두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보수 중에 보수적인 신앙을 지니고 교회 생활을 했었고, 어설픈 전도사들의 가르침만 받아왔었다. 석가는 마귀대장이고, 유교는 빨리 없어져야 하고, 부처는 때려 부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내가 최흥종 목사님 설교 한 마디로 불교, 유교와 친하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님이 "석가, 공자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나 혼자만 설교를 듣고 있지 않았다. 장로님은 물론이고 원근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모여든 이들도 있었다. 결핵이 무식한 사람만 걸리는 병이 아니다. 통계로 보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폐결핵에 더 걸린다. 그 환자들 중에 사회적인 지위나 학벌이 높은 이들이 많았고, 신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최목사님 설교 말씀에 반감을 지니거나 질문 하나 던진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1964년 12월 30일 유언장을 작성, 발송하였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이기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밝혔다. 1966년 5월 14일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5월 18일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광주공원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최흥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기도론

최흥종은 1922년 경성부 수송동의 활문사서점에서 간행된 <종교계 제명사 강연집>에 '심의 종교'를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기도론'을 제시했다. 그는 일반은총 영역에서 기도를 논할 때 중국 순임금이 하늘에 올린 기도를 다뤘다. 순임금은 어렸을 때 아버지와 동생들에 의해 우물 속에 빠트려 돌에 맞고, 불타는 지붕 위에서 자칫 죽임을 당할 뻔 했던 핍박을 받았고, 하늘을 우러러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며 "하늘이여! 만일 마음이 어떻든 나의 소원을 들으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최흥종은 이 일화를 들어 기도의 좌소가 '마음'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심정설의 일면을 가리키는 신념이자 마음에 품는 진실성과 간절성, 그리고 호소의 깊이를 함축한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그 마음이 상합하는 바로 그곳에 생명력 있는 종교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최흥종은 하나님께서 특별은총 영역에서 큰 구원을 주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신자들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는 불신자들의 기도가 무시되지 않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역설하고 명시하려는 것이며, 동시에 진정한그리스도인 경배자들이 불신자들의 호소가 때로는 유익하다는 것을 교훈삼아 더욱 기도에 열정을 품도록 격려하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했다. 다만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기도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맥락을 같이 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그는 오해를 사지 않고자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 농부의 호소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신 예수님의 기도는 천층만층 다르다"고 덧붙였다.

최흥종은 잡히기 하루 전날 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에 초점을 맞춰 참 기도의 모범을 논증했다. 그가 제시한 요소들은 1)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것,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 3) 하나님을 신뢰할 것 등이다. 그는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에게 올리는 기도는 반드시 이 삼 요소를 갖추어야 하며,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간구가 이 요소들을 완전하게 갖춘 기도요, 참 모범이 된다고 했다. 그가 가장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두 번째 요소이다.

최흥종은 예수가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세 차례에 걸쳐 확인하는 신중한 기도에 대해 길게 부연했으며,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가령, 겟세마네 언덕에 베드로, 대 야고보, 사도 요한을 데리고 간 예수가 이들 세 사람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홀로 별도의 장소에서 기도한 까닭에 대해 고찰했다. 그는 다음 두 가지의 논점을 동원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기도의 교훈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째, 합심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마음을 합해 올리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합심기도가 되지 못하면 단지 형식만 갖춘 기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최흥종은 세 제자들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으며,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어 홀로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둘째,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호칭할 때 "내 아버지"라고 부른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예수와 더불어 기도에 힘을 합할 수 있었다면, 예수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칭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1인칭 단수 소유격을 구사하여 "내 아버지"라고 불렀다.

최흥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드리는 건 필연적이라고 여겼다. 그는 하나님에게 올리는 기도에는 결코 폐할 수 없는 유구한 생명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기도에는 다음 다섯 가지 견고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유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1. 정성: 최흥종은 과거와는 달리 지혜와 학문 수준에 있어 엄청나게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한결같다고 하면서, 진실한 마음에 담긴 기도는 결코 백지화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일단 신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면 하나님이 이미 그 기도를 들으셨기에 유효하다고 보았다.
2. 항구성: 최흥종은 모세 시대로부터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느 시대이건 어느 땅에서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면서, 그리스도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한,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는 것은 본성적이며, 천성적이기에 결코 기도의 맥락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고 봤다.
3. 부자의 정: 최흥종은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올리는 위치에 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시는 위치에 계시며 이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양자 사이에는 부자지간의 끈끈한 관계성이 성립된다고 여겼다. 또한 부자관계는 제도와 질서에 의해 체결된 군신 관계나 주종 관계를 초월하며, 부모가 기꺼이 자식의 소원을 경청하여 들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따라서 그 기도는 폐하여질 수 없다고 보았다.
4. 기도의 실증적 열매: 최흥종은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부르짖음에 명백하게 응답하시고 실증적 열매를 주시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장구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취하는 인위적인 열매는 자칫 불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필연코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
5.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평무사한 속성: 최흥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모습으로 간절히 기도하기에, 그 간구에는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으며, 공평무사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기도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탁월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기에 생명력이 무궁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시대가 변화하고 학술이 진척을 이루고 문화와 문명이 현대화되어도, 기도의 좌소는 변함없이 사람의 마음이며 하나님께 아뢰는 신자의 진실한 기도는 모든 변화무쌍한 현상조차도 능히 초월한다고 보았다.

최흥종은 "심의 종교" 마지막 문단에 예수가 성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기독교의 본의와 절실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다. 이렇듯 그는 당대 신자들에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진작시키고자 하였고, 인생 후반기엔 거세 수술을 단행하기까지 하며 모든 욕망을 도려내려 하고 나병 환자 구호사역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매진했다.

4. 참고 문헌

  • 한규무,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11.
  • 한규무, <오방 최흥종의 신앙노선과 선교활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 안수강, <최흥종 목사의 기도관 분석 - 그의 "心의 宗敎"(1922)를 중심으로 ->, 한국실천신학회, 2019.


[1] 초명은 최영종.[2] 이 중 동생은 최영욱이다.[3] 하지만 형이 요절한 관계로 통상 장남이라 부른다.[4] <요시찰인의 동정에 관한 건>: 불령단 관계 잡건 - 재시베리아(전남경고) 제2966호, 1922.3.18.[5] 이재의, <좌우통합 주도한 신간회 전남지회장>, p.139.[6] 차종순, <호남교회사의 복음적 사회운동에 대한 한 연구>, p.183[7] 안종철, <광주전남 지방현대사 연구>, 한울아카데미, 1991. p.73[8] 임선화, <미군정의 실시와 전남도지사고문회의 조직>, 호남사학회, 2010.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