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6:56:08

김일(프로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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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파일:kim-il.jpg
본명 김태직(金泰稙)
링네임 한국 : 김일(金一)
일본 :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
출생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사망 2006년 10월 26일 (향년 77세)
본관 김해 김씨
체격 185cm, 120kg(현역 시절 기준)
종교 불교
별명 맹호(猛虎)
원폭 박치기(原爆頭突き)
주요 커리어 WWA 세계 헤비웨이트 챔피언
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NWA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 3회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4회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 4회
극동 헤비급 챔피언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감투상 (1975)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공로상 (2006)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민국 국민체육훈장 청룡장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2018)[1]
피니시 무브 아토믹 헤드벗
X자 굳히기[2]
피겨 포 레그락
유형 브롤러 + 올드 스쿨
테마곡 Cozy Powell - Theme One (Cosmic Highway)

1. 개요2. 일본 레슬링 커리어3.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4. 말년5. 플레이 스타일6. 이야깃거리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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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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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기자: "프로레슬링은 잘 짜인 각본대로 진행한다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일: (허허 웃으며)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아니겠소?"

한국프로레슬러.

2. 일본 레슬링 커리어

젊은 시절에 무작정 일본으로 밀항하여(...) 형무소에 갇히는 고초를 겪다 편지로 연을 맺은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역도산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에게 부탁을 하여 김일은 형무소에서 풀려날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역도산의 제자가 된 계기가 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일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도중에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 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김일이 역도산의 집 주소를 몰라서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썼는데 무사히 역도산에게 편지가 도착했다고 한다.[3] 그리고, 김일이 석방된 뒤에 연락이 되어 역도산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라는 링네임으로 활약했으며 박치기를 필살기로 삼았다. 전성기 시절 역도산의 단체 일본 프로레슬링(JWA)에서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젊은 삼총사(若手三羽がらす)로 불리는 등 거물로 손꼽혔다. 바바와 이노키가 훗날 일본을 넘어 전세계 프로레슬링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려해보면 상당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하지만 스승 역도산이 1963년 시비가 붙은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칼에 찔려 허망하게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4]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후 대한 프로레슬링의 에이스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역도산이 세운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등 간판스타들이 이탈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참전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김일은 "스승님의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일본 프로레슬링을 끝까지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레슬링은 방송권을 전일본 프로레슬링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모두 빼앗겨 TV 중계가 전혀 되지 않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결국 몰락하고 만다.[5]

이후 전일본 프로레슬링, 신일본 프로레슬링, 그리고 제3의 단체인 국제 프로레슬링 등을 전전하며 경기를 가졌지만 그다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서서히 활동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서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열린 1974년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NWF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명경기를 펼치는 등 큰 활약을 남긴다.[6]

1989년 고혈압 투병 이후 선수 생명이 끝난지 오래인 1995년 4월 2일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일본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은 신일본, 전일본, UWFi, FMW 등 당시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들이 함께 개최한 올스타 흥행인 '꿈의 가교(夢の懸け橋)' 가운데 열렸다. 잠시 라이벌이기도 했던 전설 루 테즈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입장, 스승인 역도산 등과의 일화를 이야기 한 뒤 최후의 10카운트 공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립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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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한국 프로레슬링에도 진출했는데, 본래 한국 프로레슬링은 역도산의 TV중계를 보면서 자생적으로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국내파 선수들로 시작해서 어느 정도 터를 닦아놓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김일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왔다는 걸 잘 몰랐기 때문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김일 이전의 한국 프로레슬링의 양대 거성이었던 장영철과 천규덕 가운데 천규덕은 김일과 협력하게 되었으나 장영철은 완전히 김일과 척을 진다.

이때 장영철도 자존심을 세울 법한 것이 장영철은 원래 아마추어 레슬링을 하던 정통파 레슬러였고, 공칭 100명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제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초창기 몇 년 간은 장영철이 백지에서 프로레슬링 판을 혼자서 닦아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영철 입장에서는 충분히 김일을 '굴러들어운 돌'이라고 여길 만했다. 당시 김일과 장영철의 대립은 심각해서 장영철이 단체를 따로 만들어서 나가고, 장영철 파는 김일 계열과는 아예 시합도 가지지 않을 정도였다. 장영철은 본래 같이 경기를 하던 천규덕과도 사이가 틀어져서 급기야 천규덕과 장영철이 워크 없이하는 실전 대결을 벌이게 되었지만 서로 차마 제대로 공격하지 못해서 흐지부지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 인맥이 미흡했던 장영철계는 점점 도태되었으며, 김일은 지속적으로 흥행을 성공하면서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격인 존재가 되었다. 김일은 장영철이 가지지 못한 해외 인맥을 이용해[7] 프로모터로서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의 국적을 가진 선수들을 동원했다. 김일은 스승 역도산일본에서 성공한 방식을 비슷하게 벤치마킹해서 자기보다 덩치가 큰 미국 선수나 일본 선수를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잘 통하던 일종의 국뽕 효과까지 겹쳐서 인기가 더욱 좋았다. 게다가 당시엔 프로레슬링이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게임이라는 것을 아직까지 대중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인기를 업고 김일은 전용 체육관까지 얻게 된다. 처음에는 중구 정동에 새로 지어진 '문화체육관' 2층의 일부를 얻어 '김일 도장'을 정부로부터 하사받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이 자리는 빼앗기고[8] '문화체육관'은 후일 정동이벤트홀로 바뀌게 된다. 이후 김일은 답십리(지금의 서울교통공사 본사 부근)에 전용 체육관을 얻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 인기 퇴조로 세월이 지나면서 전용 체육관도 스탠드바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경남기업 사옥이 되었다가 헐리고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

김일은 세계 프로레슬링 역사에서도 자신의 족적을 제법 남긴 프로레슬러다. 그래서, 보통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거물로 취급받는 인물이다. 다만, 세계에 족적을 남긴 그 이름은 대개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 명칭인 오오키 킨타로로 남아있다. 당연히 일본이나 서양 프로레슬링 골수 덕후들도 김일보단 오키 킨타로로 알고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다.[9]

그래도 김일은 일본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도 언론에서는 그를 “한국의 맹호”라고 칭하고, 한복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등, 스승 역도산과 달리 한국인 정체성을 아예 숨긴채 살아간건 아니었기에, 그가 한국인이라는건 당대에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10] 당연히 인터넷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정보가 확실히 알려지면서 덕후 한정으론 그가 한국인이고 본명도 김일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본이나 서구권 매니아들도 지금은 오오키 킨타로와 함께 본명인 김일 역시 같이 표기해주는 경우가 많다.

4. 말년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일본에서 투병생활을 했는데, 그런 연유로 1998년 9월 27일자 KBS2 <영상기록 병원24시> 등지의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젊었을 때부터 워낙 혹독하게 훈련했는데[11], 야구방망이로 맞고, 나무기둥, 콘크리트, 골프클럽으로 단련하는 등 단단한 물체에다 대고 허구한 날 연습한 나머지 두개골에 상처가 남는 등 큰 후유증을 입었고, 거동도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12]

1994년 1월 귀국 이래 서울 을지병원으로 옮겨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2000년 3월 25일, 마침내 장충체육관에서 그토록 바라던 국내 은퇴식을 치렀고, 당시 박지원 문광부장관으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받았다. 2003년에는 고향 거금도에 공적비가 제막됐다.

은퇴 후 건강과 재산을 잃어가는 와중에 사기도 몇 번 당할 뻔했으나, 오죽하면 자기같이 가난한 사람 털어먹겠느냐고 넘어갔다. 국내에 처음으로 WWE RAW 투어가 왔을 때 특별 게스트로 관중석에 앉아 시합을 관람했는데, 릭 플레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김일에게 예를 갖췄다.

2006년 2월에는 41년 전 '프로레슬링은 쇼다' 사건 이후 완전히 갈라섰던 전 프로레슬러 장영철[13]을 직접 찾아가 그간에 쌓인 넋두리를 풀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두 사람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장영철은 그 해 8월, 김일은 두 달 후 10월 26일에 만성신부전증 및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치기왕’ 김일 별세 이모저모.

장례는 체육인장으로 치러져 유해는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생가 옆에 안장됐으나, 2020년 5월에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에 이장됐다.

5. 플레이 스타일

박치기 임팩트가 강하지만 다채로운 관절기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이었다. 피겨 포 레그락, 독특한 관절기 'X 굳히기'를 피니쉬 무브로 쓰다가 역도산이 직접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수련해야지?"하고 조언해줘서 열심히 수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도산은 훗날 자신이 조언해준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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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이노키에게 외다리 원폭 박치기를 시도하는 김일의 사진이다.

상대 머리를 붙잡아 고정시킨 뒤 한발을 들고, 몸을 뒤로 젖혔다가 들이받기 때문에 외다리 박치기 (一本足頭突き)라 부르기도 한다.
체중이 잔뜩 실린 박치기의 파괴력 덕에 원폭박치기 (原爆頭突き)란 별칭이 붙었다.[14] 경기 중 들어가는 원폭 박치기의 위상은 무시무시해서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는 셀링을 보여줄 정도였는데, 세번째까지는 버티더라도 계속해서 들어가는 박치기에 점점 무릎을 꿇는 식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 이노키를 코너로 몰아넣은 뒤에 그의 머리를 양 손으로 움켜쥔 다음, 작정하고 연타로 때려박는 살벌한 모습도 보였다.

지금도 일본의 서브컬쳐에서도 박치기같은 기술이 나오면 대개 '원폭박치기' 로 부르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당연히 김일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일례로 KOF 시리즈에서 야마자키 류지가 사용하는 '폭탄 박치기'가 있다. 실제로 일본어로 박치기가 '頭突き'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爆弾パチキ(폭탄 박치기)'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6. 이야깃거리

  • 소중한 날의 꿈에 경기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거 마스크에는 방영 당시 김일이 일본에서 뛰고 있었을 때라 일본식 이름인 오오키 킨타로로 출연한다. 검정 고무신에도 등장하며, 묻지마 육남매에선 기식이와 두식이가 김일을 소리치다가 텔레비전을 부숴서 텔레비전 주인에게 얻어맞는다.
  • 한국프로레슬링연맹의 대표를 맡았고, 한때 개그맨 백재현의 프로레슬링 사부를 맡아 이름을 날린, 지금은 고인이 된 이왕표가 김일의 제자였다. 다만 항목에도 있듯 이왕표와 김일의 관계는 조금 묘하긴 하다.
  •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창립자인 안토니오 이노키와 동문수학하면서 각별한 사이였다. 처음 이노키가 후배로 입문하였을 때 이노키가 아예 브라질 출신이라고 착각하여 "난 한국인이고 넌 브라질인이니까 함께 잘 해보자!"고 하며 잘 돌봐줬다고 한다. 룸메이트인 동시에 이노키의 데뷔전 상대로 싸우기도 했으며, 먼 훗날 1974년에 열린 최후의 대결에서 명승부 끝에 두 선수 모두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한 장면은 신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의 명장면 중 하나. 이후 김일 투병 과정 중에도 많은 후원을 하며 정기적으로 방문을 했다고 한다. 몇몇이 말하길, 인간적인 측면에서 좋은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보여준 거의 유일한 따뜻한 면모 중 하나라 말할 정도다.
  •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인터넷 방송국인 신일본 월드에도 오오키 킨타로로 활동하던 때의 경기가 많이 올라와있다.
  • 서구권에서도 김일의 위상은 상당히 알려진 모양. 2017년에 평론가 데이브 멜처가 트위터로 가진 Q&A시간 때 오오키 킨타로의 위상은 현재로 치면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아마도 랜디 오턴 정도라고 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2017.1.12. 트윗. 2019년엔 인디 무대에서 활동하는 레슬러 Matt Farmer가 "동상까지 세워주는 나라가 있었을 정도로 당대에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프로레슬러들이 있었는데 요즘 다수의 팬들은 이런 역사를 잘 모른다"라는 트윗을 올렸는데, 멜처는 이에 동의하며 "헐크 호건이 미국에서 누린 위상 이상으로 오오키 킨타로/김일은 한국에서 대스타였다.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사람들은 납득하질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현세대의 레슬링 역사 지식 부족에 대해 개탄을 하기도 했다.[15] 2019.5.25. 트윗.
  • 고향인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는 김일 기념 체육관이 있다. 이곳에는 김일의 일생과 살아생전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있다. 고흥반도에서 소록도를 거쳐 거금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차타고 가면 편하다. 또다른 일화로는 김일이 당대 최고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던 시절, 권투와 프로레슬링 팬이던 박정희가 김일을 초청하여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향에 전기와 수도시설을 놓아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때문인지 거금도는 섬이라는 지형상 전기와 수도시설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금산면은 섬 중에선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라고 한다.
  • 사실 김일 본인은 박치기를 할 때마다 너무 아파서 하기 싫었지만(...) 사람들의 호응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박살낼 정도로 박치기를 했다고 한다. 직업병
  • 김일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 활동 당시 재일교포 출신 야쿠자정건영과도[16] 어울려 김일이 귀국했을 때 그가 야쿠자와 연관이 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는데, 일단 본인은 레슬러지만 폭력 자체는 천성적으로 싫어한다며 야쿠자와도 연관이 없다고 부정했다.

7. 둘러보기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1024px-Korean_Olympic_Committee_logo.svg1.png
2018년 대한체육회 명예의 전당 헌액자
NWA 웨스턴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토너먼트 우승자
창설 김일 & 박송남
(1970)
미정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감투상
스트롱 코바야시
(1974)
김일
(1975)
럿셔 키무라
(1976)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공훈상
후유키 코도 & 미츠 히라이
(2003)
블랙 캣 & 에이겐 하루카 & 김일 & 럿셔 키무라
(2006)
칼 곳치
(2007)


[1] 매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다.[2] 파일:x자굳히기.gif
피폭자는 압둘라 더 부처
[3] 농담이 아니라, 당시에는 역도산의 인기가 너무 많아서 팬레터를 보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편지나 엽서의 받는 사람 주소 공란에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적어서 우체통에다 넣으면 그대로 역도산의 집 앞으로 배달이 되었다고 한다.[4] 2008년 7월 NHK에서 방영한 愛しの悪役レスラーたち~昭和裏街道ブルース~ 김일 편에 따르면 역도산 사망 직후 일본으로 가려 했으나(김일은 당시 미국에 있었다), JWA의 관계자 중 한 명이 '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보증인이었던 역도산이 죽었으니 일본으로 돌아오지 말고 한국으로 가라'고 충고했다고 한다.[5] 그가 단체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많은 일본 후배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견해가 있으나, 사실관계에는 어긋난다. 김일이 일본으로 귀국했을 시점에 이미 일본 프로레슬링은 선수층이 이탈할대로 이탈하여, 결국 몇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73년 4월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니 심지어는 역도산의 친자들마저 일본 프로레슬링을 이탈하여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한 상태였다. 김일 본인도 일본 프로레슬링을 건져내려는 시도가 무산되자 전일본으로 갔다. 다만 하술하듯 그의 명경기로 뽑히는 경기들은 신일본에서 치른 경기들이 좀 더 많은 편.[6] 해당 경기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남는 명경기가 되었으며, 신일본 월드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링크, 일본 매체에서 다룬 해당 경기에 대한 리뷰 (공국진 역).[7] 일본에서 활동했으니 당연히 일본 프로레슬링 쪽과는 인맥이 많이 있었고, NWA 한국지구 프로모터 자격도 가지고 있어 북미쪽과도 연이 닿았다. 참고로 1980년대까지는 NWA가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링 조직으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시기였다. 그리고 NWA는 지금의 WWE같은 하나의 거대한 단체가 아니라 지역 단체 프로모터들의 연합이라서 NWA 내 다른 지역 단체 소속 선수들을 자기 단체에 출연시키려면 NWA 프로모터 자격이 있어야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2017년 이후 빌리 코건 체제 아래에서 녹화중인 NWA의 스튜디오에 태극기가 다른 나라 국기와 함께 걸려있다.[8] 문화체육관은 문화방송이 만든 국내 첫 민영 실내체육관이다.[9] 이는 역도산, 최배달처럼 일본에서 족적을 남긴 재일교포 격투가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10] 당장 위에 링크된 은퇴식 영상에서도 신한국 프로레슬링 총재라는 직함과 함께 한국 활동이 언급된다.[11] 훈련 내용도 내용이지만 김일의 스승이자 한일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격인 역도산부터가 훈련을 빙자한 구타를 수시로 일삼는 사람이었다. 문젠 이게 제자들한테도 전해져서 한일 프로레슬링계의 악습으로 꾸준히 유지되었다는 것.(...)[12] 머리에 많이 충격을 가하는 스포츠 선수들은 뇌손상이나 그에 준하는 문제를 겪게 되는데, 프로레슬링계에도 부검 당시 경기장을 찾는 등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왔는지, 경기를 운영하기 위한 기본 정보를 어떻게 외웠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던 크리스 벤와의 사례가 있다. 헤더가 장기여서 '폭격기'라 불렸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축구선수 제프 애스틀은 잦은 헤더로 인한 뇌손상으로 59세로 별세했다.[13] 김일은 생전에 제자들이 많이 찾아오고, 일본에서도 제자들이나 옛 팬이 돕기도 하는 등 관심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장영철은 이 발언 후에 은퇴하면서 업계에선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사업도 연이어 말아먹고, 늘그막에는 온갖 병에 시달리며 생활고를 겪었지만 주변의 도움을 크게 받지 못했다고 한다.[14] 스맥다운 게임 시리즈에도 외다리를 한 채 박치기를 먹이는 원폭 박치기가 들어가 있다.[15] 반대로 말하면 프로레슬링의 위상이 21세기 들어 그만큼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16] 스승인 역도산과 말을 터놓고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