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1:03:07

오노 반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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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42-43대 중의원 의장
오노 반보쿠
大野伴睦 | Ono Banboku
파일:오노 반보쿠.jpg
<colcolor=#c3c965>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890년 9월 20일
기후현 야마가타군 타니아이촌
(현 기후현 야마가타시)
사망 1964년 5월 29일 (향년 73세)
도쿄도 신주쿠구
학력 메이지대학 법학부 (퇴학)
가족 장남 오노 아키라[1], 며느리 오노 츠야코[2], 손자 오노 야스타다
정당

의원 선수 13 (중)
의원 대수 17, 18, 19, 20, 21, 24, 25, 26, 27, 28, 29, 30[3]
지역구 구 기후 1구
약력 도쿄시 시의원
중의원 의원 (제17-21, 24-30대)
제7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5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
자유당 총무회장
자유민주당 총재 대행
자유민주당 부총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초기 정치 경력2.3. 정계의 중진으로2.4. 말년
3. 소속 정당4. 선거 이력5. 기후현과 오노6. 발언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의 대표적인 당인파(党人派) 정치인으로 유명하며 반짱(伴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널리 사랑받은 정치인이었다. 자민당을 창설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으며, 현재까지도 총리를 배출 하지 못한 기후현에서 총리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평가 받는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0년 9월 20일 일본 기후현 야마가타군 타니아이촌에서 상인인 오노 나오타로의 4남으로 태어났다. 오노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인 나오타로가 촌정의 발전을 위하여 힘썼기 때문에 쌓은 재산이 거의 없었고, 친척이나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려야 겨우 먹고살만 했기 때문에 항상 부채문제로 인해 어렵게 자랐다.

이후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육군학교에 들어가려 시험을 쳤지만 불합격했다. 1908년 도쿄로 상경해 1910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했지만 1911년 여름 충수염으로 입원해 휴학했다.

이후 호헌운동에 관심을 가져, 1913년 다이쇼 정변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고, 메이지대학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 후 입헌정우회 본부에 들어가 정우회 비의원 모임인 원외단 회원이 되었고, 1922년 도쿄시 시바구[4] 구의원으로 당선 되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2.2. 초기 정치 경력

1930년 제1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의 공천을 받고 기후 1구에 출마해 첫 당선되었고,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파에 속했다. 1939년 신체제운동으로 정우회가 분열되자 오노는 익찬의원동맹[5]에 반발해 1941년 하토야마를 따라 동교회의 결성에 참가했고, 1942년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비추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가했다. 이듬해인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출마후 당선되어 국정 복귀에 성공하였으나 정작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공직 추방을 당하면서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를 총재로 추대하였다.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자 하야시 조지, 마스타니 슈지와 함께 당인파 3인방이라 불리며 총리인 요시다를 보좌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붕괴하자 우파사회당의 대표 니시오 스에히로가 연립 내각 참여를 권유하며 내무대신 취임을 요청했으나 오노는 "좌파사회당을 내치지 않는 이상 연립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해 니시오의 부탁을 거절했다.

민주자유당 고문을 지내던 1948년 6월, 정치자금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위원회의 증인환문을 받았고, 같은해 쇼와전공 사건에 연관되어 기소되었으나 1951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2년 8월 26일 중의원 의장으로 취임했지만, 이틀 뒤에 불시 해산이 이루어져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총선 이후인 10월에 다시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지만 이번엔 5개월 만인 1953년 3월 바카야로 해산이 이루어져 금방 물러나야 했다.

하토야마의 공직 추방 해제로 인한 복귀 이후에는 미키 부키치, 고노 이치로 등과 대립해 요시다파로 들어갔다. 특히 전전 입헌민정당 출신이면서 전시 중 익찬의회에서 하토야마와 접근해 그의 측근이 된 미키에 대해선 격렬한 반발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1954년 1월 14일, 제5차 요시다 내각의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처음이자 유일한 입각이었다. 원래 관료 출신이 아닌 당인파라 입각 이전부터도 영향력이 막강했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도 국무대신 중에서는 비교적 한직인 대신청 장관이라 정치적 위상을 위한 입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땅한 인물이 없어 자리 채우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중에 가장 영향력이 막강했고 덕분에 재직 당시 어렵다던 토마코마이시 항구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자유당 총무회장 임명으로 6개월을 조금 넘긴 7월 27일에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짧은 임기 중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2.3. 정계의 중진으로

1954년 자유당 총무회장에 취임했고 서로 대립하던 일본민주당 총무회장 미키 부키치와 화해했다. 이후 보수합동을 추진했으나 오노를 포함한 정치인들은 어떤 인물을 통합 보수정당의 초대 총재로 추대하느냐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국 신당 창당 후 선거를 통하여 총재를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약속한뒤 자유당과 민주당의 총재, 총무회장인 오노 반보쿠, 오가타 다케토라(자유당),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부키치(일본민주당) 등 4명이 총재 대행위원이 되기로 하고 1955년 11월 15일, 통합 보수정당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초대 총재에는 1956년 4월 총재선 선거 결과 하토야마 이치로가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자민당이 창당된 뒤 오노는 백정회(오노파)를 만들어 자신의 파벌을 꾸렸다. 파벌에는 약 40명 정도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백정회는 오노의 사후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후나다 나카의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의 일양회로 분열되었다.

1957년에 초대 자유민주당 부총재에 취임했다. 또한 일본유족회 고문을 맡아 1958년 1월에 유족들로 구성된 진정단을 조직해 정부와 자민당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구했다.

1958년 2월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총재로 선임되자 기시는 오노파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차기 총재에 오노를 세울것을 다짐하며 각서까지 썼으나[6]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고말았다.

와타나베 츠네오[7]에 따르면, 1956년 자민당 총재선 당시 기시는 오노에게 자신을 지원해 달라는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이시바시 단잔이 총재로 추대된것에 대한 복수였다고 한다. 어쨌든 오노는 약속을 어긴 기시를 증오하게 되었고, 1960년 기시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기 직전 우익 인사로부터 칼에 찔려 부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꼴 좋다, 그 허풍쟁이."라고 조롱했다는 후일담이 있다.[8]

오노는 총리 취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기시 내각이 총사직한 1960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같은 당인파인 이시이 미쓰지로와 관료파 이케다 하야토와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노 지지를 표명하고 있던 가와시마 쇼지로가 "당인파가 분열하면 이케다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이시이로 단일화를 하는것이 좋다"라는 조언을 했다. 이 조언을 받아들인 오노는 후보직을 사퇴하며 이시이로 당인파 후보가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가와시마는 "본래 오노를 지지하려 했지만, 사퇴했기 때문에 이케다를 지지한다." 라는 말을 하며 이케다 지지로 선회했고 결국 이케다가 총재로 선출되게 되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오노는 "가와시마에게 속았다!" 라는 말을 하며 호된 눈물을 흘렸다.

2.4. 말년

이후 오노는 이케다의 측근으로 다시 부총재직에 올랐고, 1962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를 만나 회동을 가졌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도 김 부장의 방일때마다 만나며 한일수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패망 직후 재일교포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적도 있어 한일수교에 부정적이었으나, 이후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물론 김종필등과의 친분도 있었겠지만, 재일 야쿠자등을 거쳐 정치자금등이 건너가면서 입장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는데, 이때 아들의 경사를 보러 오는 것 같다는 망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다만 살아생전 한일간 협상의 완결과 한일수교는 보지 못했다.

부총재 재임 중인 1964년 뇌출혈 증세로 게이오기주쿠대학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 그해 5월 29일 심근경색으로 향년 7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64년 6월 14일 기후시민센터에서 열린 현민장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비롯해 각종 정계인사, 현의원, 현지 기업 경영자, 후원회 등 총 3천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13 - 1940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0 - 1941 정당 해산
동교회 1941 -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정당 해산


1945 - 1948 창당


1948 - 1950 합당


1950 - 1955 합당


1955 - 1964 합당
사망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22 도쿄도 시의회 선거 도쿄시 시바구 선거구
- 당선 (1위) 초선
1930 제1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기후현 제1구 - 당선 (2위) 초선
1932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재선
1936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3위) 3선
1937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선
1942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동교회 - 낙선(5위)
1946 제2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기후현 전현구

- (-%) 당선 (6위) 5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기후 1구 42,530 (14.5%) 당선 (2위) 6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42,254 (12.4%) 7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80,006 (21.7%) 당선 (1위) 8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65,753 (19.0%) 9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64,703 (16.8%) 10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81,734 (19.9%) 11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95,931 (23.0%) 12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107,344 (24.6%) 13선[9]

5. 기후현과 오노

파일:external/blogimg.goo.ne.jp/d6a3f4014dc9add1c7c1be117847793b.jpg
기후하시마역 앞에 있는 오노 부부의 동상
기후현 하시마시에 있는 기후하시마역을 신칸센 정차역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기후현에서는 도카이도 신칸센의 정차역을 기후시오가키시에 세우기로 희망했으나, 두 도시의 지반이 당시만 해도 약했고 원래의 노선 선형을 대폭 우회시키는것도 모자라 도카이 지방의 중심역인 나고야역과의 위치가 멀어지기 때문에 일본국유철도가 난색을 표했고, 이에 기후현은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국철은 기후현의 대표 정치인이었던 오노에게 알선을 구해 노선을 우회시킬 필요가 없는 하시마시에 역을 세우기로 했고, 끝내 기후하시마역을 설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10]

따지고 보면 오노는 지역의 이익을 위해 국철에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니고 지역의 이익보다 신칸센의 속달성을 우선한 셈이었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 사실이 와전되어 지역과 정치인 사이의 핌피역의 대명사로 여겨져 "정치역"의 대표 사례로 불리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11] 어쨌든 오노가 이 역의 신설에 큰 공헌을 한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현재 기후하시마역 앞에는 오노 부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12]

이밖에도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지방인 기후현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비와호에 운하를 파서 쓰루가만과 오사카만·이세만을 연결하는 비와호 운하 건립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철 타루미선 (현 타루미 철도 타루미선) 건설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6. 발언

정치는 의리와 인정이다.(政治は義理と人情だ)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그냥 사람이다.
(猿は木から落ちても猿だが、代議士は選挙に落ちればただの人だ)

7. 여담

  • 탈바가지 같은 얼굴과 소탈하고 호방한 풍모로 일본의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를 반영하듯 오노의 자금원 또한 대기업들이 아니라 무수한 중소기업, 프로레슬링, 파칭코 업계 였다. 오노가 국회의원 근속 25년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었을 때 재계의 실력자들도 대부분이 참석하였는데 이들 앞에서 오노는 "나는 당신들로 부터 돈 한푼 받은 적 없다"며 뼈 있는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 전설의 프로레슬러인 역도산은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오노만큼은 크게 존경해서 오노가 술을 삼가라고 하면 군말없이 따랐다고 한다.[13] 또한 김일이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형무소에 수감됐을 때도 역도산이 오노에게 부탁을 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당인파 정치인의 대표인물로서 의리와 인정을 중요시 여겼다. 이런 오노의 인품을 잘 알려주는 일화가 3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자신의 지역구와 관계없는 한 노파가 "집 근처의 하수구 널판지 정비를 시청에 부탁해도 듣는 채도 안 한다"라며 호소하자 오노는 매우 분노하며 즉시 시청에 연락을 취했다. 시청의 담당 과장은 엄청 당황하며 즉시 작업을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자를 가지고 노파의 집을 직접 방문해 사죄했다고 한다.
  • 두번째로는 오노의 자택에 도둑이 들었을 때 자신이 직접 돈을 건네면서(!)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더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도둑은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반드시 이 돈을 갚으러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세번째 일화로는 자신의 사무실에 한 청년이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을때, 오노는 망설임없이 그 청년에게 마음껏 돈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정치가의 집에 도둑이 들거나 정치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런 요청이 들어왔을때 흔쾌히 돈을 주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술을 마신다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대단한 애주가로 유명했다.[14]하이쿠를 좋아해 살아생전 직접 하이쿠를 짓기도 하였고, 사후인 1966년 그가 쓴 시를 엮은 시집도 출간되었다.
  • 위의 각서 파기 사건을 계기로 기시 노부스케를 싫어하게 된 뒤로 기시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도 싫어하게 되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토가 절대 총재를 못하게 하겠다!"라며 엄포를 내뱉을 정도였다.[15][16] 사토는 오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소탈함과 인품을 칭찬하며 "모두에게 반짱이라 불리며 사랑받은 오노를 닮고자 나도 에이짱(栄ちゃん)이라 불리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17] 훗날 "달리 칭찬할 말이 없어서 그랬다"라며 오노를 혹평했다.
  • 현재 일본 언론계의 최고 실력자로 꼽히는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요미우리 신문 대표 겸 주필이 젊었을 때 오노 담당 기자였는데 와타나베에 대한 오노의 총애가 대단하여 양아들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와타나베가 언론계의 거물로 성장하는데에는 이러한 배경도 컸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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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8~1996. 운수대신, 노동대신, 9선 중의원 의원, 재선 참의원 의원 역임.[2] 1934~2021. 3선 참의원 의원 역임.[3] 재직 중 사망.[4] 현재의 미나토구 지역.[5] 이 파벌은 익찬정치회를 거쳐 대정익찬회로 발전한다.[6] 이 자리에는 오노와 기시와 기시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 그리고 고노 이치로 외에 우익의 실력자였던 코다마 요시오,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 홋카이도 탄광기선의 하기하라 기치타로가 입회인으로 참석하였다.[7] 요미우리 신문 대표이사, 주필 출신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 이사 재직 시절 2004년 일본 프로야구 재편 시기 보였던 언행과 지나친 친교진 편향 행보로 인해 야구계의 독재자라는 별칭을 얻었고, 지금도 요미우리를 제외한 NPB 전 구단 팬들의 증오대상이 되고있다. 특히 이팀하고 이팀팬들[8] 해당 사건의 범인은 입헌정우회 시절 오노를 지지하던 인사였다.[9] 1964.5.29 임기 중 사망[10] 신칸센 통과지역 중 기후현만 정차 없이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후역을 경유하면 경로를 대폭 변경해야 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나름의 최적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도카이도 신칸센이 겨울에 적설량이 많은 세키가하라 지역을 통과하여 유사시 근처에 열차를 세워둘 거점이 필요하고, 유사시 대피역 기능도 부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나름의 필요성은 있다는 주장도 있어 오노 반보쿠는 그 뒤 뒷말 안나오게 중재를 잘 했다는 평가.[11] 이와 비슷한 사례로 큐슈 신칸센치쿠고후나고야역이 있다.[12] 그러나 오노는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5개월전에 세상을 떠나 기후하시마역이 개통하는것은 끝내 보지 못했다.[13] 일본의 프로레슬링 업계가 크게 발전할수 있었던 이유는 오노의 막대한 지원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건지는 몰라도 훗날 안토니오 이노키, 하세 히로시, 오니타 아츠시 등 프로레슬러 출신 정치인들이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14] 오노가 이케다와 가깝고 사토와는 사이가 별로였던게 술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케다는 오노 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는데 사토는 술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케다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고향 히로시마의 명주를 들고 오노의 집에 찾아가 의기투합하였다고 전해진다.[15] 다만 기시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오노는 사토가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직할 시기부터 정치인으로서의 태도가 건방지다며 이미 싫어했다.[16] 이에 사토는 오노를 가리켜 지성없는 나니와부시(浪花節)(일본 악극 중 한 종류로 주로 서민적 의리와 인정에 호소하는 작품이 많았다.)에 빗대며 그가 감성팔이서민 코스프레를 시전한다고 깠다.[17] 그런데 참의원 질의에서 요시모토 흥업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 요코야마 노크가 참의원 위원회 질의 도중 사토에게 에이짱이란 발언을 하자 무지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