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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20대 문부과학대신 | |
제20대 이시카와현지사 하세 히로시 [ruby(馳, ruby=はせ)] [ruby(浩, ruby=ひろし)][1] | Hase Hiros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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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1f2023>1961년 5월 5일 ([age(1961-05-05)]세)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토야마현 오야베시[2] | |
성장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 |
학력 | 세이료([ruby(星稜, ruby=せいりょう)])고교[3] 센슈대학 (문학부 국문학과/졸업, 레슬링부)[4] |
가족 | 배우자 타카미 쿄코([ruby(高見, ruby=たか み)] [ruby(恭子, ruby=きょう こ)])(1959년생)[5] 장녀(1997년생) |
정당 | |
의원 선수 | 7 (중) 1 (참) |
지역구 | 이시카와 1구 |
현직 | 제20대 이시카와현지사 일본 유신회 고문 |
약력 | 세이료 고등학교 국어 교사 프로레슬러 일본 참의원 (이시카와현 선거구) 이시카와현 제1구 중의원 문부과학대신 정무관 문부과학부대신 자민당 국회대책부위원장 자민당 부간사장 자민당 홍보본부장 문부과학대신 도쿄 올림픽 및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학교법인 일본체육대학 이사 일본레슬링협회 부회장 일본피구협회 회장 일본킨볼스포츠연맹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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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교사, 프로레슬러 출신 정치인.프로레슬러로 시절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엘리트 테크니션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라나게와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 등 기술들의 창시자로, 정치인으로는 지역구를 세습받은 세습 정치인에게 승리하고 문부과학대신까지 올라 양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2. 생애
2.1. 초창기
1961년 토야마현 오야베시에서 농가인 카와베([ruby(川辺, ruby=かわ べ)]) 가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3학년 직전에 자식이 없었고 사과, 배 과수원을 경영하던 친척 하세([ruby(馳, ruby=はせ)]) 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6]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에서 자랐다.초등학생 때 검도, 중학생 때 동향의 와지마 히로시의 영향을 받아 부활한 스모부에서 활동한 하세는 카나자와시립 나루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세이료 고교에 입학했으나 세이료 고교에는 스모부가 없었고, 다시 검도를 하려던 도중 레슬링부에 견학을 갔다가 반강제로 권유당하여 레슬링에 입문했다.[7]
세이료 고교에서 국체에 출전하여 우승하는 등 두각을 나타낸 하세는 본래 국립 카나자와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고교 3학년 시절 올림픽에 출전할 욕심이 생긴데다 레슬링 명문인 센슈대학에서 등록금 면제를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가 오자 진학을 결정했고 문학부 국문학과 겸 레슬링부에 스포츠 추천으로 진학하여 홀로 상경했다.[8]
홀로 상경했기 때문에 생활비를 위해 가정교사, 지하철 자재 운반, 건설현장, 오코노미야키 가게 점원과 영화 엑스트라 등 온갖 일을 하면서도 센슈대학 레슬링부에서 활동하며 1983년에 전일본 학생 선수권 우승, 1984년에 전일본 선수권에서 우승하는 등 매우 훌륭한 성적을 남겼고, 교원 면허를 취득하고 졸업한 뒤 모교인 세이료 고등학교에서 잠시 국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전일본 선수권 우승자 자격으로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레슬링 종목(라이트 헤비급)에 출전하지만 예선 탈락한다.
본래 교사로 계속 살아갈 생각이었으나 올림픽 이후 인생에 진로에 세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첫번째. 육상자위대 레슬링부에 들어가 다음 1988 서울 올림픽을 준비한다.
두번째. 대학원에 들어가 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교원으로 재직한다. [9]
세번째. 대학 대선배이자 전국구급 프로레슬러 초슈 리키의 등용에 응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다.
두번째. 대학원에 들어가 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교원으로 재직한다. [9]
세번째. 대학 대선배이자 전국구급 프로레슬러 초슈 리키의 등용에 응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다.
여기서 올림픽은 한번 출전으로 족하고, 대학 교원은 30세가 넘어서도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한 데다, 센슈대학 레슬링부 대선배로 올림픽까지 출전한 바 있는[10] 초슈 리키에 대한 동경과 프로레슬러가 되면 해외 원정이 많다는 점을 매력적으로 느끼면서 1985년, 23세에 프로레슬러로 전향하기로 마음먹었다.
2.2. 프로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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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北斗, ruby=ほく と)]の[ruby(流星, ruby=りゅうせい)] / Northern Light [ruby(馳, ruby=はせ)] [ruby(浩, ruby=ひろし)] / Hiroshi Ha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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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네임 | 하세 히로시 ([ruby(馳, ruby=はせ)] [ruby(浩, ruby=ひろし)]) | |
신장 | 183cm | |
체중 | 105kg | |
혈액형 | A형 | |
유형 | 올라운더 + 테크니션 | |
시그니쳐 무브 | 역수평 찹[11] 러닝 빅 붓[12] 각종 암바, 니 바 낫 굳히기([ruby(鎌, ruby=かま)][ruby(固, ruby=がた)]め)[13] 전갈 굳히기([ruby(蠍, ruby=さそり)][ruby(固, ruby=がた)]め) 저먼, 벨리 투 벨리, 드래곤 수플렉스 자이언트 스윙[14] | |
피니쉬 무브 | 드래곤 수플렉스 홀드 _우라나게([ruby(裏投, ruby=うら な)]げ)_[15] _노던 라이츠 수플렉스 홀드_ | |
별명 | 싸우는 국회의원 ([ruby(戦, ruby=たたか)]う[ruby(国会議員, ruby=こっかい ぎいん)]) 북두의 유성 ([ruby(北斗, ruby=ほく と)]の[ruby(流星, ruby=りゅうせい)]) | |
테마곡 | Two Hearts - John Parr (1987 - )[16] | |
데뷔 | 1986년 2월 28일 (24세) 푸에르토리코 카과스 시티 아리나 재팬 프로레슬링 원정 경기 vs 미겔 페레스 주니어 | |
은퇴 | (공식) 2006년 8월 27일 (45세,커리어 21년) 도쿄도 스미다구 료고쿠 국기관[17] 전일본 FINAL NORTHERN LIGHT[18] vs VOODOO-MURDERS (TARU & 스와마 & "brother"YASSHI) (w/코지마 사토시 & 나카지마 카츠히코) | |
주요 커리어 | WCW 인터컨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2회 IWGP 태그팀 챔피언 4회 | |
SNS | |
2.2.1. 경력
2.2.1.1.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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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야츠 요시아키, 하세, 초슈 리키 |
8월 23일에 코라쿠엔 홀에서 일본 대표팀 시절 입었던 양복 차림으로 재팬 프로레슬링 입단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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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 시절 |
이 와중 1987년 1월 재팬 프로레슬링이 내부 불화로 분열되고, 신일본에 마음이 흔들린 초슈 리키의 갑작스러운 흥행 불참 선언으로 인해 3월 30일에 초슈가 추방되자 초슈 리키는 신일본에 복귀하였으며, 캘거리에서 니이쿠라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하세는 초슈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하세를 부르자 1987년 12월에 귀국한 후 신일본에 정식 입단하였다.[20]
2.2.1.2. 신일본 프로레슬링
귀국하자마자 12월 27일, 신일본의 료고쿠 국기관 흥행인 이어 엔드 인 국기관의 제 7경기에서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인 코바야시 쿠니아키에게 도전하는 것이 확정되어 신일본 데뷔전에서 타이틀 매치를 치르는 이례 중의 이례의 사태를 보여줬고, 경기 당일 코바야시와 17분간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오리지널 기술인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로 코바야시에게 핀을 따내며 제 5대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 신일본 데뷔전부터 싱글 챔피언 벨트를 따내는 대활약을 보여주었다.
1988년 1월에는 탑 오브 더 슈퍼 주니어에 출전하여 41점을 기록했고, 코시나카 시로와 공동 1등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엘리트 이미지의 하세와 바닥부터 기어온 잡초혼이 가득한 코시나카가 맞서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난투전 끝에 하세가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를 작렬했으나 코시나카가 2카운트에서 로프에 발을 대며 로프 이스케이프에 간신히 성공했다. 하세가 다시 저먼 수플렉스를 날렸으나 또다시 2카운트. 그러자 하세가 다시 코시나카의 후방을 잡으려 했으나 역으로 코시나카가 하세의 후방을 잡았고, 그대로 코시나카의 드래곤 수플렉스가 터지며 3카운트를 내주고 말았다.
그래도 3월 11일에는 타카다 노부히코에게 노턴 라이트 수플렉스로, 3월 19일에는 코시나카에게 드래곤 수플렉스로, 5월 8일에는 또다시 코시나카에게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로 IWGP 주니어 헤비급 벨트 방어전을 성공시킨 하세였으나, 5월 27일에 스탬피드 레슬링 시절 라이벌 오웬 하트에게 13분만에 고속 핀폴로 쓰리 카운트를 내주는 바람에 벨트를 내줘야 했다.
1989년 1월 16일과 2월 8일에 다시 코시나카가 가지고 있던 IWGP 주니어 헤비급 벨트에 도전했으나 각각 목 굳히기에 의한 쓰리 카운트, 반칙패로 도전에 실패한 하세는 3월 16일에 요코하마시에서 코시나카에게 또다시 도전했고,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를 두번 연속 터트리며 14분 56초만에 다시 IWGP 주니어 헤비급 벨트를 손에 넣었다. 5월 25일에 수신 선더 라이거를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렀으나 8분 39초만에 라이거 수플렉스에 패배하면서 벨트를 내줬고, 이후 헤비급으로 전향하며 주니어 헤비급 생활을 마무리했다.
6월에는 이이즈카 타카시와 함께 소련으로 원정을 떠나 삼보를 함께 수련했고, 신무기 우라나게를 익혀왔다. 이후 7월 23일에 치러진 안토니오 이노키의 참의원 선거 때 이노키의 보디가드 겸 사설 비서를 맡으며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1990년에는 태그 전선에 참전하여, 5월 28일에 비슷한 시기에 헤비급으로 전향한 과거의 호적수 코시나카 시로와 함께 오사카시 오사카부립 체육회관에서 무토 케이지 & 쵸노 마사히로가 가지고 있던 IWGP 태그팀 챔피언 벨트에 도전했으나 하세가 무토의 문설트에 3카운트를 내주며 패배했다.
이윽고 6월에는 고토 타츠토시와의 싱글 매치를 가졌다가 고토의 고각도 백드롭 접수를 미스내면서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기는 끝냈으나, 다음 시합에 세컨드로 참여하러 링으로 가다가 심정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쓰러졌다. 링 닥터와 경찰관의 재빠른 조치로 1분만에 살아나긴 했으나, 두달간 경기 출전 금지 판정을 받으며 전열을 이탈해야 했다. 복귀 후[21] 9월 2일에는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일중우호기념 원정 경기에 출전했으며, 14일에는 그레이트 무타와 대전하여 서로 유혈이 낭자한 경기 끝에 무타가 레퍼리를 폭행하며 반칙패하며 간신히 승을 거뒀다.
이후 사사키 켄스케와의 태그팀 '하세켄'을 결성하여 11월 1일,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드림 투어'90 흥행에서 무토와 쵸노에게 재도전했다. 16분 56초만에 하세가 무토에게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 홀드로 3카운트를 따내어 패배를 되갚아주면서 제 15대 IWGP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했다. 11월에는 월드 컵 토너먼트에 C블럭으로 출전했으나 0승 승점 0점으로 싱글로는 부진을 겪었다.
1991년 3월 6일 히로 사이토와 슈퍼 스트롱 머신에게 1차 방어전을 성공시킨 하세켄 태그였으나 3월 21일, 도쿄 돔에서 WCW와의 합동 흥행으로 펼쳐진 '91 스타 게이트 IN 도쿄 돔(闘強導夢) 흥행의 초만원 관중 앞에서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이었던 극강의 형제 태그 더 스타이너 브라더스(릭 스타이너 & 스캇 스타이너)와 서로의 벨트를 함께 걸고 더블 챔피언전으로 격돌했으나, 12분 56초만에 스캇 스타이너의 프랑켄슈타이너[22]에 사사키가 핀을 내주며 IWGP 태그팀 챔피언 벨트까지 내주고 말았다.
하세는 5월 31일, 오사카 성 홀에서 열린 후지나미 타츠미 20주년 기념 스페셜 이벤트~THE LEGEND OF DRAGON~에서 사사키와 함께 스타이너 브라더스의 IWGP 태그팀 챔피언 벨트에 재도전했으나 이번엔 하세 본인이 16분 48초만에 스캇 스타이너의 프랑켄슈타이너에 핀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하세는 파트너를 쵸노 마사히로로 변경한 뒤 7월 13일 WCW 새터데이 나잇에서 스타이너 브라더스에게 또다시 도전했으나 이번에도 스캇에게 하세가 또다시 당하며 IWGP 태그팀 챔피언 벨트를 찾아오는 데 실패했다.
9월 10일에는 오사카 부립 체육회관에서 열린 배틀 어텀 개막전 메인 이벤트로 후지나미 타츠미와 대전했으나, 19분 20초만에 후지나미의 엔즈이기리 2연발에 이은 피겨 포 레그락에 항복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10월 사사키 켄스케의 부상으로 파트너를 무토 케이지로 또다시 변경한 하세는, 11월 5일 도쿄 3 데이즈 배틀 마지막날[23] 흥행에서 부상당한 스캇 스타이너의 대타로 참전한 스캇 노턴과 릭 스타이너에게 무토와 함께 재도전하여, 17분 53초에 하세가 릭에게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 홀드로 3카운트를 얻어내며 2번째 IWGP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했다. 12월 16일에 하시모토 신야 & 스캇 노턴에게 1차 방어를 성공한 하세는 12월 18일에는 타이거 제트 싱과 간류지마에서 싱글 매치를 치러 1시간 11분이라는 문자 그대로 피가 튀기는 대혈투 끝에 타이거에게 우라나게로 KO승을 거뒀다.
1992년 1월 4일, 초전사(超戦士) IN 도쿄 돔(闘強導夢)에서는 초만원 관중 앞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싱글 대결을 펼쳤다. 하세는 우라나게 4연발을 날리는 등 분전했으나 5번째 우라나게를 시도하다 이노키가 이걸 막고 엔즈이기리 → 마성의 슬리퍼 → 만자 굳히기의 필살기 연타를 터트리면서 하세가 10분 9초만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2월 10일 나고야에서 스캇 노튼과 브래드 암스트롱을 상대로 한번 더 IWGP 태그팀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나, 3월 1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빅 파이트 시리즈 개막전에서 빅, 배드, 앤드 데인져러스(빅 밴 베이더 & 크러셔 뱀 뱀 비겔로우)와 방어전을 치렀다가 24분 48초만에 황제전사 베이더의 초크 슬램에 무토가 핀을 내주면서 3차 방어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5월 1일에 치바시 대회에서 무토와 다시 챔피언팀에게 도전했으나 이번엔 하세가 20분 40초만에 핀을 내주며 재탈환에 실패했다.
6월 26일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마스터즈 오브 레슬링 8일차에서 사사키 켄스케가 10개월만에 복귀하자 사사키의 복귀전 상대가 된 하세는 8월에 토너먼트식으로 치러진 G1 클라이맥스 2에 출했으나 경미한 어깨 부상으로 출전을 포기했다. 부상 치료 후 9월 23일 요코하마시에서 다시 한번 사사키 켄스케와 함께 스캇 스타이너가 복귀한 후 IWGP 태그팀 챔피언을 탈환한 스타이너 브라더스에게 도전했으나 릭에게 사사키가 핀을 내주며 도전에 실패하고 말았다.[24]
12월 14일, 오사카부립 체육회관에서 펼쳐진 배틀 파이널'92 흥행에서 IWGP 헤비급 챔피언 그레이트 무타와 논타이틀 매치로 격돌했다. 하세는 경기전부터 "엉망진창으로 해 주겠습니다(メチャクチャにやってやりますよ)"라고 공언했고, 말 그대로 무타의 안면을 짓밟으며 페인트를 지워나가면서 심지어 무타가 링 슈즈에 숨겨둔 철봉까지 뺏어 무타의 이마를 강타하여 무타에게 처음으로 유혈을 안겨주었다. 거기다 하세는 피가 흐르는 무타의 이마를 깨물고 발차기까지 연타로 갈기는 강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록 경기는 하세가 무타의 문설트에 당하며 패했지만 하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경기였다.
1993년 1월 4일, 3회차 WCW & 신일본 합동 흥행인 FANTASTIC STORY IN 도쿄 돔(闘強導夢)에서 스팅과 격돌했으나 15분 31초만에 스팅의 다이빙 바디 프레스에 패배를 맛봐야 했다. 2월 16일에는 료고쿠 국기관에서 신일본 vs WAR의 대항전에도 출전했고, 5월 3일 후쿠오카 돔 대회에서 '관절기의 귀신' 후지와라 요시아키와 '궁극의 장인 대결 1차전'을 펼쳤으나 12분만에 후지와라의 어깨굳히기에 패배했다. 이후 6월에는 반선수회동맹과 대항전을 치렀다.
8월 3일, 료고쿠 국기관 7연전이라는 유례없는 규모로 치러진 16인 토너먼트 방식의 G1 클라이맥스 3에 출전한 하세는 1차전에서 하시모토 신야를, 2차전에서 기무라 켄고를 잡고 준결승에 진출, 26분의 혈투 끝에 쵸노 마사히로에게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8월 7일의 결승전에서 후지나미 타츠미와 맞붙어 21분 49초만에 후지나미의 전갈 굳히기에 기브업하면서 우승에 실패했지만 MVP 상을 수상했다. 다음 날인 8월 8일에는 후지와라 요시아키와 '궁극의 장인 대결 2차전'을 펼쳐 오랫만에 드래곤 수플렉스 홀드로 후지와라에게 설욕에 성공했다.
9월 23일 WAR와의 대항전의 일환으로 요코하마 아레나 대회 메인 이벤트에서 WAR의 대장 텐류 겐이치로와 싱글 매치를 치렀다가 WAR스페셜에 패배한 하세는 이틀 뒤인 9월 25일 오카야마현 대회에서 IWGP 태그팀 챔피언 쥬라식 파워즈(스캇 노턴 & 헤라클레스 에르난데스[25])에게 다시 한 번 무토와 함께 도전했으나, 하세가 노턴에게 당하면서 패배했다. 이후 10월 8일에 시작한 SG 태그 리그에 무토 케이지와 함께 출전하여 11월 4일, 쵸노와 하시모토에게 승리하고 우승을 거뒀다.
1994년 1월 4일, BATTLE FIELD IN 도쿄 돔(闘強導夢)에서 스타이너 브라더스 vs 하세 & 무토의 매치를 다시 치르게 되었고, 20분만에 하세가 릭과 스캇의 합체기인 일렉트릭 체어 불독에 핀을 내주면서 패배했다. 2월부터는 헤이세이 유진군과의 항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2월 24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THANKS WRESTLING DAY BRUSH UP 흥행에서 전 스모 선수 야스다 타다오의 데뷔전 상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3월 16일, 시부야구 도쿄체육관에서 치러진 HYPER BATTLE'94 10일차 흥행 메인 이벤트에서 WCW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의 초대 챔피언 릭 루드와 타이틀전을 치른 하세는 16분 52초만에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로 승리를 거두며 제 2대 WCW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했고, 헤비급 전향 이후 첫 싱글 벨트를 손에 넣었다.[26] 8일 뒤인 3월 24일 교토시체육관에서 치러진 HYPER BATTLE'94 16일차에서 재도전해온 릭 루드의 리버스 풀 넬슨에 20분만에 레퍼리 스탑으로 패배하며 벨트는 불과 8일만에 다시 내줘야 했다.
5월 1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레슬링 돈타쿠에서는 대학 선배 초슈 리키와 싱글 매치를 치렀다 패했고, 8월 G1 클라이맥스 4에 B조로 출전하였지만 승점 6점으로 승점 7점의 파워 워리어에게 밀려서 아쉽게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하세는 10월 9일에 시작한 SG 태그 리그에 다시 한 번 무토와 함께 출전하여 2연속 우승을 거두는 성과를 보여줬고, 11월 25일에 헬 레이저스(호크 워리어[27] & 파워 워리어)가 가지고 있던 IWGP 태그팀 벨트에 다시 한 번 도전했다. 무토가 호크에게 프랑켄슈타이너로 3카운트를 따내며 다시 한 번 무토와 IWGP 태그팀 챔피언에 올랐다.
12월 13일 오사카 부립체육관에서 치러진 배틀 파이널'94 마지막날 메인 이벤트에서, IWGP 헤비급 챔피언 하시모토 신야에게 도전하면서 최초로 IWGP 헤비급 벨트에 도전했다. 이미 4번의 방어를 성공시킨 하시모토를 상대로 평소에 안 쓰던 스윙 DDT를 안겨주는 등 30분에 달하는 혈투를 펼쳤으나, 하시모토의 피셔맨즈 DDT를 허용하며 5번째 방어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1995년 1월 4일, 도쿄 돔(闘強導夢) BATTLE 7의 제 13경기 메인 이벤트에서 이번엔 스타이너 브라더스와 다시 한 번 방어전을 치르게 된 하세 & 무토. 만원 관중의 메인 이벤트였던 만큼 25분의 치열한 경기 끝에 다시 하세가 노던 라이트 수플렉스 홀드로 릭에게 3카운트를 얻어내며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랑군단(狼軍団)과의 항쟁을 전개했다.
4월 28일에 안토니오 이노키의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 및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북한 평양 릉라도에서 치러진 WCW - 신일본 합동 흥행 콜리전 인 코리아에 참가해서 1일차에 와일드 페가수스를 상대했고, 2일차에는 오랫만에 사사키 켄스케와 함께 스타이너 브라더스를 상대하기도 했는데, 이 경험이 하세의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귀국 직후 5월에 귀국 축하 파티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이시카와현이 지역구이자 당시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고 있던 모리 요시로에게 영입 요청을 받은 동시에 두 달 후의 다음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냐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고뇌하던 하세는 출마를 결정하고 5월 말을 마지막으로 프로레슬러 활동을 휴식하고 15회 참원선에 출마해 당선되며 이노키에 이어 두 번째 프로레슬러 출신 참의원이 되었다.
12월 30일, 안토니오 이노키가 주최한 '돌연 만자굳히기-INOKI FESTIVAL-'에 출전하여 메인 이벤트에서 안죠 요지와 싱글 매치를 치러 10분만에 패배했고, 의원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1996년 1월 4일 '96 WRESTLING WORLD IN 도쿄 돔(闘強導夢) 흥행의 '노던 라이트 파이널 매치'라는 부제로 치러진 사사키 켄스케와 싱글 매치에 출전하여 프로레슬러 활동을 한동안 마무리하게 된다. 경기를 마친 후 사사키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하세가 불과 10년만에 떠나간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도 정치인으로서의 건투를 빌어주었다.[28]
2.2.1.3. 전일본 ~ 공식 은퇴 이후
1996년 11월 16일, 신일본을 탈단하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한다.2000년 전일본 대규모 탈단사태일때 정치활동으로 공백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사와 미츠하루 세력과 동조하지 않고 카와다 토시아키, 후치 마사노부, 타이요 케아와 전일본에 잔류한다.
2001년 10월 8일, 신일본의 도쿄 돔 흥행인 INDICATE OF NEXT의 메인 이벤트에 무토와 함께 출전하여 나가타 유지와 아키야마 쥰을 상대했으나, 28분 4초만에 나가타의 백드롭 홀드에 핀을 내주고 말았다.
2006년 은퇴경기를 치르고 프로레슬러 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은퇴한 후 11년만인 2017년 일일 복귀를 한 후, 가끔씩 가까운 선후배들의 데뷔 기념 흥행 혹은 은퇴시합같은 중요시합에 출전하기도 한다. 은퇴 후에도 몸관리는 꾸준히 하는지, 근육과 덩치는 현역때와 큰 차이가 없다.
2.3. 정계 입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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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키 참의원 선거 당시 |
1995년 4월 28일에 안토니오 이노키의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 및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북한 평양 릉라도에서 치러진 WCW - 신일본 합동 흥행 콜리전 인 코리아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하세는 북한에서 귀국한 이후 5월 경의 귀국 축하 파티에서 이시카와현이 지역구이자 당시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고 있던 모리 요시로의 영입[29]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입문 직후 프로레슬러 생활을 잠시 휴업하고 17회 참원선에서 무소속으로 이시카와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선 후 자민당에 입당했다.
2000년, 참의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42회 중원선에서 이시카와 1구에 출마해 민주당 소속 오쿠다 켄[30]을 누르고 당선됐다.
문부과학성 소속으로 문부과학대신 정무관, 자민당 문부과학부 회장을 맡는 등 자신의 교사 경력 및 프로레슬링 선수 경력과 가장 밀접한 분야인 교육, 문화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아베 신조 총리 재임 시절 중 제3차 아베 신조 제1차 개조내각 기간인 2015년 10월부터 2016년 8월까지는 제 20대 문부과학대신[31]을 역임했으며, 대신직 퇴임 이후에도 자민당 교육재생실행본부 본부장을 역임한 것을 보면 확실히 교육, 문화 분야를 전문 분야로 삼는 듯 하다.
2021년 주변 지인들에게 참의원직 불출마 의사를 밝혔으며, 2022년에 치러지는 이시카와현지사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결과 당선되었다.
올림픽 유치에 관해서 뇌물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자 발칵 뒤집혀지면서 주목을 받자 더 이상 올림픽 관한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2022년, 일본 유신회 상임고문으로 자민당 당적을 유지한 채로 임명되었다.#
이시카와현지사 재직 중이던 2024년 1월 1일, 2024년 이시카와현 노토 지방 지진이 발생하면서 지역구인 이시카와현이 매우 큰 피해를 입자 피해를 최소화하는 지휘를 하게 되었다.
자민당 파벌 정치자금 문제로는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하고 있지 않다했음을 밝혔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5 |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이시카와 선거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34,283 (49.35%) | 당선(1위) | 초선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시카와 1구 | | 107,179 (48.82%) | 초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7,075 (46.78%) | 낙선(2위) 석패율제 당선 | 재선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9,142 (53.73%) | 당선(1위) | 3선 | ||
2009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7,168 (45.85%) | 낙선(2위) 석패율제 당선 | 4선 | ||
2012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9,544 (47.87%) | 당선(1위) | 5선 | ||
2014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422 (50.70%) | 6선 | |||
2017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2,168 (59.08%) | 7선 | |||
2022 | 이시카와현지사 선거 | 이시카와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432 (34.13%) | 초선 |
4. 성향 및 정책
- 올림픽 대표로까지 출전한 아마추어 레슬러이자 프로레슬러 출신 정치인이라는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을 맡거나 스포츠 정책에 자문을 하는 등 스포츠 관련 활동을 많이 한다. 현재 맡고 있는 스포츠 단체의 직책으로는 학교법인 일본체육대학 이사, 일본레슬링협회 부회장, 일본피구협회 회장, 일본킨볼스포츠연맹 명예회장 등이 있다. 도쿄 올림픽 및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고문도 맡았다.
- 헌법 개정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찬성하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이라는 모임에 가입되어 있다.
- 2009년 6월 경, 새역모에서 만든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해 개정된 교육 기본법을 지킨 유일한 교과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이 해당 교과서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며, 근린 제국 조항과 고노 담화의 재검토를 주장했다.
-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등을 규제하는‘청소년 건전 육성 기본 법안’이라는 법안 제정을 담당했었다.
5. 여담
- 한자로 성이 한 글자, 이름이 한 글자인 일본 내에서 상당히 드문 케이스이다. 출생 당시 성은 '카와베'로 두 글자이었으나 하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며 발생한 케이스이다.
- '히로시(浩)'라는 이름은 하세가 태어나기 전 해에 태어난 나루히토 당시 황세손 현 덴노가 부여받은 어칭호인 '히로노미야(浩宮)'에서 따와서 부모님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황태자였던 아키히토(당시 어칭호 츠구노미야(繼宮))의 장남인 황세손의 탄생이 붐의 원인이 되어, 한 반에 4~5명은 꼭 이름이 '히로시(浩)'였다고 한다.
- 프로레슬러 시절에는 1985년 푸에르토리코 시절부터 길러온 특유의 一자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으나, 정치계 진출 이후 정리했다.
- 삼보 무술가 빅토르 코가[32]의 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94년 유명 작가 타카미 쥰의 사생아였던 탤런트 타카미 쿄코와 재혼했다(타카미도 재혼). 슬하에는 1997년생의 외동딸 하세 리온 ([ruby(馳, ruby=はせ)] [ruby(鈴音, ruby=り おん)])을 두고 있다.
- 1990년 6월 '미스터 백드롭'이라고 불리는 백드롭의 달인 고토 타츠토시와의 싱글 매치 도중 고토의 고각도 백드롭을 맞을 때 접수 미스로 옆 관자놀이에 충격이 제대로 가는 바람에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기는 끝냈으나, 다음 시합에 세컨드로 참여하러 링으로 가다가 심정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쓰러졌다. 링 닥터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동공마저 열려있던 위험한 상태였으며, 링 닥터와 경찰관의 빠른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로 1분만에 살아나긴 했으나 끝내주는 편두통을 겪으며 1주간 입원해야 했고, 두달간 경기 출전 금지 판정을 받았다. 여담으로 하세는 쓰러져 있을 때 대표적인 임사 체험인 유체이탈을 겪어 쓰러져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고 진술한 바 있으며, 이후 고토의 백드롭에는 '살인 백드롭'이라는 흉흉하지만 어떻게 보면 억울한 별명이 붙고 말았다.
- 프로레슬러 생활 도중 앞니 4개를 잃어서, 앞니 4개는 의치이다.
- 문부과학대신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교사 시절 학생들을 죽도로 체벌을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사실을 스스로 밝히면서 당시 체벌을 받은 고교생들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체벌을 해서는 안된다고 밝했다. 원래라면 정치생명이 바로 끝났겠지만 폭로의 형태가 아닌 자신의 입으로 고백을 하며 바로 사과를 했고, 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체벌 근절에 노력을 했기에 큰 문제는 안됐다. 물론 체벌이 정당화될수는 없지만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체벌이 암묵적으로 용인됐던 시절이었기도 했다.
- 문부과학대신 재임 시절인 2016년, 기후 대학 졸업식에서 기미가요가 제창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해당 발언에 대해 헌법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었다.
- 모모이로 클로버 Z의 팬이다.
- 2016년 3월 31일, 도쿄돔에서 개최된 러브 라이브의 μ’s FINAL LOVE LIVE! ~μ’sic forever~에 초청되어 참석한 적이 있다.
- 2020년 4월 30일 아베 도시코, 스즈키 하야토, 이데 요세이, 아사히 겐타로 등 동료 의원 4명과 보좌진들을 이끌고 일본의 성폭력과 학대 피해 소녀를 지원하는 시설에 몰려가 허가 없이 사진을 촬영하거나, 소녀들이 하는 텐트 설치를 하세가 "여자니까"라며 텐트 등 약간 무게가 있는 짐을 소녀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젊은 의원이나 비서들이 나르도록 했고 이런 태도에서 "여성에 대한 멸시를 느낀 소녀들이 큰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하세 의원은 이날 텐트 안에 라이트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던 한 소녀에게 "좀 비켜달라"고 말하며 뒤로 지나가며 양손으로 소녀의 허리를 만지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으로 밝혀져 비판받고 있다. 관련 기사 신체 접촉이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 "허리에 손을 댔는지 어떤지는 전혀 의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죄송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덧붙였다.
- 프로레슬러에서 은퇴했지만 거의 일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경기를 치르고 있다.
6. 둘러보기
6.1. 프로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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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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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선더 라이거 (1989 ~ 1992) | → | 하세 히로시 (1993) | → | (1994,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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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21일 | WCW WCW/신일본 수퍼쇼 1 |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 IWGP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십[34] _더 스타이너 브라더스(스캇 스타이너(O) & 릭 스타이너)_(C) vs 하세켄(사사키 켄스케(X) & 하세 히로시)(C) | ****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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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텐타 (1987) | → | 하세 히로시 (1988) | → | 코바시 켄타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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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류 겐이치로 (1990) | → | 하세 히로시 (1991) | → | 울티모 드래곤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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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 | 1993,1994 | → | 1995 |
하시모토 신야 & 초슈 리키 | → | 하세 히로시 & 무토 케이지 | → | 쵸텐 쵸노 마사히로 & 텐잔 히로요시 |
6.2.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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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위원장 | <colbgcolor=#ffffff,#1F2023> 요코쿠라 야스유키 | 총무회장 | <colbgcolor=#ffffff,#1F2023> 아베 츠카사 | |
중앙당 지도부 | ||||
공동 대표 | 요시무라 히로후미 | 마에하라 세이지 | |||
당무집행기구 | ||||
간사장 | 이와타니 료헤이 | 간사장 대행 | 가와사키 다이키 | |
정무조사회 | ||||
정무조사회장 | 우메무라 사토시 | 정무조사회장 대행 | 후지타 아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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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대책위원장 | 우루마 조지 | |||
고문단 | ||||
고문 | 하세 히로시 | |||
◀ 역대 대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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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 ※ 소속 정당과 국회 내 소속 회파(会派)는 다를 수 있음 | ||||
가네다 가쓰토시 | 가네코 마스오 | 가네코 슌페이 | 가네코 야스시 | 가도 히로후미 | |
가도야마 히로아키 | 가메오카 요시타미 | 가모시타 이치로 | 가미야마 사이치 | 가미카와 요코 | |
가미타니 노보루 | 가쓰마타 다카아키 | 가와무라 다케오 | 가와사키 지로 | 가지야마 히로시 | |
가토 가쓰노부 | 가토 간지 | 간다 겐지 | 간다 유타카 | 간케 이치로 | |
고가 아쓰시 | 고노 다로 | 고무라 마사히로 | 고바야시 다카유키 | 고바야시 후미아키 | |
고이즈미 류지 | 고이즈미 신지로 | 고지마 도시후미 | 고쿠바 고노스케 | 고테라 히로오 | |
고토 시게유키 | 고토다 마사즈미 | 구니미쓰 아야노 | 구도 쇼조 | 구마다 히로미치 | |
기무라 데쓰야 | 기무라 야요이 | 기무라 지로 | 기시 노부오 | 기시다 후미오 | |
기우치 미노루 | 기카와다 히토시 | 기타무라 세이고 | 기하라 미노루 | 기하라 세이지 | |
나카사카 야스마사 | 나가시마 아키히사 | 나가오 다카시 | 나가오카 게이코 | 나카네 가즈유키 | |
나카무라 히로유키 | 나카소네 야스타카 | 나카야마 노리히로 | 나카야마 야스히데 | 나카타니 겐 | |
나카타니 신이치 | 네모토 다쿠미 | 네모토 유키노리 | 노나카 아쓰시 | 노다 다케시 | |
노다 세이코 | 누카가 후쿠시로 | 니시다 쇼지 | 니시메 고사부로 | 니시무라 아키히로 | |
니시무라 야스토시 | 니와 히데키 | 니카이 도시히로 | 다나카 가즈노리 | 다나카 류세이 | |
다나카 히데유키 | 다나하시 야스후미 | 다니 고이치 | 다니가와 도무 | 타니가와 야이치 | |
다도코로 요시노리 | 다무라 노리히사 | 다바타 히로아키 | 다이라 마사아키 | 다치바나 게이치로 | |
다카기 게이 | 다카기 쓰요시 | 다카이치 사나에 | 다카토리 슈이치 | 다카하시 히나코 | |
다케다 료타 | 다케모토 나오카즈 | 다케무라 노부히데 | 다케베 아라타 | 다케시타 와타루 | |
다케이 슌스케 | 데바타 미노루 | 도가시 히로유키 | 도미오카 쓰토무 | 도이 도루 | |
도카사키 나오미 | 도카이 키사부로 | 마쓰노 히로카즈 | 마쓰모토 다케아키 | 마쓰모토 요헤이 | |
마쓰모토 후미아키 | 마쓰시마 미도리 | 마키시마 카렌 | 마키하라 히데키 | 모리 에이스케 | |
모리야마 마사히토 | 모리야마 히로시 | 모테기 도시미쓰 | 무네키요 고이치 | 무라이 히데키 | |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 무타이 슌스케 | 무토 요지 | 미노리카와 노부히데 | 미쓰바야시 히로미 | |
미쓰야 노리오 | 미야시타 이치로 | 미야우치 히데키 | 미야자와 히로유키 | 미야자키 마사히사 | |
미야지 다쿠마 | 미야코시 미쓰히로 | 미타니 히데히로 | 미하라 아키히코 | 사사가와 히로요시 | |
사사키 하지메 | 사이토 겐 | 사이토 히로아키 | 사카모토 데쓰시 | 사카이 마나부 | |
사쿠라다 요시타카 | 사토 쓰토무 | 사토 아키라 | 사토 아키오 | 사토 유카리 | |
세키 요시히로 | 소노우라 겐타로 | 소바야시 다카유키 | 스가 요시히데 | 스기타 미오 | |
스즈키 게이스케 | 스즈키 노리카즈 | 스즈키 다카코 | 스즈키 슌이치 | 스즈키 준지 | |
스즈키 하야토 | 시게모토 모토루 | 시모무라 하쿠분 | 시바야마 마사히코 | 시오노야 류 | |
시오자키 야스히사 | 신도 요시타카 | 신타니 마사요시 | 쓰시마 준 | 쓰지 기요토 | |
쓰치야 시나코 | 아나미 요이치 | 아마리 아키라 | 아베 토시코 | 아베 신조 | |
아소 다로 | 아오야마 슈헤이 | 아이사와 이치로 | 아제모토 쇼고 | 아카마 지로 | |
아카자와 료세이 | 아키모토 마사토시 | 아키바 겐야 | 안도 다카오 | 안도 히로시 | |
야기 데쓰야 | 야나 가즈오 | 야마구치 다이메이 | 야마구치 쓰요시 | 야마기와 다이시로 | |
야마다 겐지 | 야마다 미키 | 야마모토 고이치 | 야마모토 고조 | 야마모토 다쿠 | |
야마모토 도모히로 | 야마모토 유지 | 야마시타 다카시 | 야마구치 슌이치 | 에사키 데쓰마 | |
에토 다쿠 | 에토 세이시로 | 에토 아키노리 | 엔도 도시아키 | 오구라 마사노부 | |
오구시 마사키 | 오노 겐타로 | 오노데라 이쓰노리 | 오니시 히데오 | 오니시 히로유키 | |
오니키 마코토 | 오다와라 기요시 | 오미 아사코 | 오부치 유코 | 오시마 다다모리 | |
오시카와 다케루 | 오쓰카 다쿠 | 오오카 도시타카 | 오자토 야스히로 | 오치 다카오 | |
오카시타 쇼헤이 | 오코노기 하치로 | 오쿠노 신스케 | 오쿠마 가즈히데 | 와다 요시아키 | |
와시오 에이이치로 | 와카미야 겐지 | 와타나베 고이치 | 와타나베 히로미치 | 요시노 마사요시 | |
요시이에 히로유키 | 우에노 겐이치로 | 우에노 히로시 | 우에스기 겐타로 | 이나다 도모미 | |
이노 도시로 | 이노우에 다카히로 | 이노우에 신지 | 이데 요세이 | 이마무라 마사히로 | |
이마에다 소이치로 | 이바야시 다쓰노리 | 이부키 분메이 | 이시다 마사토시 | 이시바 시게루 | |
이시카와 아키마사 | 이시하라 노부테루 | 이시하라 히로타카 | 이와야 다케시 | 이와타 가즈치카 | |
이즈미다 히로히코 | 이케다 미치타카 | 이케다 요시타카 | 이토 타다히코 | 이토 다쓰야 | |
이토 신타로 | 이토 요시타카 | 가토 아유코 | 테라다 미노루 | 하기우다 고이치 | |
하나시 야스히로 | 하라다 겐지 | 하라다 요시아키 | 하마다 야스카즈 | 하세 히로시 | |
하시모토 가쿠 | 하야시 모토오 | 하토야마 지로 | 햐쿠타케 기미치카 | 호리이 마나부 | |
호리우치 노리코 | 호소카 야스시 | 호소노 고시 | 호소다 겐이치 | 호소다 히로유키 | |
호시노 쓰요시 | 혼다 다로 | 후나다 하지메 | 후나하시 도시미쓰 | 후루야 게이지 | |
후루카와 야스시 | 후루카와 요시히사 | 후루타 게이지 | 후지마루 사토시 | 후지와라 다카시 | |
후지이 히사유키 | 후쿠다 다쓰오 | 후쿠야마 마모루 | 후쿠이 데루 | 후쿠자와 요이치 | |
히라구치 히로시 | 히라사와 가쓰에이 | 히라이 다쿠야 | }}} }}}}}} |
[1] 출생 당시의 본명은 카와베 히로시([ruby(川辺, ruby=かわ べ)] [ruby(浩, ruby=ひろし)])였다.[2] 출생 당시에는 니시토나미군(西礪波郡) 토츄마치(砺中町)였으나 태어난 다음 해인 1962년 8월에 오야베시로 옆의 이스루기마치와 함께 신설합병되었다.[3] 카나자와시 소재. 매우 다양한 분야에 동문이 있으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포수 우치야마 소마와 선발투수 오쿠가와 야스노부, 치바 롯데 마린즈의 투수 이와시타 다이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외야수 시마우치 히로아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준족의 외야수였던 무라마츠 아리히토와 일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를 비롯한 야구 선수, 일본 최고의 축구 선수 혼다 케이스케, 전 Juice=Juice의 리더 미야자키 유카 등을 배출해 냈다.[4] 프로레슬링계 최대 파벌 중 하나인 센슈대학 파벌의 넘버 2이다. 이 곳 출신으로는 대사조 초슈 리키, 나카니시 마나부, 아키야마 쥰, 캡틴 뉴 재팬, 전공이 안 맞아 중퇴한 미카미 쿄스케 등이 있다.[5] 1959년생 탤런트로, 서로 재혼이다. 유명작가 타카미 쥰의 사생아로 태어나 14세에 잡지에 데뷔한 이래 다수의 방송에 출연했다. 한류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용하의 엄청난 팬이었다.[6] 친가는 꽤 가난한 집안이었던데다 거기서조차 3남이었던 그가 무언가를 이어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양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작지만 물려받을 수 있는 집과, 사과밭이 생긴다는 점에서 어린 나이였음에도 큰 기회라고 보아 즉시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7] 시작은 반강제였으나 레슬링부의 고문 선생이 '이시카와현에 레슬링부가 있는 것은 세이료 고교 뿐이니까 교내에서만 제일이 된다면 일본 전국 대회(인터하이, 국체)에도 즉시 진출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미국 원정도 공짜, 대학도 등록금 면제로 진학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레슬링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8] 국문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올림픽 출전 이후 졸업하여 교원 자격을 얻고, 사실상의 고향인 카나자와의 모교 세이료 고교에서 선생으로 재직하며 친가의 과수원 경영을 도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 레슬링부 코치이자 은사의 추천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하세가 프로레슬러 전향을 마음먹자 하세의 선택을 대찬성해주었다고 한다.[10] 초슈는 당시 한국 국적이여서 1972 뮌헨 올림픽에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했다. 졸업 후에도 모교 센슈대에 자주 들러 레슬링부의 연습을 빡세게 봐주고 고급 스시를 모두에게 먹여줬다고 한다.[11] 뒤로 몸을 쭉 뺐다가 힘을 한번에 집중해서 치는 역수평 찹으로, 헤비급 중에서는 중량급이라고 하긴 어려운 하세임에도 이 방법으로 상당히 무거운 찹을 쳤다.[12] 언제나 기운차게 달려와 상대의 안면에 그대로 꽂아넣는 빅 붓을 선보였다.[13] 북미에서는 그레이트 무타의 무타 락으로 유명한 기술. 하세의 경우 낫 굳히기의 시작 자세인 리버스 인디언 데스락 자세에서 몇번이고 관중석을 둘러보며 뒤로 쓰러져 상대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면서도 관객들에게 어필을 하며 사용하는 쇼맨십도 함께 보여줬다.[14] 일본 프로레슬링계 자이언트 스윙의 대명사. 단단한 코어 힘으로 거의 모든 체급에게 사용이 가능했으며, 경량급 상대라면 거의 무한대로 돌릴 수 있어서 공식 은퇴전에서도 "brother"YASSHI를 상대로 45바퀴를 돌렸다. 공식 은퇴 후 이벤트로 한번씩 출전할 때 마다 관객들 앞에서 꼭 선보이는 하세식 쇼맨십의 대표격인 기술이다.[15]
1989년 6월 이이즈카 타카시와 함께 소련 원정을 가서 삼보를 수련을 쌓던 도중 개발한 하세 히로시의 오리지널 기술. 상대가 아름다운 호를 그리게 만드는 특유의 기술 비주얼이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국가를 불문하고 많은 후배 레슬러들이 애용하고 있다.[16] 존 파의 Two Hearts의 인스트루멘탈 버전. 신일본 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일본 이적 후는 물론, 공식 은퇴 후 간혹 프로레슬링판에 얼굴을 보일 때도 항상 사용하고 있다.[17] 2017년 7월 26일에 무토 케이지가 프로듀스한 프로레슬링 마스터즈 메인 이벤트 스페셜 6인 태그 매치에 은퇴 11년만에 출전, 후지나미 타츠미 & 초슈 리키와 함께 그레이트 무타 & 그레이트 카부키 & TNT를 상대하여 TNT에게 노던 라이츠 수플렉스 홀드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고, 프로레슬링 NOAH의 2021년 1월 4일 신년 흥행에서 경기를 가진 적도 있다.[18] 하세 히로시 은퇴 기념 흥행.[19] 특유의 콧수염도 이 때부터 길렀다.[20] 초슈의 부름조차 못 받은 니이쿠라는 FA가 되었다가, 이후 SWS에 합류했다.[21] 이 때부터 경기복을 검은색 숏 타이츠에서 하세의 상징과도 같은 노란색으로 변경했다.[22]
이 경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경기는 4.5성을 받으며 1991년 레슬링 옵저버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었다.[23] 1일차 11월 3일과 4일은 코라쿠엔 홀, 11월 5일은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 3일 연속 흥행이었다.[24] 이후 사사키가 12월부터 헬 레이저스에 '파워 워리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면서 하세켄 태그는 결별했다.[25] WWF 당시의 허큘리스라는 링네임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26] 이때 쯤 탤런트 타카미 쿄코와 재혼했다.[27] 로드 워리어 호크.[28] 예외적으로 7월 26일 지역구였던 카나자와시에서 치러진 후지나미 타츠미 주최 흥행 '드래곤 스피릿~용왕전설~ 4일차'에만 한 번 출전했다.[29] 모리 요시로의 장남으로 당시 비서를 맡고 있던 모리 유우키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냐고 추천했다고 한다.[30] '타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의 측근으로 다케시타파 칠봉행으로 불리우던 오쿠다 케이와의 장남으로, 케이와의 지역구였던 이시카와 1구를 세습받았으나 하세와 이시카와 제1구를 주고받는 세습 정치인 치고는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도중 2011년경 노다 내각에서 국토교통성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일본 민주당이 박살나면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하세에게 더블 스코어로 패배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21년 6월 22일 심근경색으로 사망.[31] 한국의 장관급.[32] 일본의 삼보 무술가. 일본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의 혼혈로 만주국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삼보 연맹을 창설하는 등 일본에 러시아의 고유 무술 삼보를 퍼트린 장본인이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34]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인 스타이너 브라더스와 신일본의 IWGP 태그팀 챔피언인 하세 히로시 & 사사키 켄스케가 서로의 벨트를 걸고 대결했으며, 사사키 켄스케가 스캇 스타이너의 프랑켄 슈타이너를 맞고 무너지면서 스타이너 브라더스가 승리하여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 겸 IWGP 태그 팀 챔피언이 되었다.
1989년 6월 이이즈카 타카시와 함께 소련 원정을 가서 삼보를 수련을 쌓던 도중 개발한 하세 히로시의 오리지널 기술. 상대가 아름다운 호를 그리게 만드는 특유의 기술 비주얼이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국가를 불문하고 많은 후배 레슬러들이 애용하고 있다.[16] 존 파의 Two Hearts의 인스트루멘탈 버전. 신일본 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일본 이적 후는 물론, 공식 은퇴 후 간혹 프로레슬링판에 얼굴을 보일 때도 항상 사용하고 있다.[17] 2017년 7월 26일에 무토 케이지가 프로듀스한 프로레슬링 마스터즈 메인 이벤트 스페셜 6인 태그 매치에 은퇴 11년만에 출전, 후지나미 타츠미 & 초슈 리키와 함께 그레이트 무타 & 그레이트 카부키 & TNT를 상대하여 TNT에게 노던 라이츠 수플렉스 홀드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고, 프로레슬링 NOAH의 2021년 1월 4일 신년 흥행에서 경기를 가진 적도 있다.[18] 하세 히로시 은퇴 기념 흥행.[19] 특유의 콧수염도 이 때부터 길렀다.[20] 초슈의 부름조차 못 받은 니이쿠라는 FA가 되었다가, 이후 SWS에 합류했다.[21] 이 때부터 경기복을 검은색 숏 타이츠에서 하세의 상징과도 같은 노란색으로 변경했다.[22]
이 경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경기는 4.5성을 받으며 1991년 레슬링 옵저버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었다.[23] 1일차 11월 3일과 4일은 코라쿠엔 홀, 11월 5일은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 3일 연속 흥행이었다.[24] 이후 사사키가 12월부터 헬 레이저스에 '파워 워리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면서 하세켄 태그는 결별했다.[25] WWF 당시의 허큘리스라는 링네임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26] 이때 쯤 탤런트 타카미 쿄코와 재혼했다.[27] 로드 워리어 호크.[28] 예외적으로 7월 26일 지역구였던 카나자와시에서 치러진 후지나미 타츠미 주최 흥행 '드래곤 스피릿~용왕전설~ 4일차'에만 한 번 출전했다.[29] 모리 요시로의 장남으로 당시 비서를 맡고 있던 모리 유우키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냐고 추천했다고 한다.[30] '타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의 측근으로 다케시타파 칠봉행으로 불리우던 오쿠다 케이와의 장남으로, 케이와의 지역구였던 이시카와 1구를 세습받았으나 하세와 이시카와 제1구를 주고받는 세습 정치인 치고는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도중 2011년경 노다 내각에서 국토교통성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일본 민주당이 박살나면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하세에게 더블 스코어로 패배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21년 6월 22일 심근경색으로 사망.[31] 한국의 장관급.[32] 일본의 삼보 무술가. 일본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의 혼혈로 만주국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삼보 연맹을 창설하는 등 일본에 러시아의 고유 무술 삼보를 퍼트린 장본인이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34]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인 스타이너 브라더스와 신일본의 IWGP 태그팀 챔피언인 하세 히로시 & 사사키 켄스케가 서로의 벨트를 걸고 대결했으며, 사사키 켄스케가 스캇 스타이너의 프랑켄 슈타이너를 맞고 무너지면서 스타이너 브라더스가 승리하여 WCW 월드 태그팀 챔피언 겸 IWGP 태그 팀 챔피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