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제1차 사이온지 내각 第一次西園寺內閣 | First Saionji Cabinet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906년 1월 7일 ~ 1908년 7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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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가쓰라 내각 | 제2차 가쓰라 내각 | }}} | |
<colbgcolor=#ff0000> 내각총리대신 | 사이온지 긴모치 / 제12대 | ||
여당 | |||
중의원 해산일 | 1908년 3월 1일 (임기만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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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6년 1월 7일, 입헌정우회 총재이자 귀족원 후작 의원 사이온지 긴모치가 제1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설립된 내각으로, 1908년 7월 14일까지 이어졌다.히비야 방화 사건의 영향으로 제1차 가쓰라 내각이 궁지에 몰리면서 가쓰라 다로 총리는 중의원 원내 1당인 입헌정우회의 협력을 원하며 사이온지에게 정권을 선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국책에 협력, 사실상 각외협력 상태에 있었다.
가쓰라는 정우회의 당무를 총괄하고 있던 하라 다카시와 밀담을 거듭하다가 포츠머스 조약 채결 직후인 1905년 12월 20일에 내각총사퇴를 결의, 후계 총리로 사이온지 총재를 주청해, 이듬해인 1906년 1월 6일 원로회의의 승인을 거쳐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사이온지 총재로 조각대명이 강하해, 7일에 내각이 발족했다.
그러나 사이온지 내각은 온전한 정당내각이라고 보기 힘들었는데, 입헌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은 입각은 하라 다카시 내무대신, 마츠다 마사히사가 사법대신이 되는 데 그쳤다.[1] 거기다가 사이온지 내각의 정책도 전임 내각인 제1차 가쓰라 내각의 정책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 '위임장 내각', '대리인 내각' 등으로 조롱받았다. 가쓰라 전 총리도 군사참의관에 취임, 내각의 고문격으로 자칫 대립할 가능성이 있었던 번벌[2]과 입헌정우회의 가교 역할을 맡았다.
사이온지 내각은 가쓰라 전 총리대신의 협력 하에 정권을 운영했지만, 한편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필두로 한 번벌 내의 反정우회 세력과 하라가 이끄는 입헌정우회가 서로의 세력을 잘라내는 것을 목표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하라는 야마가타의 아성인 귀족원 의원(주로 백작·자작급)을 무너뜨리고자 했고, 야마가타는 오쿠마 시게노부 전 총리가 이끌던 중의원 제2당 헌정본당과 접근, 대동구락부나 중앙구락부 결성을 주도했다. 후술하는 군(郡) 제도 폐지를 둘러싸고, 1906년부터 1907년에 걸쳐 서로를 향한 깎아내리기 격렬했지만, 중의원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1908년 1월 23일 헌정본당, 대동구락부, 유흥회가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제출했으며, 사이온지 내각은 가결시 중의원 해산을 결의하지만, 168 vs 177로 부결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임기만료로 제1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입헌정우회는 선거 후 입당한 의원들을 더해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직후 6월 22일 적기 사건이 발생, 사회주의의 침투가 대대적으로 밝혀진다. 다음날인 23일, 야마가타는 메이지 천황을 배알해 사이온지 내각의 사회주의 대응이 불충분한 것을 주상, 비난한다. 도쿠다이지 사네츠네 시종장(사이온지 총리대신의 친형)으로부터 통보받은 사이온지는 정권 운영에 염증을 느껴 병기를 명목으로 사의를 밝힌다. 당 간부인 하라 내무대신과 마츠다 사법대신은, 직전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것을 들어 위류했지만, 7월 4일 사이온지 내각은 총사퇴한다. 후임으로는 사이온지는 가쓰라를 추천. 원로회의는 열리지 않고, 각 원로에게 칙사가 세워졌는데, 야마가타도 후임 총리로 추천된 것이 번벌의 후계자인 가쓰라였기 때문에 불평은 없었으며, 12일 제2차 가쓰라 내각이 성립된다.
2. 각료 목록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ff0000; border-right: 10px solid #ff000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colcolor=#ffffff> 외무대신 | <colbgcolor=#ffffff,#000000> 가토 다카아키 → 사이온지 긴모치 → 하야시 타다스 | |
내무대신 | 하라 다카시 | |
대장대신 | 사카타니 요시로 → 마츠다 마사히사 | |
육군대신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해군대신 | 사이토 마코토 | |
사법대신 | 마츠다 마사히사 → 센게 타카토미 | |
문부대신 | 사이온지 긴모치 → 마키노 노부아키 | |
농상무대신 | 마츠오카 야스타케 | |
체신대신 | 야마가타 이사부로 → 하라 다카시 → 홋타 마사야스 | }}} }}}}}}}}} |
2.1. 국무대신
- 비고란에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1906년 1월 7일 임명
직책 | 대수 | 성명 | 소속 | 특이 사항 | 비고 |
내각총리대신 | 제12대 | 사이온지 긴모치 | 귀족원 입헌정우회 후작 | 외무대신, 문부대신 임시겸임 | 재입각 입헌정우회 총재 |
외무대신 | 제19대 | 가토 다카아키 | 외무성 무소속 | 재기용 1906년 3월 3일 면직 | |
제20대 | 사이온지 긴모치 | 귀족원 입헌정우회 후작 | 임시겸임 (내각총리대신 겸임) | 1906년 3월 3일 겸임 1906년 5월 19일 겸임해제 | |
제21대 | 하야시 타다스 | 외무성 무소속 자작 | 첫 입각 1906년 5월 19일 임명 | ||
내무대신 | 제21대 | 하라 다카시 | 중의원 입헌정우회 | 체신대신 겸임 | 재입각 |
대장대신 | 제11대 | 사카타니 요시로 | 대장성 무소속 | 첫 입각 1908년 1월 14일 면직 | |
제12대 | 마츠다 마사히사 | 중의원 입헌정우회 | 사법대신 겸임 | 1908년 1월 14일 겸임 | |
육군대신 | 제7대 | 데라우치 마사타케 | 군인 육군 중장 | 유임 | |
해군대신 | 제6대 | 사이토 마코토 | 군인 해군 중장 (해군병학교 6기) 남작[3] | 첫 입각 | |
사법대신 | 제13대 | 마츠다 마사히사 | 중의원 입헌정우회 | 대장대신 겸임 | 재입각 1908년 3월 25일 면직 |
제14대 | 센게 타카토미 | 귀족원 무소속 (목요회) 남작 | 첫 입각 1908년 3월 25일 임명 | ||
문부대신 | - | 사이온지 긴모치 | 귀족원 입헌정우회 후작 | 임시겸임 (내각총리대신 겸임) | 1906년 3월 27일 겸임 해제 |
20대 | 마키노 노부아키 | 민간인 무소속 남작 | 첫 입각 1906년 3월 27일 임명 | ||
농상무대신 | 제17대 | 마츠오카 야스타케 | 귀족원 무소속 | 첫 입각 | |
체신대신 | 제15대 | 야마가타 이사부로 | 내무성 무소속 | 첫 입각 1908년 1월 14일 면직 | |
제16대 | 하라 다카시 | 중의원 입헌정우회 | 내무대신 겸임 | 1908년 1월 14일 겸임 1908년 3월 25일 겸임 해제 | |
제17대 | 홋타 마사야스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첫 입각 1908년 3월 25일 임명 |
2.2. 내각서기관장·법제국장관
- 비고란에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1906년 1월 7일 임명
직책 | 대수 | 성명 | 소속 | 특이 사항 | 비고 |
내각서기관장 | 13대 | 이시와타 빈이치 | 사법성 무소속 | 1908년 1월 4일 면직 | |
14대 | 미나미 히로시 | 내무성 무소속 | 1908년 1월 4일 임명 | ||
법제국장관 | 10대 | 이치키 기토쿠로 | 귀족원 무소속 | 내각은급국장 겸임 | 사무대리 1906년 1월 13일 면직 |
11대 | 오카노 케이지로 | 농상무성 무소속 | 내각은급국장 겸임 | 1906년 1월 13일 임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