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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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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49년 12월 6일 | ||
야마시로국 교토 (現 교토부 교토시) | |||
사망 | 1940년 11월 24일 (향년 90세) | ||
시즈오카현 이하라군 오키츠초 (現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 |||
재임기간 | 제7대 추밀원 의장[1] | ||
1900년 10월 27일 ~ 1903년 7월 13일 | |||
제12대 내각총리대신 | |||
1906년 1월 7일 ~ 1908년 7월 14일 | |||
제14대 내각총리대신 | |||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 |||
서명 | [2]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학력 | 가쿠슈인 가이세이학교[3] 소르본 대학교 (학사) | |
작위 | 공작 | ||
정당 | |||
약력 | 동양자유신문 사장 귀족원 의원 제3대 귀족원 부의장 제11대 외무대신 제7·10대 문부대신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제7대 추밀원 의장 제2대 입헌정우회 총재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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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온지 가문의 가몬(家紋)인 히다리미츠도모에(左三つ巴) 문장. |
일본의 제12, 14대 내각총리대신. 14대 총리 재임 중 메이지 천황이 사망함에 따라 메이지 시대 마지막 총리 겸 다이쇼 시대 초대 총리가 되었다.
마지막 원로 인사로 꼽힌다. 그가 사망하면서 일본의 원로 정치는 완전히 종료한다.
2. 생애
2.1. 출신
교토 출신으로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계열의 청화가(清華家)[4] 중 하나인 도쿠다이지 가(徳大寺家)의 제28대 당주이자 우대신(右大臣)이었던 도쿠다이지 킨이토(徳大寺公純)의 차남으로 태어나 4세에 사이온지 가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했다. 두 가문의 서열 모두 청화가였고, 후지와라노 긴자네(藤原公実)를 조상으로 한다. 킨이토는 다카쓰카사 제24대 당주 스케히로의 숨겨진 서장자였기 때문에 긴모치는 고셋케의 직계 혈통을 이어받았다.청화가(세이가케)는 섭정, 관백(關白)을 독차지하던 고셋케보다는 처지지만 좌대신, 우대신과 대납언 같은 고위직을 차지하던 고위 귀족이었다. 이 덕분에 청화가는 메이지 유신 후 일괄적으로 화족 중 두 번째로 높은 계층이던 후작 작위에 서훈되었고, 이후 사이온지 가는 긴모치의 대에 이르러 공적을 인정받아 1920년에 공작가로 승작했다. 또 혈통상 사이온지 긴모치 본인은 간인노미야의 초대 당주 나오히토(直仁) 친왕의 후손, 113대 히가시야마 덴노의 6세손이다. 즉 메이지 덴노의 11촌 조카뻘 되는 황족 혈통이다.
친형 도쿠다이지 사네츠네(徳大寺実則)는 시종장을 3번 역임하고 내대신(內大臣)으로도 근무한 궁중의 실력자였다. 바로 밑의 동생 스미토모 토모이토(住友友純)는 재벌 스미토모 가(住友家)의 데릴사위로 제15대 스미토모 키치자에몬의 이름을 계승해, 장기간 재계에 군림했다. 그리고 막내동생 스에히로 타케마로(末弘威麿)는 외가인 스에히로 가(末弘家)를 이어, 후에 사립 교토 법정학교(현재의 리츠메이칸대학)의 간사, 이사를 맡았다.
2.2. 에도 막부 말기~메이지 유신
파일:external/bakumatsu.org/00012_l.jpg |
젊은 시절의 사이온지 긴모치 |
유년기에는 가쿠슈인에서 공부했으며, 당시 거주지가 어소(御所)와 가깝고, 사치노미야(후의 메이지 천황)와 나이가 비슷하여[5] 종종 그의 놀이 상대로 부름을 받았다.
이와쿠라 도모미나 산조 사네토미와 같은 에도 막부 말기에서의 정치적 공적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토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도쿠가와 가와 시마즈 가의 사적인 싸움이라고 보는 의견이 나오던 중에 적극적인 관여주전론을 주장해 이와쿠라 토모미 등의 토막파 공경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신전쟁에는 산인도 진무총독, 아이즈 구 정벌대참모로서 각지를 전전했고 그 후엔 에치고 부지사 등을 역임했지만, 그 당시 10대의 젊은 나이로 임관이 가능했던 이유로 사이온지 가문의 후광 이외의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다만 아이즈 번과의 전투에서 직접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싸우는 등 분전한 것은 사실이다. 또, 공경 중에서 처음 양장 차림으로 궁중에 참내하여 상당수의 잔류 양이파 공경의 노여움을 산 에피소드도 자기 저서 도암수필(陶庵随筆)에서 피력하고 있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저서인 '화신'(花神, かしん)에서 도막파 병학자 오무라 마스지로가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보고 있었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마스지로에게 “당신은 군문 쪽으로는 나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사이온지는 공가 식의 이름인 킨모치를 싫어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보이치로(望一郎)'로 개명하였다.
1869년, 카이세이학교(현재의 도쿄대학)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1871년 오무라의 추천을 받아 1871년 관비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자 (후에 감액을 신청한다) 그에 대한 답례 방문을 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구와의 대화가 길어진 사이 오무라 마스지로가 습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학 당시의 편지에는 프랑스로 가는 배 안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일을 이해한 일이나, 백인 소년에게 이별의 키스를 요청 받아 당황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실려있다. 그는 1880년까지 그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의 여러 사상, 지식, 문화 등을 배우고 경험했다. 그의 일본인답지 않게 할 말 다 하고 사는 성격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6]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털려 파리 코뮌이 성립되기 직전이었는데, 코뮌 성립 뒤에도 계속 머물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또한 조르주 클레망소(후의 프랑스 수상), 동료 유학생인 나카에 토쿠스케(中江篤介)[7], 마츠다 마사히사(松田正久)[8] 등과 친교를 맺어 귀국 후까지 그 인맥을 이어갔다.
파리 유학에서 자유 사상을 접하고 자유민권운동에 심취하여 나카에 마츠히사, 마츠다 마사히사 등과 함께 1881년 3월 18일에 동양자유신문을 발행하며 정부를 공격했다. 사이온지가 자유민권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싫어한 정부의 압력에 의해 퇴사를 종용받아 4월 30일 제34호까지만 발행된 후 폐간의 쓰라림을 맞게 된다.
당시 메이지 유신에 끼었던 소수의 공경 출신 인사들 가운데 하나인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9]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10]는 공경 집안들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집안 출신인 사이온지가(둘 다 청화가다)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신문사의 사장 노릇이나 한다고 분통을 터뜨린 끝에 신문사 사장과 담판을 지어서 사이온지를 강제로 해직시킨 뒤 관료직으로 밀어 넣었다는 못 믿을 이야기가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박식했으며, 당시 일본 지도부보다는 깨어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2.3. 정치 초기
정치가로서의 경력은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에서 시작된다. 유럽에서 이토의 지우를 얻은 사이온지는, 1900년 입헌정우회 창당에 참가해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그 후 다이쇼 천황 즉위시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 사이온지의 사상은 프랑스에서 배운 자유주의(Libéralisme)을 자칭하여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 탓인지 친유럽적인 면을 보여 군부 등에서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람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에게 정치력이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후의 일본에서 사이온지만큼의 정치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궁중 재계와의 인척관계를 배경으로, 그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역을 맡아 일본 정계를 이끌었다. 또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를 개정하려 하는 등 쇼와 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와는 거리를 둔 언행을 간간히 보이며 군부의 세력 확대에 저항했지만, 전쟁을 막아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첫 임기 때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에 많이 일조했다. 통감체제 하로 두는 한일신협약을 날인했고, 그의 상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군대를 완전히 해산시킨 장본인이다. 프랑스에서 배운 자유민권 사상은 어디 갔냐 싶지만, 당대 프랑스가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악랄함으로 유명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런 킨모치의 제국주의적인 면모 또한 그대로 배워왔다고 볼 수 있다. 당대 제국주의 국가의 사상가와 정치인들 중에서 이런 모순을 지적하면서 반대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비정상 취급이나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수탈한 것에 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다.
2.4. 제1차 호헌 운동
총리 재임 시절 |
1908년 총선에서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승리했지만 경제 문제를 못 풀어 얼마 뒤 끝내 총사퇴했다. 민간에서 경기 회복의 일환으로 요구하던 러일전쟁의 전비조달로 올라간 세금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경기불황이 러일전쟁의 전쟁 차관까지 겹치면서 일어나니...
1911년 2차 임기 시절에도 재정 악화와 군비 확충 문제로 애를 먹었는데, 러일전쟁 종결 이후 전비 조달을 위해 발행된 막대한 액수의 공채로 말미암아 국내/외로 원금과 이자를 정부 재정으로 상환을 위해 긴축 재정을 추진하였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기반으로 하는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도 있었기에, 이대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1913년(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 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전 내각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예외를 둘 수는 없었고, 군국주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군대는 그 특성상 돈만 잡아먹지 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긴축을 할 때 가장 많이 축소해야 하는 분야에 속한다. 러일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사이온지가 받아들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제안이었던 것.
이에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 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나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내각총리대신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 육군대신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군대신을 얻지 못한 채 사임할 수밖에 없어, 당시 육군대신 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덴노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군대신의 사표 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 육군대신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군대신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이를 다이쇼 정변이라고 하는데,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 타파, 헌정 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29대 총리) 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 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 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 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하라 다카시(原敬)나(19대 총리), 마츠다 마사히사(松田正久)(중의원 의장, 대장대신, 문부대신, 사법대신 역임) 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20대 사법대신)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제3차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 측에서는 영국의 조지 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 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킨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11]
결국, 호헌 운동의 고조로 제3차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 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총재로서 출석한 건 결코 아니었다.[12]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 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 수상은 야마모토 곤노효에로 정해졌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지멘스 사건이라는 희대의 부패 스켄에 걸려 총사퇴한다.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프랑스 유학 시절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 대표단의 전권수석으로 임명되어 파리에 파견되었으나 실질적인 임무는 전권차석인 마키노 노부아키가 담당하였다. 이때 일본 제국 대표단의 구성이 엄청난데 요시다 시게루(吉田茂)(45, 48-51대 총리), 아시다 히토시(芦田均)(47대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고셋케의 수장이자 34, 38, 39대 총리),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61, 64, 75-77대 외무대신),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2차 대전 직전 미 주재 일본 대사),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2차대전 직전 외무대신) 등 전간기, 태평양 전쟁기, 전후 일본의 외교와 정계에서 활약한 정치가와 외교관들이 가득하다.
위의 임기표를 보듯이 1900년대 초반의 일본 내각총리대신직은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사이온지가 돌려막기식으로 역임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을 세게 받은 일본 군부 내 조슈 강경파의 카츠라와 조정원로 가문의 온건파 사이온지가 서로 실각할 때마다 총리에 올랐기 때문. 이 때문에 이 시기를 가리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케이엔(桂園) 시대라고 부른다.
2.5. 쇼와 시대
중년 전성기 |
1926년(쇼와 원년) 12월 28일, 황위를 계승한 직후의 히로히토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특별히 칙어를 내려(대훈위 공작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주는 칙어), 이것에 의해 사이온지가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떠맡는 것이 사실상 확립됐다. 그는 1940년 1월, 요나이 내각 탄생 이전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각수반 지명에 계속 관여하게 된다. 사이온지는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천황들에게조차 쓴소리를 늘어놓았으며, 메이지 덴노와 비슷한 연배였고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다이쇼 덴노나 히로히토 천황도 아버지 친구이자 할아버지 친구인 사이온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이온지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가 황고둔 사건의 상주의 불일치를 히로히토 천황에게 질책당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했을 때, 사이온지가 천황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의 질책에 반대하고 있던 것으로 봐도 분명하다. 또, “입헌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히로히토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으나 황도파 장교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13]
1920년대 이후 군부가 비대해지면서 무모한 팽창정책으로 치닫자, 일본의 미래를 매우 걱정하였다. 그래서 고셋케 집안의 기대주로 꼽히면서 젊은 시절 자유주의 사상을 내보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정작 그는 총리가 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사이온지의 기대를 박살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고노에 후미마로 문서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2.26 사건 당시 살해 대상이었으나 귀족에 국가 원로였던지라 헌병들이 집 앞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습격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로 사이온지를 통제파 측의 간사한 수괴로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부정파는 천황과의 연결책으로 사이온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표면상 구실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 스루가타이의 본가 외에, 시즈오카현의 고텐바초의 우편선총별장, 같은 시즈오카현 오키츠의 자교소, 교토의 세이후소(清風荘)의 각 별장에 은둔 생활을 하며, 원로로서 중심을 이루었다. 최후의 만 년이 되면, 피서를 위해서 고텐바에 체재하는 것 이외에는 일 년의 대부분을 겨울의 기온이 온화한 자교소에서 보내었다.
1937년 6월 제1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한 이후엔 점차 정치 표면에서 물러났다.
1940년 9월 27일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사이온지는 결국 폭주하는 군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これで日本は滅びるのや。お前たちも畳の上では死ねないようになった。今からその覚悟を固めておくことどすな。
이걸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도 다다미 위에서 죽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제 그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라.
1940년 9월, 하녀 우루하 아야(漆葉 綾)에게
이걸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도 다다미 위에서 죽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제 그 각오를 단단히 해 두어라.
1940년 9월, 하녀 우루하 아야(漆葉 綾)에게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후,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一体どこへこの国を持って行くのや)"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3. 여담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해, “과학, 영어, 여자 교육을 중시하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0년에 이노우에 다케시 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반대해, 메이지 덴노로부터 교육칙어 개정허가를 얻은 것과 동시에, 제2차 교육칙어의 작성에 임했다. 이 2차 교육칙어의 초안은, 사이온지 가로부터 리츠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아래의 교육기관 설립에도 관여하고 있다.젊은 시절 사립 리츠메이칸 학교를 창설했지만 1년만에 정부가 폐교시킨 흑역사가 있다. 오늘날의 리츠메이칸 대학은 리츠메이칸 학교가 폐교한 지 30년 만에 문부대신 시절 그의 비서이자 친구의 아들이기도 한 나카가와 코주로가 세운 교토법정대로 출발한 대학이다. 물론 연혁에서는 사이온지의 리츠메이칸학교를 리츠메이칸대학의 전신 중 하나로 밝혀 놓고 있다.
- 리츠메이칸 대학 : 1869년 사숙, ‘리츠메이칸‘ 창설(교토부청 태정관 류수관의 차출명령에 의해 약 1년 만에 폐쇄되었다), 현재의 리츠메이칸 대학의 이름은 문부대신 당시의 비서관 나카가와 고주로가 양도 받은 것으로 리츠메이칸 사숙과 직접적 연결은 없다. 그러나 대학의 전신인 교토 법정 학교 설립 시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친동생 스에히로 타케마로가 학원 강사로 취임하고 있던 관계 등으로 인해 사이온지 긴모치가 숨을 거둔 1940년 리츠메이칸대학의 학조로 결정했다.
- 1880년 메이지 법률 학교(현재의 메이지 대학) 창설에 협력.
- 1897년 제2제국대학(현재의 교토대학)을 교토에 유치.
- 1901년 일본 여자 대학의 설립 발기인·창립위원.
그가 리츠메이칸 대학에 남긴 편액에 후지와라노 킨모치(藤原公望)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면서, 그가 자유주의 정치인이었지만 후지와라 씨족의 귀족 출신이라는 자의식도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후지와라 씨족과 황실간의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후대 천황들에게 쓴소리를 거침없이 날린 배경 중 하나는 여기에도 있었을 것이다.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사후 공작위는 서양자(壻養子) 하치로(八郞)[14]가 이었다.
4. 매체에서
[1] 총리 권한대행 수행. (1901년 5월 10일 ~ 1901년 6월 2일)[2] 望의 초서[3] 현 도쿄대학[4] 오섭가에 버금가는 서열의 공경의 명가.[5] 사이온지 긴모치(1849년생)가 메이지 덴노(1852년생)보다 세 살 더 많다.[6] 실제로 프랑스인들도 할 말 다하고 사는 성격의 사람들이 많다.[7]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동양에 전파해 동양의 루소라 불린 사상가, 언론인, 중의원. '억조의 백성'이라는 뜻의 쵸민(兆民)이라는 호로 알려져 있다.[8] 중의원 의장, 대장대신, 문부대신, 사법대신을 역임하였으며, 작위는 남작이다.[9] 그 역시 청화가로 오섭가 다음 랭킹이다. 산조 사네토미 정도라면 메이지 유신 관련 인물들 중 가장 금수저급에 해당한다.[10]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로 우림가에 속하는 다소 듣보 집안이었지만, 귀족 전체로서는 전상(殿上)에 속했기에 진짜 별볼일없는 출신이 많은 다이묘들보다는 훨씬 역사와 격이 있었다.[11] 같은 군인인데 왜 야마모토가 육군인 가쓰라 다로 편을 안 들고 정우회 편을 들었나 의아할 수 있는데, 일본군은 창군 초기 이미 육해군의 뿌리부터가 달라서 육해군 간의 세력 다툼이며 자존심 싸움이며 모든 것이 사사건건 부딪혔다. 게다가 해군은 조금 더 문민적이고 군인색이 옅었고, 특히 야마모토는 해군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였다. 야마모토가 취임 후 군부를 억제하려는 정책으로써 내놓은 게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의 폐지였다.[12] 사이온지는 2차 내각 총사퇴 직후인 1914년에 하라 다카시에게 총재 자리를 넘긴 상태였다.[13] 다만 기타 잇키는 그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14] 모리 모노토리(毛利元徳) 공작의 8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