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3:25:58

시게미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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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요나이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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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61·64·75-77대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葵 | Shigemitsu Mamoru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moru_Shigemitsu_1936.jpg
<colbgcolor=#003366><colcolor=#FFF> 출생 1887년 7월 29일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사망 1957년 1월 26일 (향년 69세)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시
재임기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부총리
1954년 12월 10일 ~ 1956년 12월 23일
제61대 외무대신
1943년 4월 ~ 1945년 4월
제5대 대동아대신
1945년 8월 17일 ~ 1945년 8월 25일
제64대 외무대신
1945년 8월 17일 ~ 1945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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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366><colcolor=#FFF> 학력 도쿄제국대학 (독일법학 / 학사)
비고 제2차 세계 대전 극동국제군사재판 A급 전범
}}}}}}}}} ||
1. 개요2. 생애3. 기타
3.1. USS 미주리 함 함상 항복 문서 조인식3.2. 쿠릴 열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대화
4. 롯데와의 연관설 가짜뉴스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지옥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사이판 함락 소식을 들은 후
일본 제국외교관이자 일본정치인이다. 도조 내각, 고이소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하토야마 내각에서 외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대동아대신이기도 하다.

2. 생애

1887년 오이타현에서 출생했다. 오이타현 오노군 미에마치[1]에서 오노 군수를 지내는 아버지 나오마사(直愿)와 어머니 마쓰코(松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정(시게미쓰 본가)에 아이가 없어 입양된 시게미쓰가 26대 당주가 되었다.

구제 기쓰키 중학교[2], 제5고등학교를 거쳐서 1911년 도쿄제국대학 독일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한다. 1911년 9월에 외무성 입성 후 영국 대사관 3등 서기관, 조약국 제1과장, 중화민국 공사관 1등 서기관, 독일 대사관 참사관 등을 거쳤다.[3]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그것이 일본군의 조작임을 알고도 후원했으며 송호정전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휘말려서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해서 나중에 절단하고 의족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미주리 호의 갑판에 오를 때도 다리를 전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시게미쓰 마모루는 외무대신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고, 1944년에는 대동아대신을 겸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전권 대사로서 미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또한 미국 측이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자마자 맥아더와 그의 참모장이던 리차드 서덜랜드와 담판을 지어 미국의 점령 정책이 일본 정부를 활용한 간접 통치로 전환되는데 공을 세웠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재판에 대답 및 임했으며, 금고 7년형의 판결을 받아 금고형을 받은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금고형을 받은 세 명 중 한 명은 황족이었고 나머지 두 명이 외교관이었다.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4]도 20년의 유기 금고형을 받았지만 그는 1950년 7월 23일 감옥에서 사망했다.[5]

1950년 11월 21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형기를 마치지 않고 가석방되었다. 이어서 정치가로 전업해 개진당(改進黨) 초대 총재를 지냈고 뜻을 같이하는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1954년 11월 24일 일본민주당을 창당해 부총재 등을 거쳐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1954년 12월 10일부터 1956년 12월 23일까지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다.

1957년 1월 26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심근경색 또는 협심증으로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일본민주당의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미 총리가 되었고 간사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훗날 총리직에 올랐기에 심장 문제로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 부총재 시게미쓰 역시 총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3. 기타

3.1. USS 미주리 함 함상 항복 문서 조인식

4분 38초에 시게미쓰 마모루가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쿄만에 정박한 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미주리 함에서 이루어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일본대표로 참여하였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특유의 절뚝거리는 다리로 입장하여 항복 문서에 날인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장면은 오랫동안 기록 영화에서 반복되어 사용됐으며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마모루가 장애로 인해 나타낸 모습은 현장의 연합군 대표들 및 지휘관들에게 '잔인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출처-"아메리칸 시저 : 맥아더 평전" 2권)

시게미쓰 마모루가 절뚝거리는 걸음을 걷게 된 이유는 바로 윤봉길 의사와 관련이 깊다. 1932년 4월 29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중국 상하이 천장절 축하연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윤봉길 의사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그 후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고 의족을 착용해서 절뚝거리게 되었다. 위의 뉴스릴 영상 2분 10초경을 들어보면 '몇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Korean patriot)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재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라는 윤봉길 관련 언급이 나온다. 이 영상은 영화 암살에서 그대로 등장한다.

3.2. 쿠릴 열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대화

1956년 8월 18일,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런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을 만났다. 그는 쿠릴 열도와 관련하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만약 일본이 2개 섬(쿠릴 열도)으로 만족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중이었다)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6]
이런 미국의 경고에 일본 정부는 ‘2개 섬 우선 반환론’에서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러시아와 평화조약이 보류되었다.

4. 롯데와의 연관설 가짜뉴스

신 명예회장 일가와 롯데그룹의 명예를 훼손해왔던 이 잘못된 정보의 출처는 1998년 발간된 '신격호의 비밀'이란 책이다. 그 책에는 신 명예회장 측근이 "(신 명예회장의 부인)하쓰코 여사의 어머니는 중국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중상을 입은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의 여동생이다"라고 말했단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2015년 '거인의 황혼'이란 제목으로 바꿔달고 재발간하면서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저자가 밝힌 삭제 이유는 2000년 12월 일본 롯데 사옥에서 월간지 편집장이던 한 언론인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이 직접 "일제시대 창씨개명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고 집사람은 외무대신 시게미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 명예회장 일가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하는 과정에서 '시게미쓰'로 성을 바꾸면서 우연히 그 이후 일본 외무대신이었던 '시게미쓰 마모루'와 같은 성을 쓰게 돼 발생한 오해로 볼 수 있다. 변호사(다솔 법률사무소)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고의로 반복해 댓글로 올리는 등의 방법으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엔 사자(死者) 명예훼손죄로 처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둘째 아내인 시게미쓰 하쓰코가 이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라는 설이 있었다. 이 설에 따르면 신격호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사위라고 주장했으나 완벽한 허위정보로 밝혀졌고 이 설은 진위 여부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거짓이며 반박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가짜뉴스다. 심지어 연관설 제기자도 실수를 인정하고 정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신격호 문서 참조. [팩트체크]"신격호는 일본 A급 전범 사위다?"…'가짜뉴스!'

5. 대중매체에서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최훈이 연기했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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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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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오이타현 분고오노시[2] 現 오이타 현립 키츠키 고등학교[3] #[4] 조선계 일본인 외교관이다.[5] 공통점은 두 명 다 외교관 출신의 외무대신이었다는 점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기소된 외교관으로는 히로타 고키(사형), 마쓰오카 요스케(판결 전 사망), 시라토리 토시오(종신형), 도고 시게노리(금고형-20년), 시게미쓰 마모루(금고형-7년) 등이 있다. 이 중 히로타 고키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일으킨 중일전쟁 발발 당시의 외무대신으로, 고노에 후미마로가 재판 전에 자살하자 죽은 고노에의 죄까지 더해져 사형 판결을 받았다. 시라토리 토시오삼국 동맹 조약에 기여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도고 시게노리도조 히데키 내각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의 외무대신이었던 점에 더해, 진주만 공습 이후 선전포고가 전달된 괘씸죄도 포함되어 금고 20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태평양 전쟁 도중인 1943년에 처음 외무대신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했는지 책임을 적게 물어 금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6] 동북아 영토분쟁의 ‘숨은 손’은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