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6:05:20

고토다 마사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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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요시다 내각 가타야마 내각 아시다 내각 제2·3차 요시다 내각
시데하라 기주로 아시다 히토시 니시오 스에히로 하야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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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관방장관 (1947~)
초대
하야시 조지
2대
니시오 스에히로
3대
도마베치 기조
4대
사토 에이사쿠
5대
마스다 가네시치
6대
마스다 가네시치
7대
오카자키 가쓰오
8대
호리 시게루
9대
오가타 다케토라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0-12대
후쿠나가 겐지
13-15대
네모토 류타로
16·17대
이시다 히로히데
18대
아이치 기이치
19대
아카기 무네노리
20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1·22대
오히라 마사요시
23-25대
구로가네 야스미
26대
스즈키 젠코
27·28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29대
아이치 기이치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0·31대
후쿠나가 겐지
32대
기무라 도시오
33·34대
호리 시게루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6·37대
니카이도 스스무
35·38대
다케시타 노보루
39대
이데 이치타로
40대
소노다 스나오
41대
아베 신타로
42대
다나카 로쿠스케
43대
이토 마사요시
44대
미야자와 기이치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6대
후지나미 다카오
45·47·48대
고토다 마사하루
49대
오부치 게이조
50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51대
야마시타 도쿠오
52대
모리야마 마유미
53대
사카모토 미소지
54대
가토 고이치
55대
고노 요헤이
56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57대
구마가이 히로시
58대
이가라시 고조
59대
노사카 코켄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0·61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62대
무라오카 가네조
63대
노나카 히로무
64·65대
아오키 미키오
6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67-69대
후쿠다 야스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0·71대
호소다 히로유키
72대
아베 신조
73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74대
요사노 가오루
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76대
가와무라 다케오
77대
히라노 히로후미
78대
센고쿠 요시토
79대
에다노 유키오
80대
후지무라 오사무
81-83대
스가 요시히데
84대
가토 가쓰노부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5·86대
마쓰노 히로카즈
87-89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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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경 (1869~1870)
초대
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
사법경 (1871~1885)
초대
에토 신페이
2대
오키 다카토
3대
다나카 후지마로
4대
오키 다카토
5대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 (1885~1947)
초대
야마다 아키요시
2대
다나카 후지마로
3대
고노 도가마
4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5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6대
기요우라 게이고
7대
소네 아라스케
8대
오히가시 기테츠
9대
기요우라 게이고
10대
가네코 겐타로
11대
기요우라 게이고
12대
하타노 요시나오
13대
마츠다 마사히사
14대
센게 타카토미
15대
오카베 나가모토
16대
마츠다 마사히사
17대
마츠무로 이타츠
18대
마츠다 마사히사
19대
오쿠다 요시토
20대
오자키 유키오
21대
마츠무로 이타츠
22대
하라 다카시
23대
오키 엔키치
24대
오카노 케이지로
25대
덴 켄지로
26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27대
스즈키 키사부로
28대
요코타 센노스케
임시대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오가와 헤이키치
30대
에기 다스쿠
31대
하라 요시미치
32대
와타나베 치후유
33대
스즈키 기사부로
34대
카와무라 타케지
35대
코야마 마츠키치
36대
오하라 나오시
37대
하야시 라이자부로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9대
미야기 초고로
40대
키무라 쇼타츠
41대
카자미 아키라
42대
야나가와 헤이스케
43대
고노에 후미마로
44대
이와무라 미치요
45대
마츠자카 히로마사
46대
이와타 추조
47대
키무라 토쿠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48대
스즈키 요시오
법무총재 (1948~1952)
1·2대
스즈키 요시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4대
우에다 슌키치
5대
오오하시 타케오
6대
키무라 도쿠타로
법무대신 (1952~)
초대
키무라 토쿠타로
2·3대
이누카이 타케루
4대
가토 류고로
5대
오하라 나오시
6·7대
하나무라 시로
6·7대
하나무라 시로
8대
마키노 료죠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9·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카라사와 토시키
12대
아이치 기이치
13대
이노 히로야
14대
코지마 데츠조
15대
우에키 코시로
16대
나카가키 쿠니오
17·18대
가야 오키노리
19·20대
타카하시 히토시
21대
이시이 미쓰지로
22·23대
타나카 이사지
24대
아카마 분조
25대
사이고 키치노스케
26대
코바야시 타케지
27대
아키타 다이스케
28대
우에키 코시로
29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30대
코이 유이치
31대
타나카 이사지
32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33대
하마노 세이고
34대
이나바 오사무
35대
후쿠다 하지메
36대
세토야마 미츠오
37대
후루이 요시미
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오쿠노 세이스케
40대
사카타 미치타
41대
하타노 아키라
42대
스미에이 사쿠
43대
시마자키 히토시
44대
스즈키 쇼고
45대
엔도 카나메
46대
하야시다 유키오
47대
하세가와 타카시
48대
타카츠지 마사미
49대
타니가와 카즈오
50대
고토 마사오
51대
하세가와 신
52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3대
사토 메구무
54대
타와라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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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다 마사하루
56대
미카즈키 아키라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7대
나가노 시게토
58대
나카이 히로시
59대
마에다 이사오
60대
타자와 토모하루
61대
미야자와 히로시
62대
나가오 리츠코
63대
마츠우라 이사오
64대
시모이나바 고키치
65대
나카무라 쇼자부로
66대
진노우치 타카오
67·68대
우스이 히데오
69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70대
고무라 마사히코
71대
모리야마 마유미
72·73대
노자와 다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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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노 치에코
76대
스기우라 세이켄
77대
나가세 진엔
78·79대
하토야마 구니오
78·79대
하토야마 구니오
80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81대
모리 에이스케
82·83대
치바 케이코
84대
야나기다 미노루
85대
센고쿠 요시토
86대
에다 사쓰키
87대
히라오카 히데오
88대
오가와 도시오
89대
다키 마코토
90대
다나카 케이슈
91대
다키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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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와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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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다 카츠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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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와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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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와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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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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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안위원장 (1948년~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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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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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부 외국 (1954년~2001년) · 내각부 외국 (2001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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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고사카 젠타로
2대
오하라 나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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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아사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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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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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대
하야카와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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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6대
이즈미 신야
77·7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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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대
사토 쓰토무
77·79대
하야시 모토오
80·81대
나카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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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1대
나카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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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자키 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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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오카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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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타니 에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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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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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3·96대
오코노기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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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하시 야스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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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다니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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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0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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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청 장관 (1984년~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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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다 마사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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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키 마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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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키 가즈오
임시대리
고토다 마사하루
4대
야마시타 토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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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즈키 쿠니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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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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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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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나카 헤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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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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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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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사토 쓰토무
12·13대
하라구치 가즈히로
14대
가타야마 요시히로
15대
가와바타 다쓰오
16대
다루토코 신지
17대
신도 요시타카
18·19·23대
다카이치 사나에
20·21대
노다 세이코
20·21대
노다 세이코
22대
이시다 마사토시
18·19·23대
다카이치 사나에
24대
다케다 료타
25·26대
가네코 야스시
25·26대
가네코 야스시
27대
테라다 미노루
28·30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29대
스즈키 준지
28·30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31·32대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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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colcolor=#fff> 부총리 <colbgcolor=#ffffff,#1f2024> 와타나베 미치오고토다 마사하루
법무대신 고토다 마사하루
외무대신 와타나베 미치오무토 가분
대장대신 하야시 요시로
문부대신 모리야마 마유미
후생대신 니와 유야
농림수산대신 다나부 마사미미야자와 기이치
통상산업대신 모리 요시로
운수대신 오치 이헤이
우정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미야자와 기이치
노동대신 무라카미 마사쿠니
건설대신 나카무라 기시로
자치대신 무라타 케이지로
국가공안위원장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총무청장관 카노 미치히코
홋카이도개발청장관 키타 슈지
오키나와개발청장관
방위청장관 나카야마 도시오
경제기획청장관 후나다 하지메미야자와 기이치 ,임시대리, → 다카토리 오사무
과학기술청장관 나카지마 마모루미야자와 기이치 ,임시대리, → 와타나베 쇼이치
환경청장관 하야시 다이칸
국토청장관 이노우에 타카시 }}}
}}}}}}}}}

파일:일본 경찰청 로고.svg 일본 경찰청 장관
5대 6대 7대
아라키 마스오 고토다 마사하루 나카무라 토라타

}}} ||
일본국 미야자와 내각 부총리
고토다 마사하루
後藤田正晴 | Kotoda Masaharu
파일:고토다 마사하루.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14년 8월 19일
도쿠시마현 오에군 히가시야마촌
(현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시)
사망 2005년 9월 19일 (향년 91세)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병원
재임기간 미야자와 내각 부총리
1993년 4월 8일 ~ 1993년 8월 9일
제55대 법무대신
1992년 12월 12일 ~ 1993년 8월 9일
제45대, 제47-48대 내각관방장관
1982년 11월 27일 ~ 1983년 12월 27일[1]
1985년 12월 28일 ~ 1987년 11월 26일[2]
제37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제28대 자치대신
1979년 11월 9일 ~ 1980년 7월 17일
초대 총무청 장관
1984년 7월 1일 ~ 1985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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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ffffff> 가족 아버지 고토다 마스자부로, 형 고토다 코헤이, 조카 고토다 요시히로, 조카 이노우에 히로노리[3], 작은 조카 고토다 마사즈미[4]
학력 히가시야마 소학교
도미오카 중학교 (졸업)
구제 미토 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정치학 / 학사)[5]
최종 당적

소속 파벌 무파벌
지역구 도쿠시마현 전현구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34, 35, 36, 37, 38, 39, 40
경력 제6대 일본 경찰청 차장
제6대 일본 경찰청 장관
제3대 자치청 장관 관방장
제28대 자치대신
제42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가나가와현 경제부 상정 과장
내각 관방부 장관
군사 경력
임관 육군경리학교 (6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1년 ~ 1945년 8월
최종 계급 대위
참전 태평양 전쟁 }}}}}}}}}

1. 개요2. 생애
2.1. 유년 및 성장기2.2. 육군 입대와 포로 생활2.3. 관료 시절
3. 정치인 시대
3.1. 다나카 내각 ~ 나카소네 내각 시대3.2. 다케시타 ~ 가이후 내각 시기3.3. 미야자와 내각 시대
4. 정계은퇴 이후5. 정치 성향6. 선거 이력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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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이다. 일본 경찰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법무대신, 부총리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경찰관료의 대부로 경찰내에 막강한 정보망과 영향력을 구축하는 한편, 관료생활 가운데 날카로움과 강직함을 내세워 "일본의 유리 안드로포프", "면도기 고토다", "일본의 조제프 푸셰" 라는 별명을 소유했다.

2. 생애

2.1. 유년 및 성장기

1914년 8월 9일 일본 도쿠시마현 오에군 히가시야마촌 (현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시)에서 고토다 마스자부로와 고토다 히데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고토다의 가문은 에도 시대에 마을의 수장직을 맡았던 가문으로, 오에군 오노미치 지방에서 집안 대대로 쪽빛 옷감 염색 및 술집을 운영하고 있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마스자부로는 정치에 큰 관심을 보여, 입헌민정당의 정치 활동가로서 주점을 경영하며 얻은 돈을 정치 자금이나 교육 활동 등에 투자했고, 도쿠시마현 의회 의원과 오에군의회 의장 등을 맡은 현지의 명사였다.

그러나 그가 겨우 8살때였던 1922년, 아버지 마스자부로가 지병이었던 질환으로 타계했고, 어머니도 2년뒤인 1924년 신장병으로 타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2년뒤인 1926년 고토다는 누나 요시코의 시댁이자 도쿠시마 의 유명 가문이었던 이노우에 가에 들어갔다.

이노우에 가문은 고토다를 장남으로 취급하고, 맏형 이노우에 고헤이도 유산을 처분하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큰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었지만, 부모를 일찍 잃었던 경험은 고토다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

이후 히가시야마 소학교, 토미오카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구제 미토 고등학교[6]에 입학해 졸업했다.

1935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에 입학한 고토다는 1학년 학기 종료 이후 정치학부로 전과 뒤 국민을 위해 직접 접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만주국의 남만주철도에 입사해 중국 대륙으로 건너간 이후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관료가 되는 것이 대학 재학중인 고토다의 꿈이었다.

하지만 1937년 도쿄대학 졸업 면접자와 교토대학 졸업자 입사 시험일을 헷갈려버려, 우여곡절 끝에 면접 시험을 보긴 했지만 결과는 불합격. 고등문관시험도 초시는 낙방했다.

1년 뒤인 1938년 내무성 고등문관시험에 재수해서 합격했고, 토목과 관련 부서에서 일하다 1940년 징집 통지서를 받고 일본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2.2. 육군 입대와 포로 생활

1940년 2월 고토다는 육군에 징병되어 타이완에 있던 보병 2연대에 전속받았고,[7] 육군 경리학교에서 소위로 임관해 연락 장교로 복무하였다.

중위 시절인 1945년 3월 도쿄에 잠시 체류 중인 시기 도쿄 대공습을 경험했다. 같은해 8월 일본제국의 패전으로 중국 국민혁명군에 의해 1946년 4월까지 포로 생활을 하였다.

비록 포로 취급을 받은 그였지만, 노역은 고사하고 구속도 거의 없어 심지어는 번화가에 술을 마시러 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대만에서의 일본의 통치가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국 등 타 식민지들에 비해서 비교적 양호했지만, 일제 패전 후 현지인에 의한 일본인에 대한 보복 행위는 딱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원인으로 판단된다.[8]

대만 지룽시의 지룽항에서 와카야마현 타나베시의 타나베항을 잇는 미국리버티선을 보며 초 강대국인 미국의 공업력을 생생히 실감했으며, 고토다는 대만의 일본군 사령부 근무자였음에도 불구 하고 미군에게 일반 병사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아, 일본이 전쟁에 패배한 것을 재차 실감했다.

2.3. 관료 시절

1946년 복권 이후 내무성가나가와현 상정 과장으로 복직했고, 내무성 조합 위원장, 지방국 직업과 사무관을 거쳐 동향 도쿠시마 출신인 카이하라 오사무(1917-2006)의 추천으로 1947년 경시청으로 이직, 경찰공무원 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경찰 이직 이후 경시청 경무부 경무과장을 시작으로 경찰 예비대 경비 과장 겸 조사 과장, 국가지방 경찰 본부 교통과장, 자치청 관방 장관 등의 직책을 거친 뒤 1965년 경찰청 차장, 1969년 제6대 경찰청 장관직에 올랐다.

그가 경찰청 장관직을 지낸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초반은 안보투쟁을 비롯한 일본 내 학생운동과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비롯한 적군파를 중심으로 한 극좌 단체의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였으며, 1971년 일본 석유 지하 우체국 폭파 사건의 표적 대상이 되기도 했다.[9]

이런 이유로 인해 후임인 삿사 아츠유키(佐々淳行)[10]에게 경비를 강화하고자 특임 시큐리티 폴리스를 둘것을 권유받았지만, 고토다 본인이 괜찮다며 직접 사양했다.

3. 정치인 시대

3.1. 다나카 내각 ~ 나카소네 내각 시대

1972년 경찰청 장관직을 사임한 뒤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영입, 제1차 다나카 내각의 내각관방 사무부장관에 올랐다.

다나카로부터 국토청[11]이 설립되었을때 초대 장관직을 권유받은 적이 있지만, 민간인이 정부 장관직에 오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여 그 권유를 거절했다.

이 외에도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본인의 선거 운동 준비 미비와 다나카의 만류로 무산, 사무국장 재직 시절에는 다나카 총리와 함께 소선거구제 도입을 위한 "카쿠만타" 구상을 기획했으나 야당과 당 내 반대파에 비난을 받고 무산되었다.

고토다는 1973년 말 이듬해인 1974년 참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내각관방 부장관직을 사퇴한다. 그러나 그의 고향 도쿠시마현은 일명 "미키 왕국"이라 불리는 미키 다케오 부총리의 영향이 막강한 지역이었으며, 선거구 공천을 둘러싸고 그가 자민당 본부의 공천을 받는데 성공했으나, 이에 반발한 미키파의 거물 쿠지메 겐타로(1908-1980)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결국 쿠지메에 밀려 2위로 낙선하였다.[12]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쿠시마현 전현구 선거구에 입후보 하여 현직 총리였던 미키와 직접 대결을 펼쳤다. 다나카파 였던 그는 록히드 사건과 관련된 네거티브 캠페인도 받았지만, 철저하게 선거를 진행하라는 다나카의 조언으로 전체 2위로 당선, 중의원 당선에 성공했다.

197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굉지회 (오히라파)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했고, 그해 11월 오히라 내각 발족 시 국가공안위원장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직에 올랐다. 오히라의 뒤를 이은 스즈키 젠코 내각에선 선거 제도 조사회 회장을 지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관방장관직에 취임, 본래 내각관방장관은 해당 총리의 파벌에서 선출한다는 관례를 깨고 선출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사실 해당인선은 나카소네파의 인재난과 내무성 후배로서 고토다의 수완과 실력을 잘 아는 나카소네 본인의 강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나카소네는 오랜 관료 경험으로 쌓아온 행정개혁 추진과 대규모 재해 등 유사시에 대비하여 정부 관료기구의 움직임을 숙지하고 있으며, 높은 정보수집 능력을 가진 고토다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토다는 나카소네 총리 재임 5년 동안 내각관방장관, 총무처장관, 행정관리청장관과 같은 정부 주요 직을 담당하면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미하라산 분화 사건과 같은 위기 상황속에서 뛰어난 대처능력을 발휘했으며, 총무처장관 재직 시에는 일본통신공사, 일본국유철도와 같은 공공기관의 민영화 정책을 차질없이 마무리 하는 등 뛰어난 능력으로 나카소네 내각의 중요 한 축으로 거듭났다.

1984년 다나카 가쿠에이파(목요회)가 다케시타파니카이도 그룹으로 나눠졌을때, 그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무파벌을 유지했다.

3.2. 다케시타 ~ 가이후 내각 시기

1987년 다케시타 내각 성립 이후에는 잠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이토 마사요시, 가네마루 신, 후쿠다 야스오 등과 함께 자민당 차기 총재직 후보로 꼽혔으나, 5가지 이유를 들며 총재직을 거절했다.[13] 다케시타는 고토다를 대신해 우노 소스케를 후임자로 세웠지만, 리쿠르트 사건과 본인의 여성 스캔들 문제로 실패로 끝이 났다.

뒤이어 설립된 가이후 도시키 내각에선 자민당 정치 개혁 추진 본부의 본부장 대리가 되어, 하타 쓰토무와 함께 소선거구제 도입에 총력을 다했다. [14]

이때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자민당 내 정치개혁 파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되고, 1993년 자민당 정권교체 당시 차기 총재 후보로 이름이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3.3. 미야자와 내각 시대

1992년 12월 미야자와 기이치 개조 내각이 성립하자 제55대 법무대신으로 취임, 1987년 이후 5년 만에 국정으로 복귀했다.

법무대신 재임 기간 동안에는 1989년을 끝으로 한동안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정지상태가 계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법치국가로서 바람직 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고, 1993년 3월 3년 4개월 만에 3명의 사형수에 대해 대한 사형 집행 명령을 발령했다.[15] 또한 면도기라는 별명이 있었던 관료시대와는 달리 위의 적극적인 사형 집행 판결 등의 행보로 국민들의 지지와 호감을 받았다.

1993년에는 부총리직을 맏고있던 와타나베 미치오가 지병으로 물러나며 후임 부총리에 오르며 정치적 거물 위치를 확고히 유지하였으나, 같은 시기 자민당 내 정치개혁에 참여했던 하타 츠토무, 오자와 이치로,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의 인사들이 족족 탈당하면서 자민당의 위기가 찾아왔고, 그해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연립 야당에게 패하면서 55년만의 정권교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에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미야자와의 후임 자민당 총재로서 고토다를 옹립하는 목소리가 다시 올랐지만, 이 무렵 심장 발작 문제를 일으켜 일시 입원하고 있었던 적도 있어 고사했고, 미야자와 총재와 상의 후 고노 요헤이를 지명하기로 했다. 그 결과 고노가 총재로 취임하고 고토다는 그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1996년 일본 최초의 소선구제 총선인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정계은퇴를 표명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4. 정계은퇴 이후

정계은퇴 이후에는 정치 원로로 활발히 활동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이라크 전쟁에서 자위대 파병을 결정하자 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는 등 정치개혁, 행정개혁, 외교, 안보문제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또한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집단 참배를 비판하며 과거사 문제에 대하여 반성의 입장을 표명하는 등 중도파 인사로써의 면모를 보였다.

2005년 9월 19일 오후 8시 53분, 지병인 폐렴으로 인해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은 같은 달 21일에 알려졌으며, 장례는 도쿄도 내의 절에서 친족들에 의해 치러졌다.

5. 정치 성향

같은 도쿠시마현 출신인 미키 다케오와 더불어 자민당 내 호헌반전 중도개혁파 정치인으로 꼽혔다.[16]

관방장관 재직 시절인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이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페르시아 만에 안전운항 확보를 이유로 소해함을 투입시킬 계획을 세우자, "그곳은 교전해역이다. 전쟁을 할 각오가 돼있는가. 나는 서명할 수 없다" 라고 즉각 반대하여 단념시킨 일화가 있었고, 1992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이 통과되자 해당 법안은 유리세공 처럼 위험한 법안이다" 라며 큰 우려를 표했었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총리는 현직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단행했으나, 이듬해인 1986년에는 신사 참배를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고토다의 반발과 만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고토다는 아예 "A급 전범에 대해 참배를 한다는 (국외 안팎의) 비판이 있고, 이웃나라들의 국민 감정을 배려하기 위해 총리의 공식 참배는 삼간다"는 내용의 관방장관 담화를 발표해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와 함께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한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꼽혔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4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도쿠시마 선거구

153,388 (35.21%) 낙선 (2위)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쿠시마현 전현구 68,990 (14.7%) 당선 (2위) 초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6,948 (14.8%) 당선 (5위) 재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710 (19.1%) 당선 (2위) 3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1,975 (18.2%) 당선 (2위) 4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9,468 (25.67%) 5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463 (20.46%) 6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961 (22.34%) 7선[17]

7. 여담

  • 1995년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을때, 고토다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등 당시 내각 인사들을 찾아 격려했고, 다케시타 노보루 등의 추천으로 한신·아와지 부흥 위원회의 특별 고문에 취임했다. 한편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고베항에 대해서 개인적 지진 피해 보상을 해주지 않는 조건을 원칙으로 삼아서, 당시 세계 유수의 항구 중 하나였던 고베항이 부산항 등에 밀려 몰락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 중 하나라는 의견이 있다. #
  • 그의 9촌 조카는 일본사회당 출신 정치인 이노우에 히로노리 (1925-2015)이다. 고토다가 일찍 부모님을 잃고 소년기를 이노우에가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가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고 중의원으로 전적했기 때문에, 도쿠시마현 전현구 에서 중의원 선두 자리를 두고 치열한 자리 다툼을 하게 되었다.
  •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다. 그는 스스로 입장권을 구입해 일반 팬들과 함께 관전했을 정도의 광팬이었으며,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경기 직관 중 파울볼에 위험하게 맞은 적도 있다. 그는 "자이언츠는 안 된다, 저런 뚱보(거포)만 갖추고 비상식적이다. 이길 리가 없잖아."라고 고언을 나타냈고, 스타 선수만을 모아 신인 선수의 육성을 게을리하는 자이언츠의 육성방식을 걱정하고 있었다.[18] 한편 같은 도쿠시마 출신의 우에다 토시하루에게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한 적이 있다.
  • 고토다가 관방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86년,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가 잡지사 프라이데이 본사를 습격하는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비트 군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직접 행동은 안 된다."라고 발언했다. 여기에 대해서 비트 다케시는 "비트 군이 아니라 다케시 군이지!" 라고 말했다.

[1] 제45대[2] 제47-48대[3] 1925 - 2015, 전 일본사회당 소속 9선 국회의원[4] 현 도쿠시마현지사[5] 처음 입학은 법학부 소속으로 입학하였다. 1학년 2학기 수료 후 전과.[6] 이바라키대학의 전신교[7] 본래 고토다는 단기 현역제도가 있던 일본 해군 입대를 희망했지만 입영 전 시험에서 탈락했다.[8] 한편, 일본군이 배급한 양말을 약탈하러온 현지 대만인을 향해서 국민혁명군이 발포 명령을 내린 사건이 빈발하게 있었으며, 고토다는 이것이 2.28 사건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도, "약탈하러 오는 것이 나쁘다, "중국 군대가 일본군으로부터 접수한 것이므로, 대만 주민의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9] 고토다는 소포 속에 숨겨진 폭발물을 직접 받지 않아 화를 면했지만, 소포를 취급하고 있던 우체국 직원이 우편물 처리 중 폭발로 인해 얼굴과 팔에 전치 3주분의 화상을 입었다.[10] 이후 내각안전보장실 실장을 역임했으며 새역모에 기부를 한 점과 독도 문제 관련해서도 헬리콥터를 투입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며 우익 성향 행보를 족족 드러낸 인물이다.[11]국토교통성의 전신 기관.[12] 게다가 고토다가 처음 출마하여 금권 정치의 대명사인 다나카 가쿠에이 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의 진영 선거 운동원 268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 받았고, 금권부패 선거라는 비판을 받는 풍파를 겪었다.[13] 첫번째 이유로는 본인이 경찰 출신이라는 점, 두번째 이유로는 금권선거의 대부 다나카 가쿠에이로부터 영입되어, 첫번째 참의원 선거 당시 다수의 선거법 위반자를 낳은 점으로 부터 부패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남아있다는 점. 네번째 이유로는 나카소네 내각에서 주요 요직을 5년동안 역임해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그림자가 남아있다는 점. 다섯번째 이유로는 자신의 지병이었던 당뇨병을 이유로 들며 자신은 총리 자리에 적합 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14] 고토다가 주장했던 소선거구제 안은 현재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는 비례대표 병립제 였지만, 실제의 안과 크게 다른 1표제 였다는 점이 큰 차이점으로, 이는 소선거구에 투표한 후보 정당이 그대로 비례구 정당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야당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민당의 세력을 강화시킨다는 비판이 있어, 해당 안은 실현되지 않았다.[15] 그 사형수 3명 중 2명은 고토다가 경찰청 장관 시절 사건 해결에 종사했던 산악 베이스 사건의 공범 적군파 멤버 나가타 히로코(2001년 상고 기각 이후 2006년 뇌종양으로 사망), 사카구치 히로시도 포함되어 있었다.[16] 고토다와 미키는 선거때마다 치열한 경합을 벌히며 도쿠시마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져갔는데, 이 두사람의 경쟁을 일명 아와 전쟁이라고 불렀다.[17]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8] 실제로 2000년대 초반 까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관리 따위는 장식인 팀 운영뿐만 아니라, 교진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언제나 화끈하게 지를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구단이라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인급 선수들이 성장하기에는 영 좋지 못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