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아사마 산장 사건 [ruby(浅間山荘事件, ruby=あさまさんそうじけん)]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72년 2월 19일~2월 28일 (UTC+9) | |
발생 위치 |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정 아사마 산장 | |
유형 | 적색 테러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3명[1] |
부상 | 27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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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가루이자와정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에서 연합적군(連合赤軍)[3]이 벌인 인질극. 공식 명칭은 '연합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連合赤軍あさま山荘事件). 이 사건으로 인해 산악 베이스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일본 좌파 운동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로 손꼽혔다.
사카구치 히로시(坂口 弘)를 비롯한 연합적군 회원 5명이 아사마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10일 동안 틀어박혀 경찰과 대치했는데 당시 인질은 무려 219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으로서는 일본 최장 시간 억류를 기록했다.
아사마 산장은 이 사건 이전까지 가와이 피아노에서 연수원처럼 쓰던 곳이었다.
2. 발단
총기 탈취 사건 등을 일으키고 도주하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군마현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도피 행각을 일삼았지만 경찰의 수색이 시작된 데다 외부 지원이 끊겨 조직 유지가 힘들어졌고 1971년 말부터는 내부분열 조짐까지 보였으며 동료들끼리 인격마저 짓밟힐 정도로 혹독한 사상검증과 토론이 이어지던 끝에 조직의 '총괄'이라는 명목으로 동료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해 그 중 12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이 사건을 '연합적군 사건 또는 산악 베이스 사건'이라고도 한다.그러던 중 뉴스로 경찰의 수색으로 거점들의 일부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연합적군 멤버들은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음을 직감해 군마현과 가까운 나가노현으로 도피처를 옮겼다.
당초에는 나가노 동부의 사쿠시 방면으로 도피하려고 했지만 빈약한 장비 등 여러 모로 악조건이 겹친 데다 악천후로 인해 산에서 조난을 당해 의도와 달리 가루이자와 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별장을 보고 은신처로 선택했으니 바로 아사마 산장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사마 산장 인근의 사츠키 산장에 잠입했으나 수색 중이던 나가노현 경찰 소속 1개 부대와 마주쳤다. 연합적군 멤버들은 총을 난사하며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인근의 아사마 산장으로 도주했으며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주모자 사카구치 히로시의 당초 요구사항은 연합적군 최고 간부 '모리 츠네오, 나가타 히로코' 부부의 석방과 아사마 산장에 있던 멤버들의 도주로를 보장해 줄 것이었다. 그러나 도주 건은 멤버 중 요시노 마사쿠니가 반대해서[4] 결국 그대로 산장에 틀어박힌 채 아무런 요구 조건도 없이 농성 체제로 돌입했다. 경찰은 산장 주위를 포위하는 한편 전기 차단을 시작으로 특수 차량을 이용한 정찰 등을 강행하고 범인들을 지치게 하는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경찰 측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범인의 가족들을 이용해 설득에 나섰던 것이다. 실제로 인질극에선 범인의 가족, 특히 부모에게 설득을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범인의 자수나 여자나 노인, 아이 등 일부 인질의 해방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제법 있지만 이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대상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러한 수단이 효과를 볼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족 관계가 좋은지, 나쁜지부터 시작해서 범인의 사상까지 온갖 것들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막무가내로 가족부터 투입했다.
경찰은 범인들의 어머니를 현장으로 불러와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당시 어머니들의 호소가 얼마나 절절했던지 현장에 있던 기동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범인들이 이에 대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을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하면서 설득은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터져 그들의 신경만 더 건드리는 바람에 자기 어머니에게까지 발포하게 되었다.[5]
이 사례는 당시 일본 경찰의 대응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일단 이 문제는 60년대 후반 일본 학생운동계의 분위기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서구와는 달리 집단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일본에서는 가족을 통해 압박함으로써 학생운동을 와해시키려는 시도가 많았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전의 극우 제국주의 시대에 교육받은 기성세대인 교사들은 학생운동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적군파와 같은 과격파가 아니라 학교에서 토론 활동을 하고 대자보 등을 게시하는 온건한 수준의 학생운동 조직까지 가족을 통해 협박하다시피 하여 와해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의 교사나 학부모들은 전부 개인의 정치적 활동을 극도로 적대하는 전체주의 시대에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이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부모를 협박하면 겁에 질린 부모가 학생에게 운동을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았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학생운동가들은 이 수법에 하도 시달려서 이렇게 가족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을 두고 대놓고 가족 제국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반감이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을 계속하고 적군파 같은 과격파에 가담할 정도의 인물이면 애초에 가족을 통한 설득은 안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며 오히려 자신도 가족을 통한 압박을 계속 받아 왔고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도 가족의 설득과 강요에 못 이겨 학생운동을 포기하는 일을 계속 겪은 만큼 이런 설득 방법에는 심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었을지 몰라도 본인들은 이미 숱하게 겪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수단이었다.
차라리 도발이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이런 방식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고 심각하게 오판했다는 것이야말로 당시 일본 경찰이 상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보기도 한다.
결국 설득조차도 먹히지 않자 최후의 방법으로 산장 벽과 지붕을 부수고 정면돌파로 진압하자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얻었다.
이 사건에서 웬 민간인 하나가 자기가 인질을 대신 하겠다며 무작정 산장 안으로 바구니를 들고[6] 들어갔는데 범인 중 한 명인 요시노 마사쿠니가 "빨리 안 돌아가면 갈길 것이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이 바구니를 든 민간인이 경찰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사카구치 히로시가 프락치로 오해해서 그대로 그 민간인의 뒤통수에 총알을 한 발 쐈다.[7] 그 민간인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수술 도중 결국 사망해 희생자가 되었다. 이 양반은 경찰 경계선을 뚫고 유유히 산장으로 잠입했다가 저 꼴을 당했으며 이전에 마약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서 고초를 치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경찰은 현장 통제도 제대로 못 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사건 당시 적군파에 의해 사용된 엽총들이다. 총신이 짧은 이유는 검문에 걸리지 않게 가방에 휴대하기 위해 톱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
경찰의 강행돌파에 대해 범인측은 5연발 총[8] 22구경 라이플, 12게이지 O/U형[9] 더블 배럴 샷건[10], 38구경 권총 등 총기로 저항했다. 이 와중에 상호간 총격전으로 인해 경찰 기동대원 일부가 부상을 입거나 사살되고 작전에 동원된 대형 크레인에 기기 이상이 생기는 등 작전은 난항을 겪었으나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범인들은 전원 검거되었다.
당시 경찰청장 고토타는 범인들이 사살되면 순교자가 되어 좌익 운동권이 단결할 테니 전원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근데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잘 됐지만 당시 저 따위 명령을 수행했을 기동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절로 쌍소리가 나올 명령이다. 지금처럼 테이저 같은 비살상 무기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엽총을 쏴대는 놈들을 무슨 수로 생포하라는 건가. 거기다 '사격하기 전에 상부에 보고 먼저 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결국 아래에 설명할 사사 아츠유키가 단독으로 발포 허가를 내려서 총격전을 벌였고 생포에 대해서는 당시 경시청 간부들 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11] 대안이랍시고 나온 작전은 일본 전통의 인명을 갈아넣는 것이었다.
3. 돌입 작전
건물철거용 철구를 장착한 크레인과 살수차가 동원되었고 기동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벽을 부수고 돌파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 크레인이 철구로 몇 번 후려치기도 전에 고장이 나서 멈춰 버리는 바람에 돌입 작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거듭되는 돌입 시도 도중 진두지휘하던 기동대원 2명이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순직하고 말았다.[12] 이때 돌입을 맡은 기동대는 일체의 보호장구와 진압용 방패, 곤봉과 최루탄 발사기(ガス銃 / 催涙ガス筒発射器) 등 비살상 무기와 M1911, 미네베아 뉴 남부 M60 권총을 장비했다. 듀랄루민으로 만든 진압 방패는 한 장으로는 총알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2장을 겹쳤다.
마지막 돌입 작전 도중 적군파의 총격이 너무 심해 경찰 지휘부로부터 생포를 포기하면서 산장에 돌입한 제7기동대에게 총기 사용 허가가 떨어졌지만 혼란이 심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3차례에 걸친 돌입 시도 끝에 살수차의 고압 살수로 산장의 벽을 부수고 돌입해 전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인질도 무사히 구출되었다.
범인들은 신원이 까발려지는 걸 막겠다며 2월 21일부터 코드명을 쓰기 시작했다. 사카구치 히로시는 '아사마', 반도 쿠니오는 '타테야마', 요시노 마사쿠니는 '후지산', 가토 형제는 '아카기(형)'와 '기리시마(동생)'. 물론 소용없는 뻘짓이었다.
3.1. 경찰측 사상자
- 제2기동대 4중대장 카미하라 츠토무(上原 勉) 경부, 안면에 산탄을 맞고 중상.
- 카미하라 경부 포함 중경상자 26명[15]
4. 결과
경찰의 돌파 작전 상황은 전국 각지에 생중계되어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당일 시청률이 조사 개시 이래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집계된 시청률은 NHK를 포함해 무려 89.7%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고 같은 날 1시간에 걸쳐 방송된 뉴스 특보는 평균 시청률 50.8%로 뉴스 특보 시청률로는 일본 최고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16]사건 당시의 생중계 영상 편집본
방탄도 안 되는 진압방패를 두 장 겹쳤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어설픈 당시 일본 경찰의 진압 행태를 꼬집는 이야기로 쓰인다. 결국 이걸 들었던 경찰 측에서도 사상자가 나왔으니... 사실 당시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군대, 경찰에서 테러, 인질극에 특화된 전문요원 및 부대를 양성해서 운용하는 경우가 없었다. 불과 수개월 후 서독에서 발생한 뮌헨 올림픽 참사, 한국의 혜화동 무장 탈영병 총격 난동사건 등의 대응을 보더라도 다른 나라도 비슷한 수준으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부실하고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전 세계 경찰 모두가 그랬다.
이 사건을 진압하러 온 경찰들이 닛신 컵누들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컵라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자세한 내막은 닛신 컵누들과 컵라면 문서를 참조.[17][18]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헝클어진 머리로 경찰에 연행되는 적군파 구성원들의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이후 불량 문화의 융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며칠씩이나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상태였고 몸에서는 지독한 악취까지 풀풀 풍길 정도였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측 대응의 난맥상은 이후 일본 정부, 특히 경찰 조직의 관료제적 경직의 대표적 사례로 정말 두고두고 까였다. 경시청[19]이 현경에 대한 지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 시작되어 직위상 동격인 지휘관이 여럿 있을 때 누가 최고 권한을 행사하느냐에 대한 갈등으로 발전하면서 "캐리어[20]는 앉을 자리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자조적 농담이 나왔을 정도였다. 악명 높은 고위직 원탁회의[21]와 직급별 동심원[22]의 풍경 같은 것은 수많은 작가들이 다뤄서 이젠 농담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 이 사건 대책회의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직위, 직급이나 직책상 우열을 판단하기 힘든 동급 지휘자가 여럿 있을 경우 일단 임관 시기를 따지고 그것마저 같으면 정치력 투쟁을 시작한다는 전통이 여기에서 탄생했다![23]
물론 이런 갈등이 하급 조직으로 번지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회의가 난항을 겪는 동안 컵라면에 붓는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현경 소속 급수차가 경시청 기동대에게 급수를 거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애초에 돌입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중요한 이유에는 이런 관료경직 탓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경찰 지휘부 중에 경찰청 공안제1과 이사관 겸 과장보좌로 있었던 가메이 시즈카도 있다.
체포된 범인들이 12명의 자신들의 멤버를 집단 린치로 살해한 산악 베이스 사건을 증언하면서 그것과 함께 이 인질극이 준 충격이 어마어마해서 좌파 학생 운동에 대한 대중의 여론이 급변했고 일본 사회가 운동권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좌익 운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범인들은 체포 후 기소되었으며 주범인 사카구치 히로시는 1993년 사형 확정, 요시노 마사쿠니(吉野雅邦)는 무기징역, 가토 삼형제 중 차남인 가토 미치노리(加藤倫教)는 징역 13년, 막내인 가토 모토히사(加藤元久 체포 당시 16세)는 중등 소년원 송치가 각기 선고되었다.[24] 반도 쿠니오(坂東國男)는 1975년에 일어난 쿠알라룸푸르 사건[25] 이후 일본적군과 일본 정부의 초법적 거래로 외국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 해외에서 일본적군에 합류해 국제 지명 수배# 중이지만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카구치 히로시에 대한 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요시노와 함께 수감 중이다. 가토 형제는 복역 후 전향해 아예 자민당에 입당하기도 했는데 가토 미치노리는 출소 후 가업인 농업을 하면서 환경보호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사건 50년을 기념해 이 사건에 대해서 인터뷰를 받기도 하였다.
사건 이후 아사마 산장은 수리를 거쳐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 이후 약 10년 동안은 사건 현장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이후에는 거의 잊힌 곳이 되었지만 건물은 아직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26]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정생회(正生會)라는 자선단체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청소년들의 치유 시설로 소유하고 있고 2022년 FNN 취재 요청에 선듯 아사마 산장 내부 공간을 공개하기도 했다.
5. 문화적 영향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1985년 연작 소설 '하마에게 먹히다(河馬に噛まれる)'를 내놓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사마 산장 사건과 산악 베이스 사건의 생존자로 설정되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수상작이다.겟타로보 코믹스판에서 진 하야토가 과격 학생운동 리더로 등장하며 빠지려는 멤버 2명을 아이언 클로+얼굴찢죽 하는 장면도 이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나오는 과격 혁명운동 집단 '여명'과 그들이 일으킨 모토스 호수 총격전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쓰르라미 울 적에 DS판 4권 신미오츠쿠시편의 키워드 중 하나인 시라카바 산장 농성 사건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5.1. 대중매체
- 2002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야쿠쇼 코지 주연의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突入せよ! あさま山荘事件)」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단, 다이 하드 시리즈나 레인보우 식스처럼 멋지게 진입해서 체포하는 게 주된 내용은 아니고 당시 사건 진압에 참여한 경시청 간부로서 지금은 일본에서 유명한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삿사 아츠유키(佐々淳行)[27]의 저서를 각색한 영화로 경찰측의 고군분투, 온갖 뻘짓과 삽질을 주 내용으로 다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28] 일부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바뀌어서 나오니 영화 보기 전에 숙지해 두자. 경찰 입장에만 치중해서 그런지 연합적군 멤버들은 맨 마지막 돌입 부분에서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애초에 목소리도 없다. 그냥 엽총으로 총질만 하는 것이 전부이다.
- 일본의 좌파 감독이기도 한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2008년에 「실록 연합적군(実録 連合赤軍)」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분 진출작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오로지 경찰의 관점에서만 묘사되었던 것에 비해 연합적군측 관점,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후술, 구성원들의 인간적인 고뇌, 하지만 내부자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비판적으로 볼수밖에 없는 자기합리화 등을 다룬 수작으로 평가된다. 여담으로 와카마츠 감독 본인부터가 신좌파 운동에 관계된 사람이었는데 적군파 멤버들과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1971년에는 아예 세계혁명선언이라는 영화를 찍어서 적군파의 해외 무력투쟁이나 국제 무력투쟁, 반일 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이 영화에는 당시 연합적군 리더 부부 모리 츠네오[29], 나가타 히로코[30] 커플의 여러 가지 사건(대표적으로 연합적군 사건)도 감상할 수 있다. 다른 인터뷰에서 이런 입장에 있는 와카마츠 코지 감독 본인도 이들의 투쟁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에 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밝혔다. 의미심장하게도 엔딩곡으로 쓰인 노래는 Bill Fay의 Pictures of Adolf Again으로 제목 그대로 화자가 TV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을 보고 히틀러를 까는 내용인데 적군파의 일련의 행위들을 히틀러의 행위와 동치시킨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1] 경찰관 2명, 민간인 1명[2] 경찰관 26명, 기자 1명[3] 1971년에서 1972년에 걸쳐 활동했던 극좌 테러 조직으로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의 모리 츠네오 분파와 마오주의 단체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일본공산당 혁명 좌파 가나가와현 위원회가 연합하여 결성되었다.[4] 자동차를 탈취해서 도망치자고 했는데 하필 자동차 열쇠를 외출 중이었던 인질의 남편이 가지고 있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어이없게도 당시 범행에 가담한 이들 중 운전을 할 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무산되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멤버는 이미 산악 베이스 사건 당시 자기들이 때려 죽였기 때문이다. 자승자박.[5] 이 사건이 발생한 지 22년 후 발생한 에어 프랑스 8969편 납치 사건에서도 알제리 정부가 납치범 우두머리의 어머니를 데려와 설득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린 격이 되었고 인질 한 명이 허무하게 살해당했다.[6] 인질의 남편이 과일과 함께 아내, 범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간 바구니였다. 그런데 연합적군 쪽은 가져가지도 않고 그냥 얌전히 건물 안에 잠자코 있었다.[7] 범인은 경찰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8] 기록으로 추정해 보건대 아마 호와 M300로 추정된다. 일단 위 사진에는 4자루만 찍혀 있으나 잘 보면 위에 한 자루가 더 있다. 저 안 찍힌 총기가 '5연발 총'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사진의 3번 총기인 Auto-5 소드오프 5연발 총일 가능성도 있다. 튜브탄창의 뚜껑이 달려 있는 걸 보아서 산탄총이긴 하나 펌프가 없는 걸로 보아서 Auto-5가 확실하다.[9] 아사마 산장 사건 상세 기록에는 '상하2연총'으로 적혀 있다.[10] 명색이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군대란 놈들이 엽총 따위로 무장했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애초에 적군파, 혁명 좌파 모두 그냥 학생 운동 조직에서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쓰인 엽총들은 가나가와현 위원회인 게이힌 안보공투 멤버들이 적군파와 합쳐지기 전 1971년 2월 17일에 도치기현 모오카시의 츠카타 총포점에서 털어온 총들 중 일부다. 또 다른 일부는 적군파에서 처분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제목은 모오카 총포점 습격 사건이며 게이힌 안보공투는 이전에도 파출소에서 멤버 3명이 권총 탈취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 있던 경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1명은 사살되었고 나머지 2명도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 이후 만만한 총포상으로 목표를 바꾼 듯하다.[11] 영화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에도 출신 간부들끼리 이딴 걸로 "전 대륙까지 갔다 온 사람이거든요?", "어 나돈데. 나 훈장 받았어. 너 계급 뭐였냐"면서 쓰잘데기없이 말싸움하는 장면이 나온다.[12] 이때 두 경찰관이 순직한 원인은 진압용 헬멧(방석모) 정면에 계급장이 새겨진 탓에 지휘자임을 눈치챈 무리들이 표적으로 삼아 저격한 것이었다. 이후 헬멧 정면에 계급장을 삭제하거나 뒤통수 부분에 새기게 되었다.[a] 경찰청 장관 > 경시총감 > 경시감 > 경시장 > 경시정 > 경시 > 경부 > 경부보 > 순사부장 > 순사장 > 순사.[a] [15] 범인들이 총기뿐만 아니라 철파이프 폭탄까지 사용해서 제2기동대 4중대 분대장은 오른팔이 작살났다. 안면을 피격당한 대원들이 많았고 실명한 대원들도 있다.[16] 이때 관동 지방에서만 팔던 컵라면을 기동대원들이 먹는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컵라면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7] 경찰관들이 착용한 방탄모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착용했던 90식 철모를 재도색한 것이다. 일본군이 무장해제하며 반납한 것을 인수했는데 경찰 일부에서는 2000년대까지 이용했다고 한다.[18] 상술한 영화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에는 준비한 도시락이 전부 혹한에 얼어서 죄다 버리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19] 실질적으로는 일본 경찰 본부 구실을 하지만 법적으로는 도쿄 지방의 경찰 조직에 불과하다.[20] 국가공무원채용종합직시험을 통해 임용된 경찰. 대한민국으로 치면 행정고시 출신으로 보면 되는데 1년 15명 내외의 소수정예에 진급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경찰 고위직은 모두 캐리어 출신이다. 부처 선호도도 매우 높아서 재무성 수준의 최상위부처에 해당하며 경찰 캐리어는 거의 대부분이 도쿄대 법학부이고 도쿄대 비법학부는 대놓고 차별받는다. 일본 경찰 계급에서 경시총감 바로 아래인 경시감까지 진급이 보장되어 조직 내 지위가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높으며 일본 경찰은 검찰과 대등한 수사권이라는 권력도 있기 때문이다.[21]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누가 상석에 앉을지(누가 지휘자가 되어 회의를 진행할지) 결정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둥글게 둘러앉았다고 한다.[22] 고위 직급이 일단 안쪽에 원형으로 앉고 하위 직급은 그 바깥에 직급대로 동심원을 형성한다![23] 사실 탄생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일본의 유구한 전통이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라든가 일본 육군과 경찰간의 대립 같은 일본군 육군이나 해군에서도 다시 파벌로 나뉘고 기수로 나뉘고 등등... 아주 유서 깊은 전통이다.[24] 가토 삼형제 중 맏이였던 가토 요시타카(加藤能敬)는 산악 베이스 사건 당시 린치당해 굶주림과 추위로 살해당했다.[25] 일본적군은 1975년 8월에 쿠알라룸푸르의 미국 대사관과 스웨덴 대사관을 동시에 급습해 인질극을 벌였다. 일본에서 복역 중이던 대원 5명을 석방시키라는 것이 요구 조건이었는데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했다.[26] 마지막까지 전투가 벌어진 침실의 경우에는 원래 2층 침대가 있는 서양풍 공간이였으나 2022년 기준으로는 다다미 방으로 바뀌었다.[27] 이후 내각안전보장실 실장도 역임했으며 우익 인사로, 새역모에도 기부한 적이 있고 독도와 관련해서도 독도에 헬리콥터를 투입해야 하네 어쩌네 하던 양반이다.[28] 일본 경찰들의 평소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서 유달리 일본 경찰이 나오는 영화들의 경찰들은 보통 시궁창 입장인 경우가 많다.[29] 나가타 히로코와 같이 처형을 명분으로 대원들을 학살한 산악 베이스 사건과 인바누마 사건의 주도자로, 체포된 후 연합적군 사건에 대해 "나는 미쳐있었다"는 조의 자기 비판서를 쓰고 1973년 1월 재판 도중 목을 매고 자살했다. 유서에는 "자기 책임 무거움에 절망... 스스로 사형 판결을 내리겠다."(自己の責任の重さ… 自らに死刑を下す)고 적었다.[30] 동료가 이성끼리 연애를 하였단 이유로 여자 대원을 구타해 죽인 자였으나 나중에 애인이었던 사카구치 히로시를 버린 뒤 모리 츠네오로 갈아타 놓고 "공산주의적 관점으로 봐도 올바르다."는 소리를 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고 다른 죄수와 재혼했다가 뇌종양으로 40여 년 동안 투옥한 끝에 2011년 2월 5일 밤 10시 도쿄구치소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고 일본 법무성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