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일본적군 [ruby(日本,ruby=にっぽん)][ruby(赤軍,ruby=せきぐん)] Japanese Red Army (JRA) الجيش الأحمر الياباني | |
결성 | 1971년 2월 |
해체 | 2001년 |
활동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을 중심으로 전세계 |
적대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싱가포르| ]][[틀:국기| ]][[틀:국기|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말레이시아| ]][[틀:국기| ]][[틀:국기|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동맹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틀:국기| ]][[틀:국기| ]] [[시리아 아랍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 └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PFLP) |
정치 성향 | 극좌 |
지도자 | 시게노부 후사코 ,(1971년 ~ 2000년), (검거)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주의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반시온주의 |
주요사건 | 로드 공항 테러 일본항공 404편 납치 사건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 사건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 사건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 쿠알라룸푸르 사건 자카르타 사건 |
테러조직 지정 | [[미국| ]][[틀:국기| ]][[틀:국기| ]][1]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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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日本赤軍, ruby=にほんせきぐん)] / JRA(Japanese Red Army) / الجيش الأحمر الياباني일본의 과격 좌익단체 적군파에서 갈라져 나온 신좌파 계열 반군, 도시 게릴라이자 국제 테러조직. 옴진리교 이전까지 일본 국내 테러조직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악명을 떨치던 단체였다. 한 때 안보투쟁에서 두각을 보이던 적군파(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가 1970년 타미야 타카마로가 이끄는 일당이 벌인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요도호 사건)이 너무 주목을 끌어버린 후 일본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히 추적당하여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던 중 가까스로 체포를 면한 시게노부 후사코 등이 이른바 'P 전략'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합류하여 적군파 아랍 위원회(혹은 국제 반제국주의 여단, 성전 여단, 반전민주전선 등)라는 이름으로 자칭하며 적군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 시초이다.[2]
2. 설명
일본적군(JRA)은 요도호 사건으로 공안당국의 추적이 좁혀져 오자 일부 적군파 멤버들이 출국하고 나서 1971년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무대를 옮겨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와 합류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은 시게노부 후사코를 두목으로 하여 PLO와 아랍 게릴라의 지원을 얻고자 카를로스 더 자칼이 그랬듯 혁명과 반제국주의의 미명 하에 이들의 외주를 받고 대리 테러를 일으켰다. 이스라엘 텔 아비브 공항 습격사건(1972)[3], JAL 소속 여객기 하이재킹(1973), 싱가포르 셸 석유 습격 사건 (라주 사건)(1974),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1974),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 사건(1974)[4], 쿠알라룸푸르 사건(1975)[5],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1977), 자카르타 사건(1986) 등을 일으켰다. 일본에 남아 국내투쟁을 주장하던 모리 츠네오가 이끌던 연합적군이 산악 베이스 사건으로 스스로 조직을 궤멸시키고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그 추태를 전국에 생방송하며 몰락하는 동안 일본적군은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시리아, 북한 등 반제국주의를 외치던 반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아랍, 동남아, 유럽 등 전 세계에 그 악명을 떨쳤다. 특히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등 팔레스타인 독립 세력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들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적군파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추적 때문에 활동이 어려워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AJAF), 연합적군 잔당[6] 등 일본 내 타 극좌 테러조직원들이 일본적군에 합류하려고 출국하는 등 인원들을 꾸준히 흡수하며 성장해 나갔다. 미국 국무부가 이들을 해외 테러조직 명단에 올려 예의주시할 정도였다.1970년대 중반 이후 JRA에 의한 테러는 사라지는 듯했지만 1987년에 발생한 로마 주재 영국 대사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필두로 JRA가 관여한 테러는 간간히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과 유럽 각국의 테러 방지 공조체제가 확립되고 다른 조직과의 연계가 점점 약해지면서 일본적군의 활동은 점점 미미해졌다. 결정적으로 소련 붕괴와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극좌, 신좌파 사상 자체가 완전히 구식이 되어 새로운 지지자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바트주의 시리아도 소련이 붕괴되자 미국과 서방 측에 은근슬쩍 화해 무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조직의 중심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이스라엘 및 서방 국가와 대립하는 각국의 반정부 조직들과의 자금협력과 활동제휴가 끊기게 되자 1990년대부터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안보투쟁 역시 시들해져 본토인 일본 국내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최고간부 중 하나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을 꾸준히 드나들다가 2000년 11월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는데 1974년의 헤이그 프랑스 대사관 습격 사건 등 국제테러를 주도한 혐의로 국제 수배 중이었다. 결국 2001년 4월, 최고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해산을 선언한 후 정식으로 해산했다.
2001년 해산 선언 이후 잔존 멤버들인 반도 쿠니오와 다이도지 아야코는 남미에서 "일본 적군 해산 무효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적군의 전 리더들이 정부보조금을 받고 생활한다는 소식이나 일본적군의 멤버 중 한 명인 야마모토 마리코가 도쿄 이타바시구의 슈퍼마켓에서 오징어 2마리와 12,000엔을 훔치다가 구속된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현재까지 국제수배 중인 일본 적군 인원은 총 7명이다. 해외로 나간 뒤 철저하게 숨어지냈다고 하며 2000년대 초 시게노부 후사코 체포 이후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까지는 어느 정도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이후에는 아예 종적을 감춰 버렸으며 이 중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생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사진
일본 적군은 활동만큼이나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들의 자살공격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3. 현재까지 도피 중인 조직원들
- No.1 반도 쿠니오(坂東國男)[7]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체포,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석방된 후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에 관여하였다. 1987년 봄 무렵부터 마닐라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를, 11월 25일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유럽 여러 국가를 돌아다닌 기록과 노모와의 만남을 위해 준비했으나 노모 측에서 거절했다는 기록, 귀국 준비를 했다는 사실 등이 시게노부 후사코 체포 당시 확인되었다.
2001년 시게노부의 해산 선언에 대해 다이도지 아야코와 같이 남미에서 "일본 적군 해산 무효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공안 당국에 의하면 중동을 기반으로 중국, 루마니아, 네팔에 입국이 확인되었지만 현재 생사불명이다.[8]
- No. 2 사사키 노리오(佐々木規夫)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의 일원이자 적군파 소속으로 연속 기업 폭파 사건,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폭탄 테러에 관여되어 체포되었다가 일본항공 472편 납치사건으로 석방되었다. 1998년 타인 명의의 여권 도용을 위해 도쿄에 방문했음이 확인된 후에는 생사불명이다.
- No. 3 마츠다 히사시(松田 久)
M작전에 기반한 요코하마 은행 강도로 형이 확정된 상태에서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석방된 7명 중 한 명이다. 1994년 타인 명의의 비자로 동유럽 등에 불법 입국한 혐의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으며 1999년 12월 23일 홍콩에서 다이도지 아야코, 시게노부와 회의했다는 사실을 시게노부 체포 당시 압수한 자료에서 밝혀졌으나 이후에는 시게노부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생사불명이다.
- No. 4 오쿠다이라 준조(奥平純三)
헤이그 사건과 쿠알라룸푸르 사건에 관여하였고 1976년에 요르단 입국 당시 위조 여권 혐의로 체포되어 10월 13일에 일본에 이송되었고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석방되었다. 사사키 노리오와 함께 1998년에 여권 도용을 위해 도쿄로 방문했음이 확인되었다. 1998년과 1999년 사이 두 번 이상 일본에 입국해 시게노부 후사코와 접촉했음이 밝혀졌지만 이후에는 시게노부와도 만나지 않았고 현재는 생사불명이다.
- No. 5 다이도지 아야코(大道寺あや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소속이자 일본 적군에 합류한 사람으로, 연속 기업 폭파사건에 관여한 후 1975년에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으로 체포 직전에 청산가리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검거되었다.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석방되었다. 1999년 홍콩에서 마츠다 히사시와 함께 시게노부와 회의를 가진 것이 확인되었다. 2001년에 반도 쿠니오와 같이 해산 무효 선언을 한 후 잠적하였으며 현재는 생사불명이다.
- No. 6 니헤이 아키라(仁平 映)
간이 숙박 업소에서 노무자 생활을 하다가 상해, 협박 등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옥중에서 처우 개선을 위한 옥중협회를 결성했다. 본래 일본적군 소속은 아니었지만 472편 납치 사건 당시 옥중협회의 반체제 행동이 납치 측에게 높게 평가되어 석방 요구 목록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일본적군에 참가했고 국외 도피 중이며 현재 생사불명이다.
- No. 7 오카모토 코조(岡本公三)
로드 공항 테러로 이스라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1985년 5월에 이스라엘과 PFLP-GC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 후 레바논으로 망명했으며 베이루트에서 현재까지 거주 중이다.
2022년 5월 28일 시게노부 후사코가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후 시민활동은 생각하지 않고 사죄와 감사와 재활과 투병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소한 시게노부는 50년 전 인질을 잡는 등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행적이 확인되지 않은 나머지 인원들은 수배 중이다. 2024년 3월 한국인 관광객이 촬영한 수배 벽보
[1] 미국 국무부 선정 해외 테러 조직으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수괴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해산 선언을 한 후 동년 10월 8일 지정 해제되었다. 미국 애국자법 테러리스트 배제 목록에는 여전히 등재되어 있다.[2] 국내에 남아 있던 잔당들은 M 작전을 이끄는 모리 츠네오를 필두로 나가타 히로코가 이끌던 마오주의 조직 일본공산당(혁명 좌파) 가나가와현 위원회와 제휴하여 '연합적군 중앙위원회'가 되었으며 산악 베이스 사건이라는 희대의 바보짓으로 조직력을 스스로 깎아먹고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그 끝을 장식하며 소멸한다. 이 캠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출국하여 일본적군에 합류하거나, 시오미 타카야에게 합류하여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프롤레타리아 혁명파)를 결성했다 1990년대 활동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소멸했다.[3] 로드 공항 사건으로도 불리며 적군파 조직원 3명이 공항에서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갈겨 민간인 27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과 일본 사이의 항공 직항노선이 없어졌다.[4]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본 적군파 대원 3명이 프랑스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대원을 석방시킨 사건이다.[5] 1975년 8월 4일 일본 적군 5명이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미국과 스웨덴 대사관을 습격, 점거하고 관내에 있던 미국 총영사 등 52명을 인질로 잡은 사건. 구금 중인 활동가 7명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2명은 자의적으로 거부하여 5명이 초법적인 거래로 석방되었다. 1977년의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으로 일본 정부는 두 차례 초법적 거래를 하게 된다.[6] 아사마 산장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반도 쿠니오도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인한 일본적군과 일본 정부의 거래 후 풀려나 해외로 도주하는 데 성공하고 일본적군에 합류하였다.[7] 아버지는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자살했으며 어머니는 지속적으로 투항을 권하고 있다.[8] 어차피 잡히면 아사마 산장 사건과 산악 베이스 사건의 주범이라 무조건 사형이고 적군파의 사형수로 수감 중인 간부들이 본인이 잡히지 않아 사형 집행이 되지 않는 측면도 있어서 계속 도망다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