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타미야 타카마로 [ruby(田宮高麿,ruby=たみや たかまろ)] |まろ | |
출생 | 1943년 1월 29일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이와테현 | |
사망 | 1995년 11월 30일 (향년 52세) |
평양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소속 | 적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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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칭 요도호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을 일으킨 '적군파(赤軍派)'의 주동자. '마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생애
일본 이와테현에서 출생하여 오사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사카시립대학에 입학해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에 참가했다.1970년 3월 30일 민항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하는 요도호 사건을 일으켰는대 인질로 잡혀 있던 승객들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성을 밝힌 멤버라고 한다.
북한으로 망명하고 나서도 요도호 그룹 리더로써 활동을 계속 하였는데 그 활동의 내용은 다른 멤버들로 하여금 일본인 납치를 지시하는 등의 공작 활동이었던 듯하다.
후일 일본에서 친분이 있었던 저널리스트 타카자와 코우지(高沢 皓司)에게 '일본인 납치 사안'에 대한 촉구를 부탁받고 "어려운 문제지만 해결에 노력해보겠다"고 답하였다. 1995년 11월 30일 경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사망 전날 평양역에서 만난 적군파의 의장 시오야 타카야의 말에 따르면 죽기 전날까지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타카자와 코우지를 비롯한 일본인 납치 사안을 쫓고 있던 저널리스트들이 타미야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특히 교류가 깊었던 타카자와는 '타미야의 죽음으로 요도호 그룹과의 중계자가 사라졌다'고 얘기하였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타미야가 북한당국의 비위를 거슬려 모종의 사유로 의문사했다고도 표현한다.
타미야의 자녀 3명은 2000년대에 모두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아내인 쥰코는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북한 납치 사건에 관여하여 국제 지명수배돼 있다. 자녀 중 한 명은 2011년에 미타카시의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37인 중 33위라는 저조한 순위로 낙선하였다.
3. 저서
- 우리사상의 혁명
4. 여담
- 시신은 북한 장례법에 따라 화장[1]되었고, 유골은 북한을 방문한 형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져 고향 사찰 묘지에 안장되었다.
- 내일의 죠 팬들에게는 여러 번 씹어먹어도 이가 갈리는 역적이다. 이 작자가 적군파를 내일의 죠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 장례법 제5조 "사람이 사망하면 화장한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 해당 기관의 승인을 받아 지정된 장소에 묘를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