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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color: #fff;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colcolor=#fff> 역사 | 이스라엘/역사, 팔레스타인/역사 | |
정치 | 이스라엘/정치, 팔레스타인/정치 | ||
외교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권 관계, 벨푸어 선언, 오슬로 협정 | ||
방안 | 일국 방안, 양국 방안, 삼국 방안, 영국 방안 | ||
사상 | 시오니즘, 반시오니즘,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즘, 반이스라엘주의, 반팔레스타인주의 | ||
민족 |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인, 유대인, 아랍인, 하레디, 이스라엘 아랍인, 이스라엘 무슬림 | ||
관련 단체 | 이스라엘 리쿠드팔레스타인 PLO, 파타, 하마스, PIJ, PFLP, 인민당, DFLP | ||
관련 인물 |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마일 하니예, 야히야 신와르 | ||
관련 사건 |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 나크바, 수에즈 전쟁, 6일 전쟁, 소모전(중동), 민항기 납치 및 테러(엘알 426편, 엘알 253편, 엘알 432편, 트랜스 월드 840편, 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사베나 571편, 엔테베 작전), 검은 9월, 뮌헨 올림픽 참사, 197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욤 키푸르 전쟁, 레바논 내전, 골란 고원 분쟁, 제1차 인티파다, 제2차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철수, 파타-하마스 분쟁, 가자 전쟁(2008-2009, 2012, 2014, 2021),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2023년 알아크사 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 ||
기타 | 서동시집 관현악단 |
희생자들의 명단[1]이 새겨진 위령비 |
범인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Khalid Jaw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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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뮌헨 참사 또는 뮌헨 학살(Munich massacre)은 1972 뮌헨 올림픽 기간에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서독으로 침투한 후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 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건이다. 범인들은 모두 사살 또는 체포되었지만 서독 경찰의 진압 실패로 경찰 한 명과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사진의 위령비는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건물[2]에 설치되어 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3] 테러에 대한 자세한 정보, 희생자 개개인의 사연, 그리고 당시 사진을 보여주는 빔 프로젝터가 설치된 야외 추모관도 존재하며 조화가 놓이고 있다.
2.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영어 | Munich massacre |
독일어 | Das Münchener Olympia-Attentat, Geiselnahme von München |
히브리어 | טבח הספורטאים באולימפיאדת מינכן |
아랍어 | 1972 عملية ميونخ |
3. 발단
3.1. 미흡했던 서독과 이스라엘의 보안
서독은 뮌헨 올림픽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에서 벗어나 밝고 진일보한 독일 사회를 보여주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선수단의 올림픽 참여는 차별과 폭력의 그림자를 단절하고 싶었던 서독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당시 서독 정부는 '세계 평화'를 뮌헨 올림픽의 주제로 내세우고자 의도적으로 행사의 보안을 최소화했다. 전체주의 파시즘이 창궐했던 나치 독일 시절이 불과 30년 전이었으므로, 서독 정부 입장에서는 무장 제복 경찰들이 쫙 깔려 행사를 통제하는 모습을 가급적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결과 뮌헨 올림픽 보안에 배정된 비용은 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며[4] 선수촌이나 경기장 어디에도 무장경찰이나 보안요원을 배치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신 하늘색 유니폼 복장을 한 '올리스'라는 이름의 진행요원들이 보안과 교통 통제를 담당하였으며, 그마저도 올림픽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의 태도 역시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선수촌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너무 낮아 보안에 취약했다. 선수들은 담장을 쉽게 뛰어넘어 맥줏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이스라엘 선수단도 충분한 보안 대책을 갖추지 못했다.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보안담당자는 선수단에게 이목을 끌지 말고 수상한 가방을 열어보지 말라는 등 원칙적인 보안 지침만 안내하였다. 대표선수들, 코치와 심판들, 기자와 방송요원들은 선수촌의 열악한 보안을 우려하였으나 추가적인 조치를 요청하지는 않았다.[5][6]
이러한 보안의 해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올림픽에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군정보부 제4국은 유럽에서의 테러가 임박했다는 첩보를 다수 입수하였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제시되지 않았고 다수의 보고서는 국제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들려오는 부정확한 경보로 치부되었다.
3.2. 검은 9월단의 테러 준비
검은 9월단은 1970년에 검은 9월 사건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요르단에서 후세인 1세의 군대에 의해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학살된 이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테러 단체는 철저한 신비주의 속에 운영되었으며 다른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는 달리 본부나 지부, 대변인 등을 갖추지 않았다.점조직 형태로 운영된 검은 9월단의 전체 계획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비밀스러운 리더 아부 이야드(본명 살라 칼라프)뿐이었다.[7] 이야드는 야세르 아라파트[8]의 대변인이자 파타[9]의 수뇌부에 속해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검은 9월단과의 모든 관련성을 부인하였다.이야드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3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되었다고 밝혔다. 첫째는 싫건 좋건 세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둘째는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200여 명 가량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석방시키는 것, 셋째는 투쟁을 보여주기 위해 집중된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검은 9월단의 하부 조직에 속한 8명의 청년 테러리스트들이 '이크리트와 비람'[10]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을 위해 차출되었다. 이들 중 지휘를 맡은 이샤[11], 현장 전술을 담당하는 토니(본명 유세프 나잘)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두 달 전 차출되어 일급 기밀 임무에 투여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6명은 올림픽 개최 한 달 전이던 7월 중순부터 리비아 사막 캠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테러범 중 한 명이었던 자말 알-지셰이는 6명 모두가 팔레스타인인 난민캠프 출신이었으며 처음 훈련을 받는 날부터 언제든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테러 13일 전 검은 9월단의 사야안[12]인 남녀가 부부로 위장한 채 베이루트에서 독일 쾰른-본 국제공항으로 향했는데 무사히 4개의 큰 가방을 짊어진 채 세관을 통과해 뮌헨 중앙역에 있는 보관함에 화물을 집어넣었다. 가방 속에는 AK-47 8자루와 총알이 가득 채워진 탄창 12개, 그리고 수류탄 10발이 존재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올림픽 5일째였던 8월 31일까지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다양한 경로를 거쳐 모두 서독 뮌헨에 도착했다. 테러 하루 전이던 9월 4일까지 이들은 평범한 관광객처럼 지역의 명소를 구경하고 올림픽 경기를 시청했으며 외식을 즐겼다. 4일 자정이 되어서야 이들은 비로소 구체적인 작전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준비된 무기를 손에 넣고 선수들로 위장하기 위한 붉은색 체육복을 입은 뒤 두 조로 나누어 택시에 탑승했다.
아둘 테러리스트들은 중간중간 빌리 포스(Willi Voss)를 비롯한 서독의 네오나치들의 물적 지원을 받았다. 이전부터 PLO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검은 9월 당시 직접 참전하여 요르단군에 체포당해 포로교환으로 겨우 풀려난 동독 출신 네오나치 우도 알브레히트(Udo Albrecht)가 이들을 연결해 주었다.
4. 전개
9월 5일 새벽 4시 10분 두 그룹의 검은 9월단 침투조를 태운 택시가 선수촌 25A 게이트 옆 담벼락에 도착했다. 올림픽 공식 체육복을 입은 그들은 새벽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몰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월담을 시도하는 선수들처럼 보였다. 심지어 침투조 중 하나는 담을 넘던 중 술 취한 캐나다 선수들과 마주하기도 했다.[13] 이들은 정겹게 서로의 월담을 도와주었으며 얼마간 걷다가 곧 헤어졌다.[14] 선수촌을 가로지르던 테러리스트들을 독일 우체부들이 목격하고 본부에 신고하기까지 했으나 서독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스라엘 선수단이 머무르던 콘놀리가 31번지에 도착한 그들은 매고 있던 올림픽 공식 더플백에서 AK-47 소총을 꺼내 일제히 장전했다.이스라엘 남자 선수단에 배정된 아파트는 총 다섯 동이었다. 1동은 코치와 심판들이 묵었으며 2동은 사격, 펜싱, 육상 선수들이, 3동은 역도와 레슬링 선수들이 쓰고 있었다. 4동에는 팀 닥터가, 5동에는 선수단장 랄킨이 있었다. 여자 선수들은 다른 숙소를 배정받았으며 조정 선수 2명은 경기가 열리는 독일 북부 킬에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문이 열려 있었던 1동 로비를 지나 출입문으로 향했는데 복사된 열쇠를 가지고 여러 열쇠를 돌려 가며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국제 레슬링 심판 '요세프 구트프로인트'가 잠에서 깨 숙소 안에서 문 옆으로 다가갔다. 출입문이 열리자 '구트프로인트'는 즉시 상황을 인지하고 거구의 덩치로 문을 막았는데 동료들의 탈출을 위해 최대한 문을 밀어붙이고 버텼으나 오직 역도 코치 '투비아 스콜스키'만 탈출에 성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스콜스키는 직감적으로 뒷편의 이중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져 달아났다.
스콜스키가 무작정 도망쳐 향한 곳은 한국 선수단 숙소였다. 당시 한국 여자배구 코치 전호관[15]은 새벽 5시 20분경[16] 누군가 마구 숙소 문을 두들겼고 처음에는 취객인 줄 알았고 항의했으나 곧 남자가 자신이 이스라엘 역도 코치라고 설명했다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스콜스키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곤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숙소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전호관 코치는 즉시 경찰에 연락했으며 10분 뒤 서독 경찰이 와서 스콜스키를 보호했다.# 스콜스키는 1동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구트프로인트를 제압한 테러리스트들은 1동에서 잡은 인질 6명을 2층으로 데려가 밧줄로 묶었다.[17] 1동 안에는 구트프로인트 말고도 5명이 잠들어 있었다. 비몽사몽이었던 다른 4명과 달리 친구들과 늦게까지 뮌헨을 즐기고 온 레슬링 코치 모셰 바인베르그는 테러 지휘자 이샤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벌였지만 그의 총을 빼앗으려는 순간 다른 테러리스트가 그에게 총을 쐈다. 총알은 그의 오른쪽 뺨을 관통했고 테러리스트들은 제압된 인질들을 모두 2층 방에 몰아넣었다.
테러범 이샤와 토니는 두 조로 나뉘어 행동을 진행했다. 이샤와 2명은 1동의 인질들을 관리하고 토니와 다른 4명은 바인베르그를 끌고 나와 이스라엘 선수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를 강요했다. 바인베르그는 2동을 지나쳐 3동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아마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역도 선수들과 레슬링 선수들이 테러범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3동의 선수 5명은 총을 든 테러범들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역도 선수 다비드 베르게르가 반격을 시도했으나 곧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했다. 토니 일행은 플라이급 레슬링 선수 가드 차바리를 선두에 세워 인질들을 1동으로 데려갔다. 1동 로비 앞에 도착한 순간 차바리는 테러리스트의 총을 후려치고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해 주차장으로 뛰어내려갔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차바리의 탈출과 함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바인베르그는 근처 테러리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러리스트는 반사적으로 총을 발포했고 바인베르그의 죽음과 함께 길게 울려퍼진 총성은 선수촌 전체를 깨웠다. 이렇게 10명의 이스라엘 선수단 인질이 1동에 감금되었다.
오전 4시 50분경 사태를 인지한 올림픽 본부 측에서 내보낸 진행 요원이 1동 앞에 도착했다. 진행요원은 바인베르그의 시체와 로비를 지키고 있는 테러리스트를 발견했다. 그는 본부에 상황을 설명했으며 같은 시간 이스라엘 선수단장 랄킨은 급히 이스라엘 기자들이 묵는 호텔로 전화를 걸어 인질극이 발생했다고 외쳤다.
한편 1동에서는 레슬링 선수 요세프 로마노가 바인베르그의 죽음을 보고도 테러리스트에게 달려들려고 시도했는데 한 명을 바닥에 쓰러뜨렸으나 다른 테러리스트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 로마노의 시체는 거실에 그대로 방치되었다.[18]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과 같은 공산주의 단체 바더 마인호프의 두 리더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서독 경찰이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올림픽 주최측은 이 소식을 들은 후에도 한동안 경기를 지속했다가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고 나서야 모든 경기를 중단했다.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었다. 추축국이었던 과거로 인해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후 뮌헨 경찰서장 만프레트 슈라이버 총경(1926~2015)이 현장 총책임자가 되었다. 슈라이버는 일반적인 경찰 업무는 잘 한다는 평을 들었지만 인질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욱이 사건 발생 1년 전인 1971년 8월 4일에 일어났던 은행강도 인질극[19]에서 불확실한 대처로 인질 1명이 사망하여 기소당한 전적도 있었다. 슈라이버가 현장을 지휘하면서 여러 문제가 터져나왔다. 사건 발생 후 인질극이 벌어진 선수촌 주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기자와 구경꾼들이 주변을 가득 메웠으며 심지어 방송국에서는 아예 카메라로 생중계를 하는 바람에 테러범들은 경찰의 행동 하나하나를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해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출동한 이들은 특수부대가 아닌 평범한 일선 경찰관들이었다. 당시 테러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내에서 사격을 잘하는 사람을 찾길래 지원했더니 이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격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그 작전이라는 것이 고작 운동선수로 위장한 경찰들이 스포츠 가방에 무기를 숨겨서 테러범들이 점거한 숙소 맞은편 건물의 옥상으로 잠입해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허술하게도 매우 두꺼운 방탄복 위에 체육복 상의를 걸쳐 입은 것이 뻔히 드러나는 복장으로 잠입을 시도했고 현장의 언론통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테러 진압 작전 준비 모습을 방송국 카메라가 모두 담은 것이다. 그 바람에 TV 뉴스로 이 광경을 본 테러범 중 한 명이 테라스로 나와 위장 경찰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인질들을 모두 살해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작전은 무산되었다.[20]
테러리스트들은 상부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24시간 안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요구해서 인질들과 함께 비행기로 중동으로 가기로 명령받았기 때문에 헬리콥터를 요구했다. 처음 이들이 요구하던 나라는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 측 협조를 받고자 이집트 대사관에 전화했지만 당연히 이집트 대사는 기막혀하며 "테러범을 왜 우리 이집트에 들여놓으라는 겁니까? 폭탄돌리기인가요?"라고 어이없어 하며 거절했다.
사실 서독은 테러범들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서독 경찰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에는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 놓고 외부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테러범들을 사살하려고 했지만 비행기의 경찰들이 겁을 먹고 헬리콥터가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독단적으로 작전을 취소한 뒤 철수했다.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수투표를 했고 이후 모두 비행기에서 도망갔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작전 시행 30분 전까지도 독일 경찰은 테러범 숫자를 5명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8명이었지만 올림픽 선수촌에서 인질의 상태를 확인하러 간 IOC 위원이 "테러범 5명을 봤다"고 말한 것을 검증도 없이 믿었고 나중에 테러범들이 이동하는 헬리콥터에서 테러범이 8명이라는 소식을 전해오고 나서야 정확한 인원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미 작전에 들어간 경찰관들에게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착륙한 후 테러리스트들이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 테러범들을 전부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서독 경찰 1명이 순직했으며 테러범들이 탄 헬리콥터에 수류탄을 던져서 헬리콥터가 폭발하고 다른 헬리콥터에는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중 나중에 온 경찰들이 헬리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저격수와 도망쳐 온 헬리콥터 조종사를 오인사격해서 중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에서는 테러범이 8명이라는 사실이 전달되지 않아 경찰에 5명을 사살한 뒤 한숨을 돌리는 사이 살아있던 테러범 3명이 인질을 모두 학살한 것으로 설명했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가 인질 사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 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과 함께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IOC와 독일 정부는 대회 재개를 결정하였다.
나치즘의 선전장이 되었던 베를린 올림픽의 기억을 딛고 독일 부흥을 상징하는 가장 화려한 대회를 만들겠다는 서독의 결심은 이 사건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72 뮌헨 올림픽은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한편 테러범 8명 중 5명은 총격전 중에 사살되었고 남은 3명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테러범들은 루프트한자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2명은 모처에서 의문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의 죽음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유력하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을 피해 지하 생활을 하고 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의 보도(한국어 번역)에 따르면 뮌헨 올림픽 참사가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네오나치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묘사되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네오 나치 간의 커넥션이 형성되는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영논리와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극한을 보여준 사례다.
검은 9월단이 PLO 중에서도 극좌 공산주의 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네오 나치-공산주의 연합이라는 정신나간 조합이 왜 이뤄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냉전기 서유럽의 네오 나치는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서유럽을 약화시키려는 소련 및 동독의 숨은 의도였고 다른 하나는 네오 나치들이 기성 나치가 쓸려나가고 오토 에른스트 레머를 비롯한 정통 신나치주의자들도 줄줄이 정부의 탄압을 받다가 슈트라서주의 위주로 뭉쳤는데 슈트라서주의자들이 나치당 중에서도 좌파 세력이라 소련과 동독을 적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이 소식을 듣고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쿠르트 발트하임에게 "뮌헨에서 열린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 학살에 박수를 보냅니다. 히틀러가 600만 이상의 유대인을 태웠던 독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모든 이스라엘인을 유대 국가를 만든 죄를 지은 영국으로 보낼 것입니다."라는 전보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이 전보를 접한 발트하임은 UN 대변인을 통해 "정부 수뇌들이 그에게 보낸 전보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사무총장의 관례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전했고 아민을 비판하지 않았다.[21]
5. 사망자
- 이스라엘 선수: 데이빗 버거[22], 제브 프리드만, 요세프 로마노[23] (이상 역도), 엘리에제르 할핀, 마르크 슬라빈 (이상 레슬링)
- 이스라엘 심판: 요세프 구트프로인트 (레슬링), 야코브 스프링게르 (역도)
- 이스라엘 코치: 아미추르 샤피라 (육상), 케하르 쇼르(사격), 안드레 스피처 (펜싱), 모셰 바인베르그[24] (레슬링)
- 서독 경찰: 안톤 플리거바우어[25]
- 검은 9월단[26]: 루티프 아피프(코드네임 "이샤")[27], 유세프 나잘(코드네임 "토니")[28], 아피프 아흐메드 하미드(코드네임 "파올로")[29], 칼리드 자와드(코드네임 "살라")[30], 아흐메드 셰이크 타아(코드네임 "아부 할라")[31]
6. 대응 실패 원인
뮌헨 올림픽이 개최된 시기는 68운동의 대두와 데탕트 기류의 시작으로 냉전이 다소 완화되었을 때였으며 오늘날처럼 고도의 장비와 전문 인력을 갖춘 테러리즘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한 마디로 당시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큰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올림픽으로 인한 혼란, 정보 부족 및 수집 장애도 큰 원인이었다.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하지 못하고 테러범들과 교섭하러 테러범들의 거처를 방문한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했다. 진압 작전에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라며 당황했고 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이 독일이니 독일이 맡아야 할지, 인질이 이스라엘인이니 이스라엘이 맡아야 할지, 테러범이 팔레스타인 계열이니 팔레스타인의 협조를 얻어야 할지 등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경찰 진압부대가 테러리스트들을 멀리서 정확하게 제압할 만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문 대테러부대 같은 조직이 없었던 탓에 범인을 초반에 제압하지 못하면서 피해가 이어졌다. 사건의 경과를 보면 어이없으리만치 황당한 대처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뤄지는 민간인 상대 인질극은 벌어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테러 전문팀이나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었다. 계획대로라면 경찰 저격수들이 공항에서 테러범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저격수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아니라 그냥 사격이 취미였던 일반 경찰들이었다. 독일군에는 저격수가 있었으나 법적으로 독일군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된 H&K G3 소총에는 스코프도 없었다. 경찰 중에 총 좀 쏜다는 몇 명을 차출해서 무작정 군용 소총을 쥐어주고 테러범을 저격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재앙은 예견된 것이었다. 심지어 당시 뮌헨 경찰에게는 보다 뛰어난 저격용 소총인 SSG 69가 있었는데도 G3 소총을 쥐어줬다.
테러범이 비행장에 도착한 시각은 어두운 한밤중이었는데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헬리콥터가 활주로 조명이 들지 않는 곳에 착륙했다. 그에 더해 착륙 방향이 저격수들을 상대로 90도 가량 직각이어서 시야에 모든 테러범이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라도 이런 일이 터졌다면 대개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외려 이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으로 테러 대응을 인식하는 것이 늦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인류 역사에서 당하기 전에 사건 사고를 대응한 사례보다 당해서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고치거나 대응한 사례가 더 많듯이. 사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에서 이런 유혈 인질극과 같은 테러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7. 영향
뮌헨 참사를 계기로 독일 연방경찰 산하에 창설된 특수부대 GSG 9 |
- 이스라엘은 참사 이후 모사드와 특수부대를 동원해 '신의 분노' 및 '청춘의 샘'이라는 보복 작전을 개시하여 여기저기로 도피한 검은 9월단 단원들을 블랙 옵스를 통해 차례차례 암살하였고 이것이 결국 지금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 심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PLO 역시 국제적으로 비난 대상이 되어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국제 테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노선을 바꿨다.[32] 바로 다음에 열린 1974 서독 월드컵과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이 덕분에 안전 경비 비용이 상당히 증가했고, 특히 몬트리올이 진 빚은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해소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 당시 이스라엘의 육상 선수로 출전했던 샤울 라다니는 동료 선수들에게 재빠르게 상황을 알려 더 큰 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체육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 중 하나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받았다.
- 검은 9월단의 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이 레바논에서 사실상 파괴되면서 크게 약화된 후에는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공산 반군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해 검은 9월단을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창시자 조지 하바쉬는 아랍인이지만 기독교인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은 세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 뮌헨 올림픽을 통해 자신들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뽐내고 미래의 성장 동력을 끌어올리고자 했던[33] 서독은 이 참사로 인해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대회를 끝까지 마무리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수습은 반쪽짜리 성공인 셈이었다.
- 독일은 뮌헨 올림픽 이후 동,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하고 있는데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에 뮌헨이 뛰어들었다가 평창에 밀려 탈락했다. 2036 올림픽도 베를린에서 유치를 추진 중이지만 같은 서방국들은 런던을 밀고 있어서 매우 암울하다.
- 2022년 독일이 배상액으로 2,800만 유로(약 375억원)를 주기로 결정했다. 2,000만 유로는 연방정부가, 나머지는 바이에른 주와 뮌헨 시가 조달하게 되었다.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독일 퓌르스텐펠트브루크에서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과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뮌헨 올림픽 테러 50주기 추모식에서 "독일을 대표해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보호와 이후 진상 규명이 부족했던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
- 2024 파리 올림픽이 열리면서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이 참가했는데, 하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로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시기라 이스라엘 선수들은 이스라엘 vs 말리 축구 경기 전 날부터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수많은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그에 따라 뮌헨 올림픽에서와 같은 참사 재발을 방지하고자 수많은 이스라엘과 프랑스 경찰력이 그들을 경호하고 있다. 여담으로 말리와의 축구 경기중 말리 관중들이 'Free Palestine!'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을 외치고 팔레스타인 국기와 말리 국기를 같이 흔들어 이스라엘 관중들과 실랑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8. 대중매체
- 검은 일요일(Black Sunday)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가 1975년에 출간한 소설로, 이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은 비행선을 몰고 다니면서 TV 촬영하는 조종사인데 원래 특수부대 헬리콥터 조종사였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전쟁 포로가 되어 고문을 당해 성불구자가 되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인생을 망친 미국 정부에 복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 손잡고 슈퍼볼 결승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비행선을 이용한 폭탄 테러를 계획하며 이를 알게 된 FBI 요원이 테러를 막으려는 이야기다. 소설은 그렇게 인기는 없었지만 평이 좋았고 1977년에 판권을 사서 존 프랑켄하이머가 감독하고 로버트 쇼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흥행은 별로 거두지 못했고 아랍권에서 반발이 거세 독일이나 일본은 수입사가 상영을 포기했다. 한국에서도 1981년 새해특선으로 디제스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려고 광고를 냈으나 아랍권의 반발[34]에 상영을 중단하고 11년이나 지난 1992년에 디제스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금세 막을 내렸다. 이미 1989년에 CIC 비디오로 상, 하로 나누어져 비디오로 원제목인 블랙 선데이로 냈다. 알다시피 토마스 해리스는 이후에 양들의 침묵으로 세계적 대박을 거두고 영화도 대박을 거둬들였다. 그래서인지 1992년에 한국에서도 뒤늦게 양들의 침묵 작가를 홍보하며 정발로 책이 나온 바 있었는데 원제인 블랙 선데이 그대로 나왔다. 또 여기서 다시 영감을 받아 톰 클랜시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슈퍼볼 경기장에 핵폭탄 테러를 한다는 내용과 레인보우 식스에서 올림픽 폐막식장에 테러 단체가 죽음의 바이러스를 살포한다는 내용을 소설로 집필했다.
- 뮌헨의 21시간(21 Hours at Munich)
TV 영화로, 1976년에 윌리엄 A 그레이엄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윌리엄 홀든, 셜리 나이트, 프랑코 네로, 앤서니 퀘일 출연. ABC에서 11월 7일에 첫 방영을 했으며, 에미상 2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 밤의 특공대(Sword of Gideon)
1984년 캐나다의 언론인 George Jonas 가 발표한 책 Vengeance 를 기반으로 제작된 캐나다 TV 영화. CTV에서 4시간 짜리 미니 시리즈로 만들었고 후에 미국 HBO에서도 방영되었다. 후술할 스필버그의 뮌헨과 같은 원작으로 만들어졌는데 내용은 보다 원작에 가깝다.[35]
- 뮌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 이스라엘의 신의 분노 보복 작전을 다룬다. 대표적으로 저격수들이 스코프 달린 H&K G3으로 원샷원킬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등 약간 잘못된 부분은 있으나 영화 전개 중에 참사의 진행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3년 2월 19일자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다.
- 9월 5일 (September 5)
사건 당시 올림픽을 중계한 ABC 스포츠 뉴스 취재진들을 다룬 2024년작 영화. #
[1] 서독 경찰 안톤 플리거바우어를 제외하고 이스라엘 측 희생자들만 기재되어 있다.[2] Connollystraße 31, 80809 München. 뮌헨 올림픽 공원 북부에 위치하며 뮌헨 공과대학교 올림픽 공원 캠퍼스에서 산책로 건너편에 위치한다.[3] 다리를 건너 공원 남부로 향하는 산책로가 아닌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Olympiazentrum 방향이다. 헷갈리면 BMW 본사 건물을 보고 따라가면 된다.[4] 이 참사가 터진 이후, 보안 비용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1976 몬트리올 올림픽부터 보안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하였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무려 그 비용이 10억 달러에 이르렀다.[5] 올림픽 선수단장이었던 슈뮤엘 랄킨만은 예외로, 그는 선수단의 숙소가 1층에 위치한 사실에 우려를 표했다. 랄킨은 올림픽 위원회 서독 대표 및 이스라엘 문화체육부 보안담당자 양쪽에 선수단 보안 강화를 요청했으나 모두 반려되었다.[6] 선수들은 서독에서 숙소 보호를 위한 비밀 요원을 파견했을 것으로 믿었다고 증언했다.[7]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의 범인 아부 니달이 상부에 보고도 협의도 안하고 자꾸 일을 크게 벌리자 파타에서 쫓아냈는데, 니달이 이를 잊지 않고 걸프 전쟁이 한창이던 1991년 사람을 보내 튀니지에서 암살당했다.[8] 팔레스타인 초대 대통령[9] 팔레스타인의 정당.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본거지로 삼고 있으며 세속주의를 표방한다. 현재 팔레스타인 집권 여당.[10] 레바논 접경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두 도시 이름. 1951년 이스라엘은 이 도시들에서 보안을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했다.[11] 아랍어로 예수를 의미하며 그의 코드네임으로 쓰였다. 본명은 루티프 아피프.[12] 협력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로, 검은 9월단은 충성심이 강한 하부 조직원들을 사야안이라 일컬었다.[13] 종전에는 미국 선수들로 알려졌으나 사건이 일어난 지 40여년 후 캐나다 수구 국가대표 선수들로 밝혀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국가대표 선수 데이비드 하트 등의 고백, 해당 내용이 반영된 벌거벗은 세계사[14] 캐나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월담을 도와준 사람들이 테러범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자신들 때문에 타국 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희생당한 선수들의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평생 PTSD에 시달렸다고 한다.[15] 전 현대 여자 배구단(현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감독으로, 슈퍼리그 시절 이은경, 정금선, 김송은, 김정순 등의 선수들을 이끌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16] 한국 선수단이 묵던 콘놀리가 15번지는 31번지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는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잠결에 일어난 전호관 코치가 4시 20분을 5시 20분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17] 이들은 이스라엘 선수단이 아니었다.[18] 심지어 참사가 일어난 지 20여년 후 로마노의 아내 일라나 로마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테러리스트들은 로마노의 시신에서 성기를 절단하고 희롱하며 모욕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고 한다.[19] 뮌헨 프린츠레겐텐슈트라세 도이체방크에서 무장강도인 드미트리 토도로프와 한스 게오르크 레멜마이어가 인질극과 총격전을 벌인 사건. 한스는 총격전 중 사망했으며 드미트리는 체포되어 22년형을 선고받고 1993년 만기출소했다.[20] 경찰들이 옥상에 잠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마침 방송국이 생중계를 위해 설치해 놓은 카메라가 이들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포착하여 뉴스에 송출해 버렸고 텔레비전으로 감시 중이던 테러리스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창밖을 확인한 후 정말로 경찰들이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서성이는 걸 알아챘다.[21] 참고로 이디 아민은 대놓고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문자 그대로 아돌프 히틀러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그나마 다행히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항의로 취소되었다.)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어이없게도 겨우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수상이 아민의 탄자니아 침공에 필요한 무기 지원을 거부해서였다고 한다. 뮌헨 참사로부터 4년 후 아민은 엔테베 하이재킹 사건을 배후 지원하며 사고를 치게 된다. 발트하임도 UN 사무총장에서 물러난 후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무렵에 악명 높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근교에서 근무한 전력이 드러나며 나치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전력이 탄로나 (비록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입국금지를 당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당했다. 둘의 언행은 모두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했던 셈이다.[22] 수류탄 폭발에서 살아남았지만 치료 중 사망했다.[23] 납치 도중 저항하다가 살해되었다.[24] 납치 도중 저항하다가 살해되었다.[25] 총격전 중 테러범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같은 희생자임에도 이스라엘 선수단이 아닌 서독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한동안 추모 행사에서도 배제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26]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만 기재[27] 27세 혹은 35세. 10대 시절 서독에서 살아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현장 지휘자.[28] 34세 혹은 35세. 이샤와 마찬가지로 고등 고육을 받고 독일어에 능숙했다. 현장 전술을 맡았다.[29] 독일 대학에서 1년 남짓 공부한 파타의 베테랑 조직원이었다.[30] 18세. 본 문서 맨 위 사진 속 인물. 서독에서 2년 동안 축구선수로 활동했다.[31] 독일에서 자랐다.[32] PLO의 한 관계자는 사건과 관련하여 익명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전 세계인들이 볼 수 있는 높이 솟은 산 위에 '팔레스타인'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것과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33] 세계적 이벤트라는 특성상 올림픽을 국가 발전의 선전, 더 나아가 국위 선양의 계기로 삼으려는 시도는 많았으며 상당수는 실제로 성공하기도 했다. 1960 로마 올림픽과 1964 도쿄 올림픽으로 이탈리아와 일본은 패전국의 이미지에서 탈피했고 특히 일본은 앞으로 20년간 있을 역대 최고 호황기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1988 서울 올림픽과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발휘되었다. 물론 실패한 올림픽도 많다. 올림픽의 저주 문서 참조.[34] 어느 나라인지 밝히지 않았고 아랍 어느 나라 대사관에서 항의가 있었다고만 했다.[35] 폭발물 담당 로버트의 경우 아지트에 홀로 들어가 카페트 밑과 싱크대 내부에 숨겨진 폭탄은 종이와 빵을 이용해 무력화시켰으나 방심한 상태로 냉장고 문을 열다가 그안에 장치된 폭탄이 터져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