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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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 | → | 제41~42대 야마사키 타쿠 | → | 제43대 고가 준이치로[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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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오노 반보쿠 | 3-5대 가와시마 쇼지로 | |||||
6·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대 후나다 나카 | 9·10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 ||||
11대 니카이도 스스무 | 12대 가네마루 신 | 13대 오부치 게이조 | 14대 야마사키 타쿠 | 15대 오시마 다다모리 | ||
16대 고무라 마사히코 | 17대 아소 다로 | 18대 스가 요시히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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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 2대 츠카다 주이치로 | 3대 미키 다케오 | 4대 후쿠다 다케오 | ||
5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 6대 후나다 나카 | 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 8대 후쿠다 다케오 | 9대 다나카 가쿠에이 | |
10대 가야 오키노리 | 11대 미키 다케오 | 12대 스토 히데오 | 13대 아카기 무네노리 | ||
14대 미즈타 미키오 | 15대 니시무라 나오미 | 16대 오히라 마사요시 | 17대 네모토 류타로 | 18대 미즈타 미키오 | |
19대 코사카 젠타로 | 20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1대 쿠라이시 타다오 | 22대 미즈타 미키오 | 23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 |
24대 마쓰노 라이조 | 25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6대 고모토 토시오 | 27대 에사키 마스미 | 28대 고모토 토시오 | |
29대 아베 신타로 | 30대 다나카 로쿠스케 | 31대 후지오 마사유키 | |||
32대 이토 마사요시 | 33대 와타나베 미치오 | 34대 무라타 케이지로 |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 36대 가토 무쓰키 | |
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 40대 가토 고이치 | 41대 야마사키 타쿠 | |
42대 이케다 유키히코 | 43대 가메이 시즈카 | 44대 아소 다로 | 45대 누카가 후쿠시로 | ||
46대 요사노 가오루 | 47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 48대 나카가와 쇼이치 |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50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
51대 호리 고스케 | 52대 이시바 시게루 | 53대 모테기 도시미쓰 | 54대 아마리 아키라 | ||
55대 다카이치 사나에 | 56대 이나다 도모미 | 57대 모테기 도시미쓰 | 58대 기시다 후미오 | 59대 시모무라 하쿠분 | |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 63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초대 기시 노부스케 | 2-3대 미키 다케오 | 4대 가와시마 쇼지로 | 5대 후쿠다 다케오 | ||
6대 가와시마 쇼지로 | 7대 마스타니 슈지 |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 9-10대 미키 다케오 | ||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 12대 후쿠다 다케오 |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 14대 호리 시게루 |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18대 우치다 쓰네오 |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 |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 |||
26대 가네마루 신 |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 28대 아베 신타로 |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 30대 오자와 이치로 | |
31대 오부치 게이조 | 32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34대 모리 요시로 |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 |
36대 가토 고이치 | 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노나카 히로무 | 39대 고가 마코토 | 40대 야마사키 타쿠 | |
41대 아베 신조 | 42대 타케베 쓰토무 |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 44대 아소 다로 | 45대 이부키 분메이 | |
46대 아소 다로 |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50대 이시바 시게루 | |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 54대 아마리 아키라 |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
56대 모리야마 히로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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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 2대 쿠라이시 타다오 | 3대 무라카미 이사무 | 4대 후쿠나가 겐지 | ||
5대 오자와 사에키 | 6대 야마무라 신지로 | 7대 에사키 마스미 | 8대 타케야마 유타로 | 9대 소노다 스나오 | |
10대 사사키 히데요 | 11대 나카노 시로 | 12대 사사키 히데요 | 13대 하세가와 시로 | ||
14대 소노다 스나오 | 15대 츠카하라 도시오 | 16대 가네마루 신 | 17대 하라다 겐 | 18대 후쿠다 하지메 | |
19대 에사키 마스미 | 20대 우노 소스케 | 21대 가이후 도시키 | 22대 아베 신타로 | ||
23대 미하라 아사오 | 24대 가네마루 신 | 25대 타자와 키치로 | |||
26대 타무라 하지메 | 27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 28대 에토 다카미 | 29대 모리시타 모토하루 | ||
30대 에토 다카미 | 31대 후지나미 다카오 | 32대 와타나베 고조 | |||
33대 오쿠다 게이와 | 34대 무라오카 가네조 | 35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36대 마스오카 히로유키 | 37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
38대 가와라 츠토무 | 39대 오자토 사다토시 | 40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 41대 야마사키 타쿠 | 42대 무라오카 가네조 | |
42대 무라오카 가네조 | 43대 호리 고스케 | ||||
44대 고가 마코토 | 45대 오시마 다다모리 | ||||
46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 48대 니카이 도시히로 | 49대 오시마 다다모리 | ||
50대 가와사키 지로 | 51대 아이사와 이치로 | 52대 기시다 후미오 | 53대 하마다 야스카즈 | 54대 가모시타 이치로 | |
55대 사토 쓰토무 | 56대 다케시타 와타루 | 57대 모리야마 히로시 | |||
58대 다카기 쓰요시 | 59대 하마다 야스카즈 | 60대 사카모토 데쓰시 |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 건설대신 (1948~2001) | ||||
초대 히토츠마츠 사다요시 |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 2·3대 마스타니 슈지 | 4대 마스다 가네시치 | 5대 스토 히데오 | |
6대 노다 우이치 | 7대 사토 에이사쿠 | 8-9대 토츠카 쿠이치로 | 10대 오자와 사에키 | 11-12대 타케야마 유타로 | |
13대 바바 모토하루 |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 14-15대 난조 도쿠오 | 16대 네모토 류타로 | ||
17대 엔도 사부로 | 18대 무라카미 이사무 | 19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2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 21-22대 고노 이치로 | |
23-24대 코야마 오사노리 | 25대 세토야마 미츠오 | 26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27-28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 ||
29대 호리 시게루 | 30대 츠보카와 신조 | 31대 네모토 류타로 | 32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 ||
33대 기무라 다케오 | 34대 가네마루 신 | 35대 가메오카 다카오 | 36대 오자와 타츠오 | 37대 카리야 타다오 | |
임시대리 미키 다케오 | 38대 다케시타 노보루 | 39대 주마 다츠이 | 40대 하세가와 시로 | 41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
42대 도카이 모토사부로 | 43대 와타나베 에이치 | ||||
44대 사이토 시게요시 | 45대 오치 이헤이 | 46대 우츠미 히데오 | 47대 미즈노 기요시 | 48대 키베 요시아키 | |
49대 에토 다카미 | 50대 아마노 고세이 | 51대 오치 이헤이 | 52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 임시대리 다케시타 노보루 | |
53대 노다 다케시 | 54대 하라다 쇼조 | 55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 56대 오츠카 유지 | ||
57대 야마사키 타쿠 | 58대 나카무라 기시로 | ||||
59대 이가라시 고조 |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 60대 모리모토 코지 | 61대 노사카 코겐 | 62대 모리 요시로 | |
62대 나카오 에이치 | 63대 가메이 시즈카 | 64대 가와라 츠토무 | 65대 세키야 가쓰쓰구 | 67-68대 나카야마 마사아키 | |
국토교통대신으로 계승 | |||||
67-68대 나카야마 마사아키 | 69대 오기 치카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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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57대 건설대신 | |
일본국 제47대 방위청장관 | |
<colbgcolor=#D7003A><colcolor=#ffffff> 일본국 제33-44대 중의원 의원 야마사키 타쿠 山崎拓 | Yamasaki Taku | |
출생 | 1936년 11월 21일 ([age(1936-11-21)]세) |
일본 제국 관동주 다롄시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시) | |
재임기간 | 제57대 건설대신 |
1991년 11월 5일 ~ 1992년 12월 12일 | |
제47대 방위청 장관 | |
1989년 6월 3일 ~ 1989년 8월 10일 |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 |
1984년 11월 1일 ~ 1985년 12월 28일 | |
학력 | 후쿠오카 교육 대학 부속 후쿠오카 중학교 (졸업) 후쿠오카 현립 슈우칸 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상학부 / 학사) |
소속 정당 | |
소속 파벌 | 근미래정치연구회 → 무파벌 |
지역구 | 후쿠오카 2구 |
의원 선수 | 12 (중) |
의원 대수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
약력 | 브리지스톤 직원 후쿠오카현의회 의원 내각관방부장관 자유민주당 부총재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자민당 헌법조사특별고문 총리 보좌관 자민당 외교조사 회장 일북 국교 정상화 추진 의원 연맹 회장 일본 소프트볼 협회 회장 근미래정치연구회 최고 고문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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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의 일각을 담당했으며, 고이즈미 내각에서 간사장과 부총재를 역임하며 고이즈미의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한 때 자민당 총재 후보로 불렸으나, 가토의 난 실패와 본인의 정치스캔들로 인해 몰락하여 결국 총리가 되지 못하고 정계 은퇴의 길을 걷고 말았다. 다만 은퇴 이후 근미래정치연구회 최고 고문에 임명되며 정치 원로로서는 대우받고 있다.
2. 생애
1936년 관동주 다롄시에서 만철조사부원으로 훗날 사가미여자대학장을 맡게 되는 야마사키 스스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마사키가 태어나던 날 그의 외할아버지인 야마구치 케이하치가 후쿠오카현 미이케군에서 탄광 개발에 성공하여 사위에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으로 개척의 개 (開) 자 대신 넓힐 척 (拓) 자를 붙여 탄광 개발과 만주 개척을 기념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가족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왔고 후쿠오카시에 정착해 그곳에서 자랐다. 소학교 3학년 때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쳐 척안이 되었으며 후쿠오카 중학교, 슈유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에서 5년간 일하고 후쿠오카현의 헤이와다이 야구장 앞에서 사오마이를 판매하는 매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타이어 제조 업체인 브리지스톤에 입사해 근무했다.
1967년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고, 1969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추천으로 구 후쿠오카 1구에 보수계 무소속으로 입후보 하지만 낙선했고, 1972년에는 당선,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비세습 국회의원이었다.
당선이후 방위전문 분야 의원인 방위족 의원으로 두각을 보였고,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서독 본에서 G8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을 때, 야마사키는 내각관방부장관 으로써 나카소네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개별적으로 정상회담을 진행했을 때 회담 내용을 모두 기록한 뒤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기자단에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외무성 관료의 도움없이 나카소네의 의향을 헤아려 국제 여론을 리드하는 내용으로 브리핑하도록 신경썼다.
이후 방위청장관, 건설대신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체급을 높였고, 1990년부터 타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세회 주도의 정치 운영을 비판하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 트리오를 결성해 당내 개혁을 이끌었다.
1995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 시대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취임했고, 1998년 와타나베 미치오 전 재무대신의 파벌이었던 정책과학연구소 로부터 독립해, 근미래정치연구회 (야마사키파)를 결성한다.
1999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에 총리자리를 노렸다. 비록 오부치 게이조에 밀려 낙선했으나 오부치 게이조, 가토 고이치에 이은 3위였고, 이 선거 이후 자민당 총재의 유력 후보로 주목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0년 자민당내 파벌을 둘러싸고 모리 요시로 총리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실패한 일명 가토의 난으로 인해 분란을 이끌었던 굉지회 회장 가토 고이치와 함께 정치생명에 큰 위기가 닥쳤지만, 많은 이반자가 발생하여 파벌 자체가 분열했던 가토와 달리 야마사키는 이탈자가 많지 않아 정치적 영향력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자민당 내에서도 야마사키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여 복권에 성공하게 된다.
2001년 YKK의 일원 중 하나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내각이 성립하면서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된다. 야마사키는 당내 기반이 약한 고이즈미를 반대파로 부터 지키는 역할과 외교 경험이 부족한 고이즈미의 보좌역으로 활약했다.
그가 자민당 간사장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장관,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며, 9.11 테러 당시 여3당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 9.11 사건 긴급대책협의회의 좌장으로 자위대법 개정에 대해 협의하는 등 외교·안전보장 정책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야마사키는 고이즈미의 후임 총재 및 차기 총리 후보로 물망에 올랐고 2003년 9월 자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그해 11월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애인이 주간지에 야마사키의 성추문 사실을 폭로하자 논란이 일어났고, 결국 선거에서 낙선하고 부총재 자리에서도 사임했다.[3]
낙선 이후 야마사키는 2004년 자민당 헌법조사특별고문 및 총리보좌관에 취임했다. 2005년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다시 의원직을 되찾았으며 우정민영화법안을 심의하는 특별위원회 간사가 되어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민영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우정 해산 이후 고이즈미와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다.
같은해 자민당 안보조사회장으로 취임하며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지한~친중파 의원인 가토 고이치, 후쿠다 야스오, 고가 마코토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2006년 고이즈미의 뒤를 이어 정권을 맡은 아베 신조와는 대북정책을 두고 자주 대립했다.
2007년 아베 내각이 퇴진하자 포스트 아베에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했고, 이후 자민당 외교조사 회장직에 취임하면서 외교와 안보정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후쿠다 내각에 이어 아소 내각에서도 재임되었지만,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 고이치와 함께 신당 창당을 준비하며 가메이 시즈카, 오자와 이치로 등과 회동을 가졌으나 신당 창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45회 중원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고 자민당이 대패하는 선거 상황 속에서 본인의 파벌인 근미래정치연구회 소속 의원들이 대거 낙선[4]하고 파벌 회장인 야마사키 본인도 낙선하는 등 당 내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지만[5] 파벌의 존속을 이유로 201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2010년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비례구 입후보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정년제도에 의한 나이제한으로 공인되지 않았다. 동년 3월에는 국민신당 대표인 가메이 시즈카로부터 입당 및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참여 조건을 요청 받았으나 야마사키 본인이 즉시 거절했고,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불출마 및 정계은퇴를 표명했다.
이후 근미래정치연구회 회장직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으며, 본인은 파벌 최고 고문직에 올랐다.
2016년 7월 YKK를 회고하는 자서전 YKK 비록을 출판했으며, 2개월 뒤 가토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가토의 난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던 내가 나빴다.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사카 10구 선거구에서 현역 의원이자 자민당 후보인 오쿠마 가즈히데가 입후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헌민주당 쓰지모토 기요미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야마사키는 유세현장에서 지역구는 쓰지모토, 비례구는 자민당에 투표해 달라며 오사카 지역민들의 일본유신회 견제를 호소했지만, 결과는 쓰지모토&오쿠마의 동반낙선(...) 이로 인해 당 규율 위반으로 당원권 정지 1년이라는 처분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6]
이후 근미래정치연구회의 최고 고문을 파벌 해체 직전인 2024년까지 맡았다.
3. 대북 외교
야마사키는 한반도의 비핵화·납치 문제 해결에 의한 일북 국교 정상화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 과제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압력 일변도의 외교자세가 아닌 제재보다 대화를 중시하고 북한의 정부 관계자와도 자주 회담을 해왔다.또한 2004년 4월 1일 히라사와 가쓰에이와 함께 중국을 극비로 방문해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해결 관련해 북한 고위층과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야마사키의 행동은 대북 외교 루트를 일본 - 북한 간 루트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정부의 외교 방침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문제시되었고 일본인 납치 피해단체 등에서는 야마사키가 납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2006년 고이즈미가 물러나고 아베가 후임 총리직에 유력시 되자 야마사키는 자민당 내 온건파인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며 아베를 견제했고 아베 내각의 대북 정책을 놓고 아베의 외교가 압력에 경도되어 있어 일본을 고립시키고 국익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아베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야마사키의 북일 정상화 추진을 비난하자 발언의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으나 아베는 "대화 노선에서 납치 문제가 진전하지 않았던 것을 학습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해 발언의 철회와 사과를 거부했다.
2009년 3월 18일, 북한이 일본을 향한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개시 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소 다로는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요격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이에 대해 야마사키는 미사일 발사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대화밖에 없고,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며 중국과 연계한 대화 노선을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7 - 1972 | 정계 입문 |
| 1972 - | 입당 정계은퇴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7 | 제6회 통일지방선거 | 후쿠오카현의회 사라베정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당선 (?위) | 초선[7]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후쿠오카 1구 | 46,929 (7.91%) | 낙선 (7위)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0,929 (11.64%) | 당선 (4위) | 초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4,298 (11.86%) | 재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0,975 (14.62%) | 당선 (3위) | 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4,513 (16.65%) | 당선 (1위) | 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2,419 (16.51%) | 당선 (3위) | 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88,279 (20.05%) | 당선 (1위) | 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0,388 (15.51%) | 당선 (3위) | 7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60,585 (16.61%) | 당선 (2위) | 8선[8]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후쿠오카 2구 | 98,095 (49.24%) | 당선 (1위) | 9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3,234 (44.88%) | 10선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4,565 (44.02%) | 낙선 (2위) | |||
2005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 | 96,174 (50.22%) | 당선 (1위) | 11선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6,702 (52.35%) | 12선 | |||
2009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270 (36.94%) | 낙선 (2위) |
6. 여담
- 취미는 유도, 야구, 바둑, 소프트볼 이며, 후쿠오카 현지 사무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소프트볼팀을 결성해 정기적으로 경기를 치르고 있다.
- 존경하는 인물은 제32대 총리대신이자 A급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진 히로타 고키이다. 단, 그의 행보를 보았을때 극단 우파적 성향을 띄여서 존경하는 것이 아닌 야마사키의 모교인 슈우칸 고등학교의 대선배여서 존경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 위에서도 서술 했듯이 외교적으로는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를 비롯한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지만 안보적으로는 헌법9조 개정을 오랫동안 촉구하고 있다.
[A] 의원직 상실[A] 의원직 상실[3] 그러나 이 선거에서 야마사키를 꺾고 당선된 민주당 고가 준이치로 후보는 학력위조 의혹으로 민주당을 탈당했으며, 결국 의원직에 당선된지 1년도 안 돼서 사임하게 된다.[4] 선거 전 37명 -> 선거후 16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5] 이때 소속의원들의 격감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파벌 사무실을 야마사키의 개인 사무실로 옮겨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열약했다.[6] 사실 야마사키가 쓰지모토를 지지한 이유는 쓰지모토가 주최한 정치 자금 규정법에 근거하는 정치 파티인 정치 활동 20년에, 감사와 비약의 모임 in 도쿄라는 파티에 참가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 이를 봤을때 이념적 성향보다 개인적 인연으로 지지한것에 더 가까운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7] 1969.12.7 의원직 사퇴 (중의원 선거 출마)[8]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