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서삼진(徐三辰) |
생몰 | 1890년 10월 15일 ~ 1924년 2월 1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
사망지 | 경상북도 영덕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서삼진은 1890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3월 18일 오후 1시에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그는 자전거를 타고 시위 군중 사이를 왕래하면서 그들에게 끝까지 투쟁할 것을 호소했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했고,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갔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그는 시위대와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소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렸으며,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이후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촉 찬송가를 부르면서 주재소 안에 걸려 있떤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았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서삼진은 200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행진했다. 이때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가 인근 평해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지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서삼진이 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시위대는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뒤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파괴했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고 위협하자, 그는 시위대와 함께 이들과 맞서려 했다. 그러나 정규하의 만류로 그만두고 오후 6시경에 자진 해산했으며, 이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5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출소 직후인 1924년 2월 10일에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서삼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