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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년 10월 17일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 | |
사망 | 1950년? (향년 63~64세) |
사망지 미상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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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규하는 1886년 10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무렵 병곡면 송천동교회의 장로였다. 그해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병곡면에서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이후 그는 남효직, 남계병, 남계병, 남교문, 장성열, 박의락(朴義洛) 등을 설득해 거사에 가담시켰으며, 성내동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계획하고 각자가 분담하여 부근의 병곡면·축산면·창수면일대의 기독교도와 이곳의 주요 성씨인 권(權)·박(朴)·남(南)·백(白)·이(李)등의 5성의 향반 및 지방 유지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참여약속을 받았다.
3월 18일 성내동 시장에 2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에 그는 독립쟁취에 대한 연설을 하고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시장을 행진했다. 이때 영해에 있던 경찰주재소에서 순사가 출동하여 제지했으나 시위군중은 오히려 이들을 구타하고 그 제복·제모와 휴대하고 있던 칼을 빼앗으며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하여 주재소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정규하 등이 앞장서서 투석과 곤봉으로 주재소안의 기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이에 영덕경찰서에서 서장과 순사 4명이 급파되어 이를 제지했으나 역시 본서로 쫓겨나고 말았다.
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공립심상학교·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는데 앞장섰던 그는 다시 500여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병곡면 병곡동으로 행진하여 이곳의 주재소와 면사무소의 건물과 집기류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했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는 희생이 커질 것을 우려해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고, 결국 시위대는 오후 6시경에 자진 해산했다.
이후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공문서 훼기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덕군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피신하던 중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규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