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1:05

문성초

성명 문성초(文星超)
생몰 1887년 12월 30일 ~ 1919년 4월 5일
출생지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서동리
(현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
사망지 경상남도 울산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성초는 1887년 12월 30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서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울산군내 비밀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 광복을 꾀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 기금으로 헌납했다. 그리고 4월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윽고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이 이끄는 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 동리, 남외리, 산전리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해 여러 사람들이 검거되자 해산했다. 문성초는 이문조(李文祚), 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한 뒤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했다.

4월 5일 오후 3시경, 군중은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 지역을 행진하다가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군중의 숫자가 천여 명에 이르자,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군중과 대치했다. 이후 이문조 등 9명이 체포되자, 문성초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에 일본 경찰, 헌병대는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문성초는 선두에 있던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문성초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