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3:36

박병강

성명 박병강(朴炳彊)
이명 박경하(朴景夏), 박경식(朴景植)
경산(景山)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79년 11월 23일 ~ 1945년 2월 5일
출생지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병천동[1]
사망지 평안북도 박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병강은 1879년 11월 23일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병천동에서 부친 박동근(朴東根)과 모친 안동 김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유인석이 집필한 <인계박공행상(麟溪朴公行狀)>에 따르면, 박천군에 살던 박씨 문중은 집현전 부제학을 역임한 선조를 배출한 바 있는 전통적인 문인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병강의 증조, 조부, 부친이 모두 관직에 나가지 못해서 박병강이 출생하던 시기엔 이미 가세가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박동근은 박천군 일대의 유학자로서 명성이 있었고 유인석과 친분이 있었다. 유인석은 박동근의 행장을 써줬고 스스로 "박동근 형제 및 부자와 교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병강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한학을 교육받았고 1902년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유인석이 주도한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 1906년경에는 중국 랴오둥으로 망명하여 유인석의 휘하에서 한국과 랴오둥을 오가며 연락 임무를 맡아 서신과 정보를 전달했다. 유인석은 친우 백경원(白景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경하가 천리의 고생을 무릅쓰고 큰 눈을 맞으면서 온 것을 보면 진정한 의기가 보인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1908년 7월 유인석이 연해주로 망명했을 때, 박병강은 60여 명의 문인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유인석과 함께 연해주에 있지 않고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한인의 수전사업과 한인단체 조직을 추진했다. 1913년, 유인석은 박병강에게 서신을 보내 그가 동북 일대에서 조직한 농사 활동을 칭찬하고 그가 추진하고 전개하던 단회 조직에도 찬성했다.
랴오둥 평야에서 농사를 짓고 이미 좋은 결과가 있으니 정말 기쁘다. 단회에 대한 현명한 말씀에도 매우 동의한다. 요즘에 기회가 별로 없고,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단회에 관한 알먼 제대로 빨리 진행할 수 있게 계획하라.

박병강은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을 하는 유인석을 위해 자금 마련과 관련된 활동도 수행했다. 유인석은 그에게 연이어 편지를 보내 자금이 부족해 무기 구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실정을 토로하며 자금을 꼭 마련해줄 것을 청했다. 또한 동아일보 1930년 11월 3일자 <안중근 공범 박경식의 내력>에 따르면,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을 때 박병강은 암살 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고 6천원의 자금을 송달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안중근이 의병참모총장의 신분으로 유인석의 지휘를 받고 있었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전 연해주로 가서 유인석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재판을 받던 안중근이 암살로 사용한 총과 100원 자금을 이석산(유인석의 문인 이진룡)에게 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볼 때, 박병강이 안중근에게 자금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1915년 유인석이 세상을 떠난 후, 박병강은 중국 관내 지역에서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동북 일대를 떠나 관내로 들어간 까닭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925년 초 저장성 황옌현에 거주하는 강지동에게 증여한 시에서 중한 문화의 동질성과 양국의 관계가 순망치한과 같다고 강조한 걸 볼 때 중국 정치인들과 힘을 합쳐 일제에 저항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푸젠성 충안현 지방지에 따르면, 박병강은 한국에서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3.1 운동에 가담했음을 입증할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박병강은 중국 관내에서 주로 광저우에 머물렀다. 김창숙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광저우에서 박병강과 만나 현지의 상황을 물었고 박병강과 같은 여관에 묵었다고 한다. 박병강은 김창숙의 안전을 특별히 신경썼고 밀정이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고 중국 경찰의 보호를 신청하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박병강은 광저우에 머무는 동안 중국 정치계와 상업계, 그리고 문화계의 우호인사와 친분을 맺어 그들부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김창숙은 박병강과 친분이 있던 임복성(林福成)과 용택후(龍澤厚) 등은 모두 공교(孔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고 한다. 그 중 임복성은 갑부로, 자금을 내서 중한의 혁명을 선전하는 <사민보(四民報)>를 창간해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박병강은 김창숙, 박은식 등과 함께 이 신문의 편집을 담당하여 매일 3만여 부를 간행하고 2천 부를 한국에 우편으로 보냈다.

1921년 10월 이후 사민보 편집장에서 물러난 그는 1922년 푸젠성에서 거주지를 마련하고 중국 각지에서 배일 선전과 한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연설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8년간 중국 수십개의 성과 시를 전전하며 연설했다. 연설의 내용은 주로 조선망국의 참상, 그리고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압박과 유린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1928년 5월 9일 쉬저우 우후(蕪湖)에서 열린 5·9국치기념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자 망국노다. 국가가 망하기 전에 잘 먹고 좋은 옷을 입었는데 국가가 망한 후에 재산을 모두 일본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국가의 농공상 등 산업도 다 소멸하였다.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처지가 금수만도 못하다."

또한 그는 중국인들에게 한인의 전철을 밟지 말고 일치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제안했다.
중국이 망하면 우리 한인보다 더욱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재산과 목숨까지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중국인 동포들이 빨리 깨닫고 함께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한국의 전철을 밟지 말고, 한인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일제 제국주의에 끝까지 저항할 결심을 맹세하자."

그의 연설을 보도한 중국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는 매우 뛰어난 연설 솜씨를 지녔다고 한다. 그는 다른 연설자보다 “마음과 어조가 격앙되고 정기가 매우 충만한 모양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연설할 때 그는 항상 가슴을 두드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함으로써 청중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또한 박병강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그리고 회의 주제에 맞춰 자신의 연설을 청중으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국민당이 주최한 집회에서 삼민주의쑨원의 세계적인 혁명 정신을 칭찬하는 식으로 쑨원의 대한정책을 계승하여 한인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반러대회에서는 '러시아 적색의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중국 신문들은 현장에서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이 ‘박수 소리가 우레와 같다’, ‘사람들이 모두 다 통곡했다’, ‘청중 대부분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청중은 머리털이 위로 치솟을 만큼 분노하였다’, ‘현장에서 배일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등 크게 호응했다고 보도했다.

자연히 일제는 그를 위험분자로 인식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박병강은 이러한 일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창사, 지난, 쉬저우 증 중국 각지를 전전하면서도 선전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0년 결국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그가 어떻게 체포되어 국내에서 압송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동아일보 11월 27일 <안중근 공범 박병강>이라는 기사에는 그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었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기소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그를 재판에 소환하지 못하고 대신 박천군으로 압송해 연금시켰다.

박천으로 압송되어 감시를 받던 기간 중에도 박병강은 1930년대 50대의 나이로는 드물게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다시 일제총독부의 조사를 받은 기록이 있다. 그의 과거 활동상의 이념적 좌표나, 다른 조사 대상들의 연령(통상 20대 초중반의 청년층이 많음)을 감안할 때 어떤 과정으로 혐의를 입게 되었는지 다소 의문이 되는 면이 있으며, 실제 결과는 불기소처분으로 나왔다.

유족을 통해 전해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이후 다시 중국 방면으로 넘어가 1930년대 후반 중국 칭다오에서 7년여 옥살이를 하였으며, 만기출소인지 가석방인지는 모르나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출소해 평북 박천의 자택에서 해방 6개월 전 사망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 구전되는 1930년대 후반 그의 활동상이나 최후에 관해서는 국내에 전해져내려오는 기록이 없어 아직 정확히 사실여부 확인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망 당시에는 불령선인인 그의 장례를 크게 치르지 못했으나, 1년 후 기일에는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모여 크게 장례를 하였으며, 이에 북적이고 소란한 가택으로 놀란 소련군이 와서 무슨 일인지 따져 묻다가 사정을 알아듣고는 돌아갔다는 일화가 집안에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박병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봉상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동아일보 1930년 11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병강은 유인석의 제자가 되기 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서 의병을 조직한 경험이 있었고, 이것이 실패한 후 각지를 전전하다 유인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는 이 기사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