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문박(文樸) |
자 | 장지(章之) |
호 | 수봉(壽峰)·수백당(守白堂)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880년 8월 3일 |
경상도 대구도호부 인흥면 본리동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2] 397번지[3]) | |
사망 | 1930년 12월 18일[4] |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함박산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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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문석봉(文錫鳳, 본명 문봉각文鳳珏)은 9촌 삼종숙(三從叔)이며, 문태갑 전 국회의원과 문희갑 전 대구광역시장은 모두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1880년 8월 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인흥면 본리동의 남평문씨본리세거지[5](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 397번지)에서 아버지 문봉성(文鳳成, 1854 ~ 1922. 8. 8)과 어머니 현풍 곽씨(? ~ ?. 2. 26)[6]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손정은(孫廷誾)과 이종기(李鍾杞)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그는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로서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1930년 12월 18일 그가 별세하기 이전까지 13년간 전국 각지를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연금을 수 차례 보내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개인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을 임시정부 파견원을 통해 전달하기도 했고, 중국에서 책을 전달받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 후원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2월 27일 이른 아침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 나카지마, 김모씨가 들이닥쳐 문영박의 집을 4시간 가량 수색했다.[7] 이어 그와 그의 장남 문원만(文元萬, 1897 ~ 1964. 11. 3)[8]을 체포, 연행해 28일간 대구경찰서에 구금했다. 그러나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증거는 끝내 확보되지 못해 석방 조치를 받았다. 그 뒤에도 극비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고자 하던 중 1930년 12월 18일 별세했다.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문영박의 재정적 지원을 사례하고 그 자손들을 위로 및 격려하기 위해 1931년 이교재(李敎載)를 경상도 책임자로 임명한 뒤 비밀리에 파견해 문영박을 애도하는 추조문(追弔文)과 특발문(特發文)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교재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끝내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집 천장에 숨겨 두었는데, 8.15 광복 후인 1963년 이교재의 후손들이 집 수리를 위해 천장을 뜯어내다가 우연히 이 문서를 발견해냈고, 그 뒤 비로소 문영박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당시 보냈던 추조문에는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존칭이 사용되었다. 특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동양평화와 유신(維新)을 크게 내세워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고인(故人)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 주어 무궁한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
한편, 그는 당시 자택에 한문으로 된 서적만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었고, 자신의 장서목록인 인수문고목록(仁壽文庫目錄)을 편찬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크게 기여했다. 현재도 문영박이 학문을 닦던 '광거당(廣居堂)'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고가 남아 있다.고인(故人)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 주어 무궁한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저서로 《수봉유고(壽峰遺稿)》와 《산남징신록(山南徵信錄)》 등의 초고를 남겼는데, 《수봉유고》의 경우, 이후 간행되어 차남 문강만(文罡萬, 1906 ~ 1990. 10. 13)[9]이 발문(跋文)을 쓴 석판본(石版本) 6권 3책이 안동대학교 도서관 및 한국국학진흥원 도서관에 소장돼 있고,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출판한 영인본(影印本) 3책이 대구광역시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 의안공파-이곡-참의공-의곡파 31세 영(永) 항렬.[2] 마을 일대가 남평문씨본리세거지라는 이름으로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돼 있다.[3] 이 지번에 현재도 그의 생가인 수봉고택이 남아 있다.[4]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12월 19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문영박의 7대조 문재징(文在徵, 이명 문재철(文在徹), 1686 ~ 1750)이 1700년대에 경상도 대구도호부 달서면 성당동(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에 입향해 정착했다가, 문영박의 조부 문달규(文達奎, 1832 ~ 1905. 8. 10)가 분가해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6] 곽주상(郭柱祥)의 딸이다.[7]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이를 다루면서 3월 1일을 앞두고 예비검속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 기사[8] 족보명은 문시채(文峕采).[9] 족보명 문진채(文晋采). 문태갑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