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7년 |
함경남도 리원군 서면 송노대리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이명 | 강양오(姜揚吾)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양오는 1875년 7월 3일 함경남도 리원군 서면 송노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했고, 1911년에 권업회(勸業會) 회원, 1912년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3년 6월 권업회 재무 겸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14년 8월 29일 이동휘, 김립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국에 대해 협의했다. 1917년 9월 신한촌 민회 평의원, 12월 한민회 노동부원으로 활동했으며, 1918년 10월에 전로한족대회(全露韓族大會)에서 극동국민대표회에 파견할 예비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9년 1월 신한촌 민회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며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한국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1919년 5월 청년동지회를 개최하고 총기 구입을 결의했다.1919년 7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협회 기관지인 <한인신보(韓人新報)> 재무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재정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11월 20일에 신한촌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서 상하이 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지부를 설치하여 지부장(支部長)이 되었고, 12월에는 한인민회(韓人民會) 회장에 선출되어 1920년 2월 친일인사 2명을 처단했다. 1920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지부장으로 선출되어 지부 사무 집행과 무기 구입 등을 담당했다.
그러나 1920년 4월 4일~5일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한인촌을 습격하여 수백 명을 학살하자, 강양오는 파르티잔스크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적군과 교류하며 마을을 습격하는 마적을 막기 위해 자위단인 사포를 조직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김영학, 조장원, 조영진 등과 함께 공아단(共啞團)을 결성했고, 1921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거류민회 신한촌 의사원, 11월 전로재주조선인교육회발기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22년 1월 전로재주조선인교육회를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로 개칭한 후 재무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8월 영고탑 일대에서 적기단(赤旗團) 선전부장을 맡아 공산주의 사상을 홍보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강양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