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4:44

민제호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소운(少雲)·우명(禹明)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890년 3월 24일[2]
한성부 동부 연화방 연지동계 호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3]
사망 1932년[4] 12월 14일
중화민국 항저우시
묘소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항저우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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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민필호는 그의 막내 동생이다.

2. 생애

민제호는 1890년 3월 24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연지동계 호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남동)에서 의정부 찬정(贊政)을 역임한 아버지 민치헌(閔致憲, 1844 ~ 1903. 8. 27)과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함평 이씨 이헌경(李憲卿) 사이의 4남 7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큰형은 시종원 시종을 지낸 민준호(閔濬鎬)이고, 막내 동생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민필호이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인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의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는 10대에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몇년 간 학업을 수행했고, 졸업 후 한성영어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다가 한일병합이 성립되자, 그는 반일 감정을 품었으며 장사를 핑계로 1913년 11월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착수했다.

민제호는 신규식의 초대를 받고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고, 상하이 대한민국청년단에 가입해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의정원이 개원되자, 그는 이동녕, 이시영, 여운형 등과 함께 제2차 의정원회의에 선출되어 1929년까지 활동했다. 또한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국내 각 지방의 구급의연금 모집위원을 선출했을 때, 그는 여운형, 박희선(朴熙善)과 함께 경기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0년 8월에 출범한 대한적십자회에 가담하여 회원 모집 활동에 종사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참사와 외사국장 등을 역임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귀국을 주선해 그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형사들과 총격전을 벌이도록 뒷받침했으며,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의 경기도 의원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구국에 필요한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 가담했다. 또한 상하이 교민단의 서구위원(西歐委員)을 맡아 임시정부 외곽단체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의 의거가 있은 뒤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략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인사들을 체포하려 들자, 그들의 추적을 피해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항일 운동에 참여했지만 1932년 12월 14일 병에 걸려 항저우의 자취방에서 사망했다. 향년 43세.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한민국이 완전 독립할 때까지는 어떠한 난관이 닥친다 해도 이를 극복, 합심하여 계속적인 투쟁이 있을 뿐이로다. 독립운동에는 가시밭길 같은 험난한 장애가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니 이 또한 인내와 사명감으로 이기고 새로운 보람을 찾아 이 길로 매진하길 빌 뿐이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민제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삼방파 27세 호(鎬) 항렬.[2] 1934년 간행된 용의조선인명부에는 3월 14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용의조선인명부에 그의 출생지가 경성부 원남동 95번지로 등재되어 있다.[4] 여흥민씨세보에는 1933년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