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광
성명 | 박광(朴洸) |
이명 | 박황(朴況), 박근호(朴根浩) |
생몰 | 1882년 6월 16일 ~ 1970년 3월 4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고령군 |
사망지 | 경상북도 고령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광은 1882년 6월 16일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안희제, 윤세복, 김동삼, 신팔균 등 8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했다.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8년 문상직(文相直), 이남기(李南基) 등과 함께 단둥현에서 곡물무역상 신동상회(信東商會)를 경영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독립운동가를 은닉시키고 여비를 제공했다.
또한 박광은 신규식, 조성환, 박은식 등을 통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호놀룰루 교포들의 기관지인 <신한민보>, <국민보>를 입수해 국내에 배포했으며, 1919년에는 영남과 호서지방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온 김창숙, 박돈서(朴敦緖)에게 여행 편의를 제공하고 국내외의 연락을 맡아 활동했다.
1919년 7월, 박광은 임시정부 통신원 황대벽(黃大闢)으로부터 고유문(告諭文), 독립신문, 임시정부 각원개조서(閣員改造書) 등의 문서를 교부받고 송재기로 하여금 이 문서들을 국내에 배포하게 했다. 이후 그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3년 11월에는 김원봉으로부터 무기와 신임장을 인수받고 강홍열(姜弘烈), 이상쾌(李相快)에게 교부해 그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게 했다.
이후 일제의 수사가 심해지자 중국 관내로 망명했으며, 8.15 해방 후에는 귀국해 고향에서 지내다가 1970년 3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의병장, 박광
성명 | 박광(朴匡) |
생몰 | ? ~ 1908년 1월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박광은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여기에 가담해 군위, 의흥 일대에서 모병 활동을 수행했으며, 청송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이후 정용기가 1907년 9월 1일에 입암에서 전사하자, 박광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08년 1월 광천읍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회생이 어렵게 되자 이세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자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박광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