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22 09:39:27

경현수

성명 경현수(慶賢秀)
본관 청주 경씨
생몰 1861년 1월 28일 ~ 1928년 10월 9일
출생지 경기도 적성현 현내면 읍내리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1]
사망지 경기도 연천군[2]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경현수는 1861년 1월 28일 경기도 적성현 현내면 읍내리(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봄 전국의 뜻 있는 유림들이 조직한 13도 유약소(儒約所)에 가담하여 고종 황제에게 상소하고 대신들에게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권고하는 등 여론 조성에 앞장섰으며, 김동필과 이봉학(李鳳學)·강원형, 강윤희 등과 함께 궁문 앞에 나가 글을 올려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지금 이 5조약이라는 것은 한 나라를 영영 망하게 하는 기틀입니다. 더구나, 황상께서 불가(不可)라 하고, 정부 주무의 참정 대신이 불가라 하고, 국민이 모두 불가라 하는데, 가(可)자를 쓰는 대신을 어찌 폐하의 신하라 하고 정부 대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외교를 맡은 주무 대신으로서 압제에 의하여서라고는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인장을 찍었으니 어찌 매국의 죄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외의 여러 대신도 처음부터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오다가 오늘의 화를 조성하였고, 반역의 행동이 결국은 가(可)자를 쓰는 자리에서 드러났으니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열성조(列聖朝)와 황상폐하의 역신(逆臣)이오니 국법이 있는데 어찌 법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만일 그대로 둔다면 3천리 강토가 다시 대한의 소유가 될 수 없사오니, 폐하는 장차 종묘 사직을 어느 곳에 두시렵니까. 억만 백성을 뉘 집으로 보내어 노예를 만들려는 것입니까. (후략)

또한 그들은 각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조약의 무효를 위한 투쟁을 벌이려 계획했지만 일본군의 방해로 뜻대로 되지 않자 평안도 용천을 중심으로 의병 운동을 전개하던 전덕원과 합세했다. 이후 1908년 13도 창의군에 가담해 총대장 허위의 부대에 종군했으며, 그해 2월 허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혁명단(淸國革命團)에 군사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었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허위가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지자, 그는 고향에 은거했고 1928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경현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200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청주 경씨 집성촌이다.[2] 적성면은 1945년 9월에서야 경기도 파주군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