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8월 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1]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남용식(南容式) |
이명 | 남광풍(南光豊)·남용식(南容植)·남일성(南日星)[2] |
본관 | 영양 남씨[3] |
출생 | 1909년[4] 7월 2일 |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5] | |
사망 | 1956년 10월 20일 |
강원도 울진군 (현 경상북도 울진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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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남석순은 그의 본생가쪽 사촌 동생이며[6], 남원수는 그의 6촌 형 남순하(南舜河)의 손자로 남왈성에게는 삼종손(三從孫)이 된다.
2. 생애
남왈성은 1909년 7월 2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남만년(南萬䄵)과 어머니 신안 주씨 주경욱(朱景旭)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고향 울진의 제동학교(濟東學校)를 졸업하였다.#1927년 강원도 울진에서 울진청년회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신간회 울진지회에도 합류하여 재정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이우정 등과 함께 울진청년회를 울진청년동매로 개편하였고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31년 울진읍 연지리 연호정에서 이우정 등의 독립운동가 동료들과 함께 울진공작당을 창립하고 양양, 강릉, 삼척 등지에서 활동했다. 동년 8월 15일 제2차 총회에 참여하였고 제3차 총회에서는 극동공산주의자동맹으로 명칭을 바구었다. 남왈성은 양양 등지에서 각 지역의 책임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라는 임무를 맡고 이를 수행하였다.
1932년 11월 진기열 등의 울진적색농민조합 소속 동료들과 함께 선언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1933년 3월 울진농민조합 조직선전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울진면 평정리에서 야학을 운영하였으며 함경남도 함흥부에서는 지하조직인 함흥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던 1934년 8월 울진적색농민조합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35년 7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같은 달 30일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9년 1월 30일에 출옥하였다.
그 뒤 1943년 12월 울진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이후 울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6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남왈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울진 농민조합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2]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남일(日)성으로 기재되어 있다.[3] 송정공파(松亭公派)-울진 정림(井林) 문중 16대손 용(容) 항렬. 영양 남씨 24세.[4] 남씨대동보 2권 대광공후 송정공파(영양 본관) 494쪽에는 190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5]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복이·남석순·남원수·남왈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6] 남석순의 아버지 남백년(南百䄵)은 남왈성의 아버지 남만년(南萬䄵)의 친동생인데, 남만년이 11촌뻘되는 족숙 남국영(南國永)에게 입양되면서 남석순과 남왈성은 14촌 지간으로 멀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