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고묘주(高昴柱) |
본관 | 제주 고씨[1]# |
출생 | 1897년 11월 24일 |
경상남도 진해군 서면 일암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 | |
사망 | 1919년 4월 3일 |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사동리 | |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8의사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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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11대손이며,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高從厚)의 10대손이다. 독립유공자 고규주는 그의 둘째 형이다.
2. 생애
고앙주는 1897년 11월 24일 경상남도 진해군 서면 일암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리)에서 아버지 고제칠(高濟七, 1855 ~ ?. 10 .1)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 ~ ?. 5. 26) 변덕윤(卞德潤)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전라도 광주목에 세거해왔으나, 6대조 고한창(高漢昌)이 동생 고한현(高漢賢)·고한일(高漢日)과 함께 10대조 고종후(高從厚)[2]의 묘소가 있던 경상도 진주목 양전면 발산리(현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로 이주해왔고, 뒤에 고한창이 재차 진해현 서면 일암리로 이주해와서 7대째 세거하게 되었다.[3]1919년 3월 28일 창원군 진동면 고현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후 경찰의 체포를 피해 피신한 변상태(卞相泰)·권영대·권태용 등은 청년들을 규합하고 4월 3일에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의 연합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4월 1일 변우범(卞又範)의 집에 모여 회의를 연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때 이들의 계획을 전해들은 고앙주는 적극 찬성했고 4월 3일 오전 9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 집결했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고앙주는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행진했다. 이때 진동면민들도 가세하면서 군중의 숫자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오후 2시경,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명이 군중과 충돌했다. 이후 양측의 피비린내나는 육박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 결과 고앙주를 비롯한 8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22명이 부상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고앙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장흥백파-효열공파 30세 주(柱) 항렬.[2]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으로 참전했다가 순절하였다. 그래서 묘소가 진주에 있었던 것이다.[3] 첫째 남동생 고한현은 이때 거제현(현 거제시)으로 이주했고, 둘째 남동생 고한일은 진주목(현 진주시) 문산면으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