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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용(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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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권태용(權泰用, 權泰瑢)
이원(而元)
출생 1885년 10월 8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1]
사망 1939년 6월 14일 (향년 53세)
중화민국 충칭
본관 안동 권씨[2]
가족 아버지 권병의, 어머니 김해 김씨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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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생애

1885년 10월 8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아버지 권병의(權秉儀)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병오(金炳五)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말 변상태(卞相泰), 권영대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으로부터 피신한 그는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한 뒤 4월 3일 인근의 3개 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4월 1일, 변상태, 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주민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4월 2일 오전, 권태용은 진전면 율치리에 소재한 김순삼(金順三)의 집을 방문하여 마침 이곳에 있던 김영종에게 동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양촌리 냇가에 모이자,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후 그는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행진했다. 여기에 진동면민도 가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5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일제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보조원·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8명이 피살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를 피해 도주했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후 서울로 피신한 그는 8월 20일 하동로 등과 의논해 임시정부와 연락할 임무를 맡았다. 그는 무사히 상하이로 간 뒤 임시정부로부터 경상남도 금전수입원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9월 강태동, 이을규(李乙奎)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서 임시정부의 격문, 포고문 등을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다 일제 경찰의 수배를 받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1919년 12월 20일 학무부(學務部)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11월 3일 중국 신문 <대공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해 논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 또한 1920년 1월 1일 신년축하회에 참석해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 그 후 임시정부와 함께 하다 1939년 6월 14일 충칭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태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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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2] 복야공파 응경(應慶)계 33세 태(泰)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