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7 18:34:53

장덕익

성명 장덕익(張德翼)
생몰 1888년[1] ~ 1947년 11월 8일[2]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읍 비봉동
본관 인동 장씨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79년도에 발행한 <부산경남3.1운동사>에 따르면, 장덕익은 1891년 7월 6일생이라고 한다. 반면 경찰청지문 기록에는 1889년 8월 19일생으로 기재되었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광림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3월 10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3.1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광림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인 강달룡, 심두섭, 이강우, 박진환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 교유문 등 2천 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든 후 거사일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배부하면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며 행진했다. 그러다가 일제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는 중단되었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인동장씨 족보'에 따르면, 장덕익은 50세 전후에 병환이 악화되자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중 자식들이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냐고 묻자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말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날짜는 11월 8일로 명시되었지만 사망년도는 1942년설과 1947년설로 나뉜다. 또한 별세 후 진주시 이현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표지석을 세우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장덕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889년 8월 19일 설과 1891년 7월 6일 설도 있다.[2] 1942년 11월 8일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