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14 02:35:30

고석진

성명 고석진(高石鎭)
자 / 호 정여(貞汝) / 수남(秀南)
본관 제주 고씨[1]
생몰 1856년 1월 11일 ~ 1924년 12월 26일
출생지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가평리
(현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2]
사망지 전라북도 고창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고제천은 그의 조카이다.

2. 생애

고석진은 1856년 1월 11일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가평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추원의관(議官)을 역임하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사임한 뒤 최익현과 뜻을 함께 하여 거사할 것을 꾀했다. 당시 최익현은 이용원(李容元), 이도재(李道宰), 이성렬(李聖烈), 이남규, 곽종석, 전우(田愚) 등 명망 높은 유림에게 함께 국난 타개의 길을 모색하자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해 근심했다. 이때 고석진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태인(泰仁) 사람 임병찬이 이미 갑오년부터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으니 그의 충의는 믿을 만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모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익현은 이를 받아들여 임병찬과 제휴했고 고석진과 임병찬을 축으로 하여 최제학(崔濟學)·최학령(崔學嶺)·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鍾弓)·김태원·임현주(林顯周) 등과 함께 군수 물자를 준비하며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1906년 4월 중순경 민종식의 의병대가 홍주성에 입성해 기세를 올리자, 최익현은 의병 궐기를 서둘렀다. 그는 문인들을 데리고 태인을 향해 출발했고, 고석진은 최학엽, 최학엽(崔學燁), 노병희, 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종성리에서 최익현 일행을 맞이했다. 최익현은 태인 무성서원에 도착하여 최고운(崔孤雲) 선생 영정을 봉심(奉審)하고 이어 강회(講會)로 들어갔다. 강회를 마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구신(舊臣)의 처지에 있어 진실로 종묘 사직과 미생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함이요, 성공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상대하는 그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이에 고석진을 비롯한 문인들이 생명을 걸고 맹서했다. 이리하여 결성된 의병대는 4월 14일 아침부터 행군을 개시해 정읍 한교에 이르러 병력을 모집하니 백여 명이 합세했다. 고석진은 김재구(金在龜), 강종회와 함께 포군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여기에 합세했고, 의병대의 숫자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4월 16일 순창읍에 들어온 의병대는 총포와 포수를 보완하고 추격해온 일본군을 성밖에서 물리친 뒤 17일 곡성을 거쳐 18일 남원으로 향하려다 진압군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순창으로 방향을 돌려 오산촌에서 유진했다. 이후 19일 관군과 결탁하여 의병을 궁지에 몰려 하던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을 붙잡았다. 최익현은 이건용을 죽이려 했지만 고석진 등이 만류하자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1906년 4월 20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시문이 내려오고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에 포위되자, 최익현은 의병대를 해산시켰다. 고석진은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최익현을 모시다가 체포되었고, 서울로 호송된 뒤 6월 25일 4개월 연금형을 선고받았다. 10월에 석방된 그는 대마도로 유배된 최익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임병찬의 전보를 받고 최익현의 장남 최영조와 함께 수의를 준비하여 부산으로 달려가 11월 5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최익현을 면회했다. 이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약재를 몇 가지 준비하고 면회하려 했지만 11월 17일에 이미 돌아겼다는 전보를 받고 통곡했다.

1910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독립의군부를 구성할 때 참모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914년 2월 독립의군부의 참모총장의 칙명을 맡았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었다. 다만 일제는 사건이 확대될 것을 우려해 임병찬만 처벌하고 그는 무죄 방면시켰다. 고석진은 1919년에는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전국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했다. 1924년 12월 26일 고창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고석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장흥백파 19세 진(鎭) 항렬.[2]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용진고제천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