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장낙수(張洛洙), 장중산(張中山) 장사충(張思忠), 장봉서(張鳳書), 장정민(張貞敏) |
출생 | 1914년 3월 10일 |
경기도 경성부 동부 창선방 동학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 |
사망 | 1992년 1월 15일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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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장낙수는 1914년 3월 10일 경기도 경성부 동부 창선방 동학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서 태어났다.그는 1929년 상하이로 유학갔고, 1933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인 김정식(金正植)의 권유를 받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에 입학하여 교관인 지청천 등으로부터 사상 및 군사교육을 받고 1935년 4월 초에 졸업했다.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의하고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에 입당하고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장낙수는 또 난징의 중앙정치훈련반에 입소해 1년간 훈련을 받았으며, 민족혁명당 제1특별구당 회계 책임을 맡아 식료품 구입, 현금 출납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 본부 군사부원에 임명되어 군사부장 지청천으로부터 특별 훈련반 입생 모집 및 상해구당부上海區黨部)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상해에 파견되어 김진원(金鎭源) 등을 입당시키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국내 정세 조사, 일본군의 군대 수송 상황 탐지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장기(長崎)로 압송되었으며, 갖은 고문을 받은 뒤 1938년 8월 24일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감시를 받다가 8.15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서울로 돌아간 뒤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1992년 1월 15일에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낙수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2019년 3월 1일 아침마당 3.1 운동 100주년 기획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계현(張桂賢) 가수는 "오늘은 노래를 하러 나온 게 아니다. 바로 제가 독립운동하신 장낙수 선생님의 아들이다"고 말했다. 그는 "삼일절, 광복절만 되면 아침에 태극기를 꼭 달아야 한다. 늦게 일어나면 아버지한테 야단맞았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는 좋은 아버님을 둬서 자랑스럽다며, 삼일절 100주년이라 감회가 새롭다면서 울컥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