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산혁명렬사릉에 있는 최효일의 반신상.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윤장손(尹長孫)[1] |
이명 | 최우(崔宇), 최우일(崔宇一) |
출생 | 1905년[2] |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동천동 300번지 (現 평안북도 동림군 동림읍) | |
사망 | 1932년 10월 12일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대성산혁명렬사릉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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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5년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동천동 300번지(現 동림군 동림읍)에서 태어났다.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게 없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 초까지 만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창설되자 가입한 뒤 특무 제1대장에 취임했다. 이후 1930년 6월 18일 박차석(朴次石)[3]·정주양(鄭柱陽) 등과 함께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장백현(長白縣)[4]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해 6월 20일 군자금 모집 결사대원 김형권 등과 함께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現 량강도 김형권군 내중리)의 풍산경찰서 내중(內中)주재소를 지나던 중 일행을 검문하던 마츠야마 이조(松山猪三) 순사부장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다른 순사에게는 총상을 입혔으며, 민가 및 자동차를 습격해 군자금 모집을 추진하던 중 1930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1년 10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 협박, 강도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에 공소했으나 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 살인미수, 강도, 협박 등의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없음으로 사형선고[5]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에 상고했으나 1932년 6월 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2심과 같은 혐의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재심 청구를 했지만 1932년 9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재심 청구가 기각되었고, 9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항고가 기각되었다.
결국 1932년 10월 12일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현재 그의 유해는 북한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보존되어 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1932년 10월 22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호적명이 윤장손(尹長孫)이라고 기재되어 있다.[2] 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당시 28세로 기재되어 있다.[3] 이명 박개석(朴開石).[4]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장백 조선족 자치현.[5] 1932년 10월 12일 오후 3시.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 집행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