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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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민족대표 33인 | 김좌진 |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 ||||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 |
1. 개요
竹林高會.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대에 일곱 문인이 설립한 문학 모임이다.
이 모임의 핵심인물은 이인로로 중국 시인 백낙천의 4우를 모방해 미수사우를 맺었는데 임춘을 시우, 조통을 산림우, 이담지를 주우, 그리고 승려인 종령을 공문우라 칭했다.
후에는 중국의 모임을 따서 죽림칠현이라 고쳤으며, 현대에도 흔히 죽림칠현이라 불린다. 또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도 부른다.[1]
이들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시주를 벗삼던 죽림칠현을 본떠 모임을 가짐으로써 죽림고회라 불렀다. 무신정권기에 문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산야로 들어가 시와 술로써 불우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했다. 중국의 죽림칠현이 진대의 난시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초야에 들어가 생겨난 것처럼 죽림고회도 무신이 집권하여 문신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난세를 피하여 향리에 들어가 문학에 열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현 중 이인로와 조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문사로서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서 오는 울분과 강개의 심정을 문학과 술로써 위로하고 잊으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들이 노장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청담적, 출세간적, 방종적인 풍모를 흠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세재의 비극적 죽음 등을 고려하면 관직에 적극적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무인정권기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인로나 죽림고회를 신나게 깐 이규보는 후일 최충헌 정권에 출사해서 크게 출세하였고 어용문인 소리를 후대에 듣게 된다.
고려시대 당시 문단을 대표했고 상당한 영향력도 끼쳤다고 한다. 시를 쓴 것 외에도 시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인로의 《파한집》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평론집이다. 이규보는 나이 19세에 35년이나 연상인 오세재와 망년지우를 맺고, 죽림고회에 출입하면서 이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이들이 매일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거리낌없이 함부로 행동하자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2. 멤버
3. 이규보의 칠현설
이규보의 〈칠현설〉에 의하면 오세재가 경주에서 돌아오지 않자 죽림칠현은 이규보에게 오세재 대신 7현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이규보는 "7현이 무슨 조정의 관직이어서 빈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까? 중국의 완적과 혜강이 죽은 후 그것을 계승한 자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라고 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든 후, 이어서 시로써 "7현 가운데 그 누가 왕융과 같은 사람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읊어 좌중을 성나게 만들었다고 한다.칠현설 - 이규보 - | ||
先輩有以文名世者某某等七人, 自以爲一時豪俊, | 선배유이문명세자모모등칠인, 자이위일시호준, | 선배들 중에 세상에 문장으로 이름 난 모모 등 일곱 사람이, 스스로 한 때의 호걸이라 여겼는데, |
遂相與爲七賢, 蓋慕晉之七賢也. | 수상여위칠현, 개모진지칠현야. | 드디어 서로 어울려서 칠현이라 하니, 대개 진 나라의 칠현을 사모한 것이다. |
每相會, 飮酒賦詩, 旁若無人, 世多譏之, 然後稍沮。 | 매상회, 음주부시, 방약무인, 세다기지, 연후초저. | 매번 서로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방약무인하였는데, 세상에서 빈정대는 사람이 많아지자, 기세가 조금 수그러졌다. |
時予年方十九, 吳德全許爲忘年友, 每携詣其會. | 시여년방십구, 오덕전허위망년우, 매휴예기회 |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는데, 오덕전[2]이 망년우로 삼아, 항상 그 모임에 데리고 갔었다. |
其後德全遊東都, 予復詣其會, 李淸卿目予曰, 子之德全, 東遊不返, 子可補耶. | 기후덕전유동도, 여부예기회, 이청경목여왈, 자지덕전, 동유불반, 자가보야. | 그 뒤에 덕전이 동도에 갔을 때[3],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였더니, 이청경[4]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자네의 오덕전이, 동도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보충이 되겠는가? |
予立應曰. 七賢豈朝廷官爵, 而補其闕耶. 未聞嵇阮之後有承之者. 闔座皆大笑。 | 여입응왈, 칠현기조정관작, 이보기궐야. 미문혜원지후유승지자. 합좌개대소 | 하기에,내가 곧 대답하기를, "칠현이 조정의 벼슬도 아닌데 어찌 그 빈 자리를 보충합니까. 혜강과 완적 이후에 이를 이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5]하니, 모두들 크게 웃었다. |
又使之賦詩, 占春人二字. 予立成口號曰. | 우사지부시 점춘인이자 여입성구호왈 | 또 나를 보고 시를 짓게 하면서, 춘(春)과 인(人) 두 자를 운자로 부르기에, 내가 금세 지어 읊었다 |
榮參竹下會, 快倒甕中春, 未識七賢內, 誰爲鑽核人。 | 영참죽하회, 쾌도옹중춘. 미식칠현내, 수위찬핵인 | 참람되게 죽림회에 참석하여, 유쾌하게 독안의 봄을 마시네. 씨에 구멍을 뚫을 인물[6]이 칠현중에서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
一座頗有慍色, 卽傲然大醉而出. | 일좌파유온색, 즉오연대취이출. | 이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가 불쾌해 하였으므로, 이내 대취한 상태로 거만하게 나왔다. |
予少狂如此, 世人皆目以爲狂客也. | 여소광여차 세인개목이위광객야 | 젊어서 이처럼 미친 짓을 하였으므로, 세상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이라고 하였다. |
좋게 보면 이국의 유명인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허세와 허영을 풍자한 것이지만 어쨌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이들을 별 이유도 없이 심하게 조롱한 것이고, 후일 이규보 자신도 이런 행적을 약간은 민망하게 여겼는지 '젊은 시절에는 미친 짓을 하고 다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다르게 보면 젊은 시절 관운이 잘 풀리지 않던 이규보의 방황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또 이렇게 보면 후일 출세운이 트이고 난 이후 이규보의 행적은 남들 보고 혹시 위선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롱하던 젊은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음이 씁쓸한 점.
4. 기타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는 죽림칠현 김부식이라고 나오지만 엄밀히 말하면 같은 문인이라는 것 말고는 관계가 없다.5. 같이보기
6. 둘러보기
죽림고회 (竹林高會) | ||||||
오세재 | 이담지 | 이인로 | 임춘 | 조통 | 함순 | 황보항 |
[1] 중국의 원판 죽림칠현은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부른다. 해좌(海左, 바다의 왼쪽), 강좌(江左, 강의 왼쪽)는 해동(海東, 바다의 동쪽), 강동(江東, 강의 동쪽)과 같은 뜻이다. 황제가 남쪽을 보고 앉으면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 되므로. 실제로 해동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별칭 가운데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남쪽은 앞, 북쪽은 뒤라고 부른다.[2] 오세재[3] 동도는 당시 동경으로 불렸던 경주로, 오세재의 외가가 있었다. 오세재는 이곳으로 가서 말직을 지내다가 생활고로 죽었다. 경주로 놀러간 것이 아니다.[4] 이담지[5] 혜강과 완적은 7현중에서 비교적 일찍 죽었다. 특히 혜강은 관직에 오르지 않고 사마씨 정권에 항거하다가 처형당했다.[6] 이를 죽림칠현의 핵심이 될 인물이라고 오역한 글도 있다. 그것도 문학사 관련해서. 사실은 본문에도 나오지만 왕융의 고사이다. 왕융은 자기집 자두를 팔면서 그 씨를 가져다가 싹을 틔울까 싶어서 자두 씨에 모두 구멍을 뚫었다는 쪼잔한 일화가 유명할 정도로 죽림칠현의 이름에 먹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죽림고회에 참석한 이들 보고, 지금은 나름대로 관직을 떠나서 유유자적한다고 하지만 뒤에 왕융처럼 행동할 인물이 없으란 보장이 있느냐고 돌직구를 던지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