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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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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鎔默
1904년 9월 8일 ~ 1961년 8월 9일 (향년 56세)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소설가, 시인, 수필가, 기자이다. 본관은 수안(遂安)[1], 아호는 우서(雨西), 초명은 하태용(河泰鏞).

계용묵의 외조부 박치항은 현상윤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의 외조부 박치형(朴治亨)의 첫째 남동생이다. 그러므로 현상윤은 계용묵에게 외재종형(外再從兄)이 된다.

2. 생애

1904년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리 군현동(현 선천군 삼성리 군현동)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와 어머니 진주 하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 진주 하씨는 아버지의 옛 연인으로, 출생 직후에는 친외조부 하재천(河載玔)과 둘째 외숙부 하원(河洹)의 호적에 올라 하태용(河泰鏞)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가 이후 생부를 따라 귀향하면서 본 이름을 되찾았다. #

그의 조부 계창전(桂昌琠)은 1905년 종9품 동명왕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고 #, 외조부 죽산 박씨 박치항(朴治恒)[2]은 1873년(고종 10)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 입격하고 # 1883년(고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1891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 종5품 부사직(副司直) 등을 역임한 인물로, 계용묵의 친가와 외가 모두 선천 지방의 양반가문이었다.

선천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잠깐 재학했으나 신교육을 반대하던 조부에 의해 모두 발각되어 강제로 귀향하였고, 곧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유학, 토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이 파산하여 1931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한때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20년 <새소리>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다.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61년 8월 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인해 향년 56세에 사망했다. # 사후 서울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3. 기타

평소에 신고 다니던 구두 때문에 본의아니게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구두 수선공이 신발 바닥에 큰 징을 박아준 것 때문에 걸을 때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났는데, 밤중에 덕수궁 근처를 걸어가다가 앞서 가던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서 도망가는 바람에 불량배로 오인받았다는(...) 웃픈 해프닝인데, 이를 계용묵 본인이 아래에서 언급되는 수필인 구두발표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소설 '백치 아다다', 수필 '구두'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은 모두 단편이며, 장편소설을 딱 하나 쓰긴 했으나 원고를 분실하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공식 번역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목은 <검둥이의 설움>.

일제 말기에 같은 작가인 다나카 히데미쓰(田中英光, 1913~1949)로부터 일본어로 글을 쓰지 않으면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을 당한 적이 있다.#


[1] 군현파 23세 용(鎔) 항렬.[2] 1883년 국조방목에는 박치항(朴致恒)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