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53:20

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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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昱
141년 ~ 220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황건적의 난2.2. 유대에게 조언2.3. 조조에게 임관2.4. 연주에서의 반란2.5. 원소와의 화친을 반대2.6. 유비를 경계하다2.7. 관도대전2.8. 위나라의 명신2.9. 인육 논란
3. 삼국지연의4. 평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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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중덕(仲德)으로 본명은 정립(程立). 연주 동군 동아현(現 산둥성 랴오청시의 일부) 출신.

<정욱전>에 따르면 8척 3촌(약 196.7cm)의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2. 정사 삼국지

2.1. 황건적의 난

정욱은 연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정욱의 고향 동아현에서 황건적에 호응한 몇몇의 반란자가 성문에 불을 지르자 백성들과 현령들이 모두 성 밖으로 피신했는데, 정욱만은 이 반란자들이 소수인 점을 꿰뚫어보고 성안으로 피해 굳게 지킬 것을 현령에게 권한다. 그러나 현령은 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병인 기병을 풀어 깃발을 사람들이 모인 곳 근처에 세운 뒤 "적이 당도했다!"라고 소리쳐 사람들이 성 내로 돌아가게 한다.

반란자들이 와서 성을 공격했지만 항복시킬 수 없어 떠나고자 했다. 정욱이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급히 공격하니 격파되어 달아났다. 그 결과 동아현은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정욱의 이런 기지가 있었기에 동아현은 황건적의 난이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2.2. 유대에게 조언

초평 연간(190년 ~ 193년)연주자사 유대가 정욱을 초빙했으나 정욱은 응하지 않는다. 한편 유대는 원소, 공손찬과 모두 친했기에 원소는 그의 처자식을 유대에게 맡겼고 공손찬은 종사 범방에게 기병대를 딸려보내 유대를 돕게 했다. 그런데 공손찬과 원소와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공손찬은 유대에게 원소의 처자식을 내놓고 그와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다음 목표는 유대가 될 것이라 협박한다. 당시 공손찬의 세력이 워낙 강했으므로 유대 진영에서는 연일 의론이 끊이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던 유대는 정욱을 불러 그의 가르침을 청한다. 정욱은 원소는 가깝지만 공손찬은 멀리 떨어져 있고 공손찬은 원소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점을 들어 원소에게 붙어야 한다고 일러주며, 이에 범방은 기병대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돌아갔다. 범방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찬은 원소에게 크게 패했고, 이 때문에 유대는 정욱을 크게 신뢰하게 되어 재차 정욱에게 벼슬을 주고 부하로 삼으려고 하나 정욱은 이를 거절한다.

2.3. 조조에게 임관

유대가 황건적에게 죽고 조조연주에 이르러 정욱을 초빙한다. 정욱이 유대의 초빙은 거절했으면서 조조의 초빙은 받아들이니 그의 고향 사람들이 "어찌 전후의 일이 이렇게 서로 배치되는가!"라고 했다. 정욱은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조조는 정욱을 만나본 뒤 크게 기뻐하며 정욱을 수장현의 현령으로 삼는다. 정욱이 조조에게 등용될 때는 무려 50대 중반으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2.4. 연주에서의 반란

조조가 서주 침공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에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조조와 중심 병력이 없는 틈을 타 진궁장막, 여포 등을 끌어들여 모반한다. 조조가 떠난 연주는 순식간에 여포의 손에 대부분 넘어갔다. 이때야말로 조조의 일생에 걸쳐 가장 위급했던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견성, 범, 동아 등 세 개의 현만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순욱과 정욱이 후방에 남아 있었는데, 여포군에 항복한 자들이 진궁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한다고 말하자, 다시 범의(氾嶷)를 시켜 범현을 취하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순욱이 정욱에게 지금 연주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린 오직 이 3성만 가지고 있는데 진궁 등이 중병(重兵)으로 임한다면 깊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지 못해 세 성은 반드시 동요할 것이고 당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니 돌아가 저들을 설득한다면 거의 괜찮아 질 것이라고 했다.

정욱은 범현을 지날 때 그 현령근윤을 설득하며 말하길 근윤이 눈물을 흘리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느냐고 했다. 이 때 범의가 이미 현에 와 있었는데, 근윤이 이에 범의를 보고서는 복병을 두었다가 그를 찔러 죽이고 돌아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수비했다.[1]

정욱이 또 따로 기병을 보내 창정진(倉亭津)의 나룻길을 끊게 하니, 진궁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못했다. 정욱이 동아현에 이르르자, 동아현령 조지가 이미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독려하여 성에 웅거하여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또 연주 종사 설제가 정욱과 같이 힘모아 모의하여 마침내 세 성을 완전히 보전하며 태조를 기다렸다. 조조가 돌아와 정욱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힘이 없었다면 난 돌아갈 곳이 없었을 것이라 했다. 이에 표를 올려 정욱을 동평상으로 삼고, 범현에 주둔토록 했다. 조조는 보답으로 정욱을 동평군의 상으로 임명한다.

일전에 정욱이 어렸을 때 태산(泰山)에 올라 두 손으로 해(日)를 받드는 꿈을 꾸었다. 정욱이 혼자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 순욱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정욱의 공에 힘입어 세 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순욱이 이 얘기를 조조에게 전해주었고 조조는 그의 이름 '설 립(立)'에다 '해 일(日)'을 붙여줘 빛날 욱(昱)으로 개명하게 된다(조조를 태양처럼 받들어달라는 뜻).

2.5. 원소와의 화친을 반대

그해 가을, 갑작스럽게 황충 즉 메뚜기들이 대량 등장함으로서 연주 부근에서 대기근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군량미 문제로 여포와 장막은 불가피하게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판정승을 거둔 셈이지만 연주 부근 즉 연주 자체에서도 메뚜기가 들끓어 겨우 지켜낸 3 성을 포함해 연주 일대의 식량이 되어줘야할 추수철의 곡식들의 태반이 날라가버려 말그대로 연주 전체가 굶어죽기 일보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이때 원소는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가족들을 업으로 옮겨 살도록 권한다. 정욱전에서는 원소가 '화친'을 권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 정욱전의 필자인 진수가 위왕조를 시조로 모시는 사람이라는 걸 고려하면 '화친'은 어디까지나 조조를 띄워주기 위함이라 보는게 옳다. 이 당시 조조는 뭐로 비교해도 원소와 '화친'이라는 글자가 들어갈 정도로 원소에게 비빌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 실제로는 자립하려는 조조의 태도를 보고 그의 태도를 확인 및 견제하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 즉 혼자 자립해서 굶어뒤지거나 다시금 남들 앞에서 자기 아래에 무릎꿇거나 2지 선다를 하라고 강요한 셈.

곤궁한 상황에 있던 조조는 이를 수락하려 했다. 그러나 마침 외지에 사신으로 나갔다 돌아온 정욱이 이를 듣고 조조를 찾아가 다그치며 원소의 제안을 거절하게 하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장군께서 일이 닥치자 두려워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깊이 생각치 않은 것입니까! 무릇 원소는 연과 조(趙) 땅에 의거하여 천하를 병탄해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혜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자신을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보다 아래라고 여기십니까? 장군의 용과 범 같은 위엄으로 가히 한신이나 팽월(彭越)같은 일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연주가 비록 쇠잔해졌지만 아직 세 성과 능히 싸울 있는 전사들이 있어 만명이라도 항복시키지 못합니다. 장군의 신이한 무력으로써 문약(순욱)이나 저 등과 함께 저들을 거두어 기용하신다면, 패왕의 대업을 가히 이룰 수 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 정욱전

위략》에는 이렇게 설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전횡은 제나라의 세족으로 형제 3명이 번갈아 왕노릇 했는데, 천리나 되는 제나라 땅에 웅거하고, 백만의 병사를 끼고서 제후들과 더불어 남면(南面, 왕이 되었다는 뜻)하고 고(孤)라 칭했습니다. 얼마 뒤 한고조가 천하를 얻게 되자 전횡은 도리어 항복한 포로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의 일에 당하여 전횡을 어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조조가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대장부의 지극한 치욕이요
라 했다. 정욱이 다시 말하기를
제 어리석은 견해로는 (공의) 큰 뜻은 알지 못하지만, 장군의 뜻이 전횡만 못하다고 봅니다. 전횡은 제나라의 일개 장수였을 뿐인데 고조의 신하가 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가솔들을 업성으로 보내고자 하시는데, 그러면 장차 북면(北面)하고 원소를 섬기게 됩니다. 무릇 장군의 총명함과 신이한 무력으로는 도리어 수치을 겪지 않고 원소를 아래에 둘 수 있으니, 제 생각으론 장군께선 이를 부끄럽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 나중에 했던 말이 정욱전 본전과 대략 같다고 한다.

2.6. 유비를 경계하다

이후 조조는 헌제를 옹립해 허도에 도읍을 정하고, 연주가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기에, 정욱을 상서로 삼고 동중랑장과 제음태수를 겸하게 하여 연주의 모든 대소사를 위임하여 관장하게 했다.

이 무렵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해오자 정욱은 높은 안목으로 조조에게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조조는 곽가의 조언에 따라[2] 정욱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정욱이 공(=조조)을 설득하며 말하길 "유비의 관상을 보니 영웅의 재주가 있고 뭇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니, 빨리 그를 도모하는 게 낫습니다."라 했다. 공이 말하길 "바야흐로 지금 영웅을 거둬들이고 있는 때인데,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할 수는 없소."라 했다. - 무제기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수춘원술를 공격하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주면, 출정하고 곧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 맞아 떨어져 유비는 차주를 살해하고 서주를 차지한다.

2.7. 관도대전

관도 대전 발발 당시 견성을 도맡아 지키고 있었는데 이 당시 정욱의 군사가 많지 않았다.

원소가 10만 대군을 데리고 남하할 경우 견성은 제일 처음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조조는 이에 2천명의 군사를 더 보내고자 했으나 정욱은 '여기서 병력이 증원되어 봤자 제대로 못막고 뚫리는 건 똑같다. 하지만 원소의 오만함은 잡졸이면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 둘것이나 여기에 2천이나마 추가되면 위협을 억누르는 의미에서라도 오히려 견성을 노리려 들 것이다. 그러니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선 지원을 안보냄이 옳다.'라고 거절하고 실제로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1천도 안 되는 걸 알고 자신들에게 큰 영향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겨 무시하고 지나친다. 조조는 가후에게 편지를 보내 정욱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3]보다 뛰어나다며 담력을 칭찬했다.

관도대전 동안은 상술한 대로 견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 생전엔 견성을 무사히 지켜낸 것 외엔 별 활약이 없었으나 대전발발 이후 ~ 원소의 병사 때까지 견성 주변 여러 장소에 숨어있던 유민들을 거두며 수천의 정병을 훈련시켰고[4] 원가 내부에서 후계자 다툼으로 갈등이 빚어질 때 이 병사들을 이끌고 조조와 합류,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분무장군의 지위를 얻으며 동시에 안국정후로 봉해져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2.8. 위나라의 명신

이후 유비오나라로 도망간다는 소식에 다들 손권이 유비를 죽일 거라 생각했지만 정욱은 반대 의견을 냈다.
손권이 이제 막 자리에 오른지라 천하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공께선 천하에 적이 없고 이제 막 형주를 점령하셔서, 그 위엄이 장강 이남 지역에 떨쳤으니, 손권에게 비록 지모가 있다한들 능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비에겐 빼어난 명성이 있고, 관우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손권이 필히 그를 빌어 우리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력을 풀어 나누기는 어렵고, 유비의 도움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으니, 또한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손권이 유비의 힘을 빌어 조조에게 대항하려 할 것임을 예측하였고, 곧 그가 예측한 그대로 되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 조조는 그가 연주의 세 성을 지킨 일을 들며 그를 칭찬했다. 정욱은 그를 위한 축하연의 자리에서 '만족할 줄 알고, 욕되지 않았으니 물러나길 원한다.'라며 병권을 내놓고 칩거에 들었다.

그 후 조조가 친히 마초를 공격할 때 조비가 남아 조조의 일을 거들때 정욱을 군을 통솔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때 하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토벌하는 도중 천여 명이 항복하였는데, 이들을 처형하자고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욱은 반대하면서 조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항복한 자를 죽이는 건 난세의 원칙입니다. 천하가 혼란할 때는 투항해 온 자들을 용서하지 않아야만 위세를 떨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대략 안정되었으므로 항복해 오는 자들이 계속 늘어날 것인데, 예전처럼 무작정 죽일 수는 없고 혹 그렇게 한다 해도 위엄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을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죽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조조의 의향을) 여쭈어봐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정욱이 맡고 있으므로 조조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조비는 정욱을 다시 불러 내전에서 왜 끝까지 주장하지 않는지 물었는데 명을 받아 일을 전담하는 경우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고 지금 이 포로들은 수중에 있으니 변고가 생길리 없다. 그래서 일개 장군으로서의 소임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비는 감탄하여 조조에게 보고했고 마초와 싸우고 돌아온 조조의 의향도 이와 같았다. 조조는 정욱의 군계(軍計)와 두 부자간의 처신처리를 칭찬했다.

정욱은 성질이 강하고 드세어 주위에 적이 많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욱이 반란한다고 참언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그를 무척 신임했고 그를 더욱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213년위위에 임명되고, 중위 형정(邢貞)과 예법에 따른 몸가짐을 두고 다투었다가 면직되었다.

220년에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다시 위위로 되고 봉작을 올려 안향후에 봉하고, 봉읍을 3백 호 늘려 이전 것과 합쳐 8백 호가 되게 하였다. 정욱은 당해 79세에 죽었는데, 벼슬이 공(公)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숙후(肅侯)라 했다. 아들 정무(程武)가 뒤를 이었고, 손자 정효(程曉)는 황문시랑이 되었다.

2.9. 인육 논란

정욱이 삼공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정사 삼국지》 주석으로 인용된 왕침의 《위서》와 《세설신어(世說新語)》[5]라는 책에는 조조가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정욱이 자기 고향을 약탈하여 3일 분의 식량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인육을 말린 것이 섞여 있어 조정의 신임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군이 식량이 부족했을 때는 여포와 싸운 기간 혹은 원소와 싸운 날들인데, 여포와 싸울 때 동아현이 배반하지 않은 세 현 중 하나였으므로 정욱이 약탈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원소와 싸울 때는 700명의 병력으로 원소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동아현까지 가서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만약 정욱이 군대를 이끌고 동아현을 약탈했다면 제멋대로 병사를 이끌고 자신의 주군의 영토를 약탈한 셈이므로 이는 조정의 신임을 잃은 정도로 끝났을 리가 없다. 이는 반역을 규정되어 극형을 받고도 남는다. 따라서 저렇게 정욱이 자신의 출신현을 약탈해서 군량을 조달했다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서 지어졌거나 정욱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진 험담일 것이다.

다만, 위의 일이 반드시 없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여러 현의 지명의 오기 혹은 혼동일 수도 있다. 조조의 식량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을 때가 많아 식량 조달 과정에서 급한 경우의 무리수로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일화가 꾸며졌다고만 믿기에는 정욱의 정치적 위치와 더불어 그의 정적들에 의해 그가 맡고 있던 고위직에 대한 저런 일화가 어떤 식으로 쉽게 퍼질 수 있었는가 하는 풀리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세설신어》는 소설이지만 《위서》는 일단은 역사서에 해당한다. 물론 왕침의 《위서》가 역사왜곡 논란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보통은 사마씨나 조씨를 미화하거나 높여주기를 했을 경우가 많고 정욱이 위나라의 최고참에 속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서가 정욱을 폄하해야하는 이유가 없다.

3.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의 초기의 자잘한 활약들이 생략되었으나 창정에서 십면매복계로 원소를 격퇴하는 임팩트 있는 활약이 창작되었다.

서모[6]에게 서서의 동향 친구인 척[7] 접근해 호의를 얻고 필적을 베껴서 서서를 속이고,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은혜를 입은 것을 강조해서 관우가 조조를 놔두게 만드는 등 통찰력은 있지만 나쁜 품성이 두드러져 인정조차 이용하는 비정하고 냉혈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4. 평가

정욱이 연주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 연주 동아현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사를 보면 동아현의 현령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사병까지도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연주자사 유대가 그를 여러 차례 불렀고 조조도 연주를 얻자마자 그를 부른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정욱은 연주에서 인망높은 지역 유지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욱은 일평생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항상 가장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한 지략가였으며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막거나 혹은 공격하는 데 실력을 발휘한 장수이기도 했다. 조조가 원정을 떠날 때면 근거지를 지켰던 걸로 보아 보급에도 능했으며, 동시에 무척 신임을 받은 인물이며 관도대전 이후 견성을 지킬때를 보면 담력도 대단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정욱의 큰 미덕이었다. 특히나 조조가 중원을 평정했을 때는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병권을 반납하고 칩거에 들어간 적도 있다. 물론 조조는 그런 그를 계속해서 아끼고 더욱 무겁게 여겼다.

정욱은 대기만성형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상원담을 공격했을 때는 이미 환갑을 한참이나 넘긴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기에 정욱이야말로 노익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정욱은 자신이 원하는 주군을 찾으며 차분히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조조를 만났다. 당시 기준으로 출사할때 나이 오십, 그러나 정욱은 거의 삼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유감없이 떨쳐 보임으로써 사서에 이름을 남겼다.

관도대전 전후의 행적으로 보아 정욱은 다른 모사들과는 달리 병사를 직접 지휘하는 사령관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관직체계 자체에 약간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만, 정욱은 문-무관의 구별이 명확한 인물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이었다. 사후 장군직인 거기장군으로 추증되기도 했고, 생전의 마지막 직책인 위위 역시 장군직은 아니지만 황실의 경비를 담당하는 군사적인 성격이 있는 직책이었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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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중(徐衆)은 "근윤과 조조는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친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의에 따라서 행동했다. 옛날에 왕릉의 모친은 항우에게 잡혀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한고조가 천하를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아들이 뜻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올바른 결심을 하자면 자신과 관계된 것을 애써 끊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연후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일을 성사시킬 수가 있다. 위공자(衛公子)는 제나라에 출사를 했다가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했으며, 관중이 가족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끊지 않았다면 어찌 주군을 정성스럽게 섬겨서 재상이 되었겠는가? 그렇지만 효자의 문에서 충신을 구하는 것이 천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의 도리이므로, 근윤은 마땅히 자신의 어머니를 먼저 구했어야 한다. 서서의 모친이 조공에게 잡혔을 때 유비는 서서를 조조에게 보냄으로써 천하의 사람들에게 아들의 정을 소중히 여겼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조조 역시도 근윤을 여포에게 보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비판했다.[2] 위서에서는 정욱이 유비가 우환이 될 것이라고 간하지만 곽가는 반대한 것으로 나오고, 부자에서는 곽가도 유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내용이 서로 상충되고 있어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다.[3] 춘추시대 때 이름난 장사들. 이 둘을 합칭해 '분육(賁育)이'라 해서 힘세고 용감한 장사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처럼 쓰였다.[4] 상식적으로 그 유민 모두가 군인이 되려는 적령기 남성일 리가 없으니 실제로는 적령기 남성만해도 수천에 그 외 인원까지 포함하면 수만일 가능성이 높다. 즉 수천의 군사에 수만이나 되는 백성을 얻은 셈이다.[5] 세설신어는 여러 가지 야사를 모아놓은 야사집으로써 조조가 여백사의 일가를 죽인 일화, 조조가 그의 말년에 나무를 벨 때 피가 흘러 조조가 입고 있던 옷에 묻었다는 일화 등이 기록되어 있다.[6] 서서의 어머니[7] 서서의 기록에 따르면 188년 즈음에 복수를 끝냈다고 했으니 이즈음 20대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정욱과 대략 20~30살 정도 차이가 난다. 다만 연의에는 애당초 정욱의 나이가 나오지 않고 정사에서는 정욱이 이런 계책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