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7:57:31

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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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군공(郡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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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초 추존 황제
환온 | 桓溫
출생 312년
동진 예주 초국 용항현
(現 안후이성 벙부시 하이위안현 룽캉진)
사망 373년 8월 18일 (향년 61세)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영숭릉(永崇陵)
재위기간 동진의 만녕현남
331년 ~ 348년
동진의 임하군공
348년 ~ 360년
동진의 남군공
360년 ~ 373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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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51665><colcolor=#ece5b6> 본관 초국 환씨
온(溫)
부모 부친 만녕간남 환이
(萬寧簡男 桓彝, 276 ~ 328)
모후 임하태부인 공헌
(臨賀太夫人 孔憲, ? ~ ?)
형제자매 5남 중 장남
배우자 남강공주, 첩실 이씨, 예장공태부인
자녀 7남 4녀
원자(元子)
작호 만녕현남(萬寧縣男)
→ 임하군공(臨賀郡公)
→ 남군공(南郡公) → 황제(皇帝)
묘호 -태조(太祖)-
시호 선무공(宣武公)
→ 선무황제(宣武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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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서정과 북벌
2.2.1. 서정: 저족의 성한 정복2.2.2. 제1차 북벌: 저족의 전진 공략전2.2.3. 제2차 북벌: 강족의 요양 정벌과 고도 낙양 수복2.2.4. 제3차 북벌: 선비 모용부의 전연 공략전
2.3. 말년과 최후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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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장군이자 정치가이며 권신.

환이[1]의 장남으로, 동생으로는 환운, 환활, 환비, 환충이 있고, 환씨 가문에서 폐출당한 환비를 제외하면 모두 동진에서 고관대작을 지냈다. 자는 원자(元子)였으며, 시호는 선무공(宣武公)이었다.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로, 영가의 난으로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한 지 30여 년이 된 시점에서, 파촉 일대를 회복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세 차례 북벌을 시도하여 서진 왕조의 옛 도읍인 낙양 일대를 수복하는 등 화북 일대를 점거한 이민족 왕조들에게 아직 사마씨의 동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린 명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던 권신이기도 했다. 동진의 실권자로 떠오른 환온은 제멋대로 황제를 폐위하기도 했으며, 종국에는 제위까지 찬탈하려 들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북벌에 실패하고 뜸을 들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처럼 환온은 무참히 짓밟힌 한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위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찌들은 야심가이자 난신적자로 평가될 여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여러모로 조조사마의의 후배격이자 이후 유유의 선배격인 인물이었으며, 한국사로 치면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행적이 비슷했다.

훗날 그의 아들인 환현(桓玄)이 일시적으로 동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환초를 세워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환온 또한 황제로 추증되어 시호를 선무황제(宣武皇帝)[2]라 했다. 그러나 환현의 왕조는 단명했고, 정식 왕조로 인정되진 않는다.

2. 생애

2.1. 초창기

초국(譙國) 용항(龍亢)[3]에서 내려온 무인 집안의 자손으로, 선성태수 환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았을 때 태원온교가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아이는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시험삼아 울려보세."
라고 했다. 환온이 우렁차게 우는 소리를 듣고는
"참으로 영특한 인물이로다!"
라고 했다. 온교는 사람을 잘 보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환온의 아버지 환이는 이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온교의 성인 '온'(溫)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삼았다.

환이는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부하인 한황(韓晃)에게 살해당했다. 환온은 이를 분하고 슬프게 여겨, 창을 베고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환이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3년 뒤 환이를 살해한 일파 중 한 명인 경현(經縣)의 현령 강파(江播)가 죽자, 자식들인 강표(江彪) 3형제가 상을 치르며 지팡이 안에 칼을 숨기고 환온에 대비했다. 하지만 환온은 자신을 조문객이라 속이고 들어가 강표를 죽이고 두 동생들도 쫓아가서 죽였다.

진서》<원탐전>에 따르면 환온은 어렸을 때 몹시 가난했는데, 일찍이 젊었을 때 도박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가산을 탕진[4]하고 도박 밑천이 조금 남아 있어서 잃은 돈을 찾을 방도를 생각해봤으나 떠올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본전을 건질 방도를 원탐에게 알아보려고 했는데 원탐이 마침 상중이라 망설이다가 일단 말을 해보았다. 그러자 원탐은 어려워하는 기색없이 상복을 벗고 변복한 다음, 베로 만든 모자를 품속에 넣고 환온을 따라 채권자와 도박을 하러 나섰다. 원탐은 어려서부터 재주꾼이란 말을 듣고 있었는데 채권자도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했다.
"원언도(彥道, 원탐의 자)와 같은 재주가 없으니 당신은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판이 벌어지자 원탐이 판돈을 10만 전에서 100만 전으로 올리고 패를 던지며 크게 부르짖더니 베모자를 꺼내 땅에 던지며 말했다.
"이제 원언도를 알아보겠소?"
원탐의 소탈함이 이와 같았다.[5]

환온은 호탕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자태도 매우 훌륭했다. 도박을 해서 돈을 날려먹은 흑역사가 있었지만 환온 개인은 대단히 검소했다고 하며, 젊은 시절 패국유담과 친했는데, 유담이 이전부터 일컫길
"환온의 눈은 자주빛 석릉(石棱, 자수정의 모서리) 같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털이 빳빳하게 선 듯하니, 손중모(孫仲謀), 진선왕(晉宣王)에 버금간다."[6]
라고 했다. 제2대 숙조 명황제 사마소의 장녀 남강장공주[7]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가 되었고, 낭야태수로 임명됐다가 서주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유익(庾翼, 305~345)과 사이가 좋았는데, 항상 서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일을 기약했다. 유익이 동진의 제3대 현종 성황제 사마연에게 일찍이 환온을 천거하며 말하길
"환온은 어려서부터 웅략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를 대하거나 평범한 사위로 그를 아끼지 마시고, 마땅히 방숙(方叔)과 소호(召虎)[8]의 임무를 맡겨 간난을 구제할 공적을 위탁하십시오."
라고 했다.

이후 유익이 북벌을 개시했을 때 소도독에 임명되어 군을 이끌고 임회에 주둔하여 북상할 준비를 마쳤지만, 장안 수복의 임무를 맡은 환선후조의 장수 이비(李羆)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유익은 새로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중병에 걸렸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자신의 아들 유원지가 형주를 이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유씨 가문의 득세를 경계하던 보정대신 하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형주자사로 환온을 조정에 추천했다. 동진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고 환온은 도독형양사주제군사, 안서장군, 형주자사, 영호남만교위, 가절로 임명되었다.

당시 유담은 환온의 야심을 눈치채고 아래처럼 말하며 환온의 권력을 축소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를 보내면 틀림없이 서초西楚의 땅을 평정할 수는 있지만, 이윽고 다시 억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 자신께서 장강 상류 땅을 다스리십시오. 제가 종군사마의 직을 맡겠습니다.

2.2. 서정과 북벌

2.2.1. 서정: 저족의 성한 정복

동진의 제5대 효종 목황제(穆帝) 사마담의 치세때인 영화 2년(347), 안서장군이 된 환온은 저족이 세운 성한(成漢)이 내분으로 인해서 지리멸렬해지자, 서정을 상주했는데 조정에선 이 멀고 험하며, 환온의 병사도 너무 적었기에 적의 근거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매우 근심했다. 하지만 환온은 어명을 받고 익주자사 주무(周撫), 초왕 사마무기(司馬無忌), 건무장군 원교 등을 대동하고 촉을 토벌하기 위해 행군했다. 환온은 우선 참군 주초(周楚)[9]손성(孫盛)[10]에게 명령해 치중을 맡기고, 스스로는 보병을 거느리고 바로 성도를 목표로 진군했다.

이듬해(348) 3월 환온군이 팽모(彭模)에 도착하자 놀란 성한의 황제 이세가 그의 숙부인 이복(李福)과 종형인 이권(李權) 등에게 팽모를 공격하여, 중간에서 환온군을 영격하도록 했다. 이복의 군대가 팽모에 도착했을 때, 환온의 주력군은 이미 떠난 상태였고, 주초와 손성의 부대만이 주둔해있었다. 비록 성한군의 군세가 우월했으나, 주초 등이 결사적으로 항전해 이복을 격퇴시켰다. 환온 또한 진군 도중 이권의 공격을 받았지만, 세 번 싸워 이권을 대파했고 성한군은 성도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가 모두 패배하여 돌아오자 황제 이세가 친정하여 전군으로 환온과 착교(笮橋)에서 맞붙으니, 초기에는 환온이 불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환온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았다. 이에 환온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는데, 북을 치는 병사가 명령을 잘못 알아듣고 전진하는 북을 세차게 울렸다. 제일 먼저 움직였던 건 원교의 부대로 원교가 칼을 뽑아 앞장서서 직접 성한군으로 돌격했고, 이 모습을 본 3군 역시 일제히 앞으로 돌격했다. 환온의 공세가 이 정도로 맹렬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이세는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성 안으로 도망쳤으나 뒤쫓아온 환온군에 의해 성도의 성문이 불 타버렸다. 이렇게 되자 성 안의 수비군들마저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결국 이세는 성도를 버린 뒤 가맹관(葭萌關)으로 도망쳤다.(착교 전투) 이세는 곧 항복하기로 결심해 사람을 보내어 항복했다. 환온의 대군은 기세 당당하게 성도에 입성했으며, 이세와 성한의 황족들을 동진의 수도 건강에 압송하니 성한 왕조는 멸망했다.

성도를 점령한 환온은 몇 달간 그 곳에 머무르며 인재를 등용하고 지친 민심을 어루만지는 데 힘을 썼다. 그는 멸망한 성한의 관리인 초헌지(谯献之)와 상거(常璩)를 참좌로 등용해 어진 정치를 펼치니 성도의 민심이 환온에게 쏠렸다. 형주의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서, 등정, 외문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환온은 주무 및 원교와 군사를 나누어 이들을 동시에 쳐서 평정했다. 이러한 대공으로 환온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승격되었으며 임하군공(臨賀郡公)으로 책봉되었다. 그렇게 해서 환온의 이름은 동진 조정과 민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후 환온은 주무에게 파촉 일대를 위임하니 이후 주씨 3대가 연이어 40여년간 이 일대를 다스리게 된다.

앞서 환온의 병력이 적었다고 언급했는데 《위서》 <열전> 84권과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은 불과 군사 7,000명만으로 천자에게 아뢰는 문서를 올리고 촉을 정벌했다고 한다.

2.2.2. 제1차 북벌: 저족의 전진 공략전

영화 5년(349), 갈족 석씨의 후조 태조 무황제 석호가 붕어하고 그의 아들들이 제위를 다투어 장강 이북이 대혼란에 빠지자 환온은 북정하길 원해 먼저 군을 이끌고 안륙(安陸)에 주둔했다. 그리고 상소하여 조정에서 수륙의 적합함을 논하길 청했으나, 젊은 나이에 서부 군단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무창(武昌)을 중심으로 형주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환온을 조정에서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회답이 없었다. 당시 조정이 은호 등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알았기에, 환온은 몹시 성을 냈으나, 원래 은호를 알고 있어서, 그를 꺼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북벌을 선언하며, 표를 상주하고, 무창(武昌)에서 군을 일으켰는데 병력이 4~50,000명에 이르렀다. 훗날 제8대 태종 간문제가 된 사마욱이 당시 무군장군이었는데, 환온에게 글을 써서 사직의 대계를 밝히며 군을 일으킨 연유를 물었다. 이에 환온이 곧 회군하여 진에 돌아간 뒤 상소했다.
"신이 근래에 친히 군을 거느림은 북으로 가 (후)조, (염)위를 멸망시키길 원했기 때문으로, 군을 무창에 머무르게 했는데 무군대장군,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의 글을 받아 보니, 세상이 어지럽고 떠들썩하여 망령되이 의혹이 생겨났고, 그 말과 뜻이 위급하여 근심이 사직에까지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살피니 깜짝 놀랐으나 연유도 이해할 수 없는데도,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돌아보며 죽어도 의탁할 땅이 없었습니다.

신이 미미하고 드러나지 않는데도 황송하게도 중임을 짊어졌기에, 비록 재주가 그에 걸맞은 사람은 아니지만 직분은 난을 평정함에 있습니다. 원수가 불멸하여, 국치를 아직 씻지 못했으나 다행히 개태(開泰)의 때로 인해 우연히 틈탈 기회를 만나게 됐으니, 필부도 뜻이 있어 오히려 분개함을 품는데, 신 또한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서 폐단을 바라만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을 메고 말을 몰아,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전후로 표진(表陳)한 것이, 지금까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성심으로 태연하며 공사로 깨끗했는데, 무슨 사소한 것이 있었기에 이러한 혐기(嫌忌)를 용납하셨습니까? 어찌 올바름을 꺼리는 무리들이 속으로 두려움을 품고 조롱하며 헛된 말을 한 것에 혹해 조정에서 받아들이신 겁니까?

과거 악의가 정성을 다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달아났고, 곽광이 충성을 다했으나 상관(上官)은 변을 고했습니다. 참언이 행적을 병들게 하고 간사한 이가 덕을 어지럽힘이 역대에 항상 있던 근심거리로 존망(存亡)의 연유입니다. 지금 주상께선 양추(陽秋)가 많으시고, 폐하께선 성스럽고 깨끗함으로 조정에 임하시니, 삼가 위임하시며 군하(群下)에 책임을 지우시고, 바야흐로 재능있는 이들에게 회통(會通)함을 맡겨, 덕과 믿음을 먼 변방까지 베푸셨습니다.

때마침 신이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어, 3대를 복종하며 섬겼으니, 신분은 타관살이하는 손님이 아니고, 행적은 한신팽월의 허물도 없었으나, 반간(反間)이 흉심(胸心)에서 일어나, 함께 어지럽힘이 4국을 지나게 됐으니, 이가 옛 현인이 이전에 탄식한 까닭이며, 신 또한 올해에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구적(寇賊)이 쇠하여 대사가 거의 정해졌고, 이 잃어버린 백성들이 고니가 선 듯이 남쪽을 바라며, 의로움에 힘쓰는 이들도 분개하고 한탄함이 곧 드러났기에, 원흉의 명운이 누각에 동떨어져 있는데도, 엉뚱한 의논이 망령되이 생겨나 이로 인해 작은 허물을 큰 죄로 만들고, 거의 망해가던 도적이 다시 숨통이 트이게 했으니, 기세를 끊은 것에 상심하여 슬퍼하고 개탄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설사 공공을 위함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나, 밖의 근심이 아직 그치지 않고 안의 폐단이 서로 흥하더라도, 신의 본심은 힘을 바치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목제 사마담이 위로하며 태위(太尉)를 겸직하게 했으나, 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은호가 구도 낙양(洛陽)에 이르러 원릉(園陵)[11]을 수복하며, 잠시 전국새를 찾고[12] 하남을 수복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하남 지역의 군벌들과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국 선봉으로 나선 강족의 수장인 요양(姚襄)[13]이 배신을 함으로써 은호의 북부군이 중심이 된 북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14] 이에 물자와 병장기가 바닥나고, 조야가 모두 은호를 원망하자 환온이 조야의 원망에 의거해 은호를 폐할 것을 아뢰니, 견제할 세력이 사라진 환온은 이로부터 내외의 대권을 모두 쥐게 되었다.

영화 10년(354) 2월, 드디어 내부의 견제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환온은 마침내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요양(姚襄)을 정벌하기 위해 강릉에서 출발했다. 수군은 장강을 따라 북진하여 양양에서 균구(均口)로 들어가, 남향(南鄉)에 이르렀고, 보병은 석천(淅川)에서부터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관중(關中)을 정벌하며, 양주자사 사마훈(司馬勳)은 자오도에서 나오도록 명령했다.

5월, 장안 방면 북벌군은 승리를 거듭하며 장안 인근 위수의 지류인 파수까지 진입했다. 소위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위연자오곡 계책과 유사했으나 군량 수송 문제와 기습으로 대패하고 철수하여 이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결국 허사가 되었다.

한편 별동대가 상락(上洛)을 공격해, 전진의 고조 경명제 부건(苻健)의 형주자사 곽경(郭敬)을 사로잡았고, 청니(青泥)로 진격해 전진군을 격파했다. 부건 또한 아들 부장과 부생, 동생 부웅(苻雄)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류(嶢柳)와 수사퇴(愁思槌)에서 환온을 막도록 명령해 양군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부생이 직접 진을 함락시키고 환온의 장수 응탄(應誕)과 유홍(劉泓)을 죽이며 수천 명을 참수하는 등 분투했으나, 환온군이 전력을 다해 싸우자 대적하지 못하고 부생의 전진군은 곧 달아났다.

동시에 전진의 승상 부웅도 장군 환충(桓沖)[15]과 백록원(白鹿原)에서 싸웠으나 역시 환충에게 격파당했다. 환온 또한 패상(霸上)에 이르니, 부장 등은 대사마 뇌약아와 합류해 장안의 소성(小城)에서 5,000명으로 도랑을 깊이 파고 굳게 지킬 뿐이었다. 이렇게 장안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삼보의 여러 군현들이 환온에게 앞다투어 항복해 왔다. 항복해 오는 거주민들은 모두 편안히 지내며 다시 일에 종사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길에서 환온을 맞이하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고, 노인들은 감격해서 울며 말하길
"오늘날 다시 관군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라고 했다. 순양태수 설진(薛珍)은 환온에게 이 기세를 몰아 곧장 패수를 건너 장안을 치라고 조언했지만 환온은 보급문제를 겪고 있어 보리가 익으면 현지에서 조달할 생각으로 무시하고 패상에 눌러앉았다.

환온의 주력군이 진격을 멈추자 전진군에게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이 철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는 부웅은 7,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자오도로 올라오는 사마훈을 기습했다. 당연히 환온의 주력군과 싸우느라 전진군이 올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마훈은 패퇴해 여왜보(女媧堡)까지 물러났다가, 자오도 루트를 포기하고 한족 장씨의 정권인 전량의 진주자사 왕진(王擢)과 힘을 합쳐 진창을 공격했다. 일단 자오도에서 급한 불을 끈 부웅은 곧바로 백록원으로 가 주둔 중이던 동진군을 기습해 10,000여 명을 죽였다.

비록 앞을 막는 군벌들을 하나씩 격파해가며 기세를 올리던 환온이었지만,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고질적인 보급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애초에 환온은 그가 진격할 때쯤 보리가 익으리라 여기고 이를 거두어서 군량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나, 경명제 부건은 이를 간파하여 모를 베고 불을 질러서 들판을 비우는 청야 전술을 펼쳤다. 환온군은 현지 조달이 어려워지자 군량이 부족해져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군량 보급이 어려워 사기가 날로 떨어지는데 적은 거세게 저항하니, 결국 환온은 결단을 내려 관중의 백성 3,000여 호를 이끌고 회군했다.[16]

동진군의 퇴각만을 기다리던 전진의 태자 부장은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다. 뒤를 공격당한 동진군은 동관(潼關)에 이를 때까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연전연패를 거듭하다가 지휘관인 태자 부장을 죽이고 나서야 겨우 추격을 떨쳐낼 수 있었다. 패전 이후 퇴각하던 중 설진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환온의 신중함을 비웃다가 분노한 환온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다. 한편, 왕진과 사마훈은 진창을 잠깐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시 뒤쫓아온 전진의 부웅에게 격파당하고 각자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이로써 환온의 제1차 북벌은 실패로 끝이 나게 되었다.

2.2.3. 제2차 북벌: 강족의 요양 정벌과 고도 낙양 수복

동진 목제 영화 12년(356), 환온은 사주 일대의 강족 수장 요양을 다시 공격했다. 환온은 진격하던 중 이런 말을 하며 청담에 빠져있던 왕연을 비난하기도 했다.
백 년 가까이 신주(중원)를 황폐하도록 버려뒀으니 왕이보(왕연) 등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환온은 먼저, 선발대로 장수 고무(高武)에게 군사를 주어 노양(魯陽)에 주둔시키고, 보국장군 대시(戴施)로 하여금 황하에서 수군을 이끌고 요양의 본진인 허창과 낙양을 공략하도록 했다. 그리고 환온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후방에서 선발대 지원을 맡으며 진군했는데, 마침내 낙양성 인근 이수(伊水) 남쪽에 이르렀다. 요양은 이수 북쪽 수풀에 병력을 숨겨두고 거짓으로 투항했으나 환온은 속지 않았다. 환온이 몸소 갑옷을 입고 요양군과 싸워 적군 수천 명을 전사시키고 크게 승리했다. 요양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잔당들을 모은 뒤 병주로 도주했고 환온은 이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17]

이후 낙양의 주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40년 만에 옛 수도를 되찾았다. 환온은 도굴로 초토화된 서진의 황릉을 복원하고 군대를 남겨 낙양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백성 3,000명과 주성을 데리고 복귀했다. 이 공으로 환온은 남군공이 되었으며 아들 환제도 임하현공에 봉해진다.

2.2.4. 제3차 북벌: 선비 모용부의 전연 공략전

동진 제7대 폐제 사마혁의 치세 때인 태화 4년(369) 5월 22일, 환온은 서연이주자사 치음[18], 예주자사 원진, 강주자사 환충 등과 함께 병력 50,000명을 이끌고 제3차 북벌을 감행해 선비 모용부전연을 공격했다. 환온은 변수(汴水)의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려고 했다. 이때 환온의 참모인 치초가 변수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관리되지 않아 보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말렸지만 환온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하필 그때 가뭄이 들어 변수에 배를 띄우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자, 환온은 보급로를 변수에서 황하로 변경하고, 모목지에게 수로를 파도록 명령했다.

치초는 황하로 수로를 뚫은 것은 물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고 또, 황하는 본진과 거리가 멀어 보급로로 적합하지 않다고 다시 한번 진언했다. 그리고 기존 작전대로 북벌을 이어갈 경우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며 두 가지 계책을 제안했다. 하나는 하북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인 업성(鄴城)으로 진격해 속전속결로 무너뜨려 전연을 요동으로 쫓아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하의 수로를 지키며 근방에 식량을 비축해둔 뒤 내년 여름쯤에 진격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환온은 이 제안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기어이 수로를 판 뒤 수군을 황하로 들여보냈다.

대충 보급로 문제를 해결한 환온은 우선 장수 단현(檀玄)을 보내 호륙(湖陸)을 공격해 전연군을 무찌르고 모용충(慕容忠)을 사로잡았다. 전연은 서둘러 모용려(慕容厲)에게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주어 반격을 시도했지만 황허(黃墟)에서 환온이 직접 지휘하는 동진군에게 격파당했다.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등하주서가 임저에서 전연의 장수 부안(傅顏)을 격파하자, 고평태수 서번(徐翻)이 항복해왔다. 전연의 조정은 모용장(慕容臧)에게 군을 이끌고 환온을 막게 했지만 번번이 패주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전진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7월이 되자 전연 사람 손원(孫元)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환온에게 호응했다. 기세를 탄 환온은 어느새 수도 업성 인근인 방두(枋頭)까지 진출해 그곳에 주둔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연의 제3대 헌무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매우 두려워하며 요동으로 도망칠 궁리만 했다. 이때 모용수가 스스로 나서 자신이 직접 환온을 막겠다고 청하자 모용위는 이를 받아들여 모용장 대신 모용수를 총지휘관으로 삼는 한편, 전진의 세조 선소제 부견에게 무뢰 서쪽 땅을 떼어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승상 왕맹의 설득으로 부견은 구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장수 구지(苟池)와 등강(鄧羌)에게 20,000명을 주어 전연을 구원하도록 했다.

연전연승하던 환온군이었지만 당시 하북의 지리에 능통해 북벌군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단사(段思)가 전연의 장수 실라등에게 사로잡히면서 진격이 지체되었다. 또한, 환온의 명령을 받고 진격 중이던 이술(李述)이 염간진(染干津)이 이끄는 전연군에게 공격받아 전사하자 환온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모용수가 모용덕(慕容德)과 유당(劉當)에게 10,000명의 군사를 내주어 변수에서 황하로 넘어가는 수로의 석문을 점거하게 하자 환온이 원진을 보냈으나 탈환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도(李邽)가 나머지 보급로들을 차단하니 환온군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만을 노린 모용수는 1,000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동진군에 돌격해 수많은 병사들을 학살했다.

전쟁이 점점 불리해지고 식량마저 다 떨어진데다가 전진의 구원병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마저 전해지자 환온은 퇴각을 결심했다. 그는 배를 모두 불태우고 치중을 버린 뒤, 모목지에게 군사를 조금 내어주어 동연(東燕)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창원(倉垣) 방면으로 후퇴시켰다. 모용수는 환온의 함정이 있을 것을 염려해 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천천히 동진군을 추격했다. 며칠 동안 추격을 한 끝에 환온에게 별다른 속셈을 없음을 간파한 모용수는 환온이 양읍(襄邑)에 이르렀을 때 공격을 가해 동진군을 또다시 대파하고 30,000명을 죽였다. 전연군의 추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진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강행하던 중 이번에는 전연을 구원하러 온 전진군을 만나 또 패배하고 10,000명을 잃었다. 겨우 목숨을 구한 환온은 동진에 도착한 뒤 군사를 수습하고 산양(山陽)에 주둔하며 형세를 살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지 오래였다. 무양(武陽)에서 끝까지 동진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전연군에게 저항하던 손원의 사망을 끝으로 제3차 북벌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환온은 석문을 점거하지 못한 원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원진이 격노하여 수춘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환온은 전연과 전진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원진의 세력을 제거했다.

2.3. 말년과 최후

환온은 베개를 어루만지며 동진의 황제가 될 야망을 꿈꾸었다. 이에 폐제 사마혁남색가 내지 고자로 몰아 폐위시키고[19], 나이 많은 태종 간문제 사마욱을 옹립했다. 환온의 권세는 이미 황권을 넘어섰기에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다.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환온은 그 공으로 대사마(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라 364년에 이미 갖고 있었던 형주자사에서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전임이 되었고, 관중을 통치하던 양주자사(凉州刺史) 사마훈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쉽게 제압한 뒤 그 자리를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했다. 369년에는 연주자사 겸 서주자사를 더해 장강 하류의 모든 군사력을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대인 서부 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때 환온의 친구인 동진의 명문 귀족 유담(劉淡)이 가세했다.

당시 동진은 화북 지방으로부터 들어온 유민(流民)과 화중, 화남의 원주민이 섞여 건국된 나라였다. 아직 강남이 완전히 개발된 상태도 아니었는 데다가 북부의 한족 주민들이 특권을 받아 동진으로 유입되는 유민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호구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조세병역을 적절하게 부여하지 못하여 나라 꼴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환온은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를 토단(土斷)이라고 했다. 동진 시기 100년 동안 토단은 약 아홉 차례 시행되었는데 환온이 대사마에 재직할 때 가장 거국적으로 실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진의 국력은 다시 재정비될 수 있었다.

이렇게 환온은 명망을 쌓고 간문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려고 했으나, 간문제는 환온의 야심을 간파하고 불안해하다가 급사해버렸다. 특히 사안[20]은 초연한 태도로 그를 제거하려던 환온의 의지를 꺾었고, 이에 간문제 사마욱이 붕어하자 열종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했다.

기이한 일화를 모으기 좋아한 《진서》의 <환온전>에는 이에 대해서 기이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환온의 말년에 갑자기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비구니가 먼 곳에서 와서 시주로 삼고자 의탁했다. 이 비구니의 재주와 품행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환온은 매우 공경스럽게 대했으며 집에서 거주하게 했다. 그런데 이 비구니가 매번 목욕할 때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환온은 이를 의심하여 엿보았다. 환온이 그 모습을 보니 비구니는 나체로 칼을 휘둘러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몸과 머리를 잘라 모두 작은 덩어리로 잘게 잘랐다. 환온은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며 돌아갔다. 신비스럽게도 비구니가 욕실에서 나오는데 몸의 형태가 전과 같았다. 환온이 솔직하게 털어넣고 묻자 비구니가 답하기를
"만약 군주를 축출하거나 능멸한다면 육신이 마땅히 보았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때 환온은 장차 찬위(問鼎)할 계책을 꾸미던 참이었는데 이를 듣고 한탄했다. 이후로 이를 경계로 삼아 종신토록 신하의 절개를 지켰다. 비구니는 뒤에 작별하고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화는 환온이 찬탈의 마음을 품었지만 끝내 그 마음을 실행할 수 없었음을 뜻하는 일화이다.

또 《진서》 <환온전>은 그가 죽기 전 태종 간문제와 있었던 일화도 기록하고 있다. 열종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한 후 환온이 남주(南州)에서 돌아와 태종 간문제의 능을 배알했는데, 좌우에서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온이 이윽고 수레에 올라 시종에게 선제 간문제의 영령을 뵈었다고 말했는데, 선제가 했던 말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환온이 능을 배알할 때 자주 말하기를
"신은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환온이 또 좌우에 묻기를 은연(殷涓)의 모습을 물었는데 어떤 사람이 대답하길
"은연이란 사람은 비대하고 단신이며 낯빛이 검고 매우 추합니다."
라고 했다. 환온이 이르기를
"조금 전 그도 선제의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용모가 또한 그러했다."
라며 불길하게 생각했다.

은호(殷浩)가 환온에게 폐해져 죽고 나서, 은연이 자못 절조가 있어 마침내 환온에게 이르지 않고 무릉왕 사마희와 사귀었다. 환온이 의심하고 그를 해했으나 끝내 인식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은연을 보고 빌미가 돼 환온이 병에 걸렸다. 건강에서 14일을 머무르고 고숙에 돌아가 마침내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환온은 효무제 사마요에게 구석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찬탈을 꿈꿨지만 사안왕탄지가 반대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사안과 왕탄지는 그가 위독함을 듣고 은밀히 선양을 늦추었다. 석문(錫文)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환온이 죽으니 향년 62세였다.

환온의 아들인 형주자사 환현은 결국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하여 효무제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훗날 환초라고 불리는 초(楚)나라 황제가 되어 환온의 유지를 이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유유에게 반격을 받아 피살되고 말았다. 이후 유유는 동진을 찬탈하고, 유송의 개국자가 되었다.

3. 평가

동진 이전의 나라 중 조위 때는 조조가 군사적 명성을 토대로 실권을 잡고, 반대파들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분위기를 형성한 후 그 아들 조비후한찬탈했고, 서진 때도 마찬가지로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등이 외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쌓는 한편, 반대파들을 철저히 탄압하여 기반을 다진 후 사마염이 결국 조위를 찬탈했다. 환온이 동진의 다른 실력자들과는 달리 눈에 띄게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정책을 펼치려고 했음은 이런 선례들을 따라 신(新) 왕조를 세워보고 싶어했던 야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환온은 물론 유능했으면 유능했지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강남에 쳐박힌 동진을 부흥시키며 40년 만에 북벌을 일으켜 낙양을 수복하고 반란을 두 차례나 진압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거뒀다. 환온이 상대하던 지휘관들도 부웅, 부생, 요양, 모용수 등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즉, 환온이 무능해서 모용수 같은 명장에게 패배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환온이 통치하던 시절 동진은 환온 이후 명재상 사안이 다스리던 때처럼 평화로웠다. 게다가 환온이 정말 무능력한 인간이었더라면 전진전연이 동맹을 맺고, 환온에 맞섰을 리가 없다.

그리고 환온에게도 억울할 이유는 있었다. 그의 야망이 성공하지 못했던 건 동진 특유의 상황도 한 몫 했다. 왕돈의 반란과 소준성제 사마연을 감금하고 일으킨 내란을 봐도 동진이란 국가가 몇 번씩이나 내부에서 왕조 교체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효무제 사마요가 살아있을 때 제국은 사실상 분열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 동진의 건국 시기부터 건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권과 장강 이북의 '북부군', 장강 중류의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군'에 각각 유력자와 황족들이 중심이 되어서 서로 견제에 견제를 하는 형식으로 간신히 국가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21][22] 그러니 환온이 야심을 품으며 틈을 엿 볼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동진 조정이 환온에게 제대로 북벌을 실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환온이 성한을 정벌하자 놀란 동진 조정은 그에게 북벌의 기회를 주지 않고 그를 견제하는 세력만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견제 세력이란 작자들의 군사적인 재능은 환온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환온으로서는 동진 조정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훗날 환온이 북벌을 실시했을 때는 적국인 전진전연에서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어 환온을 방어할 준비가 된 상태였다. 따라서 환온의 군사적인 재능이 동진 조정의 지나친 경계 때문에 좋은 타이밍에 펼쳐지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온이 찬탈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군사적 업적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미숙함과 우유부단함이었다. 환온은 은씨와 유씨를 제거하고 무릉왕 사마희를 숙청했으나, 정작 본인에게 가장 걸림돌이었던 사안왕탄지는 살려두었다.[23] 그리고 황제에게 적극적으로 선양을 강요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환온에게 맞설 규모의 국내 군벌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분명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군공이 부족하더라도 황제를 강하게 압박했더라면 선양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온은 본인의 말과는 다르게도 오명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24][25] 그의 야망은 아들 환현이 실현하여 동진을 찬탈한 후 환초를 건국했지만, 유유에게 진압당해 결국 실패한 찬탈로 끝남으로써 그 기반을 제공한 환온 역시 역적의 대명사인 망탁조의의 추가 멤버, 즉
""
(莽操懿溫)
으로 후세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

4. 기타

남송 시기에 여러 성씨의 유래에 대해 조사한 서적인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 따르면, 초국(譙國)에 자리잡은 용항현 환씨, 상현 환씨, 질현 환씨는 모두 강씨(姜) 성의 제환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전한 시기 환영(桓榮), 환담(桓譚) 등의 환씨들이 패국(沛國)에 자리잡았는데, 훗날 패국에서 초국이 갈라져 나오면서 초국 환씨가 된 것. 이로 인해 고평릉 사변사마의에 맞섰다가 멸족당한 대사농 환범의 후손이 환온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환범 항목 참조.

위진남북조시대의 가십거리를 소재로 한 소설인 《세설신어》에서는 주인공이라고 봐도 될 만큼 비중이 크다. 여기에서도 역시 영웅다운 품모와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의 모습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세설신어》에 처음 출전된 단장이라는 고사성어의 일화에서도 등장한다. 일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환온이 촉 땅을 정벌하러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 병사가 우연히 새끼 원숭이를 산채로 잡았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찾아서 배를 쫒아 오다가 힘이 다해서 배에 떨어져 죽었는데,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내장이 끊어져 있었다. 이를 본 환온이 그 병사를 매로 때려 엄히 꾸짖었다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단장 문서 참조.

《어림》에 따르면 환온은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과 기풍이 조위때의 사마선왕(사마의) 및 서진 말기의 유월석과 동류라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을 역적 왕대장군(왕돈)에 견주자 마음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진의 고조 경명제 부건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환온의 제1차 북벌) 북방에서 아름다운 여자 하나를 얻어 종으로 삼았는데, 원래 유월석의 기녀(妓女)였다.[26] 환온이 들어오는 걸 여종이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울기에 환온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종이 대답하길
"나리(官家)께서 매우 유사공(劉司空)과 닮아서 그리 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환온이 크게 기뻐하며 곧장 밖으로 나가 의관을 정제하고는 다시 들어와 여종을 불러 자신의 어떠한 곳이 그와 닮았는가 물었다. 여종이
"눈이 매우 닮았지만 작은 것이 흠이요, 얼굴도 매우 닮았지만 마른 것이 흠이며, 수염도 매우 닮았지만 붉은 것이 흠이고, 체형도 매우 닮았지만 짤막한게 흠이며, 목소리도 매우 닮았지만 여자같은게 흠입니다."
라고 했다. 환온은 이에 관을 풀고 혁대를 풀더니,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잠이 들었으며, 며칠동안 기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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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준의 난 당시에 소준에게 항거하다 한황에게 목이 잘린 동진충신이다.[2]진서》<환현전>:百官到姑孰劝玄僣伪位,玄伪让,朝臣固请,玄乃于城南七里立郊,登坛篡位,以玄牡告天,百僚陪列,而仪注不备,忘称万岁,又不易帝讳。……追尊其父温宣武皇帝,庙称太庙,南康公主为宣皇后。……号温墓曰永崇陵,置守卫四十人。[3] 오늘날의 안후이성 벙부시 화이위안현 룽캉진.[4] 곽자에 따르면 이때 환온이 가산을 잃은 도박은 저포(樗蒲)였다. 저포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주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였다. (樗, 가죽나무)와 (蒲, 부들)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든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곽자에 따르면 환온은 이 도박으로 쌀 수백 곡을 잃었다고 하는데, 치(齒, 패의 일종)패가 나쁜 데다가 또한 의욕마저 꺾여 스스로 판단하길 다시는 일어날 수 없노라 여겨 원탐에게 갔다고 한다.[5] 곽자에 따르면 환온의 요청에 "매우 좋소, 내가 경을 빼낼 뿐만이 아니라, 경을 위해서 그 놈들을 박살내버리겠소. 내가 반드시 좋은 패를 만들어 낼 터이니 경은 다만 소리나 지르고 있으시오." 그는 즉시 상복을 벗고 문을 나섰다. 머리 위에 상모(巾帽)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벗어서 내던져 버리고는 작은 모자를 착용했다. 놀이가 시작되자 원탐은 형세를 몰아 분개한 수컷처럼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던졌다하면 필히 노(盧)와 치(雉)가 나오니, 두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자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의기를 잃었고, 원탐은 잠시만에 수백만 전을 얻었다.[6]태평어람》과 《세설신어》에도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태평어람》에서는 손중모만 언급한다.[7] 이름은 사마흥남이다.[8] 서주 선왕(宣王) 때의 현신(賢臣)들로 형만(荊蠻)을 평정했다.[9] 익주자사 주무의 아들이다.[10] 《위씨춘추》의 저자이며,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진 인물이다.[11] 능원(陵園), 즉 황제의 묘소[12] 염위의 수도 업성이 포위된 기회를 틈타 업성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상환받은 것이었다.[13] 은호의 북벌을 막아낸 인물이자 후진을 세운 태조 무소제 요장의 형이었다. 은호는 요양을 두려워하여 자객 위경(魏憬) 등을 보내 수 차례나 암살을 시도했는데, 이에 요양은 참다 못해 동진을 배신했다.[14] 환온은 이전에 측근 치초에게 은호는 덕행도 있고 언어에도 뛰어나 상서령이나 복야가 되었다면 훌륭히 백관의 모범이 되었을거라 했는데 이는 은호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15] 환온의 동생으로, 그가 죽은 뒤 서부 군단의 대권을 물려받았다.[16] 이때 환온은 훗날 전진의 명군인 세조 선소제 부견을 보필하는 한족 출신의 명재상 왕맹을 만났다. 환온은 회군때 왕맹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왕맹은 거절하고 관중에 남았다.[17] 허창과 낙양의 백성들은 요양이 멀리 떠나자 슬퍼했고 그가 다쳤다거나,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북쪽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애민 행보에 따른 결과로 위진남북조 시대엔 흔한 일이 아니었다.[18] 삼국시대 조위의 관료였던 치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치감이었다.[19] 환온은 사마혁의 아들 3명이 측근인 상룡, 계호, 주령보의 아들이라 무고했으며, 사마혁은 폐위 이후에는 주색에 빠져 죽었다.[20] 비수대전 당시 태연하게 바둑을 두다가 사람들이 돌아가자 나막신이 부러지는 것도 모르고 기뻐했다는 그 사람이다. 이 일화만 보면 웃기는 사람 같지만 실은 당대의 명재상이자 명망높은 문화인이었다.[21] 즉, 천하삼분지계가 동진 영토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22] 거기다가 뿐만 아니라 군 말고도 회수 이북 문벌귀족과 토착 호족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문벌귀족, 토착 호족, 군사 집단이 서로 견제하고 군사 집단 내에서도 북부군, 서부군 식으로 분열되어 있고 어느 한쪽이 명확하게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니까 일단 사마씨진나라를 받들 뿐이라는 거다(...) 이렇게나 분열되니까 역으로 어느 누가 덥석 선양을 받았다간 나머지로부터 "니가 뭔데 황제를 하냐!!"며 다굴당할테니 선양받을 생각을 못하는 것.[23] 사안과 왕탄지도 죽이려고 했으나 사안의 태연함에 죽이지 못했다.[24] 물론 훗날의 유유는 뛰어난 무공으로 사마씨의 정통성을 압도하여 유송의 황제에 즉위했다.[25] 유송의 소도성은 군공이 환온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유욱을 제거하고 남제를 건국했다. 물론 유욱은 개막장이라서 자신이 죽음을 초래했다 봐도 무방하다. 소도성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것이었지만 환온도 은호를 실각시키면서 마치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것처럼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26] 사실 유월석이 318년 졸이고 환온의 북벌이 354 ~ 355년이니 유월석이 죽을 때 15세였다고 해도 여종은 53세의 나이가 된다. 이는 환온보다 열살 가까이 많은 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