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3:03:16

하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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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군공(郡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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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안성충숙공(安成忠肅公)
何無忌 | 하무기
시호 충숙(忠肅)
작위 안성군 개국공(安成郡開國公)
(何)
무기(無忌)
불명
생몰 ? ~ 410년 5월 9일[1]
출신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자녀 하옹(何邕)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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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정동장군 유뢰지의 조카.

2. 생애

젊었을 때부터 원대한 포부를 품었고 성정은 충직했으나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늘 말과 낯빛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장성하고 출사하여 주(州)의 종사를 지내다가 태학박사로 옮겨졌다. 이후 외삼촌인 진북장군 유뢰지가 경구(京口)를 진수하자, 유뢰지는 하무기를 만나 그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했다.

융안 4년(400년), 회계왕세자 사마원현이 자신의 아들 사마언장(司馬彥章)을 동해왕에 봉하면서 하무기를 동해국 중위(中尉)로 삼고 광무장군을 더했다.

원흥 원년(402년) 3월, 환현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建康)을 향해 진격하자, 사마원현의 명을 받고 율주(溧洲)에 주둔하고 있던 유뢰지는 환현에게 항복하려 했다. 하무기는 참군 유유와 함께 유뢰지를 찾아가 여러 차례 극구 간했지만, 유뢰지는 끝내 따르지 않고 아들 유경선을 보내 항복했다. 북부군을 이끌던 연청2주자사 유뢰지가 맥없이 항복하면서 사마원현이 이끌던 관군은 무너졌고, 환현은 그대로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원현, 사마언장 부자를 저잣거리에서 참수했다. 그때 하무기가 저자로 들어가 죽은 사마언장을 위해 큰 소리로 서럽게 우니 사람들은 이를 의롭게 여겼다.

비록 항복했다고는 하나, 환현에게 있어서 북부군을 계속 이끌고 있던 유뢰지는 충분히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환현이 유뢰지를 회계내사로 좌천시키자, 유뢰지는 분노하여 항복한 것을 후회하고 곧바로 반란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유뢰지는 율주에서 반독(班瀆)으로 주둔지를 옮기고 부하들과 거사를 꾸미려 했으나, 유유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하들은 배신만 하는 유뢰지에게 크게 실망해 모두 흩어졌다. 유뢰지의 곁에는 아들 유경선과 동해왕이 죽고 갈 곳이 없어진 하무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뢰지는 두려운 마음에 유경선을 경구로 보내 가족을 데려오려 했으나, 그마저도 시기를 놓쳐 실패하고 말았다. 더이상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유뢰지는 사병을 거느리고 북으로 달아나다가 신주(新洲)에 이르러 목을 메고 자결했다.

원흥 2년(403년) 2월, 하무기는 외삼촌 유뢰지 사후, 본래 친분이 있던 유유를 찾아가 함께 산음(山陰)에서 거병하고 환현을 토벌할 것을 권했다. 유유 또한 그의 뜻에 동의했으나, 산음현은 수도와 너무 거리가 멀어 거병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호족 공정(孔靖)의 의견에 따라 경구에서 거병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원흥 2년(403년) 12월, 환현이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초나라를 건국했다. 하무기는 이부랑 조정(曹靖)의 오랜 친구였기에, 조정이 하무기를 작은 현의 현령으로 삼아달라 청했지만 환현이 불허하였다.

원흥 3년(404년) 2월, 하무기와 유유는 다시 경구로 돌아가, 유의, 맹창(孟昶) 등의 인재를 영입하고 거병을 준비했다. 이후 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한 날이 되자, 유유는 당시 경구를 진수하던 안성왕 환수에게 사냥을 나간다 청하고, 하무기와 함께 성을 빠져나와 밖에서 무리 100여 명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경구성 문이 열리자마자, 하무기가 조복(詔服)을 입고 스스로를 조정의 칙사라 칭하며 입성하니, 누구도 감히 그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유유가 무리를 거느리고 하무기의 뒤를 따라 성으로 진입하여 재빨리 환수를 참수하고 그 목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경구 점령에 성공한 후, 하무기는 유유에게 유목지를 천거했다.

원흥 3년(404년) 3월, 환현은 군대를 동원해 유유에게 맞섰으나, 이내 대패하여 건강을 버린 채 사마덕종을 데리고 형주로 도망쳤다. 유유는 건강을 장악하고 무릉왕 사마존(司馬遵)을 승제하여 임시 조정을 꾸렸다. 하무기는 보국장군, 낭야내사에 임명되어 회계왕 사마도자 휘하에 배속되어 있던 정예병을 모두 넘겨받고, 관군장군 유의의 지휘 아래 진무장군 유도규 등과 더불어 도망친 환현을 추격했다.

분구(湓口)를 지키던 환현의 용양장군 하담지(何澹之), 전장군 곽전(郭銓), 전장군 곽창지(郭昶之)는 하무기 등이 상락주(桑落洲)에 이르자 수군을 이끌고 먼저 싸움을 걸었다. 하담지는 항상 자신이 타고 있는 전함을 성대하게 꾸몄는데, 적함 중 하담지의 대장기만 보이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전함 따위는 없었다. 이를 보고 적장이 없음을 간파한 하무기가 말했다.
"적의 수장은 필시 여기에 오지 않고 나를 속이려 하는 것이니, 마땅히 바로 공격하여야만 한다."
그러자 부하들이 말했다.
"하담지가 저 대장선에 없다면 저것을 탈취해봐야 무익합니다."
이에 하무기가 유도규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중과부적이라 싸워도 전부 승리할 수는 없었소. 하나, 하담지가 비록 대장선에 없을지라도 저것을 탈취한다면 그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한 번의 북소리만으로도 가히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오."
유도규가 그의 말에 따라 진격하여 대장선을 탈취하니, 하무기는 전군을 향해 외쳤다.
"하담지는 이미 사로잡혔다!"
그 말에 적군들이 놀라 혼란에 빠지자, 하무기는 북을 울리고 병사들로 하여금 함성을 크게 지르게 하여 기세를 한껏 끌어올렸다. 하무기와 유도규는 승세를 타고 돌진하여 적군을 대파하니, 하담지, 곽전 등은 분구를 버린 채 도망쳤고, 하무기 등은 계속 진격해 심양(尋陽)에 이르렀다. 심양에 주둔한 하무기는 사자를 보내 일전에 환현이 내다버린 동진 종묘의 주석(主祏)을 받들게 하고, 무강공주, 낭야왕비를 구출해 경사로 돌려보냈다. 이후 쟁영주(崢嶸洲)에서 유의, 유도규 등과 함께 환현이 친히 지휘하는 수군과 싸워 대파했다.

원흥 3년(404년) 5월, 대패한 환현은 한중(漢中)으로 피신하기 위해 입촉하다가 모수지에게 속아 공격을 받고 참수되었다. 그러나 환현의 사촌형 환겸, 조카 환진이 거병하여 강릉을 다시 장악하고, 유의가 지휘하는 토벌군에 맞섰다. 유의는 파릉(巴陵)에 도착해 환현의 장수였던 왕치휘(王稚徽)를 주살하고, 하무기와 군대를 나눠서 진군했다. 하무기와 유도규는 마두(馬頭)로 진군해 환겸을 격파하고, 용천(龍泉)에서 환울(桓蔚)과 싸워 모두 무찔렀다. 자신감에 찬 하무기는 유도규의 만류를 무시하고 강릉으로 진군을 재촉하다가, 영계(靈溪)에서 환진의 군대를 만나 대패해 군사 수천 명을 잃었다. 심양으로 도주한 하무기는 총사령관인 유의에게 서신을 올려 죄를 청했다.

원흥 3년(404년) 10월, 유의, 하무기, 유도규 등은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심양 서쪽으로 올라가 하구(夏口)에 이르렀다. 하무기는 유의가 하구 남쪽에 위치한 노산성(魯山城)을 공략하고, 유도규가 하구 서남쪽에 위치한 언월루(偃月壘)를 공략할 동안 장강에서 환진이 보낸 진동장군 풍해(馮該)를 막았다. 이윽고 유의와 유도규가 두 성을 함락시키자, 하무기와 싸우던 풍해는 후퇴하여 석성(石城)에 들어가 지켰다. 하무기, 유의 등은 뒤이어 파릉까지 평정하였다.

의희 원년(405년) 정월, 하무기 등이 마두에 주둔하자, 환겸, 환진도 나와서 강진(江津)에 주둔하고 강주와 형주의 분할 통치를 승인해주면 천자를 보내겠다 청했으나 하무기가 불허하였다. 이후 진군하여 환겸과 환진을 무찌르고 강릉을 점거하니, 환겸 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의희 원년(405년) 3월, 안제 사마덕종을 모시고 도성 건강에 돌아온 하무기는 독예주양주회남여강안풍역양당읍5군제군사(督豫州揚州淮南廬江安豐歷陽堂邑五郡諸軍事), 우장군, 예주자사, 가절에 제수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옮겨져, 회계내사, 독강동5군제군사(督江東五郡諸軍事), 지절에 임명되고 장군직은 이전과 같았다.

의희 2년(406년) 10월, 도독강형예3주제군사(都督江荊三州諸軍事), 강주자사로 옮겨지고, 장군과 지절은 전과 같이 했다. 또, 환현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안성군개국공(安成郡開國公)에 봉해지니, 식읍이 3,000호에 이르렀다. 얼마 뒤, 사주의 홍농(弘農), 양주(揚州)의 송자(松滋)를 관할하게 되고, 진남장군으로 승진하고 산기시랑이 더해졌다.

의희 6년(410년) 2월, 광주자사 노순이 유유가 북벌에 나선 것을 기회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하무기는 심양에서 군대를 일으켜 노순을 막고자 하였다. 하무기는 출정을 말리는 장사 등잠지(鄧潛之)와 참군 은천(殷闡)의 간언을 무시한 채 수군을 거느리고 예장(豫章)에서 노순의 장수 서도복의 군대와 조우하였다. 서도복은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장강 서쪽 강안의 작은 산에 올라 강노로 하무기의 수군을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았다. 그때 하필이면 서풍이 사납게 불면서 하무기의 전함들이 표류하여 장강 동쪽 강안에 긴급히 정박하게 되니, 적들은 곧바로 거대한 함선을 출격시켜 아직 정비를 마치지 못한 하무기의 군대를 역습했다.

적의 맹렬한 습격에 하무기의 군대는 패하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무기는 패했음을 알고 주위에 엄숙히 외쳤다.
"소무(蘇武)의 부절[2]을 내게 가져오라!"
부하가 부절을 갖다주자, 하무기는 몸소 전투를 독려하며 적과 싸웠으나 전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적군이 하무기의 함선을 포위하고, 적병 수십 명이 이미 배 위에 오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무기의 말과 안색에는 난처함이 전혀 없었다. 하무기는 그렇게 끝까지 적군과 싸우다가 부절을 움켜쥔 채 전사하였다. 하무기의 장렬한 최후를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그를 시중, 사공으로 추증해주었다. 시호는 '충숙(忠肅)'. 아들 하옹(何邕)이 후사를 이었다.


[1] 음력으로는 3월 20일.[2] 전한 시기 충신으로 유명한 소무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