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8 18:39:15

사석

사마진 군공(郡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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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강양공(南康襄公)
謝石 | 사석
시호 양(襄)
작위 흥평현백(興平縣伯) → 남강군공(南康郡公)
사(謝)
이름 석(石)
석노(石奴)
생몰 327년 ~ 389년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부친 사부(謝裒)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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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장수. 자는 석노(石奴). 명문가인 진군 양하[1] 사씨 집안 출신으로, 동진의 태상 사부(謝裒)의 5번째 아들이자 명재상 사안(謝安)의 동생이다. 부견이 쳐들어오자 비수에서 그를 대패시켜 전진의 남하를 저지했고, 그 공으로 남강군공(南康郡公)에 봉해지며 사씨 가문의 위세를 한껏 드높였다.

2. 생애

성인이 되었을 때 타고난 명문가 출신 덕에 바로 비서랑으로 임관하여 황문시랑, 정로장군 등 여러 관직을 전전했다.

379년, 전진의 장수 구난(俱難)과 팽초(彭超)가 팽성을 함락하고 동진의 요충지 중 하나인 광릉을 위협하자, 당시 정로장군이던 사석은 광릉을 지키기 위해 수군을 이끌고 도중(塗中)에 주둔했다. 하지만 조카인 사현(謝玄)의 활약으로 동진군이 삼아(三阿)에서 대승을 거두며 전진군이 물러났고, 사석은 조정에서 공을 인정받아 흥평현백(興平縣伯)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381년 1월에 상서복야로 승진하였다.

383년 8월, 전진의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켜 동진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동진 조정은 사석을 정로장군에 다시 임명하고 사안에게 가절을 내려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했다. 사안은 동생 사석과 그의 조카인 사염, 사현과 서중랑장 환이 등을 보내 전진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전진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초반에 유리한 전세를 이끌었고, 10월에 전진군의 선봉에게 수춘까지 빼앗겼다. 중군을 이끌던 부견이 몇몇 기병과 함께 먼저 수춘에 도착하여 과거 동진의 장수였던 주서를 사신으로 보내 사석에게 항복을 권하도록 했다.

동년 11월, 당시 사석은 전진군의 압도적인 물량이 두려워 주둔한 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 했는데, 사신으로 간 주서가 항복을 권하기는 커녕 아직 100만 대군이 전부 집결한 것이 아니니 나아가 공격할 것을 사석에게 건의했다. 곁에 있던 사염이 주서의 말에 찬동해 적극적으로 사석을 설득시켰고, 마침 수춘 근방에서 별동대를 이끌던 유뢰지가 전진의 장수 양성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승전보까지 전해지니, 사석 또한 마음을 바꿔 전진군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두 군대는 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중이었는데, 사석은 부견에게 자신이 비수를 건넌 뒤에 결전을 벌일테니 군사를 뒤로 물려달라 청했다. 부견은 군사를 뒤로 물리는 척하다가 동진군이 비수를 반쯤 건넜을 때 기습을 하려 했지만, 진짜 패배해서 후퇴하는 줄 알았던 전진의 병사들은 모두 동요하여 전열이 붕괴되었다. 부견의 참모인 양평공 부융은 군사를 수습하려다 낙마해 밟혀죽었고,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사석의 군대는 비수를 무사히 건넌 뒤 혼란에 빠진 전진군의 뒤를 쳤고, 전진의 수십만 대군은 그대로 괴멸당해 물러났다. 전투 후, 사석은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돌아와 중군장군으로 승진했고 남강군공(南康郡公)에 봉해졌다. 이후로도 사안의 북벌에 참여하여 과거 서진 시대에 북방 이민족 왕조들에게 빼앗겼던 악공들을 다시 데려오는 등 여러 공을 세웠다.

385년 8월, 형 사안이 죽고 사석은 또 승진하여 위장군에 산기상시, 상서령을 겸직했다. 하지만 사석은 사적인 일로 이부시랑 왕공(王恭)과 크게 다투었고, 이게 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둘은 서로 사직을 청하면서 면직되었다. 효무제가 친히 조서를 내려 그를 달래면서 복직시켜주겠다 했지만, 사석은 1년 넘게 무시하며 이에 응하지 않다가, 주변 사람들의 설득 끝에 결국 받아들였다.

389년 12월 15일, 조정에서 사석에게 개부의동삼사를 내렸으나, 당시 병이 위중하여 조서를 받기도 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62세로 효무제는 사석을 사공으로 추증해주었다. 아들 사왕(謝汪)이 남강군공 작위를 계승했지만 요절하여 대가 끊겼다.[2]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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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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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허난성 저우커우시 주변.[2] 남강군공 작위는 사왕의 사촌 사명혜(謝明慧)가 이었으나 얼마 안가 손은에게 피살당하니 또 후사가 없었다. 이에 사명혜의 사촌 사고(謝暠)가 그 뒤를 이었으나 이번에는 동진이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봉국이 완전히 삭제되었다.